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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 성전과 약탈의 역사
 지중해를 무대로 전개된 문명교류의 역사

- 십자군, 성전과 약탈의 역사를 읽고

서점을 찾았을 때, 이 책이 바로 눈에 들어왔다. 요즘 읽고 있는 책이 '아랍인의 눈으로 본 십자군 전쟁’인데다가 요즘 문화교류사에 관심이 많기 때문이었다.

이 책은 십자군 전쟁을 통해 지중해를 무대로 전개된 문명교류를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다.

저자는 십자군전쟁을 지중해 양편의 기독교 유럽과 이슬람교 중동이 본격적으로 대립하고 충돌한 사건임과 동시에 기독교와 이슬람 문화의 융합을 촉진한 사건으로 보고 있었다.

11세기 이후 서유럽 사회는 안으로 인구의 증가, 농업 생산의 증대, 도시의 부활 등으로 오랜 침체 끝에 수세의 입장에서 벗어나 적극적인 대외 진출을 꾀하였다. 엘베 강을 넘어 독일인이 슬라브 땅에 식민 운동을 시작하였고, 이베리아 반도에서는 이슬람교도에 대한 재정복 운동이 전개되었다. 무엇보다도 교황권의 신장, 이탈리아 상인과 봉건 제후들의 세속적 욕망, 성지 탈환등 여러 요인이 복합되어 일어난 십자군 전쟁이 유럽 세력 팽창의 대표적 사건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십자군 전쟁처럼 성스러운 이름에 가장 세속적인 욕망이 결합된 전쟁은 없으며, 신의 이름을 빌어 약탈과 살인․만행이 판을 친 전쟁이 없을 것이다. 전쟁의 발단은 예루살렘이었다. 예루살렘은 유대인․기독교인․이슬람 인 공통의 성지였다. 유대인에게는 다윗의 우물이 있는 어머니 도시요, 기독교도에겐 예수가 죽어 부활한 곳, 이슬람교도에겐 마호메트가 머무른 곳이기 때문이다. 당시 예루살렘을 지배하고 있던 이슬람 인들은 기독교인의 성지 순례를 방해하지 않았다. 그런데 셀주크 투르크 족이 이 지역을 장악하면서부터 기독교인의 성지 순례는 금지되었다. 셀주크 투르크 족은 중앙 아시아에서 일어난 민족으로서 열렬한 이슬람교도가 되어 세력을 팽창시키고 있었다. 위협을 느낀 동로마 제국 황제 알렉시우스 1세는 교황 우르반 2세에게 원조를 요청했다. 우르반 2세는 이것이 비잔틴 교회를 로마 교회에 복속시킬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1095년 11월 우르반 2세는 클레르몽에서 회의를 개최, 성지탈환을 위한 십자군 파병을 제창했다. 웅변술 이 뛰어났던 그는 성지 예루살렘을 잃은 기독교도들의 비참한 생활과 투르크 족의 위협을 설명하고, 이슬람의 승리는 기독교 세계의 불명예라고 열변을 토했다. 이 전쟁은 성전이며, 전사자는 모두 천국에 가서 그 보상을 받을 거라고 역설했다. 그뿐 아니라, 동방엔 금은 보화가 깔려 있고 아리따운 이슬람 여인들이 기다리고 있다고 하며 제후들의 욕심을 부채질했다.

1095년 삐아첸자(piacenza)와 끌레르몽(Clermont) 교회 회의에서 교황 우르바노 2세는 동로마제국의 알레시오 황제가 파견한 자들로부터 동로마제국의 위급한 상황을 전해듣고 그리스도의 무덤을 되찾고 동방의 그리스도인들을 구출하기 위해 원정군을 보내자고 호소하여 제1차 십자군 원정(1096~1099년)이 시작되었다.

그리스도께서 사시고 돌아가시어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준 이스라엘 성지순례에 대한 열망, 동방과의 무역을 원하는 이탈리아 상인들의 상업적인 야심등의 요인 복합적으로 결합되어 십자군이 결성되었다. 특히 십자군에 참가하여 대사를 받고 전사할 경우 순교자가 된다는 것도 열성적인 신자들을 원정군에 쉽게 참가하게 하였다. 그러나 제대로 준비되지 않은 제1차 원정에서는 비조직적이고 계몽되지 않은 농부들도 많이 참가하여 교회 역사에 커다란 오점을 남기는 일들이 일어났다.

그들이 라인 지방을 지날 때, 흥분한 나머지 유태인들에 대한 박해로 유혈 참사가 일어났는데 발칸 지역을 지날 때에도 지휘자의 통솔을 제대로 받지 않은 이들은 지방 주미들에게도 방화와 학살로 참극을 일으켰다. 전투경험이 전혀 없는 많은 원정군들이 예루살렘에 도달하기도 전에 셀주크족의 공격을 받아 전멸하였다. 그러나 나머지 원정군들이 악전고투 끝에 1098년 안티오키아를 함락하고 1099년 7월 예루살렘을 정복하였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도 부녀자와 유아와 노인들까지 무차별적으로 참살하는 비 그리스도교적인 만행을 저질렀다. 서유럽에서 이곳까지 도달하는 전투에서 이슬람군들의 매복병들의 습격을 받아 매일 매일 수많은 동료들이 전사하는 가운데 겨우 살아 남은 이들의 보복심리와 이슬람 군들의 항전의 악순환이 서로를 살육의 참상으로 몰고 갔다.

이런 악순환의 결과는 생사의 기로에서 양측 모두 이성적인 자제력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서 자신들의 신앙의 가르침과는 전혀 무관하게 생존의 본능만이 절대 기준이었다고 볼 수 있다.

제2차 원정은 이슬람 세력의 반격으로 에뎃사가 함락(1144년)되면서 시작되었는데(1147~1149), 끌레르보의 베르나르도 성인의 설교로 추진되었지만 터키인들과의 여러 번의 전투에서 전멸되어 결국 예루살렘에까지 이르지 못하고 실패하였다.

제3차 원정(1188~1192)은 붉은 수염의 프리드리히(Friedrich)황제가 인솔한 잘 조직된 십자군들이 이코니움에서 터키인들과 싸워 혁혁한 승리를 거두었지만, 황제가 1190년 살레프에서 익사함으로써 지휘자를 잃은 군대는 더 이상 진군할 수 없었다.

영국의 왕 리차드(Richard) 1세, 프랑스의 필립(Philipp) 2세등이 참가하여 예루살렘 재탈환에는 실패하였지만 십자군들이 성지의 새로운 지역을 정복하고 살라딘 술탄과 화해하여 그리스도교인들에게 평화로운 예루살렘 순례의 자유가 보장되었다.

제4차 원정(1202~1204)은 교황 인노첸시오 3세 교황의 호소로 시작되어 서방 그리스도교 세계의 모두가 마지막으로 이 원정에 참가하였다. 그러나 십자군들은 완전히 교황의 의사를 거스르고, 이기적이고 상업저인 이해관계에서 베네치아의 상인들에 의해 콘스탄티노플을 함라가하고(1204. 4.13)라틴 제국이 그곳에 설립되는 엉뚱한 결과를 낳게 하였다. 이 과정에서 이 되시는 심하게 약탈되고 황폐하였으며, 이러한 난폭하고 비이성적인 행동은 동서교회의 분열을 더욱 심화시키고 이슬람 세력에 대한 동방세계의 방위력이 결정적으로 약화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제 5차 원정(1217~1221년)은 1215년 제4차 라테란 공의회에서 십자군 원정이 결정되어 1217년에 실행되었다. 프리드리히 2세가 십자군 파견을 약속했으나 이행하지 않아 파문을 받았다. 원정군은 동유럽의 신흥 그리스도 국가의 약소한 군사력으로 편성되어 이집트를 공격하여 다미에타를 공격하는 적은 성과를 거두었을 뿐이었다.

아씨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은 성지 재탈환을 복음 정신에 따라 평화로운 포교로 해야 한다는 본래의 정신에 따라 무방비 상태로 성지에 가서 술탄을 설득시키려 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포로가 되었다. 그러나 술탄이 성인을 너그럽게 대우하여 풀려났고, 이것을 계기로 프란치스코회의 평화로운 선교활동이 성지에서 시작되었다.

제 6차 원정(1228~1229년)은 교회 당국과는 무관하게 파문 중에 있는 프리드리히 2세 황제의 개인적인 원정이었다. 그는 이집트 술탄과의 담판을 통해 예루살렘을 그리스도인들에게 반환시키는데 성공하였지만, 그후 1224년 결정적으로 다시 잃게 되었다.

제 7차 원정(1248~1254년) 및 8차 원정(1270년)이 모두 실패함으로써 실제적인 원정은 모두 끝났다. 프랑스의 성왕 루이 9세는 우선 이집트를 정복한 후에 성지를 점령하려 하였으나 1205년4월 카이로에서 완패 당해 후퇴했는데 그의 군대에 전염병이 돌아 전의를 상실하고 포로가 되었고 그의 부하를 위해서는 거액의 몸값을 지불하고 그 자신은 이슬람에게 다미에타(Danietta)를 넘겨주는 조건으로 풀려났다.

서방에서는 차츰 십자군 원정에 반대하는 여론이 조성되고 비폭력적인 설교를 통해 이 지역에 복음을 전파하려는 운동이 일어났으며 유럽 자체 내에서는 이교도 문제, 즉 스페인의 무어인, 이교 슬라브인, 프랑스 남부의 알비파 이단등 더 현실적인 문제들이 다가왔다. 이로 인해 십자군 원정은 사실상 실패로 끝났다.

사실 십자군 전쟁은 모든면에서 성공할 수 없는 전쟁이었다. 십자군전사들이 훈련을 제대로 받지 못한 데다 무장마저 허술 했던 것, 당시의 교통통신 수단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먼 지역으로 원정한 것, 국왕과 대영주들이 참전해 지휘부가 대립한 것, 중동 이슬람에 대한 정보가 부족한데다 심자군 원정의 기본 이념마저 변질된 것 등을 실패의 중요한 원인이라 하겠다.

십자군운동은 우선 유럽에서 교황권의 후퇴, 국왕 권력의 강화와 중앙집권화, 도시와 상업의 발달, 이슬람문화와의 접촉에 의한 문화의 발달 등 모든 일과 관계가 있다. 즉 교황에 의해 제창된 운동의 실패는 그대로 교황의 권위를 약화시켰다. 전사(戰死)에 의해 단절된 귀족 가의 소유영지는 왕령(王領)에 편입되어 왕권의 기반을 강화하였다.

십자군운동으로 최대의 경제적 이익을 본 것은 북이탈리아의 여러 도시였다. 십자군에 참가한 유럽인들은 미지의 이질적인 세계를 발견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영향을 과대하게 평가할 수는 없다. 왕권의 강화는 봉건사회 내부 전개에 기본적 요인을 가지고 있었다. 봉건적인 분열상태에 있을 때에만 유럽세계를 관념적으로 통합할 수 있었던 교황권은 왕권에 의한 중앙집권화와 더불어 쇠퇴할 수밖에 없었다.

도시와 상업의 발달은 십자군운동의 전제조건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대규모의 군대를 먼 곳까지 보낼 수도 없었고 다량의 식량과 무기를 모으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또한 동방문화 유입의 중심지는 시칠리아와 에스파냐였다. 유럽인은 이교문화(異敎文化)에 접하면서도 최후까지 관용의 정신을 배우는 일이 없었다.

또한 제4회 십자군에 의해 와해된 비잔틴제국은 다시 부활하지만 이미 소국에 지나지 않았으며 몰락은 결정적이었다. 그 때문에 비잔틴제국은 이제까지 수행해오던 유럽의 방벽 역할을 잃게 되었다. 이슬람세계에 대한 영향도 컸다. 이슬람교도는 관용의 정신이 풍부했다. 그러나 십자군의 공격을 받게 되자 그들 사이에 점차 비관용성과 민족의식이 고취되었으며, 성전(聖戰)에 대한 정열은 높아갔다.

이 책을 읽으면서 지중해를 배경으로 비록 무력을 동원한 충돌이었지만 두 문명이 교류하는 과정을 볼 수 있었다. 그렇지만 이 책 또한 그동안 읽었던 많은 십자군 전쟁에 관한 책들과 마차가지로 지나치게 유럽의 관점에서 쓰여졌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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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잔틴 제국, 천년의 역사와 만나다


로마 제국은 쇠퇴하여 395년에는 동로마와 서로마로 분리되어버립니다. 그 후 서로마 제국은 게르만 족의 대이동에 의해 멸망하지만, 동로마 제국은 천년동안 명맥을 이어 나갑니다. 이 반쪽짜리 로마제국은 앞의 로마 제국과 구분하기 위해 비잔틴이라는 새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답니다. 

비잔틴 제국의 발전과 쇠퇴

십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산천이 수백 번도 넘게 변할 만큼의 긴 시간을 유지한 나라라면 뭔가 특별한 것이 있었겠죠? 우선 비잔틴 제국은 아시아와 유럽을 갈라놓는 보스포루스 해협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동서 무역의 중심지로 자리잡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비잔틴 제국이 정치적으로 쇠퇴한 이후에도 여젆시 콘스탄티노플은 경제의 중심지 자리를지킬 수 있었죠. 또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은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데다 로마 시대부터 건설된 성벽이 버티고 있었기 때문에 이민족들이 쉽게 침범할 수 없었어요. 게다가 비잔틴의 황제는 황제 교황주의를 바탕으로 정치의 지도자 뿐아니라 교회의 수장까지 겸하고 있었으므로 막강한 힘을 행사할 수 있었답니다.




이러한 여건을 바탕으로 비잔틴 제국은 6세기 중엽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때 전성기를 누립니다. 527년에 황제의 자리에 오른 유스티니아누스는 백 년전에 멸망한 로마제국의 영광을 재현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로마의 재건을 위해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제일 먼저 착수한 일은 비잔틴 제국 내부를 안정시키는 것이었어요. 그는 국내의 안정을 위해서는 사람들에게 해야 할 일과 해서는 안되는 일을 명확히 알려주는 법체계를 다지는 일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유스티니아누스 대제는 법전 편찬에 가장 먼저 매달리지요. 이 때 만들어진 로마법 대전은 기존의 로마법을 집대성하여 만든 것으로 그 뒤 유럽 각국의 법에 큰 영향을 주게 됩니다. 또한 유스티나아누스 대제는 양잠법을 몰래 페르시아에서 들여와 견직 공업이 발달하는데 빛나는 공을 세우기도 해요.

나라가 어느 정도 안정된 후에, 유스티니아누스 대제는 해외로 눈을 돌립니다. 유스티니아누스 대제의 정복 사업으로 비잔틴 제국은 지중해 연안, 소아시아, 아프리카의 옛 로마영역을 차지했고, 로마 제국의 고향이라고 할 수 있는 이탈리아 반도도 반쯤 되찾아서 로마제국의 영광을 재현하는 듯 보였습니다.



하지만 유스티니아누스 대제 사후, 비잔틴 제국은 롬바르드 족의 침입을 시작으로 북쪽의 슬라브 족, 동쪽의 사산 왕조 페르시아의 침공에 시달립니다. 따라서 후대 황제들은 영토를 지키기 위해 모든 영토를 31개의 군관구로 나누고 황제가 직접 임명한 사령관에게 군사관, 행정권, 사법권을 주는 군관구제와 농민에게 군역에 종사하는 대가로 토지를 주는 둔전병제를 시행합니다. 그러나 7세기에 강성해진 이슬람 제국의 침입으로 비잔틴 제국은 대부분의 영토를 빼앗기고 수도 콘스탄티노플이 있는 발칸 반도와 소아시아의 남부로 영토가 축소됩니다. 이후 9세기에 비잔틴 제국은 이슬람 제국이 분열된 틈을 타 영토를 회복하고 다시 번성하는 듯 했지만, 군관구를 장악한 지방 세력가들이 황제의 명령을 무시하고 농민의 토지를 빼앗아 차지하는 바람에 강력했던 황제권을 잃어버리면서 다시 쇠퇴의 길로 접어들게 됩니다. 겨우 명맥만 이어가던 비잔틴 제국은 베네치아 상인의 사주를 받은 제4차 십자군 원정군의 침입으로 더욱 약해져, 결국 1453년에 오스만 투르크 군에게 정복당하고 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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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비류
    와~ 비잔틴 제국의 역사를 한페이지로 알 수 있는 포스팅이네요ㅋ
    제가 비잔틴 제국과 이스탄불에 대해서 관심이 많은데 관련 문화나 관련글 있으면
    또 올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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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아버지 왕(Rex Pater Europae), 샤를마뉴


초기생애

 샤를마뉴는 샤를1세(Charle Ⅰ), 카알 대제(Karl der Grosse), 찰스 대제(Charles the Great), 카롤루스 대제(Carolus Magnus) 등으로도 불린다. 그는 742년경 4월 2일 피핀 3세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메로빙거 왕조 말기 프랑크 왕국의 권력은 궁재(宮宰)에게로 집중되었으며 샤를마뉴가 태어날 무렵엔 그의 아버지 피핀과 숙부 카를로만이 프랑크 왕국의 궁재가 되어 프랑크 왕국을 장악한 직후였다. 나중에 카롤링거 왕조라고 부르게 된 이 가문은 메로빙거 왕조의 궁재직을 세습하며 프랑크 왕국 전체에 대한 지배권을 장악해왔다. 샤를마뉴의 할아버지 카를 마르텔은 분열 직전에 처한 왕국을 재건했고 732년에는 투르와 푸아티에 전투에서 사라센(이슬람)을 물리쳐 유럽과 기독교 세계를 지켜낸 공로로 인망이 있었다. 그는 힘없는 메로빙거 왕조가 유일하게 갖고 있던 이름뿐인 국왕의 대권을 침해하지 않은 채 사실상 왕국을 아들인 피핀과 카를로만에게 세습하듯 물려주었다.

 샤를마뉴가 어렸을 때 그의 아버지 피핀은 왕족 및 자신의 형제들을 쓰러뜨리고 권력을 차지했으며 751년에는 힘 있는 자가 국왕이 되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며 교황 자카리아스로부터 승인을 받아 실권 없는 메로빙거 왕가의 마지막 왕 힐데리히 3세를 폐위시킨 뒤 프랑크 회의에 의해 왕위에 올랐다. 자카리아스의 후임 교황인 스테파누스 2세는 롬바르드족(랑고바르드)의 침공으로부터 로마를 보호하는 데 도움을 청하려고 754년 알프스를 넘어 프랑크 왕국을 방문했는데 당시 12세였던 샤를마뉴는 왕국의 장자로서 교황을 영접했다. 교황은 생드니 대성당에서 성유식(聖油式)을 집전해 피핀과 그의 두 아들 샤를마뉴 및 카를로만에게 왕의 칭호를 수여했다. 이 귀중한 봉사의 대가로 피핀은 롬바르드족을 교황의 영지에서 축출할 것을 다짐했다. 피핀은 760년부터 해마다 원정을 해 아키텐(루아르 강 남쪽의 프랑스)을 정복함으로써 피레네 산맥까지가 모두 프랑크 왕국의 영토임을 재확인했다. 이 일련의 원정에는 샤를마뉴가 늘 동행했다.

 이런 젊은 시절의 경험은 아마 샤를마뉴의 성격과 목표 형성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그는 아버지를 닮아서 권력에 대한 불굴의 의지를 갖고 있었다. 외적에 대항해 단호하게 싸우고 기회만 있으면 영토를 넓히려는 경향, 가까운 친척들의 권리를 빼앗는 한이 있더라도 혼자 나라를 다스리겠다는 결심도 아버지와 똑같았다. 샤를마뉴는 세속 권력과 교회 권력의 밀접한 관계를 일찍부터 인정했다. 그는 교회를 존중했고 크리스트교 신앙을 널리 전파하는 것이 왕의 의무라고 생각했다. 또 교회에 대한 왕의 종주권을 주장하면서도 신이 그에게 크리스트교도들을 맡겼기 때문에 신에게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프랑크의 왕

 768년 피핀이 죽자 프랑크 왕국의 오랜 관습에 따라 왕국은 그의 두 아들에게 분할되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형제 사이에 격렬한 대립이 일어났다. 샤를마뉴의 동생 카를로만은 부르군트 일대를 다스렸는데 롬바르드 선왕의 왕비였던 게르베르가와 결혼하였다. 롬바르드 왕 데시다리우스는 카를로만이 프랑크 전체의 왕이 되기를 원하여 그를 암암리에 지원하였다. 그러나 동생과의 갈등에서 샤를마뉴는 승리했고 771년 카를로만이 사망하자 프랑크 왕국의 단일 지배자가 되었으며 카를로만의 편을 든 롬바르드를 멸망시켰다. 롬바르드의 수도인 파비아 포위 공격이 아직 진행되고 있는 동안 샤를마뉴는 로마로 가서 교황과 함께 774년의 부활절을 축하하고 이탈리아의 대부분을 교황령으로 이양하겠다는 아버지의 약속을 성 베드로 성당에서 재확인했다. 그러나 그가 실제로 넓혀준 교황의 땅은 미미했고 롬바르드 왕국 전역에 대한 통치권은 자신이 차지했다.

 샤를마뉴는 이교도인 작센족이 라인 강 하류 지역을 공격한 앙갚음으로 772년에 지금의 니더작센 지방과 베스트팔렌 지방에 사는 작센족을 공격했다. 그러나 775년부터는 복수보다는 작센족 전체를 정복하여 크리스트교로 개종시키고 그들의 영토를 프랑크 왕국에 통합하는 것이 그의 목표가 되었다. 이 목표는 여러 차례의 원정 끝에 실현된 것처럼 보였다. 작센족 귀족들이 그에게 충성을 서약하고 775~777년에 대규모 세례식이 거행되었기 때문이다. 777년에 파더보른에서 열린 제국의회는 작센족의 항복을 조인했다. 의회에 참석한 사람들 중에는 코르도바의 우마이야 왕조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키는 데 샤를마뉴의 도움을 얻으려고 스페인 북부에서 찾아온 아랍인들도 끼어 있었다. 778년 여름 샤를마뉴는 스페인으로 진격해 사라고사를 포위했지만 그 도시를 점령하지는 못했다. 피레네 산맥을 넘어 퇴각하던 프랑크 군대는 바스크족의 공격을 받고 참패를 당했다. 브르타뉴 원정 때 활약했던 샤를마뉴의 기사 롤랑도 이때 죽었는데 그는 나중에 전설과 시(롤랑의 노래)로써 불멸의 존재가 되었다.

 이후 그는 영토 보전에 힘쓰는 한편 내정을 강화하고 문화생활과 법의 지배를 보호했다. 샤를마뉴가 스페인에서 패배한 직후 작센족이 다시 봉기했다. 샤를마뉴가 생각하기에 세례를 받고 충성을 서약한 이 작센족의 저항은 정치적 배신이자 종교적 변절로 이런 범죄에는 가혹한 처벌을 내릴 필요가 있었다. 샤를마뉴는 작센족과 18회나 전쟁을 치르고 난 뒤에야 그들을 완전히 정복했다. 결국 그는 작센족을 자신의 지배 아래 복종시키겠다는 목표만이 아니라 제국에 완전히 통합시키겠다는 목표도 달성했다. 세속 권력과 크리스트교 신앙 사이의 뗄 수 없는 유대관계를 생각하면 이것은 작센족을 크리스트교로 개종시켜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샤를마뉴는 781년에 2번째로 로마를 방문해 교황이 어린 두 아들 피피노와 루이(루트비히)에게 각각 롬바르드와 아키텐의 왕관을 씌워주게 했다. 또한 비잔틴 제국의 황태후이며 콘스탄티누스 6세의 모후로서 섭정을 맡고 있던 이레네에게서 자신의 이탈리아 지배를 사실상 승인받았다. 그러나 프랑크 왕국이 787년에 이탈리아 남부를 공격한 뒤 샤를마뉴와 비잔틴 제국의 협약은 깨졌다.

 788년 샤를마뉴는 바이에른 공작이자 사촌인 타실로 3세를 폐위함으로써 라인 강 건너편에 남아 있는 마지막 게르만족의 독립성을 사실상 박탈했다. 이제 서게르만족인 알라마니족, 바이에른족, 작센족, 튀링겐족은 역사상 처음으로 하나의 정치 단위 안에 모이게 되었다. 게다가 아바르 왕국(지금의 헝가리와 오스트리아 북부)에 속해 있던 나머지 공국들과 도나우 강 유역에 새로 건설된 슬라브족 국가들도 느슨하나마 프랑크 왕국에 의존하게 되었고 프랑크 왕국의 종주권을 어느 정도 인정했다.

  프랑크 왕국은 엄청난 팽창을 통해 중세 초기의 부족국가들보다 훨씬 높은 지위로 올라갔기 때문에 이제는 양적인 변화뿐만 아니라 질적인 변화도 필요했다. 그러나 샤를마뉴에게 로마 황제의 칭호를 부여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은 늦게야 떠올랐고 그나마도 특수한 정치적 상황이 조성되었기 때문이었다. 동로마 제국, 즉 비잔틴 제국은 서로마 제국까지 포함한 로마 제국 전체에 대해 발언권을 가질 자격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당시 비잔틴 제국은 로마와 라벤나를 포기하고 이탈리아 남부와 시칠리아 섬에 대해서만 지배권을 주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샤를마뉴의 보호를 받고 있던 교황 하드리아누스는 이탈리아 중부에 자치령을 세우려고 애쓰고 있었다.
 


서로마의 황제

 799년 5월 교황 레오 3세는 로마에서 반대파들의 습격을 받자 샤를마뉴의 궁정으로 피신해 지원을 간청했다. 샤를마뉴는 800년 11월 교황과 함께 로마로 가서 황제의 예우로 영접을 받았다. 성 베드로 성당에서 열린 성탄절 미사 때 로마인들이 샤를마뉴를 황제라고 찬양하자 교황은 성유식을 집전하여 샤를마뉴에게 왕관을 씌워주고 샤를 아우구스투스라는 이름으로 황제에 임명했다. 샤를마뉴가 옛날 로마 제국의 서부지역을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의 황제 지위에 대한 합법성을 구체화해주었지만 동로마 황태후 이레네(797년 아들을 퇴위시키고 장님으로 만들었음), 즉 여성의 지배에 대항하려는 욕망도 그가 제위를 얻으려고 한 이유였다.

 비잔틴 제국은 제위 찬탈자의 공격에 대비했지만 샤를마뉴가 원한 것은 그저 자신의 새로운 지위와 협상에서 얻은 로마 지배권을 인정받는 것뿐이었다. 812년 비잔틴 제국 황제인 미카일 1세가 어쨌든 샤를마뉴를 황제로(로마 황제는 아니었음) 승인함으로써 그는 목적을 달성했다. 황제라는 칭호는 샤를마뉴에게 어떠한 권력도 추가로 주지 않았지만 그의 로마 지배는 합법적인 것이 되었다. 역사적으로 중요한 754년의 사건, 즉 교황이 비잔틴 제국과 소원해지고 그 대신 프랑크 왕국과 친교 관계를 확립한 것은 이제 명백해졌다. 중세의 제국이라는 개념, 그리고 프랑크 왕국 및 그 뒤를 이은 신성 로마 제국의 법률적 전통이 아우구스투스가 세운 고대 로마 제국과 맺고 있는 모든 관계는 샤를마뉴가 가졌던 황제라는 칭호와 지위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궁정과 행정

 제국의 창건은 주로 제국 내부의 문화 수준을 높이려는 샤를마뉴의 노력을 통해 합법화되었다. 샤를마뉴가 권력을 잡았을 때 프랑크 왕국의 문화, 행정, 사법 제도는 아직도 상대적으로 미개한 상태였다. 예를 들어 이 프랑크 왕국의 왕은 일정한 주거지가 전혀 없었다. 따뜻한 봄 날씨 때문에 샤를마뉴가 특히 좋아한 아헨이 왕의 거처가 된 것은 794년에 이르러서였다. 샤를마뉴는 이곳에 궁정과 왕실 교회를 지었다.

 샤를마뉴의 궁정은 그의 가족, ‘카펠라’라는 왕의 개인 예배를 집전한 성직자들, 그리고 속세의 관리들로 구성되었다. 속세의 관리들 중에는 자신의 영지 안에서 왕권을 일부 위임받아 행사하도록 허용된 영주들, 왕실의 집사들, 왕실 관리인들이 포함되었다. 샤를마뉴는 자신의 궁정을 왕국의 정치와 행정 중심지뿐 아니라 지성의 중심지로 만들겠다는 야심이 있었기 때문에 해외에서도 유명한 학자들을 불러들였다. 이들 가운데 중요한 인물로 아인하르트와 앨퀸이 있었다. 샤를마뉴는 이들을 비롯한 여러 문필가들의 도움을 얻어 교회 신부들의 저술과 고대 작가들의 작품을 소장하는 왕실도서관을 설립했으며 프랑크 왕국의 젊은 기사들을 가르치기 위해 궁정 학교를 창설했다. 제국 전역의 종교의식과 도덕성 및 재판절차의 수준을 높이려는 노력도 이루어졌다.

 모든 수도원 학교와 성당 학교에서는 라틴어와 라틴 문학을 집중적으로 공부하라는 지시가 내려졌다. ‘카롤링거 르네상스’라고 불리는 문화적 운동은 제국의 수많은 수도원을 중심으로 활발히 전개되었다. 그러나 전 세계에서 최고의 지성들을 불러들여 성직자를 가르치게 하고 결국에는 백성 전체를 가르치게 한 샤를마뉴의 노력과 그의 궁정을 언급하지 않고서는 이 운동을 제대로 평가할 수 없다. 궁정의 신학적 지식과 지적 자부심은 791년경에 샤를마뉴의 이름으로 작성한 포괄적 논문인 <샤를마뉴의 책 (Libri Carolini)>에 반영되어 있다.

 샤를마뉴는 이 궁정을 통해 제국을 다스리고 관리했으며 정의를 시행했다. 궁정과 제국 각지의 주요행정관 및 귀족들은 적어도 1년에 한두 번씩 프랑크 왕국의 심장부나 정복한 영토에 모여 총회를 열었다. 이것은 군대회의나 귀족들의 입법회의 및 교회의 종교회의를 분명히 구별하지 않은 카롤링거 제국의 독특한 구조를 보여준다. 이들과 궁정의 관계는 샤를마뉴의 명령에 따라 각지를 돌아다니는 왕의 사절들을 통해 유지되었다. 왕의 사절은 대개 2명이 한 조를 이루었는데 관리와 고위 성직자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왕의 명령은 글로 쓰면 안 되는 것이 원칙이었지만 샤를마뉴의 통치가 끝나기 20년 전부터 왕의 포고령이 약간 애매하나마 기록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왕의 포고령이 일정한 틀을 갖는 데는 시간이 걸렸으며 카롤링거 르네상스 시기에 형식이 고안되었다. 샤를마뉴는 그가 지배하는 다양한 민족과 부족의 전통적 권리를 원칙적으로 존중했고 황제가 된 뒤에는 그 전통적 권리를 기록하게 했다. 프랑크 왕국의 법령집은 여러 부족의 율법을 보완하는 기능을 했을 뿐 아니라 공공생활과 개인생활의 가장 다양한 측면에 적용된 규칙이며 왕의 사절과 백작 및 주교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에게 내려진 특수한 명령이기도 했다. 전체적으로 볼 때 샤를마뉴 시대에 만들어진 법률 문서는 샤를마뉴가 사법 행정과 대중 계몽에 관심이 많았다는 것을 뚜렷이 증명해준다.

 
통치의 한계

 그러나 샤를마뉴의 제국에 구조적인 결함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프랑크 제국의 모든 정치제도는 샤를마뉴의 뛰어난 능력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그가 사라지면 모든 것이 무너질 위기에 놓여 있었다. 이것은 샤를마뉴의 후계자인 루트비히 1세 때 프랑크 제국의 양상을 보면 훨씬 명확하다. 샤를마뉴의 교육정책으로 자신감을 얻은 성직자들은 항상 샤를마뉴의 신권(神權)정치를 고분고분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그들은 걸핏하면 자신들의 정치적, 교육적 원칙을 내세워 샤를마뉴의 신권정치에 반대하곤 했다.

 카롤링거 왕조와 함께 제국을 건설한 평신도 귀족들은 새로운 정복이 새로운 이권과 봉토를 약속해주지 않는 한 왕조와 확고한 유대를 맺을 수 없었다. 그러나 800년에 이르자 이미 도달한 국경선을 넘어 밖으로 더욱 팽창하는 것은 사실상 거의 불가능해졌다. 실제로는 이미 얻은 땅을 통합, 관리하며 외적으로부터 보호하는 데 필요한 경제적 자원과 기술적 수단도 불충분한 상태였다. 샤를마뉴의 제국은 로마 제국이 국가를 유지하는 데 사용한 수단들(화폐 경제, 봉급을 받는 관리, 상비군, 정비된 도로망과 통신망, 해안을 지키는 해군)을 갖고 있지 않았다. 샤를마뉴가 살아 있을 때 이미 해안은 노르만족의 위협을 받고 있었다. 806년에 샤를마뉴는 제국을 분할해 아들들한테 나누어줄 계획을 세웠지만 맏아들과 둘째 아들이 죽자 813년 아헨에서 아키텐의 루이(경건왕 루트비히)를 공동 황제로 만들고 유일한 후계자로 삼았다. 샤를마뉴는 불과 몇 달 뒤인 814년 1월 28일 아헨에서 세상을 떠났다.

 
인간성과 영향력

 샤를마뉴가 죽은 뒤 그의 뒤를 이은 후손들이 제국 내부의 평화와 통일성 및 국제적 지위를 유지하지 못했기 때문에 샤를마뉴의 명성은 죽은 뒤에 더욱 빛났다. 카롤링거 왕조가 단절된 뒤에도 서프랑크(프랑스) 왕국과 동프랑크(독일) 왕국의 정치적 전통은 샤를마뉴가 세운 선례에서 자양을 얻어 생명력을 유지했다. 오토 1세 때 아헨은 독일 통치자들이 대관식을 올리는 도시가 되었고 로마 교황에 대항한 대립 교황 파스칼리스 3세는 붉은 수염왕 프리드리히 1세의 요청으로 1165년에 샤를마뉴를 성인으로 추증했다. 프랑스에서는 존엄왕 필리프 2세가 샤를마뉴를 기리는 전통을 되살렸다. 샤를마뉴의 진정한 후계자가 독일인이냐 프랑스인이냐 하는 문제는 중세뿐 아니라 근대에 접어든 뒤에도 계속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나폴레옹은 샤를마뉴의 후계자라 자처했고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크리스트교 국가들이 통합해 ‘서방 유럽’을 구성하자는 논의는 샤를마뉴의 본보기를 상기시켰다.

 민간 전설과 문학도 이런 정치적 전통과 나란히 발전해 롤랑을 다룬 서사시에서 절정에 이르렀다. 샤를마뉴의 명성은 한때 그의 제국이던 지역 내부에만 머물지 않았다. 일부 슬라브어에서 왕을 뜻하는 단어는 그의 이름에서 파생한 것이다. 샤를마뉴는 전기적 문서를 전혀 남기지 않았다. 그의 인간성은 그의 행위와 동시대인들이 남긴 기록으로 조립할 수 있을 뿐이다. 샤를마뉴의 강렬한 개성은 분명 신의 뜻이 자신과 함께 한다는 굳은 신념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그는 마음속으로 전혀 모순을 느끼지 않고 개인의 독실한 신앙심과 일상생활의 쾌락, 종교적 사명감과 권력에 대한 강한 의지, 거친 태도와 지적 성장에 대한 갈망, 적과 타협하지 않는 태도와 공정함을 양립시킬 수 있었다. 그의 독실한 신앙심에는 정치적 조건이 붙어 있었기 때문에 제국과 교회는 제도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하나의 단위가 되었다.

  그의 제국은 2대 황제인 루트비히에서 끝났지만 로마 제국 멸망 이후 갈기갈기 찢어졌던 서유럽 사람들이 그 후 몇 세기 동안 의지할 수 있는 공통된 지적, 종교적, 정치적 유산을 재구성하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 물론 이런 유산이 샤를마뉴 혼자 힘으로 만든 것은 아니지만 그가 없었다면 상상하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그의 궁정 시인들 가운데 한 사람은 그를 ‘유럽의 아버지 왕(Rex Pater Europae)’이라고 불렀다. 사실 중세의 수백년 동안 유럽 역사에 그와 비슷한 발자취를 남긴 사람은 아무도 없다
 


제국의 분열

 샤를마뉴가 814년에 죽자 그의 아들 루이트비히 1세가 제국을 물려받았다. 그는 신앙심이 두터워 교회로부터 환영을 받았고 경건왕이라는 별칭도 얻었지만 난세를 헤쳐 나갈 능력이 부족하였으며 무능한 군주로 평가되고 있다. 제국 분열의 조짐은 루트비히 1세의 황후 에르멘가르드가 세 아들을 남기고 818년에 세상을 떠날 때부터 시작되었다. 이미 루트비히는 게르만족의 상속 유풍에 따라 제국을 그의 세 아들에게 분할 상속하기로 정해 놓았다. 장자 로타르 1세에게는 제위를 물려주어 제국의 중심부를, 차남 피핀과 삼남 루이 2세에게는 변경을 주기로 하였다. 그러나 에르멘가르드가 죽고 4개월 후 루트비히는 유디트와 재혼하여 사남 샤를(대머리 왕 샤를 2세)을 낳았고 그에게도 상속권이 생겼다. 그것도 늦게 얻은 귀여운 자식이고 형들에 비해서 어린 연령은 불이익을 받을 수도 있기 때문에 부친으로서는 자기가 살아 있을 때 상속 문제를 확실히 해둘 필요가 있었다. 이에 루트비히는 829년에 회의를 소집하고 샤를에게 제국의 중심부를 준다고 선언해 버렸다.

 여기서부터 부자간 혹은 형제간에 추잡한 상속 싸움이 시작되었다. 로타르는 아우 피핀과 일부 호족들의 호응을 얻어 반란을 일으켜 황후 유디트를 감금하고 로타르의 측근들이 궁중의 요직을 차지하여 영토 상속문제를 원점으로 돌렸다. 그러나 6개월 후 다시 루트비히가 일부 호족과 교회, 수도원의 도움으로 세력을 회복하여 영토 상속문제를 다시 논의하게 되었고 이에 불리함을 느낀 장자 로타르는 교황청과 말을 맞추어 놓고 알자스에서 회의를 열어 아버지인 루트비히를 퇴위시키고 세 아들은 유디트의 아들 샤를을 배제하고 합의하에 영토를 셋으로 나누어 가졌다. 하지만 이 합의는 오래 가지 않았다. 겨우 1년을 못 넘기고 형제들 간에 다시 싸움이 시작되었고 차남 피핀이 부친 루트비히와 손을 잡고 로타르에게 대항하였다. 호족들은 우왕좌왕하였고 교회는 에르멘가르드의 아들들을 외면하였으며 수도원이 확실하게 루트비히를 지지하자 로타르는 이탈리아로 도망갔고 그를 지지했던 많은 사람들은 처형되었다. 그리고 루트비히는 834년에 복위하였다.

 그 후 몇 년간 잠잠하였지만 차남 피핀이 죽자 부왕 루트비히는 기다렸다는 듯이 그 땅을 샤를에게 주었고 840년에 루트비히가 세상을 떠나자 다시 상속 분쟁이 전개되었다. 결국 843년에 베르됭 조약으로 제국을 삼분하여 로타르는 제호(帝號)와 중심부를, 삼남 루이는 라인강 동쪽의 동프랑크를, 샤를은 제국 서쪽의 서프랑크를 차지하였다. 이래서 제국은 동프랑크, 서프랑크, 중프랑크로 분할되었고 855년에 로타르가 죽고 세력이 약해지자 동프랑크의 루이와 서프랑크의 샤를이 870년에 메르센에서 다시 조약을 맺어 중프랑크의 로트링겐 일대를 빼앗아 나누어 가졌다. 이것이 오늘날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 세 나라의 출발이었고 그 판도도 지금과 비슷하였다.

 샤를 대제의 손자들은 이렇게 해서 영토를 얻었지만 그것은 오래갈 수는 없었고 결국 875년에 중프랑크에서, 이어 911년에 동프랑크에서, 987년에는 서프랑크에서 카롤링거의 왕통은 단절되었고 노르만인과 마자르인 그리고 이슬람인의 침입으로 유럽은 혼란에 빠졌다.


자료 출처
http://mtcha.com.ne.kr/world-man/france/man32-syarulmanyu.htm
http://tiny.britannica.co.kr/bol/topic.asp?mtt_id=88304

http://www.nobelmann.com/history/history_.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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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대통령들의 혈액형은?

개인적으로 혈액형별 성격론을 전혀 믿지는 않지만 재미삼아 역대 대통령들의 혈액형을 찾아보았습니다.

검색방법:  *국가기록원홈페이지-기록물검색(상단에 있음)-대통령관련기록-역대대통령기록관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 이승만은 냉철하고 현실적인 탁월한 정치가였으나 너무 독선적이었으며 고집이 셌고, 지나친 정권욕에 사로잡혀 종래에는 4.19 혁명을 불러왔고, 결국 하야했습니다. 그의 혈액형은 O형 이네요.


5.16 군사정변으로 물러났던 대한민국의 두번째 대통령 윤보선, 그도 O형
이었네요.



5.16 군사정변을 통해 정권을 잡은 뒤 18년 동안 독재를 하며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역사를 퇴보시킨 박정희 대통령. 그의 혈액형은 소심하다는 A형
이네요ㅎ


전두환 소장에게 정권을 내준 고 최규하 전 대통령, 우유부단한 성격탓에 최주사라는 별명도 가지고 있는데요. 그의 혈액형은 A형
이었다고 합니다.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뒤, 광주민주화 항쟁 때 공수부대를 투입해서 수천명의 국민들을 학살했고, 96년 내란죄 등 10여가지 죄로 사형을 선고받은 전두환. 정치적 역학관계와 인권 대통령을 자처한 김대중대통령의 사면으로 풀려났죠. 밝혀진 뇌물만 2천억원이 넘지만 전재산이 29만원밖에 없다고 우기는 전두환씨의 혈액형은 B형
이라네요.

전두환의 육군사관학교 동기로  12.12사태에 가담했고, 전두환의 뒤를 이어 정권을 잡았습니다. 역시 수천억원의 뇌물을 받았으며 역시 10여가지의 죄로 인해 전두한과 법정에 섰었고,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습니다. 노태우의 혈액형은 AB형.



나름대로 민주주의에 입각한 정치를 하려고 노력했으나 무능한 그의 경제 정책은 IMF외환위기를 불러왔다. 금융실명제를 실시해 경제를 개혁했으나 정치적 보복을 위한 것이었다는 소문도 있다. 김영삼도 AB형
.


 햇볕정책을 펼쳐 남북관계를 진전시키고 한반도에 평화 무드를 조성했습니다. 그와 관련해 한국인 최초로 노벨평화상을 받기도 했습니다. 주요 업적으로는 성공적인 대북정책과 김영삼이 말아먹은 경제를 급격하게 회복시키고 IT산업을 발전시킨 것 등이 있죠. 완벽한 대통령이라고 말하긴 어렵지만 우리나라에서 몇 안되는 대통령같은 대통령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 그의 혈액형은 A형이네요.



대한민국 16대 대통령 노무현. 요즘 박연차 리스트와 관련해 시끄럽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많은 열성 지지자를 보유하고 있을 것입니다. 어쨌거나 그는 O형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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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혈액형별 성격론은 일본 회사의 상술이니 당연히 틀리겠지만.. 이글을 보니 더욱 그렇네요 ^^ 역시 혈액형과 성격은 전혀 상관없는듯합니다. 그런데 역대 대통령기록관에 대통령 혈액형까지 나와있다니 놀랍네요
  • 박정희 대통령이 소심함으로 상징되는 A 형이라는게 재밌는데요..
    재밌는 글 잘보고 갑니다..ㅎㅎ
  • 박 전대통령은 쿠테타 성공당시 선술집에서 막걸리 혼자 먹고 신세 한탄하고 있었다는 드라마 내용이 있던데..역시 A형이군요. 전두환 전 대통령 B형인지 예전에 알았고^^
  • 이색적인 내용입니다. 정권을 잡으면서 본인의 혈액형과 다르게 행동해 나아갈 수도 있고 본인의 성격을 그대로 유지하려는 대통령도 계시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잘 보고 갑니다.
  • 재밌다^^
    역대대통령의 혈액형을 알수있다는것이 너무 흥미로웠고^^
    짧게요약되어있는 내용들도 재밌게 봤습니다. 잘보고갑니다.^^
  • 대통령
    본인의 혈액형 보다는 참모진의 혈액형이 당시 대통령의 색깔을 표현할 가능성이 훨더 많은것 같네요
  • 아드리아
    김대중과 노무현만 잘했다는거 보니까.
    그쪽 인가뵈"
  • 소나기
    ㅋ A형이 소심하다.. 결론을 얻기까지 신중한거죠.
    지를때 크게 지르는 스타일..
  • 그쪽정말 지겹다이제
    그쪽이 그쪽이지... 김대중이와 노무현만 좋게 얘기하는거보니 그쪽이죠. 아주 꼴사납습니다.
    이민가야지 이거원..
    • 다른 대통령들도 좋게 얘기하고 싶었는데,
      아는 좋은 내용이 없어서요ㅎ
      아시는거 있으면 소개 좀 해주세요~
    • Erc
      그럼 알려드릴게요. 박정희 대통령은 취임당시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국가중 하나였던 나라를 눈부시게 성장시켜 놓았고 거의 유일하게 자신을 위해 재산을 은닉하지 않은 대통령이기도 하며 일가친척을 정치권에 절대 관여못하게 한 거의 유일한 대통령이기도 하지요. 즉 당신이 보릿고개가 아닌 비만을 걱정하고 편하게 뒹굴거리며 인터넷을 할수 있는 기반을 깔아준 분이죠. 일부는 국민들이 잘나서 잘된거다 하고 그것도 어느정도는 맞는 말이라 보지만 그 잘난 국민들의 나라가 왜 박정희 대통령 취임직전까지 찢어지게 가난하고 경제성장률이 바닥이었다가 경제개발 5개년 계획중에서야 성장률이 급격히 오르기 시작했는지 모르겠네요.
      김대중 대통령은 노벨평화상을 위해 북한에게 매년 수조원의 국민 혈세를 쏟아붓고는 정전협정은 커녕 바로 제1차 연평해전으로 북한에게 뒤통수를 맞고 이에 더욱 지원을 늘려 김정일의 선심을 사려했으나 3년뒤에는 전국민의 축제인 월드컵을 노린 2차연평해전으로 뒤통수를 병으로 가격당한 미련하고 노망든 대통령이었지요. 게다가 오로지 호남출신만을 기용하고 대다수 국토개발사업을 호남에만 집중해 타지역출신들의 비난을 한몸에 받았지요. 또 김종필총재와 연합, 호남뿐 아니라 충청권의 표도 얻어 선거에서 승리했음에도 대통령이 되자마자 총리였던 김종필을 배신하고 버려 충청도에서도 미움을 한몸에 받았고요. 즉 국민화합과는 거리가 먼 자신과 주변인의 안위만 챙기는 대통령이었지요. 하지만 정치에는 오랜 야당생활에도 살아남은 것으로 봐도 알수있듯이 정치100단, 늙은 여우등 많은 별명이 있던 정치의 귀재였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넘어가겠습니다. 이제 아주 조금이라도 아셨나요?
  • 소내기
    박정희 대통령은 비형입니다.
    박근헤 의원도 비형이구요
  • 김대중대통령에 대한 평가를 후하고 전국민이 사랑하는
    박정희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어이없게 박하고
    솔직히 부모가 전라도 꼴통이거나 혹은 민주화 세력이 아닌이상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평가를 독재로 매도해버리는 분은 많지 않거든요 ㅋㅋ
    홍어 신가봐요..
    서울 신림동은 홍어 천지던데 ㅋㅋ
    홍어에 대한 너무 안좋은 기억들이 많아서 ㅋㅋ
    • 현대사를 제대로 공부하신 분이라면 박정희를 독재자로 평가합니다. 좀 더 열심히 공부하신 분이라면 친일파로 평가할 수도 있겠네요. 아예 대놓고 지역감정 조장하시는 분 같은데 제 블로그보다 조선일보 기사를 읽으시는게 더 유익하실겁니다.
  • 최종적으로 다시 알아낸 혈액형
    국가 기록원의 전 대통령의 혈액형이 잘못 되어 있습니다 그당시 주먹 구구식으로 기록되었던 내용이구요 박정의 대통령은 최종 조사결과 B형으로 나왔구요 전두환 대통령은O형으로 최종 조사결과 나왔습니다 노태우 대통령은 A형이구요 나머지는 위의 대로 같습니다.. 인터넷이라는곳이 잘못하면 정보마져도 오도될수 있다는걸 여실히 보여주네요.. 최종적으로 결과가 나온 사이트를 참조 하세요 하두 말들이 많아서 최종적으로 직접 조사해서 나온 결과란 것을 밝혀 드립니다 이럻게 한군데서 뭐다 하면 순시간에 직접 알아보지도 않고서 믿어버리기 때문에 자꾸 진실이 숨겨지는것 같습니다.. 여러분이 직접 좀더 실질적으로 조사를 해보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어느 기관에서 뭐다 하면 무조건 믿어 버리는 그런한 건 잘못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불과 몇십년 전만해도 혈액형이 중구 남방으로 기록되었습니다 심지어는 우리 자신의 혈액형도 몇번을 바뀌는 일도 허다하지 않았습니까 하물며 예전의 대통령들도 그러했으리라 생각 됩니다 과학이 급속도로 발전되면서 형액형을 알아내는 기술도 급속도로 바뀌면서 발전했습니다 국가 기록원만 보고 믿지 마시고 최종적으로 완전 조사 후에 발표되었던 역대 대통령의 혈액형을 참조 하시기 바랍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만 박정희 B형 전두환O형 노태우 A형 노무현 O형 이승만 O형 이명박B형임을 말씀드립니다..
  • 홍어사냥
    버러지 같은 홍어네 ㅋㅋㅋ
    사측이나 국가에서는 돈먹는 골치덩이인 의료보험을 박정희가 만듬
    처음에는 대기업위주로 실시
    전두환은 민간 소규모 업자들이 싫다는데 억지로 확대실시...
    한국은 유래없는 아픈게 두렵지 않은 나라가됨
    김대중 나라에 돈이 없자 다들 싫다는 연금실시 다 날려먹음 지존..... 사기꾼
    서민들 피빨아서 IMF를 극복한것처럼 보이지만 수많은 노예층 형성....
    막말로 대기업 노동자나 공무원아니면 너는 노예다 라는 공식을 만듬
  • 밑에 개소리하는분이 계시네요.
    박정희대통령 a형맞구요.. 박근혜 대통령 b형맞습니다.. 그이유는 육영수여사가 ab형이셨습니다.
    그리고 박근령씨가 a형입니다.
  • 빨갱이짓한 또라이가 둘다 a형이네
  • 비형의 장난질
    최종다시알아냔혈액형님 장난치지 마시거요,,저 몇십년간 정주영,박정희,요근래에는 박지성 김연아까지 비형인지 일있습니다,,왜냐믄 비형들이 돌아다니면서 모든 괞찮은 사람들을 비형으로 왜곡시키드라고요정확히 이야기 할게요박정희 에이형 맞습니다,,김연아 정주영.박지성 오형맞습니다,작년 다음 인물란 쳐보면 전부 비형으로 떳습니다,비형들이 돌아다니면서 거짓으로 덮어씌우드라고요..실질적으로 당사자들이 혈액형 확인 시켜도 기록이 남았다는거짓으로 비형드리 장난질 칩니다,애초에 비형은 인물이 생길수없는 혈액형ㄴ입니다,, 그래서 거짓으로 왜곡하는거고요,,요 근래에는 혈액형들이 거의 드러나니까 증명할수 없는시대의 다른나라사람인 간디가 비형이다고 주장하는 비형들의 날조 왜곡이 두드러지드라고요,제발 자신의 능력으로 사세여 날조나 왜곡으로 살지 마시고요
  • ㅜㅜ
    울나라 대통령 혈액형 정확근거도//에이형,,,박정희,김대중,최규하/비형 전두환 이명박 박근혜/오형 노무현 이승만 윤보선/ 에이비형 노테우 김영삼..제발 비형분들 자신들의 혈액형 컴플레스 가진것을 알겠는데 박근혜같이 계속 거짓맗을 밥먹듯이 하지는맙시다,또는 이맹바기처럼 거짓말이 일상화 되니,비형으로 욕얻어먹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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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초대황제 아우구스투스 리더십의 비밀?


로마가 이탈리아 반도의 작은 나라에서 시작하여 서유럽과 북아프리카 그리고 서아시아를 지배하는 제국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카이사르가 공화정을 타파하고 제정으로 전환하는 기틀을 마련한 데서 찾을 수 있다. 카이사르는 로마제국의 기초공사를 위한 청사진을 만들었고, 그 설계를 토대로 초대황제 아우구스투스는 건물을 지어 준공을 하였다. 


로마인이야기는 인류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대국으로 존속하고 유지된 로마의 역사를 11권의 책 속에 담아내고 있다. 로마인이야기의 주인공은 사실상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카이사르가 로마제국의 창업자라면 아우구스투스는 수성에 성공하여 제국이 장기간 동안 존속할 수 있도록 기여하였기 때문이다.

기업의 성장 역시 비슷한 맥락에서 관찰이 가능하다. “창업은 쉬워도 수성이 어렵다”고 흔히들 말한다. 로마제국의 창업과 수성이 어떻게 가능하였는지 최근의 경영이론과 비교하면서 지난 호에 살펴본 카이사르의 리더십에 이어 아우구스투스의 리더십을 조명해 본다.

기원 전 44년에 카이사르가 암살된 직후 후계자로 지명된 옥타비아누스는 당시 18세로서 정치권에서는 애숭이에 불과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런 그가 당대의 쟁쟁한 실력자인 안토니우스를 제압하고 14년 만에 최고권력자에 올랐다는 사실 자체가 그의 지혜와 능력을 웅변적으로 입증해 주고 있다.

그의 리더십 특성은 첫째, 철저한 목표관리를 실시한 점을 들 수 있다. 아우구스투스는 ‘공화정 폐지와 제정의 구축’이라는 목표를 세우고 이를 실천하기 위해 철저한 계획을 세워 목표를 달성했다. 특히 카이사르가 암살당한 원인을 분석하고 기득권의 반발을 무마하면서 뜻을 달성하기 위해 늘 마스터 플랜을 마련하여 일을 추진했다. 예를 들면 그는 권력을 장악한 후에 공화정으로의 복귀를 선언하여 원로원을 안심시키고 환영을 받는다. 그러나 결과는 공화정은 폐지되고 제정시대가 열리게 된다.

그래서 “아우구스투스가 하는 일은 하나 하나는 합법적이지만 서로 연결하면 비합법이 되는 제정으로 연결되었다”는 평가를 받게 되었다. 그는 목표를 세우고 그 목표를 달생했을 때의 예상되는 이점을 그려본 후 치밀하게 장애요인을 살펴봄으로써 구체적인 실천 전략을 수립하였다. 그러므로 아우구스투스는 오늘날의 MBO(management by objective)개념을 도입하여 점진적이고 지속적인 개혁을 추진하여 목표를 이룬 황제라고 말할 수 있다.

둘째, 제국 통치를 위한 시스템을 구축하였다.
카이사르는 로마가 제국으로 가기 위한 제도를 구축하기 위해 설계를 하였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미완성이었다. 이를 이어 받은 아우구스투스는 사람의 자의성을 방지하기 위해 가능하면 무슨 일이든 제도화함으로써 행정이 합리성과 공정성을 바탕으로 운영될 수 있도록 기반을 구축하였다.

상비군제 도입, 원로원 의원수의 구조조정, 화폐개혁, 국세청 창설, 선거제도 개혁 등을 통해 제국을 효율적으로 운영하기 위한 시스템을 마련하였다. 특히 당시에 50만에 달하는 군인을 구조조정하여 16만 8천 명으로 감축한 후 상비군 제도를 도입함으로써 군대를 양적관리에서 질전관리로 전화하였고, 이를 위해 퇴직금 제도를 법제화했다는 사실에 놀라움에 금할 수 없다.

셋째, 시스템에 대한 지속적인 평가를 통해 점진적인 개혁이 가능하도록 하였다. 아우구스투스가 통치기간 동안에 경험한 로마제국의 평화는 그의 수많은 개혁이 처음부터 완벽했기 때문이 아니다. 그 개혁이 제대로 기능을 발휘하고 있는지 어떤지를 그가 쉬지 않고 감시했기 때문이다.

그는 로마가 도로를 건설하고 유지와 보수를 지속적으로 하였듯이 개혁도 마찬가지라고 보았다. 계획(Plan)과 실천(Do)과 평가(See)의 선순환을 끊임없이 체계화하였기에 시스템의 작동이 가능했던 것이다.

넷째, 솔선수범하는 노블리스 오블리제(Nobless Oblige)의 리더십을 보여 주었다. 카이사르가 아우구스투스를 후계자로 지명하게 된 가장 큰 배경이 투철한 책임감을 바탕으로 한 솔선수범하는 자세였다고 한다. 그는 재임 중에 국가가 어렵거나 돈이 필요할 때 개인 돈으로 국고를 네 번이나 지원했다. 돈이 모자라면 먼저 자기 주머니를 턴 후에 모금을 하였던 것이다.

또한 그는 딸 율리아를 자손들을 번성시킬 목적으로 세 번씩이나 결혼시킬 정도로 혈연에 지나치게 집착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가족이나 친척이 법을 어기면 엄격하게 처벌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의 딸과 친척들이 유배형을 받고 쓸쓸하게 노년을 보냈고, 아우구스투스의 유언장에서도 유배된 딸과 손녀는 영묘에 묻히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고 적은 사실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그는 강한 책임감과 더불어 공적인 일과 사적인 일을 구분하는 솔선수범이 몸에 벤 지도자였다.

다섯째, 권한 위임을 생활화하였다.
아우구스투스는 자신의 능력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부족한 부분에 대해서는 전문가를 활용함으로써 권한을 위임하는 모범을 보여 주었다. 예를 들면 군사와 내정은 아그리파, 외교와 문화는 마이케나스에게 위임하여 성공할 수 있었다.

아그리파는 카이사르가 아우구스투스의 군사적인 분야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추천한 인물로서 모든 군사전략과 지휘는 그가 맡았다. 마이케나스는 외교와 문화 분야에서 충실한 조언을 하여 원활한 통치가 가능하게 만들었다.

요즈음 기업인들이 문화사업 육성을 위해 아낌없이 지원하는 매세나 운동이 바로 마이케나스의 뜻을 기리기 위한데서 시작되었다는 역사적 의미를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아우구스투스의 건강이 좋지 않았던 것도 권한위임을 할 수 있는 중요한 요인이었다.

끝으로 놀라운 자제력을 보여 주었다.
인류 역사상 각종 개혁이 실패하는 이유는 서두르는 데 중요한 원인이 있다. 기득권층의 반발이 계속될 경우 개혁을 추진하면서 성공하기란 쉽지 않다. 아우구스투스가 개혁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어떠한 비난과 불편함도 참고 견디면서 오로지 목표를 향해 한 걸음 한 걸음씩 나아갔기 때문에 마지막에는 자신이 원하는 바를 관철시킬 수 있었다.

신중한 성격을 타고난 아우구스투스가 뛰어난 자제력을 발휘했던 게 성공의 비결이었다고 할 수 있다. 아우구스투스가 원로원 의원들의 무례한 행동에 대해 의붓 아들에게 보낸 다음과 같은 편지에서 그의 자제력을 엿볼 수 있다.

“나의 티베리우스여, 젊은 너로서는 무리도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나를 나쁘게 말하는 사람이 있더라도 분개해서는 안된다. 그들이 우리에게 칼을 들이대지 않는다는 것만으로도 만족해야 하지 않겠느냐.”

개혁이란 미명하에 목청만 높이는 개혁은 곧 한계에 부딪히고 만다. 준비된 개혁, 말 하지 않는 개혁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아우구스투스는 행동으로 보여준 셈이다.

카이사르는 창업형 리더십, 아우구스투스는 수성형 리더십을 발휘하여 로마제국을 반석 위에 올려 놓았다. 사실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는 절묘한 보완관계에 있다. 성장과 안정, 창업과 수성, 진보와 보수의 조화를 통해 목표를 달성할 수 있었다.

지금 우리 사회는 곳곳에서 리더십의 중요성을 절감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의 리더십이 오늘날 지식 정보사회에서 더욱 돋보이는 이유이기도 하다.

로마제국의 초석을 닦은 두 지도자에 대한 철저한 연구와 벤치마킹이 무한경쟁시대의 높은 파고를 뛰어넘는데 좋은 참고가 되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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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논란, 의사가 아니라 장군이다?


안중근 의사의 존칭을 장군(將軍)으로 바꾸자는 움직임이 일고 있습니다.

개인적 희생을 강조한 ‘의사’보다는 ‘장군’이 국가적 항일 투쟁의 의미를 더 명확하게 드러낸다는 주장인데요. 그러나 의병은 정식 군대가 아닌 데다 장군 존칭으로는 안 의사의 다양한 면모를 담지 못한다며 반대하는 목소리도 높다고 합니다.

안중근평화재단 청년아카데미는 20일 “하얼빈 의거 100주년을 기념해 다음달 26일 국회도서관 강당에서 여는 학술대회에서 존칭 변경 문제를 집중적으로 조명하고, 다양한 대국민 홍보 캠페인을 벌일 방침이다”고 밝혔습니다.

안의사가 뤼순 재판에서 자신을 “대한의군 참모중장”이라고 밝힌 것이 이 제안의 근거입니다. 또 국가와 군을 대표하는 장군 존칭이 개인 자격인 의사보다 의거의 취지를 더 정확하게 담고 있다는 주장입니다.

정광일 대표는 “안중근의 공적을 국외에 알릴 때도 장군이란 말이 더 효과적”이라며 “의사는 국내에서 쓰이는 좁은 개념이다”고 지적했다고 합니다.

학계에서는 의견이 분분하다고 하는데요.
찬성 측은 장군이란 말을 써야 이토 히로부미 저격을 국내 의군의 항일투쟁으로 부각할 수 있다는 것을 근거로 제시했고, 반대 측은 ‘장군’ 호칭은 ‘군인으로서 안중근’만 부각될 뿐 안 의사의 사상이나 업적, 하얼빈 의거의 역사적 의미가 오히려 묻힐 수 있다는 우려를 표명했는데요.

물론 호칭도 중요하지만 친일잔재를 청산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 더 문제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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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중근테러리스트
    안중근이 테러리스트라는 개독들은 또 뭐냐.. 원래 역사라는 해석 자체가 보는 입장과 관점에 따라 바뀌어 볼 수 있다. 독립투사가 테러리스트라는 건 우리나라가 아니라 완전 일본의 관점에서 본 것이다. 한 나라의 독립을 위해 싸웠으면 어느나라든 존중은 해주기 마련이다. 그런데 테러리스트라고 앞장서는 짓거리라는.. 웹에 떠도는 것 찾았습니다. 이거 꼭 보시길~ http://blog.daum.net/jjkkss694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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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즈비언, 조선시대에도 있었다?

 


조선시대에도 레즈비언이 있었을까?

놀랍게도 조선왕조실록에 레즈비언에 대한 기록이 있다.

세종의 맏아들인 문종의 두번째 부인인 봉씨가 궁궐의 여종을 사랑했다는 내용이 그것이다.



조선시대와 마찬가지로 지금 한국 사회에서  레즈비언은 비가시화되어 있다. 1996년 서울방송의 <송지나의 취재파일>을 통해 전해성과 이해솔 등 여러 명의 레즈비언이 커밍아웃했다. 그러나 이들의 커밍아웃이 다른 레즈비언들의 커밍아웃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아직까지 레즈비언은 사회로부터 곱지 않은 시선을 받고 있다. '끼리끼리'와 같은 레즈비언 인권 운동 단체들은 레즈비언들이 여성임과 동시에 성적 소수자이기에 이중 억압을 겪고 있다고 주장한다.

청소년 레즈비언들은 가정과 학교에서 훈육과 교정이 필요한 존재들로 타자화되고 있다. 2006년에 문화방송은 청소년 이반에 관해 왜곡된 보도를 내보낸 바 있어 성적 소수자 인권 단체들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각각 2005년과 2006년에 제작된 단편 다큐멘터리 <이반 검열>과 <이반 검열, 두 번째 이야기>는 학교 안팎에서 일어나는 청소년 이반 억압 사례를 다루고 있다.

제대로 정체성을 드러내고 활동할 수 없게 하는 현실과는 달리, 인터넷은 레즈비언들에게 소통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고 있다. 다음, 네이버 등 여러 포털 사이트들에 레즈비언들의 온라인 커뮤니티가 건설되어 있다. 티지넷이나 미유넷은 레즈비언들을 위한 사이트로서, 많은 회원수를 보유하고 있다. 오프라인에서는 주로 신촌이나 홍대, 이태원 지역의 레즈비언 전용 클럽들이 레즈비언 커뮤니티의 중심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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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정복기의 군대


예언자 무함마드의 시대

1. 무슬림 지휘관-7세기 중반 : 부유하고 잘 무장된 이 지휘관은 쇠사슬 코이프와 어깨 드림 위에 비잔티움에서 유래된 형태의 조립식 투구를 쓰고 있다. 매우 긴 쇠사슬 호버크는 일반적인 형태인듯 하나, 강화된 가죽 러멜러 흉갑은 그렇지 않다. 칼은 아마도 사산조나 인도의 양식일것이며 가죽 방패와 신은 근처의 누비아에서 보이는 형태에서 유래되었다.

 2. 무슬림 궁수-7세기 초중반 : 이 가난한 병사는 그의 칼을 넝마로 감쌌고 가죽 끈을 감아 머리를 보호했다. 그의 활은 Grewia tenax라는 나무에서 베어낸 간단하 형태의 활이며, 짧은 화살은 돌화살촉을 쓰고 있다. 튼튼한 나알-샌들-을 신고 카미스-긴 소매를 가진 튜닉-을 입고, 전통적인 아라비아의 의상인 이자르-어깨와 몸통에 두르는 천-을 입고 있다.

3. 베두윈 족장-7세기 초 : 7세기의 아라비아 반도의 정주민과 베두윈들 사이에서는 의복의 차이점을 찾을수없지만, 남부와 북부에서는 옷차림이 다르다는것이 드러난다. 그의 올린 머리 형태는 이슬람 이전 아라비아의 미술품에서 보인다. 쇠사슬 디르(갑옷) 위에 앞이 뚫려있는 주바(jubba)를 입고 있으며 갑옷 아래는 이자르를 입고 있다. 낙타의 안장은 수백년간 아라비아에서 쓰여오던 것이며 가죽으로 된 등자가 있다.


무슬림의 대정복

1. 안사 전사-7세기 중반 : 안사-예언자의 돕는 사람들-들은 '인도된 칼리프'들의 정예병력이 되었으며 그들의 장비와 무기등은 여러곳에서 자세히 묘사되었다. 이 병사는 하얀 펠트 모자-칼란수와-를 그의 투구 위에 쓰고 있다. 노란색 터번은 그가 안사임을 나타낸다. 실로 짜여진 가는 벨트와 수대-어깨부터 허리까지 칼을 차기 위해 만들어진 띠-는 가죽 벨트나 수대보다 더 많이 사용되었을뿐만 아니라 이 시대의 특징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의 장비는 긴 대나무 창과 전통적인 형태와 비슷한 짧은 칼, 그리고 약간 대칭이 맞지 않는 아랍 스타일의 활, 기름을 바른 가죽 방패이다. 어깨의 호버크 아래에는 속을 천 등으로 층층이 튼튼하게 채웠다.

2. 페르시아 아사와리아 기병-7세기 중반 : 옛 사산조 기병의 함라-붉은 얼굴의 사람들-의 일원이었던 이 병사는 사산조 최후의 시기의 무장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넓은 철띠로 강화된 투구와 셔츠모양의 튜닉 아래 입은 짧은 사슬 호버크, 다리를 보호하는 란-장식된 각반-이 그의 무장이다. 활을 쏘는 오른손은 가죽끈으로 보호하고 있다. 아바르 양식의 긴 칼과 단검, 활은 두개의 나눠진 벨트에 고정되어있으며, 마갑은 북부 스텝의 영향을 보여준다. 안장에는 목제 등자가 달려있다.

3. 베르베르 보조병 : 무장이 매우 빈약한 이 베르베르 보조병은 조악한 직조 하이크와 코르크로 바닥을 댄 샌들을 착용하고 있다. 베르베르족이 지난 세기동안 그랬듯이 전투를 위해서 머리를 밀었고 창과 간단한 투석끈, 돌이 든 가방, 그리고 가죽 방패를 들고 있다.

우마이야조의 보병

1. 우마이야조 근위병-8세기 초 : 이 정예병이 쓰고 있는 철과 청동이 섞인 투구는 중앙아시아에서 유래됬음에도 이란과 이라크에서 대규모로 제조되었다. 그의 디르 호버크 밑에 있는 두라아-앞이 뚫린 튜닉-은 아랍에서 습관적으로 착용된것 같다. 수대에 달려있는 미끄럼 방지가 된 세겹짜리 칼집세트는 매우 특별한 형태인데 이러한 형태는 사마르칸트와 판지켄트(pianjikent)의 낙타를 탄 아랍 침략자들의 그림에서 볼 수 있다.

2. 우마이야조 보병-8세기 초 : 이 보병 궁수는 투구 위에 모자를 쓰고 있다. 이 병사의 무장은 일반적인 우마이야조 보병의 무장을 보여준다. 그의 유일한 다른 방어구는 쇠사슬 디르이다. 천으로 된 카바와 솜으로 된 카미스(겉옷과 갑옷 안의 흰 옷을 말하는것 같은데, 어느게 카바이고 어느게 카미스인지 모르겠음) 아래에는 군사들이 입었던 바지 시르왈이 있다. 어깨에 걸치고 있는 숄은 타얄산이라고 부른다.

3. 무슬림 여성-8세기 초 : 일반적인 견해에도 불구하고, 여성들은 초기 무슬림 시기동안 매우 활동적으로 일을 했었다. 그리고 때에 따라서는 집을 지키기 위해 무기를 들기도 했다. 이 여성은 아마도 부유한 계층의 출신일 것이다. 고급 터번은 머리카락만을 가리고 있는데 이러한 것이 현재의 극단론자들이 주장하는 모든 얼굴을 가리는것 보다 예언자의 본래 가르침에 더 가깝다.

우마이야조의 기병 
 
1. 발흐 총독-8세기 : 여기 이 총독은 갑옷 대신 고위 관료의 옷을 입고 있지만, 지방 총독들은 중무장을 했다. 시위를 매지 않은 채 활집에 들어있는 거대한 아랍활은 도보로만 사용할 수 있다. 몇몇 우마이야의 상류층 인사들은 보석류나 마스카라-코흘-를 이용하기도 했다. 이 자는 말 위에 비스듬히 걸터앉아 있는데, 이러한 형태는 파지켄트의 벽화에서 보인다. 초기 형태의 칼란수와-모자-와 타야라산-목에 두른 흰 띠-를 쓰고 있으며 큰 장갑을 끼고 있다.

2. 우마이야조 정예 기병-7세기 후반 : 이란 출신의 병사들의 무장에서는 이란 갑옷의 영향을 받은점이 보인다. 이 병사는 미그흐파르-쇠사슬 드림-를 입고 있는데, 이 갑옷은 그의 옷 아래에 있다. 청동 러멜러 흉갑은 탄누르 또는 '자궁'이라고 알려졌다. 손에는 이란 양식의 건틀렛을 끼고 있으며 발은 사크 알 자르드라고 불리는 쇠사슬 각반으로 보호하고 있다. 방패는 나무로 된 채색방패이다.

3. 이집트의 우마이야 왕조의 경기병-8세기 중반 : 기후는 우마이야 칼리프조의 아랍 지방에서 중장갑이 드문 이유에 대한 답이 될것이다. 이 병사는 남부 누비아에서 온 악어가죽 투구-초기 중세시대에 쓰인 철제 러멜러 목 보호대가 곁들여 있다-를 쓰고 있다. 화려하게 장식된 카미스 셔츠와 시르왈 바지위에 찬 두개의 벨트가 있는데, 첫번째 벨트는 실로 두껍게 짠 아랍의 양식이고, 가죽과 장식이 달린 가죽 벨트는 새로 나타난 투르크-이란의 양식이다. 낡은 가죽이 덧대여져 있는 안장에는 목재 등자는 달려있지 않다.


 압바스 혁명 
 
1. 후라사니 아랍 정예병-8세기 중반 : 이 정예병은 그의 터번과 모자 아래 둥그런 낮은 투구를 쓰고 있다. 또한 그는 일반적인 형태의 갑옷인 디르에다 얇은 판을 겹쳐 만든 완갑(팔에 차는 방호구)을 쓰고 있다. '명예의 겉옷' 위에 금으로 된 타와-목걸이-를 쓰고 있는데, 이 목걸이는 전투에서 장교들을 구분하기 위해 주어졌다. 말에서 내린 채로 싸우기 때문에 칼은 등에 차고 있다.

2. 후라사니 아랍 기병-8세기 후반 : 이 병사는 바야다 투구와 미그흐파르를 입고, 투구 위에는 가죽 안감을 댄 모자-아마도 이 모자는 칼란수와 샤하시야일것이다-를 쓰고 있다. 전통적인 이란 양식의 카바 코트 아래에는 쇠사슬 호버크를 입고 있다. 이란의 샬와 바지 위에 정강이 갑옷인 란을 가죽끈으로 고정했으며 칸자르라는 단검, 도끼(타바르진), 투르크-이란의 합성궁으로 무장했다. 이 시기에 무슬림 궁수들은 손가락과 엄지 모두를 이용해서 활을 당겼다.

3. 페르가나 기병-8세기 중반 : 민족적인 기원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이 기병은 투르크식의 높은 투구를 쓰고 있다. 앞부분에 솜털을 포갠 겉옷 밑에 쇠사슬 호버크와 얇은 판을 겹쳐 만든 정강이 갑주와 완갑을 착용하고 있다. 겉옷의 아래쪽 부분에 있는 가죽 러멜러 흉갑은 따로 입을때도 있었다. 말에는 코에 큰 금속 재갈끈을 매어놨고 안장의 뒷부분에는 분해된 천막이나 접은 깃발을 매어두는 막대가 매달려 있다.

 


압바스조-변경의 전사들 
 
1. 아나톨리아 국경 전사-9세기 초 : 많은 사료들이 동부 아나톨리아의 비잔티움 병사와 무슬림 병사사이의 장비의 유사성이 있음을 말해준다. 이 병사는 오직 터번을 통해서만 그가 무슬림이란걸 알아볼수 있으며 각 부분을 대갈못으로 고정한 철제 투구를 쓰고 있다. 실로 짠 두꺼운 검은 겉옷-두라아-아래에 보편적인 갑옷인 디르와 가벼운 가죽 부츠-쿠프-를 착용하고 있다. 그의 쭉 뻗은 양날검은 노획된 비잔티움의 무기에서 나타난다.

2. 압바스조 보병-9세기 초 : 여기 이 병사는 종려나무 잎의 줄기로 만든 투구와 가죽으로 감싼 갈대방패를 들고 있다. 이 방패는 중동에 몇세기전부터 알려져 온것인데, 다만 다른 것은 자신의 방패에 역청칠을 했다는 것이다.

3. 페르시아 기병-9세기 초 : 9세기 중반에 이르러서 많은 이란인 기병들은 이전보다 더 가볍게 무장한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경향은 보병이 덜 중시되고 기마 궁술을 더 중요히 여기는 상황을 반영한다. 이 기병은 새로운 형태의 칼란수와를 쓰고 있다. 짧은 쇠사슬 호버크는 철제 러멜러 흉갑아래 입었는데, 이러한 갑옷들은 전신부의 가슴만을 보호하기 위한 목적으로 입었다. 그는 또한 당시 이란에서 많이 쓰이던 굽은 세이버를 들고 있다. 말의 머리는 천을 덧댄 철제 마갑으로 보호하고 있고, 몸통과 목은 티즈파프라고 불리는 펠트를 층층히 쌓아 만든 마갑을 쓰고 있다.

 압바스조-궁중 
 
1. 굴람 근위기병-9세기 중반 : 노예 출신의 이들 굴람들은 처음 몇년간은 통치자의 가장 신뢰할만한 근위병들이었다. 이 굴람은 장식된 비단 두라아와 헐렁한 비단 바지를 입고 있다. 긴 머리는 아마도 그가 투르크족 출신이란것을 보여주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다른 부족 출신들도 긴 머리를 했다. 활은 명백히 중앙아시아에서 발명된것이나 화살통과 활집은 투르크 양식의 영향을 보여준다. 뺨가리개가 달려있는 투구는 많은 그림에서 보인다.

2. 아브나 보병-9세기 초 : 이 아브나 보병의 장비와 복장을 통해 그의 부대가 아랍군과 후라사니들의 혼합이라는것을 알수 있다. 터번 아래에는 양질의 이란 철과 청동으로 만든 투구를 쓰고 있으며 그가 들고 있는 압바스조의 검은 깃발에는 쿠란의 구절이 쓰여있다.

3. 칼리프 무타와킬(847~861) : 칼리프는 터번 천 아래 걷어올린 가죽 목덮개가 달려있는 칼린수와 타윌라를 쓰고 있다. 어깨에는 붉은 비단으로 만들어진 미트라프를 두르고 있고 검은 가죽으로 만든 주바흐 아래 붉은 두라아를 입고 있다. 궁전 안에서 압바스조의 칼리프들은 카딥이라는 지팡이를 가지고 다녔으나 궁전 외부에서는 여기 보이는 간단한 형태의 외날 세이버를 가지고 다녔다. 다양한 형태의 검은 웃옷과 화려하게 장식된 허리띠, 그리고 이러한 지팡이나 칼은 압바스조의 표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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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초상과 손도장, 3만6천명의 손도장으로…日간수의 후손도?


안중근 의사 의거 100주년을 맞아 제작된 '안중근 손도장 재현그림'이 일반에 공개돼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가로 30미터, 세로 50미터의 이 걸개그림은 지난 6월초부터 4개월간 서울 및 전국 광역시, 마라도, 독도 등 전국곳곳을 다니며 국민들의 작은 손도장 3만2,000여 개를 모아 완성한 대형작품으로 이는 지난 10월 25일 서울 광화문 KT건물에 안중근 초상과 함께 걸려 일반인들에게 공개됐습니다.

이번 프로젝트는 국내는 물론 미국 뉴욕,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중국 하얼빈, 일본 대림사, 레바논 동명부대 등지에서 해외동포 및 파병군인, 고려인, 조선족 등 한민족이 함께한 '범국민 참여 프로젝트'로 진행돼 화제를 모은 바 있습니다.

특히 일본 미야기현 대림사에서 안 의사를 감시했던 간수의 후손도 참여했고 하얼빈역 행사 때는 안 의사의 조카 며느리인 안노길(96)씨가 함께했습니다.

이번 '대한국인 손도장 프로젝트'를 기획한 한국 홍보 전문가 서경덕 성신여대 객원교수는 "안의사의 애국정신 및 동양평화론을 재조명하고 나아가 젊은이들에게는 올바른 역사의식을 심어주고, 국가와 민족에 대한 소중함을 다시금 일깨워 주기 위해 이 프로젝트를 기획했다"고 설명했습니다.

사실 미국의 링컨, 인도의 간디, 중국의 마오 등 세계 여러나라에서 자국의 영웅을 해외에 널리 알리고 있습니다. 우리도 우리의 영웅을 전세계에 알리는 프로젝트가 계속되기를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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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의문 복원, 4대문 중 유일하게 복원되지 않았던 서대문 복원?

서울성곽 4대문 가운데 유일하게 복원되지 않았던 '돈의문', 일명 서대문이 2013년까지 복원됩니다.


서울시는 돈의문을 비롯한 서울성곽 전 구간에 대한 원형복원을 내용으로 하는 '서울성곽 중장기 종합정비 기본계획'을 발표했습니다.

서울시는 1915년 일제가 철거했던 돈의문을 원래 위치인 정동사거리 일대에 2013년까지 옛모습 그대로 복원하고, 서대문 사거리 고가차도도 철거하기로 했습니다.

또, 주변에 돈의문 역사 문화공원도 조성해 시민들과 관광객들이 다양한 문화 역사체험을 즐길 수 있도록 할 계획입니다.

서울시는 돈의문 복원에 맞춰 서울성곽 인왕산 구간과 남산 구간 등 7개 구간 2천 175m를 복원해 서울성곽과 북한산성 그리고 탕춘대성을 함께 묶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일괄등재를 추진하기로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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