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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Talk to History (62)
조선시대에도 남성 출산휴가가 있었다?

출산휴가, 남자들에게도 해당되는 말일까요?

관련 법 조항을 살펴보니

"남녀고용평등과 일.가정 양립지원에 관한 법률" 제 3장 18조의 2(배우자출산휴가)에따르면,
1.사업주는 근로자가 배우자의 출산을 이유로 휴가를 청구하는 경우에 3일의 휴가를 주어야한다.
라고 되어있습니다.

대기업을 비롯한 일부 기업에서는 3일의 휴가를 인정해주고는 있는데
그렇지 못한 곳이 훨씬 많은 것이 현실입니다.

21세기에도 생소한 남자들의 출산휴가, 조선시대에도 있었다면 믿으시겠어요? 


놀랍게도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남자도 출산휴가가 있었다고 합니다.
노르웨이 같은 복지 선진국들처럼 우리나라의 출산휴가도 확대된다면 출산 장려에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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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레디에이터, 어디까지가 진짜?


 로마의 오헌제 시대를 이룩한 다섯 명의 황제들 중 네명은 가장 현명하다고 생각한 사람에게 황제의 자리를 물려주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다섯 번째 황제이자 철학자로도 유명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자신의 아들인 어리석은 콤모두스에게 황제의 자리를 남겨줍니다. 이 콤모두스가 바로 영화 '글레디에이터'에 나오는 악당 황제입니다.

 영화 '글레디에이터'에서는 사실 황제가 막시무스에게 황제의 자리를 넘겨주려고 했지만 그 사실을 안 콤모두스가 아버지 아우렐리우스 황제를 독살하고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는 내용으로 전개됩니다. 이 이야기는 픽션이지만 아우렐리우스 황제가 아들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왕위를 물려주려고 했다는 것은 어느 정도 일리가 있는 이야기입니다. 로마에서는 황제의 혈육이 아니더라도 황제의 자격을 갖추고 있다면, 황제는 그 사람을 양자로 삼아서 제위를 물려줄 수 있었기 때문이죠. 게다가 콤모두스는 네로와 비슷한 폭군으로 충분히 아버지를 죽일 수 있는 사람이었죠. 하지만 콤모두스의 죽음은 영화와 역사적 사실히 완전히 다릅니다. 영화에서는 콤모두스가 막시무스에게 죽지만, 실제로는 목욕탕에서 암살자에게 목졸려 죽습니다.

 이 영화의 가장 큰 미지수는 바로 막시무수예요. 그는 이 영화의 주인공이지만 실존인물인지는 알 수 없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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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흐.. 로마인 이야기를 11권까지 한 번 보고 다시 6권까지 봤는데.. 가물가물 합니다. -_ -;;;;;
  • 비공식 우수 블로거 앰블럼은 뭥미? ㅋ
  • corblo
    콤모두스가 아버지를 죽이고 황제자리를 차지했다는 설은 오래 전부터 꾸준히 제기되어 오는 의혹이었으나 근거없는 일종의 음모론으로 허구에 불과합니다. 글쓴 분의 말대로 오현제 시대엔 전임황제가 능력있는 사람을 양자로 들여 후계자로 삼는 방식으로 유능한 군주들이 연이어 통치를 했습니다. 이것은 이들에게 친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고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에게는 콤모두스라는 친아들이 있었기에 세습을 결정했습니다. 아들을 권력에서 배제해서 후일 분란의 씨앗을 만들기 보다 후계자로 삼아서 안정적인 제위계승을 하기로 결정한 거지요. 물론 결과는 대실패였지만요. 로마제정에서 제위의 세습은 제도적으로 정착되진 않았지만 친아들이나 가까운 친족이 제위를 물려받는 것은 자주 있엇던 일입니다. 실제로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어린 아들에게 차기황제에게 부여하는 카이사르 칭호를 주었고 호민관 특권을 부여했으며 부자가 공동으로 집정관에 취임하는 등 제위를 물려받기 위한 일들을 마치고 죽었습니다. 가만 있으면 다음 황제가 자기일텐데 무리수를 두면서 아버지를 죽일 이유가 없지요. 아우렐리우스 황제가 임종할 당시 중신들과 장군들을 불러 자기 아들에게 충성을 맹세할 것을 요구한 것만 보아도 제위에서 콤모두스를 배제할 생각이 없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또한 즉위할 당시 콤모두스는 이십대의 젊은 나이였고 그 전까지 제위계승자로서 결격사유를 딱히 찾을 수 없었습니다. 제위에 오르고 나서야 그런 변화가 나타나고 결국 역사에 남는 악제가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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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민정음과 세종대왕의 거짓말

나랏말싸미 듕귁에 달아

문짱와로 서로사맛디아니할새

이런젼차로 어린백셩이 니르고저 홇베이셔도

마참내 제뜨들 시러펴디 못할노미하니라

내 이랄위하야 어엿비녀겨

새로 스물여듫짜랄 맹가노니

사람마다 해여수비니겨 날로쑤메 편안케 할 따라미니라

 위의 글은 세종어제훈민정음의 내용으로, 세종대왕이 한글을 만든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고등학교 국어교과서는 이 글에 세종대왕의 애민정신, 자주정신, 실용정신, 창조정신을 느낄 수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 중 애민정신이 가장 중요하게 다뤄지는데 과연 세종대왕은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한글을 만들었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라는 의견도 적지 않다. 세종대왕은 조선 초기의 왕으로 조선왕조의 정당성을 만백성에게 알려야했다. 그러기위해서는 백성들 모두가 보다 쉽게 볼 수 있는 새로운 문자가 필요했던 것이다. 훈민정음으로 쓰여진 최초의 문헌은 '용비어천가'이다. 그 내용은 역성혁명이 천명임을 백성들에게 알려 조선건국의 합리화를 꾀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세종은 조세제도를 바꿨는데, 이를 알릴 문자가 필요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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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상트
    생각지도 못하던 사실이네요;
  • 안타깝습니다.
    당시 세종대왕은 자신의 조부가 건국하고 아버지가 기틀을 잡은 조선을 이끌어가야 하는 숙명을 어깨에 지고 군주자리에 올라섰습니다. 당연히 조선 건국의 정당성을 백성들의 마음 속 깊이 새겨넣어야만 했습니다. 그건 거부 할 수 없는 과업이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백성들이 쉽게 익힐 수 있는 훈민정음으로 알리는건 당연한거 아닙니까~ 그리고 세종은 재위기간동안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을 끊임없이 보여주었습니다. 근데 고작 용비어천가를 통해 조선 건국의 정당성을 알리려 했다는 사실과 조세제도 사례만으로 그의 마음을 폄하하는건 그저 졸렬한 수작으로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 세종대왕께서 백성을 사랑하지 않았다는 말을 한 것은 아닙니다. 다만 세종대왕이 언급한 그 이유들보다 더 큰 이유가 숨어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을뿐입니다.
  • Fashion community attracts numerous teenagers today not simply given that it is a alternatively new career, but additionally it really is intended to realise person's likes from the field of trend. Furthermore, it can be really a high-paid profession currently. Any time a younger human being decides to link her or his exercise using the vogue market place next to nothing arrives to thoughts apart from an individual its part - style layout. In all probability, several persons in fact know that it truly is a separate discipline of vogue industry. Believe it or not, you can find a fantastic quantity of other professions and specialties in such as creating clothing, design and style, selling, merchandising, and so 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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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 개수를 계산 하는 사람, 아르키메데스

 모래 개수를 계산 하는 사람, 아르키메데스

 아르키메데스는 가까운 친척인 사라쿠사의 하에론 왕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내게 지구 밖 어딘가에 발 디딜 곳과 충분한 길이의 막대를 준다면 지구를 움직여 보겠다."고 뽐내며 말해였다. 하에론 왕은 크게 놀라 실제 실험을 통해 작은 힘으로도 무거운 물체가 움직이는 것을 보여달라고 청하였다. 그래서 아르키메데스는 병기고에서 배를 하나 골라 거기에 많은 사람과 화물을 싣게 하고는 혼자서 아무 힘도 들이지 않고 그저 도르래에 걸린 밧줄을 끌어당기기만해서 배를 끌어올려 바다에 띄웠다.      -플루타르코스, 「전기」



 아르키메데스는 헬레니즘 시대의 천재 과학자로, 윗글에 나온 '도르래의 원리' 외에도 '부력의 원리'를 비롯한 수많은 과학적 업적을 남겼습니다. 또 조국 사라쿠사가 로마의 침략을 받자, 아르키메데스는 투석기, 기중기 등 지렛대를 응용한 신형 무기를 만들어 내기도 했죠. 하지만 사라쿠사는 신흥 강국 로마를 이기지 못하고 결국 함락되는데, 그 날도 아르키메데스는 뜰의 모래 위에 도형을 그리며 기하학의 연구에 몰두하고 있었어요. 그러던 중 사람의 그림자가 비치자 그것이 로마 병사인 줄도 모르고 "비켜! 내 도형이 가려지잖나"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이 말에 화가 난 로마 병사는 아르키메데스를 몰라 보고 그의 목을 쳤는데, 평소 아르키메데스의 학식을 존경하던 로마의 장군이 이 사실을 안타깝게 여겨 아르키메데스의 묘비석에 죽는 순간까지 그가 연구하던 도형을 그려 주었다고 합니다. 죽는 순간까지 연구에 골몰했던 아르키메데스 같은 과학자들의 노력에 힘입어, 헬레니즘 시대에는 자연과학이 크게 발전할 수 있었습니다.

부력의 발견

 아르키메데스는 천문학자 피라쿠스의 아들이었다. 그가 이집트로 유학을 갔다가 돌아와서 피라쿠스가 왕에게 아르키메데스를 인사시키러 갔다. 그 때, 왕은 새로 만든 왕관이 순금으로 만들어졌는지, 아니면 다른 물질과 섞였는지 궁금해하던 참이었다. 왕의 이 문제를 풀어달라고 아르키메데스에게 부탁을 하자, 아르키메데스는 하루나 이틀 동안 시간을 . 피라쿠스가 아르키메데스에게 목욕이나 하러 가자해서 그들은 목욕탕에 갔고, 아르키메데스는 목욕탕 속에 들어갔다. 그러다가 아버지의 목욕탕 물은 넘치지 않는데, 자기의 목욕탕물은 넘치는 것을 보고, 갑자기 어떤 생각이 든 아르키메데스는 유레카("알았다" 뜻의 그리스어)를 외치면서 몸으로 밖으로 뛰어나갔다. 거리에 있던 사람들은 아르키메데스를 보고 정신병자라고 놀렸지만, 아르키메데스는 듣지 못했다. 문제를 풀 방법을 찾았기 때문이었다. 왕에게 간 아르키메데스는 왕관을 물 속에 넣고 물이 넘친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러고 나서 그는 왕관을 저울에 놓고 금화 몇 개와 숫자가 같다는 것을 증명한 다음 발견해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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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란 무엇인가

 

 
 과거의 단순한 사실을 가지고 새로운 해석과 가치를 부여해 역사적 사실로 만드는 것이 역사가의 작업이자 몫입니다. 단순한 사실도 역사가의 새로운 생각과 역사적 상상력을 통해서 재구성되어 살아 숨쉬는 새로운 역사가 되는 것이죠이런 의미에서 모든 역사를 생각의 역사라고도 하는 것입니다. 역사가는 과거의 사실이 없으면 뿌리가 없는 쓸모없는 존재이며, 과거의 사실은 역사가가 없으면 생명을 얻지 못해 무의미합니다. 역사가와 사실은 대등하게 서로 상호 작용하여 영향을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거죠. 이런 뜻에서 영국의 역사학자 E.H.Carr는 역사는 역사가에 의해 항상 다시 쓰여진다는 점을 밝히면서 '역사는 역사가와 사실 사이에서 일어나는 상호 작용의 계속적인 과정이며,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결국 역사를 배우는 이유는 과거의 사실을 반추하여 현재의 상황을 이해하고, 보다 진보적이고 발전적인 미래를 준비하는 것이기 때문에, 과거와 현재 및 미래는 시간적으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연속적인 과정 중의 일부라고 볼 수도 있다는 것의 Carr의 주장입니다
 

 
 이러한 카의 생각은 '역사가는 자기 자신을 죽이고 과거가 본래 어떠했는가를 밝히는 것을 지상 과제로 삼아, 오직 역사적 사실로 하여금 이야기하게 해야한다'고 말한 독일의 역사가 랑케의 역사인식과는 다른 것이었죠. 역사는 주관을 철저히 배제해야 한다는 랑케의 주장과는 달리, 그는 역사가 주관적일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 셈이니까요.

 '
역사가 오늘의 사건을 심판해 줄 것이다'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에게는 지금은 별로 중요하지 않게 여겨지거나 혹은 나쁘게 여겨지는 자신의 행동이, 후에는 분명 좋은 평가를 받게 될 것이라는 확신이 있죠. 이처럼 어떤 사건에 대한 평가는 고정불변의 것이 아닙니다. 시대가 변하게 되면 그에 따라서 과거에 일어난 역사적 사건의 의미도 변할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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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 국사 진도 나가기 전 첫강의마다 들었던 이야기다 "역사란 무엇인가"
    요고는 "역사" 뿐 만 아니라 개인의 '히스토리'에도 마찬가지 이야기인거같애 - ㅋ
  • 잘 읽어 봤습니다. 세계사 배우면서 E.H 카아에 대한것은 들어는 봤는데 님글 보니 여러 생각이 드네요 앞으로 역사관련 포스팅 자주 올릴생각인데 가끔씩 들러서 충고해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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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비아 로렌스>의 거짓말

  영국의 거장 데이비드 린 감독이 미국 자본으로 만든 70MM 영화 <아라비아의 로렌스>(1962)는 사막의 아름다움과 영웅의 열정, 그리고 감동을 담은 세기의 걸작이다.

 
여기에 사막을 종횡무진하는 영국인 T . E . 로렌스가 있다. 그는 아랍인들의 독립을 위해, 외세배척을 위해 아랍인들을 이끌고 몇 안되는 군사로 연전연승을 거두며 아랍인들의 존경심을 얻는다. 그러나 아랍인들의 독립을 위한 명목으로 시작된 이 아랍반란이 끝난 직후, 영국이 약조를 어기고 아랍인들의 독립을 인정해주지 않자, 회의를 느낀 로렌스는 양심에 따라 장교를 그만두고 오토바이 사고를 내서 사망하며 불꽃같은 인생을 마감한다. 
 
 
아름다운 금발 머리와 푸른 눈을 가진 그는 현대영웅의 초상으로 남았다. 로렌스에 대한 이 이야기들은 그의 저서 <일곱 가지 지혜의 기둥>과 <사막의 반란>에 기초한 이야기들이다.

  "아랍인들은 영웅으로서의 로렌스는 전혀 모른다."

  영웅은 만들어진다. 로렌스 또한 그런 부류 중 하나이자 자신의 거짓말로 거짓된 역사를 완성한 인물이다. 로렌스에 대한 모든 이야기는 그의 입과 그의 저서로써 밝혀진 이야기들이지 다른 사람의 증언은 없다. 그에 대한 사진을 비롯해 몇몇 자료들이 있지만 그가 아랍반란의 선두를 지휘한 영국인 지도자라는 증거는 일절 없다. 결국 당시 아랍인들의 증언을 통해 사실을 알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아랍인들은 로렌스가 누군지 모른다고 한다. 이것은 도대체 어찌 된 사실인가?

  아랍반란의 주역은 로렌스가 아니다. 파이잘 왕자의 아버지인 후세인왕 휘하에 있던 아랍인청년들이었다. 
 
 (당시 영국은 아랍반란의 전면에 나선 적이 없었다. 외교사절단 몇명, 보급물자 몇몇, 전쟁경과를 보고해주는 종군기자 몇명. 이 정도가 아랍에 대한 영국의 모든 지원이었다. 영국은 1차대전 터키와의 싸움에서 위기를 피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아랍이 뒤를 치도록 만드는 것이 목적이었을 뿐 아랍의 독립을 생각하진 않았다. 파리강화회의에서 아랍의 독립을 철저히 무시한 것이나, 맥마흔 선언으로 아랍의 독립을 보장하고서도 밸포어 선언을 하여 이스라엘 건국의 기초를 세우게끔 빌미를 줘 아랍인들을 기만한것을 봐도 알 수 있다. 무식한 아랍인들은 처음에 그 사실을 믿었다.)

 
로렌스는 파이잘 왕자와 만나 그의 군대를 이끌고 선봉에 서서 전략을 지휘했을까? 이것 역시 거짓말이다. 파이잘군의 지휘관은 이라크인 장교들이었으며, 모든 군단은 아랍인들로 구성되어 있었다.그렇다면 최후의 다마스쿠스 해방은? 이것은 성 안에 있던 아랍인 지도자들과 후세인왕 지휘하 장교들의 내통으로 이룬 승리였다. 이런 자리에 로렌스는 낀 적도 없을 뿐더러 그가 활약할 무대는 없었다. 아랍반란의 모든 것은 아랍인들끼리 이룩해낸 것이었다.

 
로렌스의 이야기를 알게 된 아랍인들측에서는 이러한 로렌스 신화가 너무나도 의심스우며 있지도 않은 사실이라고 이야기 한 바가 있었다. 아랍반란은 많은 아랍인들의 피와 땀으로 이루어진 것. 그런데도 한 영국장교가 영국으로 귀환한 그 날부터 아랍반란의 모든 공로가 로렌스에게 돌아가 버릴 줄은 꿈에도 몰랐다고 말하였다.

  그렇다면 로렌스는 누구인가?

  로렌스는 영국의 고고학자이자 중동 문명에 관심이 깊던 사람이었다. 그는 1차대전에서 영국 외교사절단의 외교관을 맡았고, 아랍반란의 경과를 영국에 계속해서 제공하는 중재자이자 종군기자 수준이었던 인물이다. 전쟁에 나선 적은 전혀 없으며, 일부 아랍 장교들의 눈에 띈 적 조차 없었다.

 아랍인들은 그를 기억한다. 그는 후세인 왕에게 1921년 팔레스티나에 유태인들의 독립국가를 가지게끔 보장한 '밸포어선언'을 인정하라고 협박적인 외교를 한 인물이었다. 영국의 무력을 등에 엎고 후세인 왕을 협박한 더러운 영국인 외교관. 이것이 아랍인들이 기억하는 로렌스의 모든 것이다.

 슐레이만 무서라는 작가가 있다. 그는 <아랍이 본 아라비아의 로렌스>라는 저서를 출판한 적이 있다. 로렌스에 대한 허구를 알리고 진실을 외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이런 시도는 크게 성공하지 못했다. 데이비드 린의 영화 <아라비아의 로렌스>가 너무나도 확고하게 로렌스의 이미지를 완성하였으며, 서구인들이 기록한 역사를 세상은 무조건 믿었기 때문이다.

  <아라비아의 로렌스>는 명백한 역사왜곡이자 아랍인들에 대한 모독이자 기만이다. 지금 사전과 미디어, 모든 검색 매체에서 로렌스를 찾으면 그는 아랍반란의 영웅. 아라비아의 로렌스. 이런 모습으로 그려진다. 보여지는 것만이 진실은 아니다. 사실과 역사는 다르다. 하지만 <아라비아의 로렌스>는 너무나도 서구 우월주의적인 사고방식과 아랍의 미개함과 열등함을 노골적으로 표현한 예이다. 이것에 대해 우리는 어떤 딴지조차 걸어보지 않는다. 우리 역시 서구 우월주의 이데올로기에 우리도 모르게 쪄들어 버렸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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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자연이 살아숨쉬는 비무장지대(DMZ)


 비무장지대는「정전협정」에 규정되어, 군사분계선에서 양측이 2km씩 후퇴하여 완충지대로서 설치한 지역이다. 서쪽은 한강 하구의 교동도, 동쪽으로는 강원도 고성군 명호리에 이르는 248km에 이르는 한반도 허리를 가로지르는 분단의 상징이다. 비무장지대 내의 군사분계선에는 철책선이 없고, 군사분계선임을 표시하는 표지판이 설치되어 있다.「정전협정」에 의하면 비무장지대에서는 개인 화기(권총 혹은 단발식 보총) 이외에는 무장이 금지되어 있고, 군인과 민간인의 출입 또한 통제되었다.
 
1. 비무장지대의 역할

「정전협정」제10항에 의하면, 비무장지대 내의 군사분계선 이남지역은 UN군 총사령관이, 이북지역은 인민군 및 중국군 총사령관이 관리책임을 맡게 되어 있다. 따라서 이러한 문제 때문에 남북한이 비무장지대에 대한 독자적인 결정과 변화를 시도할 수 없게 되어있다. 이러한 문제는 경의선과 동해선, 그리고 금강산 육로 관광문제를 둘러싸고, 해당 지역의 비무장지대 통과에 대한 관리 책임을 둘러싸고 북한과 미국 간에 신경전이 벌어지는 근거가 되기도 했다.

2. 전망


 최근 비무장지대는 남과 북의 대립의 상징으로서만 아니라 자연의 보고로서 보존의 가치가 높은 지역으로 인식되고 있다. 이 지역은 오랫동안 개발이 정지된 곳이어서 자연환경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기 때문이다. 한편 비무장지대는 지난 2000년의 〈남북정상회담〉 이후 경의선과 동해선, 그리고 금강산 육로관광이 실시됨으로써 조금씩 개방되고 있다. 대표적으로 지난 1998년 6월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소떼 방북이 판문점을 통해 이루어졌고, 분단 반세기만에 처음으로 2003년 10월에는 정주영 체육관 개관식과 남북 합동 축하공연 참가를 위한 대규모 방북단이 판문점이 아닌 군사분계선을 넘어 북한을 방문하였다. 앞으로 대규모 방북이나 금강산 관광, 경의선·동해선 연결 등이 이루어지면 군사분계선의 여러 곳이 개방될 것이며, 이렇게 될 경우 비무장지대와 군사분계선의 변화가 요구될 것이다. 이는 곧 한반도의 평화체제 수립에 한 걸음 더 가깝게 다가서는 것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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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때의 흑인병사 화제


 임진왜란 때 흑인병사가 참전했었다는 기록이 화제다.



그 흑인은 파랑국(지금의 포르투갈) 출신이었는데, 조선왕조실록은 그를 조총을 잘 쏘고 여러가지 무예를 지녔다고 기록하고 있다.

임진왜란 때 포르투갈 출신의 흑인이라니...정말 흥미롭지 않을 수 없다.
이 밖에도 조선왕조실록에는 시선을 끄는 흥미로운 주제들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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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삼국시대에도 한반도 지배?

 지난주에 화제가 되었던 일본 지유샤의 새로운 우익교과서에 임나일본부설이 또 끼어있다는 군요. 먼저 임나일본부설은 일본의 야마토왜[大和倭]가 4세기 후반에 한반도 남부지역에 진출하여 백제·신라·가야를 지배하고, 특히 가야에는 일본부(日本府)라는 기관을 두어 6세기 중엽까지 직접 지배하였다는 설입니다.

 일본이 주장하는 임나일본부설의 근거로는  여러가지가 있지만 그 중 하나로 만주에 있는 광개토대왕비를 들 수 있겠습니다. 일본은 제국주의의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해 광개토대왕비의 글자를 교묘하게 변조합니다.

百殘新羅舊是屬民 由來朝貢
而倭以辛卯年來 渡海破
百殘 □□□羅 以爲臣民
以六年丙申 王躬率水軍
討利殘國

백잔신라구시속민 유래조공
이왜이신묘년래 도해파
백잔□□□라 이위신민
이육년병신 왕궁솔수군
토리잔국

일본의 주장은 □□□에 들어오는 글자가 "임나신"이라고 해서 "일본이 바다를 건너 백제와 신라를 깨뜨리고 신민을 삼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주장은 □□□에 들어가는 글자의 첫칸에 들어갈 글자가 "동"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앞자가 "동"자가 들어가면 그 뒤엔 정, 벌, 침,등의 동사가 오게 되고 주어는 자연히 백제가 되어버린다는 주장입니다. 그러면 해석은 "병신 육년 대왕은 수군을 거느리고 백제를 토벌했다 라는 해석이 됩니다.

광개토대왕비는 이렇듯 교묘하게 변조되어 있습니다.
물론 한국사학계에서조차 광개토대왕비가 어떻게 변조되었다고 단정짓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정황증거들이 있습니다.
이번 지유샤판 왜곡 교과서에 또 다시 기재될 임나일본부설은 일본의 청소년들에게 한반도는 한때 일본이 지배했던 땅이니 언제가는 다시 찾아야 한다라는 아주 위험한 생각을 심어 주고 있습니다. 사실 교육계뿐만 아니라 일본 사회 전체에 창궐하고 있는 우경화는 우리가 반드시 경계해야하며 일본은 이 같은 행위를 당장 중단하고 전범국으로서 국제 사회에 대해 진심으로 사죄해야할 것입니다.



아래는 백과사전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야마토 왜의 '남선경영설(南鮮經營說)'이라고도 불린다. 이 주장은 현재 일본의 교과서에 수록되어 일본인의 한국에 대한 편견과 우월감을 조장하고 있다. 일본의 임나일본부에 관한 연구는 이미 17세기 초에 시작되어 19세기 말에는 본격적인 문헌고증에 의해 정설로 뿌리를 내림과 동시에 각국에 소개되었다. 이를 통해 3세기경에는 외국에 식민지를 건설할 정도로 일본의 고대사회가 발전하였다는 논리로 나아갔고, 한편으로는 일본 제국주의의 한반도 식민지배를 정당화하는 논리로 이용하였다.

이처럼 임나일본부설은 일본의 한국에 대한 제국주의적 침략행위를 과거로의 환원으로 정당화하는 도구로 사용되었으며, 일본인과 한국인은 본래 같은 뿌리에서 태어났다는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과 함께 표리관계를 이루면서 35년간의 식민통치를 합리화하는 관념적 버팀대로서 기능했던 것이다. 따라서 식민사학의 극복을 논의할 때, 임나일본부설에 대한 비판과 부정이 빼놓을 수 없는 과제가 됨은 당연하다.

임나일본부설의 근거로는 보통 4가지가 제시되고 있다. 그 중 핵심적인 것이 《일본서기(日本書紀)》에 적힌 내용이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진구황후[神功皇后]가 보낸 왜군이 369년 한반도에 건너와 7국(國)과 4읍(邑)을 점령하였고, 그뒤 임나(任那:伽倻)에 일본부가 설치되었으며, 562년 신라에 멸망하였다고 한다. 즉 일본은 369년부터 562년까지 약 200년간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으며 중심기관이 가야에 두어진 임나일본부라는 것이다. 광개토대왕비(廣開土大王碑)도 그 주장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거론되었다. 비문의 신묘년(391년) 기사를 "왜가 바다를 건너와 백제와 임나·신라 등을 격파하고 신민(臣民)으로 삼았다"고 해석하여, 당시 왜국의 한반도 남부 지배를 알려주는 결정적 증거라고 주장하였다.

한편 남조(南朝)·송(宋)·제(齊)·양(梁) 나라의 역사기록에 나오는 왜왕의 책봉기사도 들고 있다. 여기에는 왜왕이 "왜백제신라임나진한모한제군사왜국왕(倭百濟新羅任那秦韓慕韓 諸軍事倭國王)"이라는 관작(官爵)을 인정해줄 것을 요청하였고, 송에서는 백제를 제외한 나머지 지역에 대한 왜의 지배권을 인정하는 듯한 칭호를 내린 것으로 되어 있다. 그리하여 이소노카미신궁[石上神宮]의 칠지도(七支刀)도 왜의 군사적 우세와 한반도 남부 지배를 인정한 '번국(蕃國)' 백제가 야마토조정에 바친 것으로 해석되었다.

그러나 '임나일본부'란 명칭은 《일본서기》의 6세기 전반에 해당하는 기록에는 빈번히 나타나지만 한국의 기록에는 전혀 나오지 않는다. 이 때문에 그 존재 여부조차 의심되었고 이에 대한 반론들이 제기되었다. 제일 먼저 나온 것이 북한학계 김석형(金錫亨)의 분국설(分國說)이다. 이 설에 의하면 삼한·삼국 시대에 수많은 사람들이 한반도에서 일본열도로 건너가 그곳에서 삼한·삼국의 식민지라 할 수 있는 분국들을 곳곳에 설치하였고, 이때 임나일본부는 일본열도 내에 수립된 가야의 분국 임나에 설치된 것이라는 것이다. 이 설은 광개토대왕비문이 석회가 발라져 변조되었다는 주장과 함께, 그 사실 여부보다는 근대 일본역사학의 '제국주의적 체질'에 대한 반성을 촉구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 의미가 있었다.

현재 일본학계에서는 예전처럼 한반도 남부에 대한 식민지경영과 같은 주장은 거의 사라졌으나 임나일본부의 존재를 기내(畿內)의 야마토조정과는 무관한 규슈[九州]의 지방호족에 의해 설치되었다고 보는 견해로부터, 일본의 '출장소' 또는 '‘출장기관'과 같은 출선기관설(出先機關說) 등을 계속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것의 신빙성이 의심을 받자 이제는 선사시대부터 가야지역과 일본열도의 활발한 교류를 들어, 가야지역에 일부의 왜인들이 집단적으로 거주하게 되었고 이러한 왜인들을 통제하는 행정기관이 임나일본부였다는 '가야의 왜(倭)'설이나 왜의 식민지 지배기관이 아니라 가야에 파견된 왜의 사신들로 이해하는 외교사절설(外交使節說) 등 다양한 견해가 제기되고 있다.

반면 한국 학계에서는 대체로 임나일본부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있는데, 가야를 지배했다고 하는 《일본서기》의 '왜'가 실제로는 백제라는 견해와 한반도 남부지역에서 활동한 왜군을 백제의 용병으로 보는 백제군사령부설(百濟軍司令部說)이 있다. 최근에는 임나일본부는 왜의 통치기관이나 백제의 군사령부와 같은 것이 아니었으며, 임나(任那)와 안라(安羅)에 파견된 왜의 사신인 기비노오미[吉備臣]와 가와치노아타이[河內直]였다는 주장도 나왔다.

한반도 남부에서 활동했던 '왜(倭)'의 문제의 총합으로서 제기되는 임나일본부 문제는 한국고대사의 복원뿐만 아니라 한일관계사 및 동아시아 역사상(歷史像)의 재구축과 올바른 한·일관계 정립을 위해서도 중요한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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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중정원, 영원한 고대의 불가사의

세미라미스의 공중정원


 공중정원은 실제로 공중에 떠있는 것이 아니라 높이 솟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연속된 계단식 테라스로 된 노대에 풀과 꽃, 수목을 심었기 때문에 멀리서 보면 마치 삼림으로 뒤덮인 작은 산과 같다. 현대적 관점에서 보면 계단식 아파트의 발코니에 꽃과 커다란 나무들을 심은 것과 유사하다. 공중정원이 있었다는 바빌론은 고대 바빌로니아의 수도다. 바빌론은 수많은 정복자들에 의해 정복을 당했는데 그것은 이 지역을 차지하는 민족이 세계를 지배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곳을 지나간 유명한 왕들은 수없이 많으며, 그 중에서도 바빌론을 재건하고 공중정원을 직접 건설했다는 아시리아의 정복자 세미라미스가 매우 유명하다.

 놀랍게도 세미라미스는 남자가 아니라 여자다. 세미라미스에 대한 전설은 오래전부터 알려져 있었다. 학자들은 세미라미스를 기원전 8백23년에서 8백10년까지 바빌론을 통치했던 삼시 아다드 5세의 왕비인 ‘사무-라마’로 여긴다. 삼시 아다드 5세는 유명한 아슈르나시르팔왕(기원전 883-859)의 손자다. 세미라미스가 역사상 가장 유명한 왕 중 한명으로 거론되는 것은 바빌론을 재건축했기 때문이다. 당시까지는 님루드가 수도였는데 그녀는 수도를 바빌론으로 옮겼다. 수도를 옮기기 위해 재건한 바빌론은 고대의 바빌론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거대한 성곽을 가진 도시였다.

 고대에서 가장 넓은 성곽이라고 해도 폭이 8m에 지나지 않았으나 바빌론의 성곽은 무려 17.7m가 됐다는 것이 근래의 발굴에 의해 알려졌다. 외부 성곽은 11.3km이며, 내부 성곽은 6km다. 성곽 옆으로 흐르는 유프라테스강을 건널 수 있는 커다란 기둥으로 된 다리가 놓여졌는데, 기둥들의 간격은 3.6m, 다리의 폭은 9m였으며 4마리의 말이 끄는 전차가 다닐 수 있을 만큼 폭이 넓었다. 이 성채는 1백개의 문을 갖고 있었다. 성벽이 어찌나 거대하고 방문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는지 현재의 세계 7대 불가사의가 확정되기 전부터 세계의 불가사의에 단골로 들어간 기념물이었다. 사실 세계 7대 불가사의의 명명자라고도 볼 수 있는 필론도 자신이 선정한 세계 7대 불가사의에 파로스섬의 등대 대신 바빌론의 성벽을 선정했다. 바빌론은 세계 7대 불가사의에 거대한 성벽과 공중정원 등 두개가 포함됐다는 뜻이다.

설계자는 누구인가

 한편 공중정원은 기원전 5백년경 신바빌로니아의 네부카드네자르 2세가 왕비 아미타스를  수도인 바빌론에 건설한 정원이라고도 알려져 있다. 네부카드네자르 2세(성경에서는 느브갓셀 2세라고도 함)는 바빌론의 왕이 되자 메디아왕국 키약사레스왕의 딸 아미티스를 왕비로 맞았다. 산이 많아 과일과 꽃이 풍성한 메디아에서 자란 왕비는 평탄하고 비가 잘 오지 않는 바빌론에 마음을 두지 못한 채 항상 아름다운 고향의 푸른 언덕을 그리워했다. 이 모습을 보고 안타깝게 여긴 왕은 왕비를 위해 메디아에 있는 어떤 정원보다도 아름다운 정원을 바빌론에 만들라고 명령했다. 왕의 명령을 받은 건축가는 곧장 작업에 들어가 왕궁의 광장 중앙에 가로·세로 4백m, 폭 15m의 토대를 세우고 그 위에 계단식 건물을 세웠다. 한층이 만들어지면 그 위에 기름진 흙을 옮겨 놓고 넓은 발코니에 잘 다듬은 화단을 일궜다.

 그렇다면 이쯤에서 진짜 공중정원을 건설한 사람은 누구일지 궁금해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세계 7대 불가사의의 경우 공식적인 이름은 ‘세미라미스의 공중정원’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 공중정원을 건설한 장본인으로는 네부카드네자르 2세도 거론되기 때문이다. 결국 두사람 모두 공중정원을 건설했다고 보면 의문점이 해결된다. 사실 테라스에 나무나 풀을 심는 것은 메소포타미아의 강가에 사는 사람들에게 매우 보편적인 것이었다. 즉 도시 주위를 흐르는 강물을 이용해 식물을 재배하는 정원은 매우 오래전부터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대영박물관에 보관된 니니브의 소위 ‘나무로 꽉 채워진 장소 아래에서의 향연’으로 유명한 아수르바니팔왕과 왕비가 나무 그늘 아래에서 향연을 베푸는 그림으로도 알 수 있다.

 디디오르가 기록한 공중정원의 모습은 다음과 같다. “인공정원은 한변이 거의 1백20m의 사각형으로 마치 극장과 같이 계단으로 한단씩 올라가게 설계됐다. 테라스 또는 플랫폼에 재배되는 모든 식물의 무게는 높낮이가 있는 기둥으로 지지되도록 했다. 가장 높은 기둥은 약 25m로, 정원 최상부를 지지하며 벽체의 두께는 6.6m나 된다. 테라스는 돌출부분을 포함해 16×4피에(1 피에 = 0.3m)의 크기로 아스팔트로 많이 칠해진 벽돌(갈대를 포함)로 주의를 구분한 후 다시 구운 벽돌로 치장했다. 이곳에 얇은 납판을 붙여 물이 기초 부분으로 흘러 들어가지 않도록 했다. 테라스에서 거대한 나무들의 뿌리가 충분히 자랄 수 있도록 해 준 장치인 것이다. 테라스에는 각종 종류의 크고 작은 나무들이 심어져 있어 그 규모나 아름다움이 빼어나다. 기둥의 높낮이도 다르게 만들어 강도가 다른 빛이 들어오도록 유도함으로써 호화롭게 장식된 궁전의 내부 공간에 신비감을 주도록 했다. 단 하나의 기둥이 천장부터 기초까지 내려져 있는데, 이 안에 다량의 강물을 테라스까지 올릴 수 있도록 만드는 수력기계가 들어 있다. 그러나 이 기계는 밖에서 볼 수 없다.”

물을 공급하는 두가지 방법

 비가 거의 오지 않아 사막과 같은 기후를 갖고 있는 바빌론에서 약 4천3백64평이라는 큰 정원에 물을 대는 것은 여간 어려운 문제가 아니었다. 수력기계에 대해서는 두가지 설이 있다. 첫번째 방법은 정원의 맨 위에 커다란 물탱크를 만들어 유프라테스강의 물을 펌프로 길어 올렸다는 것. 체인에 물통을 연속적으로 매달아 상부로 물을 올린 다음 물탱크에 저장했다가 필요한 곳에 물을 흘려주거나 물뿌리개를 이용해 물을 공급했다는 매우 단순한 방법이다. 두번째 방법은 디오도르와 스트라본이 기록한 것으로 아르키메데스가 고안한 수력기계 방식이다. 아르키메데스의 수력기계란 물레방아를 타고 올라온 물을 아르키메데스의 나사에 연결해 꼭대기까지 퍼올리는 구조다. 특히 이 방식의 장점은 물레방아가 도는 힘으로 아르키메데스 나사가 돌면 물이 달팽이식 나선형 홈을 타고 올라간다는 것이다. 이 방식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비롯한 중세시대의 기술자들이 실현시키려고 했던 기술이기도 하며, 광산의 지하에서 물을 퍼올리거나 고층 건물에 물을 공급하기 위해 사용됐다.

 첫번째 방식의 경우 물을 상부로 올리는 체인이 밖에서 보일 수밖에 없다는 단점(일설에는 외부에서 보이지 않는 물레방아를 각 층마다 설치했다고 함)을 갖고 있다. 두번째 방식은 디디오르가 지붕에서 기초까지 내려져 있는 기둥으로 물이 올라갔다는 설명에 부합된다. 하지만 이 경우 각층에 수많은 아르키메데스의 나사, 즉 기둥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설명이 보이지 않는다. 결국 상층부까지 물을 길어 올리는 방법은 이 두가지 방식을 병용하거나, 방문자들이 잘 볼 수 없는 곳에서 사람들이 직접 물을 상부로 길어 올렸다고 가정할 수밖에 없다.

 비가 거의 오지 않아 사막과 같은 기후를 갖고 있는 바빌론에서 약 4천3백64평이라는 큰 정원에 물을 대는 것은 여간 어려운 문제가 아니었다. 수력기계에 대해서는 두가지 설이 있다. 첫번째 방법은 정원의 맨 위에 커다란 물탱크를 만들어 유프라테스강의 물을 펌프로 길어 올렸다는 것. 체인에 물통을 연속적으로 매달아 상부로 물을 올린 다음 물탱크에 저장했다가 필요한 곳에 물을 흘려주거나 물뿌리개를 이용해 물을 공급했다는 매우 단순한 방법이다. 두번째 방법은 디오도르와 스트라본이 기록한 것으로 아르키메데스가 고안한 수력기계 방식이다. 아르키메데스의 수력기계란 물레방아를 타고 올라온 물을 아르키메데스의 나사에 연결해 꼭대기까지 퍼올리는 구조다. 특히 이 방식의 장점은 물레방아가 도는 힘으로 아르키메데스 나사가 돌면 물이 달팽이식 나선형 홈을 타고 올라간다는 것이다. 이 방식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비롯한 중세시대의 기술자들이 실현시키려고 했던 기술이기도 하며, 광산의 지하에서 물을 퍼올리거나 고층 건물에 물을 공급하기 위해 사용됐다.

 첫번째 방식의 경우 물을 상부로 올리는 체인이 밖에서 보일 수밖에 없다는 단점(일설에는 외부에서 보이지 않는 물레방아를 각 층마다 설치했다고 함)을 갖고 있다. 두번째 방식은 디디오르가 지붕에서 기초까지 내려져 있는 기둥으로 물이 올라갔다는 설명에 부합된다. 하지만 이 경우 각층에 수많은 아르키메데스의 나사, 즉 기둥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설명이 보이지 않는다. 결국 상층부까지 물을 길어 올리는 방법은 이 두가지 방식을 병용하거나, 방문자들이 잘 볼 수 없는 곳에서 사람들이 직접 물을 상부로 길어 올렸다고 가정할 수밖에 없다.

공중정원의 발굴
 


 학자들은 아직 공중정원의 위치를 확정한 상태는 아니지만, 비교적 예전부터 공중정원의 위치로 알려진 아무란의 언덕으로 추정한다. 바빌론은 내외 이중성벽에 둘러싸여 있었는데 공중정원은 내성에 위치하며, ‘텔 아무란 이븐 알리’(Tel-Amuran-ibn-Ali, 추장의 언덕)라고도 불렸다.

 바빌론의 폐허는 오늘날까지도 그 모습이 남아 있는데, 이라크 정부는 특히 공중정원을 집중적으로 복원할 계획을 갖고 있다. 바빌론의 공중정원이 다른 불가사의보다 더 유명해진 것은 수많은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불러 일으켰던 바벨탑과 로맨틱한 분위기를 갖고 있는 공중정원의 신화가 혼합됐기 때문이다. 또한 공중정원은 다른 불가사의처럼 인간을 압도하는 것은 아니지만 사랑으로 이뤄진 건물이라는데 더욱 매력이 있다. 천하의 영웅 알렉산더가 자신이 죽을 장소로 바빌론을 지목한 것도 이해가 될 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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