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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Talk to History (62)
거칠부, 그는 누구인가?
 드라마 선덕여왕의 인기에 힘입어 거칠부 장군이 포털 인기검색어에 올라있었습니다.
거칠부, 그는 누구일까요?

 거칠부는 신라 진흥왕 때의 장군이며 정치가. 고구려 공격에 큰 공을 세웠으며, 〈국사 國史〉를 편찬한 인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이는 황종(荒宗)·거칠부지(居七夫智/居柒夫智)라고도 합니다. 거칠부는 내물마립간의 5대손이며, 아버지는 이찬(伊飡) 물력(勿力)입니다. 거칠부는 어려서부터 큰 뜻을 품고 승려가 되어 전국을 돌아다니며 견문을 넓혔습니다. 이때 고구려에 몰래 들어가 혜량(惠亮)의 강론과 설법을 듣고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이후 545년(진흥왕 6) 왕명을 받아 〈국사 國史〉를 편찬했구요. 551년 대각간 구진, 각간 비태, 잡찬 탐지·비서, 파진찬 노부·서력부, 대아찬 비차부, 아찬 미진부 등 8명의 장군과 더불어 고구려를 공격하여 죽령 이북 고현(高峴) 이남의 10군을 점령했습니다. 576년 진지왕이 즉위하자 상대등에 임명되었습니다. 진흥왕순수비에도 그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역사를 재미있게 각색한 사극들이 인기를 끌면서 역사를 잘못 알리는 등의 부정적인 효과도 있지만, 우리 역사에 관심을 갖게되는 긍정적인 효과가 더 큰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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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도협약 100년…간도 되찾기 운동, 문제는 북한?
 
 오는 9월 4일은 지난 1909년 청-일 간도(間島)협약이 맺어진 지 100년이 되는 날입니다. 국내에서는 이를 앞두고 민간 차원에서 국제사회에 탄원서를 제출하는 등 간도를 되찾자는 움직임이 더욱 거세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간도를 중국이 차지하고 있는 것은 다른 조약 때문이라고 합니다. 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한 일본은  1951년 9월에 1941년 이전에 맺은 모든 조약을 무효로 하는 샌프란시스코 조약을 체결하였습니다. 고로 이미 간도협약은 무효가 된 것이죠.

 그럼 왜 간도가 중국의 영토로 되어있을까요? 그 이유는 1962년 북한과 중국이 맺은 조중변계조약에 있습니다. 조중변계조약에는 간도는 물론 백두산 천지를 중국이 55%, 북한이 45%를 갖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다고 합니다.

 즉 간도를 되찾기 위해서는 북한과 통일을 한 후에 북한이 괴뢰정권이었음을 증명하여 북한이 중국 등과 맺은 모든 조약을 무효화시켜야 한다는 것이죠. 

 간도협약이 맺어진지 100년째가 다가오면서 정계와 학계, 그리고 국민들까지 간도에 관심을 가져주시는 것은 매우 감사한 일이나 보다 더 정확히 알았으면 합니다.

(이 글에 일부 포함 된 정보의 출처는 티워(제휴 언론사들 포함)로서 저작권은 픽플커뮤니케이션즈에 있고, 픽플커뮤니케이션즈의 일원인 필자는 저작권법에 저촉되지 않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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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 또다른 협약이 있었군요.. 흠.. 생각처럼 간단한 문제는 아니네요. 북한이 끼어 있다면..
    어서 간도를 찾아오는 그날이 오면 좋겠습니다.
  • 휴...우리나라가 분단이 되었을 때부터 정말 많이 꼬인 것은 사실입니다.
    만약에 광복 이후에 단일 국가로 성장을 했다면 아마도 일본과 비슷한 수준을 유지하거나 그 이상이 되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이 드네요.
  • 우와~
    되찾을 수만 있다면 대한민국 만세입니다.
  • WkdRofmf wnrdudi
    짱깨를 죽여야
  • 간도 협악 100년을 바라보며

    간도를 회복하자는 국민 서명운동의 기사를 보고



    본론을 약간 떠나 소설 안수길 저 "북간도"를 이 기회에 다시 한번 상기하여 대중적 읽기를 권하고 싶다.

    체험으로 역사 속에서 간도를 일구고 사잇섬을 오가며 그 시대 우리 조상들의 한 많은 삷을 피부로 맛보면 우리가 지금 말로 또는 글로

    이 이야기르 전개하는데 훨신 많은 도음이 되리라 생각한다.

    이 소설은 오늘날 우리가 접한지 오래된 잊은 문학세계를 다기 역사 속에서 조명 할 뿐만 아니라 ,괘를 달리하면 좋은 영화화 할 수있는 멋진 소재이다



    tv시대에 우리의 불후의 명작 "안수길 저 북간도"를 저 서재 한 곳에서 꺼내 국민적 사랑을 받는 필독서 로 일독을 이지음에 꼭 맞는 것으로 추천합니다.




    역사는 지금도 똑같은 연장선상에 있다.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 국사교과서 왜곡, 중국의 동북공정, 남한산성, 왜란, 호란, 역사의 모든 페이지가 같은 맥락이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우주베키스탄, 디아스포라, 네팔, 미 쏘 일,

    열강속에 약소국의 일들은 우리만의 비극이 아니다.

    이스라엘이 수백년전의 가나안을 다시 찾은 것은

    국제법상 시효가 아니고

    그들 민족구성원 하나하나가 대대로 내려오는 역사의 공감의식이다.

    이 공감의식이 사라질 때 고구려도 발해도 간도도 모두 사라진다.

    우리가 이 기회에 우리 가까이 손쉽게 국민적 정서로 함께 할 수 있는

    잊어버린 소설 읽기 당시 일간지 연재 소설 안수길 저 북간도를 때맞추어 전국민적으로 읽을거리로 간곡히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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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오는 광복절, 8·15광복에 대해 알아보자!

 8·15 광복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의 일본의 패전이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지만 일본의 강제합병(1910.8.22)이후 해방 전까지 계속된 우리민족의 독립투쟁이 큰 역할을 하였다. 1910년 이전에는 애국계몽운동·독립협회운동·반침략호국운동이, 이후에는 대한제국의 부활을 위한 복벽운동이 전개되었으며, 1919년 3·1운동이후에는 민족주의·사회주의·공산주의 사상을 바탕으로 독립투쟁이 국내·외에서 활발히 전개되었다.

 1919년 3·1운동을 시작으로 전개된 우리민족의 독립투쟁은 현대적 국민국가수립을 위한 준비단계였다. 해외에서는 3·1운동 직전 2월에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대한국민의회가, 3·1운동 직후 상하이(上海)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1919.4.13)되었다. 국내에서는 임시정부선포문을 발표(1919.4.23)하는 등 곳곳에 정부가 설립되었다. 1920년대는 민족유일당운동이 전개됐으나 성공하진 못하였다. 한편 1910년경 만주지방에서는 독립군의 무장항쟁이 활기를 띠었다. 간도 삼원보(三源堡)의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는 독립군 3,500명을 수료시키고, 김좌진(金佐鎭)은 간도에서 1,600여명의 독립군을 양성하였으며, 연길현(延吉縣)에서는 홍범도(洪範圖)의 대한독립군이 활동하였다. 1920년 10월 청산리전투 이후에는 독립군부대가 통합하여 대한독립군단을 설립하였다.

 국내의 광복운동은 사회운동의 형태를 취하였으며, 민족주의노선과 사회주의혁명노선으로 양분되었다. 1927년 2월에 재통합을 위해 신간회가 조직되었으나 1931년에 해체되었다. 해외에서는 정치단체가 1935년 7월에 민족혁명당으로 통합되었으나, 1938년에 좌익계 독립운동단체가 조선민족전선연맹을 결성함으로써 민족진영과 좌익사회주의진영으로 양립되었다. 그러나 1939년에 김구(金九)와 김원봉(金元鳳)이 민족적 통일기구로 전국연합전선 협회를 성립시켰으며, 1940년에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으로 발전하였다. 1940년 9월에 충칭(重慶)에서는 광복군이 창설되어 대일 무력항전을 전개하였다.


 광복 등 우리 역에 대해 더 알고 싶으신 분은 국가기록원(http://archives.go.kr/)을 방문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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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러시아 공사관 답사와 아관파천

아관파천

 '아관파천(俄館播遷)'. 한국인이라면 모를 리가 없을 이 네 음절의 짧은 단어. 일제에 의해 대한제국 황실과 민중 일반이 느끼는 압력이 최고조에 이르던 시기, 대한제국의 지도자 고종은 1896년 러시아 공사관으로 황급히 몸을 피하게 되는데 바로 그 사건이 아관파천이요, 바로 지금 눈 앞에 서 있는 건물이 바로 러시아 공사관의 일부인 것이다.

 비록 첨탑 부분을 남기고 대부분의 건물이 사라지긴 했지만 이 건물은 운현궁이나 경운궁, 지금은 사라진 조선총독부 건물 등과 함께 우리 근대사와 직접적인 연관을 맺고 있는 건물인 것이다.

 을미사변 이후 일본세력의 배경으로 조직된 제3차 김홍집(金弘集)내각은 일세일원연호(一世一元年號) ·태양력 사용, 군제개혁, 단발령의 실시 등 급진적인 개혁을 단행하였으나 명성황후의 살해와 단발령의 실시는 친일내각과 그 배후세력인 일본에 대한 국민의 감정을 극단적으로 자극하여 전국 각지에서 의병항쟁이 일어났다. 이범진(李範晉) ·이완용(李完用) 등의 친러파 세력은 친위대(親衛隊)가 의병을 진압하기 위해 지방으로 분산될 기회를 이용하여, 자신들의 세력만회와 신변에 불안을 느끼고 있던 고종의 희망에 따라 러시아 공사 베베르와 협의, 파천계획을 진행하였다.

 이들은 미리 인천에 와 있던 러시아 수병(水兵) 150명과 포(砲) 1문을 서울로 이동하고 2월 11일 새벽 국왕과 왕세자를 극비밀리에 정동(貞洞)에 있던 러시아 공관으로 옮겼다. 러시아 공사관에 도착한 고종은 즉시 김홍집 ·유길준(兪吉濬) ·정병하(鄭秉夏) ·조희연(趙羲淵) ·장박(張博) 등의 5대신을 역적으로 규정하여 포살(捕殺) 명령을 내려 김홍집 ·정병하 ·어윤중(魚允中)은 군중에게 타살되고 유길준 ·조희연 등은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이로써 친일내각은 몰락하고 박정양(朴定陽:首相 ·內相) ·이완용(外相 ·學相 ·農相) ·이윤용(李允用:軍相) ·윤용선(尹容善:度支相) ·이범진(法相 ·警務使) 등의 친러파 정부가 구성되었는데, 중심인물은 이범진이었다. 신정부는 의병항쟁을 불문에 부치고, 죄수들을 석방하는 등 민심수습에 힘쓰고, 일본세력으로 개혁하였던 제도를 구제(舊制)로 환원하였다. 일시에 지지기반을 상실한 일본측은 독립국가의 체면을 내세워 국왕의 조속한 환궁을 요청하였으나 고종은 ‘불안 ·공포의 궁전보다는 노국공관의 일실(一室)이 안정하니 당분간 환궁할 수 없다’고 거절하였다. 이를 계기로 조선왕조의 보호국을 자처하게 된 러시아는 조선정부에 압력을 가하여 압록강 연안과 울릉도의 삼림채벌권을 비롯하여 경원(慶源) ·종성(鐘城)의 채광권, 경원전신선(京元電信線)을 시베리아 전선에 연결하는 권리, 인천 월미도 저탄소(沔炭所) 설치권 등 경제적 이권을 차지했다.

 이에 구미열강(歐美列强)도 동등한 권리를 요구하여 경인(京仁) 및 경의선(京義線) 철도부설권 등 중요이권이 값싼 조건으로 외국에 넘어갔다. 아관파천 1년 간은 내정에 있어서도 러시아의 강한 영향력 밑에 놓이게 되어 정부 각부에 러시아인 고문과 사관(士官)이 초빙되고, 러시아 무기가 구입되어 중앙 군제도 러시아식으로 개편되었으며 재정도 러시아인 재정고문에 의해 농단되었다. 1897년 2월 25일, 고종은 러시아의 영향에서 벗어나라는 내외의 압력에 따라 러시아 공관을 떠나 경운궁(慶運宮:덕수궁)으로 환궁하고 국호를 대한제국, 연호를 광무(光武)로 고치고 왕을 황제라 칭하여 중외에 독립제국임을 선포하였다.

구러시아 공사관의 유래



 구 러시아공사관의 정확한 명칭은 러시아공사관 탑이다. 러시아공사관 건물의 일부인 탑에 해당한다. 러시아공사관 건물은 한러수호조약[韓露修好條約]이 체결된 1885년에 착공되어 1890년 준공되었다. 이 건물은 경복궁과 경운궁(덕수궁) 등 서울 4대문 안을 내려다 볼 수 있는 정동(貞洞)의 고지대에 입지했으며, 그 건물 규모나 대지 규모에서 미국ㆍ영국ㆍ프랑스ㆍ독일공사관보다 컸다.

 19세기 말 고종은 일본 세력을 견제하기 위하여 서양 세력을 이용하려 하였는데, 이 서양 국가 중에 러시아를 특히 중시했다. 러시아공사관은 경운궁과 미국ㆍ 영국 등 서양 국가의 공관 등이 집중적으로 위치한 정동을 내려다 볼 수 있는 언덕 위에 자리잡고 있었다. 이 자리는 원래 경운궁의 영역이었으며, 탑의 동북쪽 지하실이 경운궁으로 연결되었다고도 한다.

 1895년 고종 비인 명성황후가 경복궁에서 일본 세력에 의하여 시해되자, 고종은 1896년 2월 세자와 함께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하였다가[俄館播遷], 1897년 경운궁으로 환궁하였다. 아관파천으로 친일 김홍집(金弘集) 내각이 무너지고 친러 박정양(朴定陽) 내각이 조직되었다. 이렇게 러시아공사관의 입지와 건축은 조선 말의 정치적인 상황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

 이 건물의 설계자는 러시아인 사바찐(Afanasij Ivanobich Seredin Sabatin)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1860년경 러시아에서 출생했다. 1883년 여름 중국 상해에 있던 사바찐은 고종으로부터 유럽식 정주지(定住地)의 설계와 관청 건물의 건축을 맡아달라고 초빙받는다. 그는 그해 9월 조선에 도착했고, 1884년 초에 왕궁 축조 설계, 저렴한 벽돌공장, 불연성(不燃性)의 이엉지붕 설비안, 서울의 전차선로 설비안 등을 작성했다. 그의 건축활동은 경운궁ㆍ정동 일대ㆍ서대문ㆍ경복궁 그리고 인천 등지에서 이루어졌는데, 그의 첫 설계 작품은 러시아공사관 건물과 그 건물의 러시아아치문[俄門]이다.

 그는 또한 명성황후 민씨 시해사건의 목격자이기도 했다. 그는 왕실직속 시위대(侍衛隊) 교관이던 미 육군 퇴역소장 다이(W. M. Dye)와 함께 경복궁 건청궁(乾淸宮) 옥호루(玉壺樓) 인근의 서양관(西洋館)에 기거했는데, 이 건물은 고종의 거실에서 불과 60~70m 떨어진 곳이었다. 시해의 주동자들인 일본군 장교들은 황후 처소를 사바찐에게 물었는데 그가 가르쳐주지 않아 목숨이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렀었다고 한다. 러시아공사관 건물은 사진에 의해서 그 규모와 건축을 알 수 있다. 사진 자료에 의하면 러시아공사관 건물은 단층 ㄱ자형이었다. 정면과 측면은 아치 아케이드(arcade)로 둘러쌓았고, 정면에는 페디먼트(pediment)를 두었다. 이 공사관의 핵심은 탑부이다. 고지대에 3층탑을 설치하여 경복궁과 인접한 경운궁 그리고 주변 서울 시내를 내려다 볼 수 있었다.

 이 탑은 석재와 회색 벽돌로 되어 있었는데, 1973년 탑 외부 단장 때 흰 회반죽 칠로 마감하였다. 1층은 반원형 아치의 아래로 긴 장방형 개구부가 있으며, 2층은 단순 벽으로, 3층의 각 입면은 쌍 반원형 아치창과 페디먼트로 구성되었다. 이 3층은 전망대 역할을 했다.

 1896년 촬영한 사진을 보면, 러시아공사관 입구에는 개선문 형식의 아치문이 세워져 있었는데 이 문은 벽돌조로 전후 좌우 4면이 아치로 개방되었다.

 서울특별시는 1981년 문화재관리국과 공동으로 공사관 유적을 발굴하였는데, 공사관 지하에는 밀실과 비밀통로가 있었다. 지하 밀실은 7m×4m의 장방형 평면으로 돌과 벽돌로 쌓여져 있었다. 이 지하 밀실과 공사관, 그리고 탑은 비밀통로로 서로 연결되었는데 그 통로 폭은 약 45cm로 매우 좁고, 길이는 20.3m였다. 통로의 중간 지점에 폭 50cm, 길이 5m를 확장시켜 놓았는데, 이는 왕복 통행 때 대기 공간 구실을 한 것으로 보인다. 이 통로의 벽은 벽돌로, 바닥은 재래식 석회다짐을 했다.

 고종은 아관파천 때 이 공사관의 제일 좋은 방에서 머물렀다고 한다. 커튼ㆍ벽지ㆍ바닥재ㆍ실내등은 모두 화려한 것이었고, 침대ㆍ소파ㆍ의자 등도 제정(帝政) 러시아로부터 수입된 가구들이었다고 한다. 이 공사관 내부의 장식은 제정러시아의 화려한 인테리어 스타일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건물은 광복 직후 소련영사관으로 사용되었다. 한국전쟁 때 대부분이 소실되고 탑 부분과 일부 지하층만 남아있었다. 1973년 약간 손질하여 현재와 같이 되었다. 이 건물은 건축사적 의미도 중요하지만, 그 역사적인 장소성(場所性)이 더 중요하다. 이 탑은 이를 상징하고 있다. 1981년 10월 건물을 재보수하고 주변을 조경하여 시민공원으로 사용되고 있다. 현재 대지 면적은 약 2,500평으로 반 이상 줄었다. 이 건물은 1973년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3호로 지정되었으며, 1977년 11월 22일 사적 제253호로 승격되었다.


느낀 점

 당시 대한제국은 말 그대로 국가로서의 체면을 상실한 채 그저 일본이나 러시아, 영국 등 열강들에게 휘둘리던 동방의 한 작은 나라에 불과했다.

 러일전쟁에서 '만약' 러시아가 승리하고 일본이 패했다면 과연 고종은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을까? 러시아 공사관으로 가느니 차라리 해외 망명을 해 독립운동을 (탄압하거나 방관하지 않고) 지원했다면 이후 역사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물론 역사를 바라봄에 있어서의 '가정(假定)'이란 그저 허무맹랑한 '희망'일 수밖에 없으며 무용지물에 그친다는 점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다만 당시 자국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조선땅에서 동분서주하던 열강들에게 있어, 동방의 한 작은 나라의 왕 고종은 그저 종속변수일 수밖에 없었을 뿐이며, 고종 자신이 의탁처로 택한 러시아 역시 크게 다르지 않은 입장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생각할 때 어쩌면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몸을 피한 후 약 1년 뒤인 1897년 2월 20일 경운궁으로 환궁한 것은, 한반도 역사에 있어 별다른 의미가 없는 일이란 생각이 든다. 그저 나라 잃은 자의 슬픔이요 힘없는 자의 소리 없는 아우성일 뿐, 언젠가는 양상은 달리 해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을 테니 말이다.

 또한 고종 스스로도 나라의 독립을 위해 적극적으로 헌신했다기보다는 자신을 비롯한 왕가의 안녕을 위해 애쓴 흔적이 더 역력하니 일반 민중들에게 있어서는 별 의미가 없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물론 이를 두고 너무 무책임한 소리일 뿐만 아니라 당시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데서 나오는 오해라고 반박할 수도 있겠다. 물론이다. 이 길손이 당시를 살았던 사람이 아니니 말이다.

 아마도 가슴 한구석을 메어오는 답답함은 여기서 나오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무리 고종을 미워하고 싶어도 이런 비극의 원인을 고종 스스로가 초래했다고 단정할 수 없으니 말이다. 차라리 고종 한 사람에게 모든 책임을 뒤집어씌울 수 있으면 차라리 마음이라도 시원할 텐데….

 그래, 그냥 마음 편하게 지나간 '과거'는 잊는다고 치자. 문제는 어디까지나 '현재'이니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도 쉽게 해결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관파천이라는 한맺힌 설움을 경험한 지 100년도 더 지난 현재 2009년의 한국은 외부로부터 자유로운지 쉽사리 판단을 내리기 힘들어 보인다. 주변 4강을 만족시켜야 하는 남북통일을 위한 잰걸음들이, 미국 시장(市場)의 눈치를 보아야 하는 한국 경제가 그저 답답하기만한 여름밤이다.


더 많은 우리 역사의 기록들은 대한민국 국가기록원(http://www.archives.go.kr/)에서 열람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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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답사기 - 신라의 천년고도를 만나다.

 


 우리가 처음 간 곳은 국립 경주 박물관. 도착하니 최경숙 교수님과 조교님이 우릴 기다리고 계셨다. 이 곳은 어릴 때부터 여러번 와본 곳이지만 그 날은 죽은 박물관이 아닌, 살아있는 국립 경주 박물관과 대화를 해 볼 참이였다. 그러나 내 노력이 부족했는지, 아무리 말을 걸어도 박물관을 잘 대답을 해주지 않았다. 내가 가장 먼저 찾은 것은 성덕대왕신종. 일명 에밀레종이다. 아이를 녹여 만들었다는 이야기는 카이스트의 성분 분석 결과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지만 나는 예전에 들은 에밀레종의 소리를 잊을 수 없다. 직접 타종된 것은 아니고 녹음된 것이었지만 충분히 아름다웠었다. 시간관계상 나는 에밀레종 앞에 오래 있을 수 없었다. 에밀레종 이외에 나의 눈길을 끈 것은 두개의 금관이었다. 고등학교 때 읽은 ‘역사스페셜’이라는 책에서 본대로 금관의 모양은 사슴 뿔이 두 개 그리고 나무가 세 그루였다. 두개의 사슴뿔은 토테미즘의 흔적인데, 나무의 의미는 잘 기억이 나질 않았다. 또한 신라의 금관은 왕이 평소에 착용하던 것이 아니라 장례용이라고 한다. 역시 시간관계상 금관을 지나쳐 다른 것들을 차례로 보았다. 유홍준 교수의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마음에 와 닿았다. 내가 조금이라도 아는 유물에는 관심이 생겼지만 내가 전혀 모르는 유물은 그냥 보고 지나치게 되었다. 부산에 돌아가면 공부를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박물관을 나와 우리는 차도를 따라 걸었다. 조금 걷다 보니 넓은 터가 나왔다. 이곳이 반월성터. 신라 궁전의 일부였다는 이 곳이 지금은 숲이 우거지고 풀이 나 있어 세월의 무상함을 떠올리게 했다. 야은 길재의 ‘오백년 도읍지를’이라는 시조가 떠오르는 순간 이였다. 우리는 이 곳에서 도시락으로 점심을 해결했다. 
 


 점심을 먹고 월성 안에 있는 석빙고로 달려갔다. 한 여름에도 거의 완벽하게 얼음을 저장했다는 석빙고는 안타깝게도 입구에 철문이 설치되어 잠겨있었다. 사전조사에 따르면 선조들은 매년 2월말 강가에서 얼음을 잘라서 저장한 뒤 6월부터 10월까지 수시로 그 얼음을 꺼내 더위를 물리쳤다고 한다. 현존하는 6개의 석빙고의 하나인 이곳도 두 단계의 과정을 통해 얼음을 저장했을 것이다. 1단계는 얼음 저장에 앞서 겨울 내내 내부를 냉각시키는 것이고, 2단계는 얼음을 넣은 뒤 7~8개월 동안 얼음을 녹지 않게 저장하는 것이다. 우선 1단계의 과정에 숨어있는 비밀은 바로 출입문 옆에 있는 날개벽이다. 겨울에 찬 바람은 이 곳에 부딪쳐 소용돌이로 변하고 이 소용돌이는 빠르고 힘차게 내부 깊은 곳 까지 밀고 들어간다고 한다. 그래서 겨울철 보통의 지하실 온도가 섭씨 15도인 것에 비하여 석빙고 내부 기온은 영하 0.5도에서 영상 2도라고 한다. 그 다음 단계는 얼음을 어떻게 보존하는가인데 실재로 석빙고 안의 얼음은 녹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거의 미미할 정도로 녹았을 뿐이다. 이렇게 찬 기온을 유지한 데는 3가지 열쇠가 있는데, 첫 번째는 절묘한 천장 구조이다. 화강암의 천장은 1-2 미터의 간격을 두고 4.5개의 아치형 모양으로 만들어져 그 사이에는 움푹 들어간 빈 공간이 있다. 이곳이 바로 내부의 더운 공기를 빼내는 일종의 에어포켓인 것이다. 두 번째는 바로 환기구이다. 위쪽에 설치된 환기구는 에어포켓에 갇힌 더운 공기를 밖으로 빼낸다. 이것은 바로 더운 공기는 위로 뜬다는 사실을 이용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석빙고 내부의 온도는 한여름에도 0도 안팎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다 3번째는 얼음에 치명적인 물과 습기를 빠르게 밖으로 빼내는 배수로이다. 또한 빗물을 막기 위하여 석빙고 외부에 석회와 진흙으로 방수층을 만들었다. 그리고 얼음과 벽 및 천장 틈 사이에는 밀집, 왕겨, 톱밥 등을 단열재로 채워 넣어 외부열기를 차단하였다. 거기에다 외부의 잔디는 햇빛을 흐트러뜨려 열 전달을 방해하는 효과가 있으니 석빙고의 얼음은 한여름에도 거의 녹지 않고 견디었던 것이다. 인터넷에서 검색한 것들을 눈으로 확인해보고 싶었는데 아쉬움이 컸다. 석빙고 입구를 막고 있는 철문이 원망스러웠다. 어쨌든 선조들의 지혜에 경외감이 들었다.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또 다시 바쁘게 발걸음을 재촉했다. 얼마 쯤 걸었을까. 우리는 곧 고풍스러운 나무들을 볼 수 있었다. 김알지의 탄생설화와 관련된 계림이었다. 한번도 가본적은 없었지만 김알지의 설화는 익히 알고 있었다. 최경숙 교수님이 설명하실 때 박혁거세의 설화가 얽힌 곳이라고 해서 의아했었는데 집에 와서 찾아보니 내가 알고 있었던 것이 맞았다. 아마 교수님께서 잘못 말씀하신 듯 하다. 이미 녹초가 되어있던 나는 계림의 멋들어진 나무들과 사진을 몇 장 찍고 나서 벤치에 쓰러지듯 앉았다. 그러나 휴식도 잠시 우리는 또 다시 걸어야 했다. 좌우로 커다란 봉분들을 지나 도착한 것은 내물왕릉. 중․고등학교 때 많이 듣던 왕중의 하나 인데 별로 기억이 나질 않았다. 그냥 내물왕 때부터 중국문화를 수용하기 시작했다는 정도밖에는. 거대한 내물왕릉을 지나 천마총에 도착했다. 이 곳은 6학년 수학여행 때 한번 와 본적이 있어서 이번이 두 번째였다. 몇 점 안되는 유물들을 보고 밖으로 나왔다. 천마총 입구에는 에어커튼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피곤과 더위에 힘겨워 하던 나에겐 에어커튼에서 나오는 바람이 감로수처럼 느껴졌다.

 


 다음 목적지는 안압지. 역시 초등학교 수학여행 때 와 본적은 있었지만 다른 곳처럼 느껴졌다. 지금의 기러기와 오리가 노니는 연못이라는 뜻의 안압지라는 이름은 신라가 망하고 폐허로 변한 한참 뒤에 조선시대 묵객들이 갈대와 부평초가 무성하고 기러기와 오리만 날아다닌다 해서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삼국사기를 보면 674년에 안압지가 조성된 것으로 되어있는데 여기에 한가지 의문이 드는 점이 있다. 674년이면 나․당 전쟁이 끝나지 않았을 때로 알고 있는데 그럼 전쟁 중에 대규모 공사를 벌인 이유는 무엇일까? 네이버 지식인에 물어봤지만 아직 대답이 올라오질 않았다. 권덕영 교수님께서 내 글을 읽고 의문을 시원하게 대답해주시리라 굳게 믿는다.

 이번 경주 답사의 마지막 코스는 황룡사지였다. 한번도 가본 적은 없었지만 중학교 때부터 교과서나 여러 참고서에서 많이 봤었던 곳이다. 사진에서 보던대로 13세기에 몽고군의 침입으로 모든 건물이 불타버려 넓은 벌판에 주춧돌들만 보였다. 비록 실물은 볼 수 없었지만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지식은 나로 하여금 황룡사를 느낄 수 있게 만들었다. 백제의 미륵사와 비견될 만한 거대한 규모와 신라 삼보중 하나인 거대한 9층 목탑 등 신라 제일의 국찰의 기상이 느껴졌다. 하루 종일 정말 너무 피곤했지만 이렇게 새로운 것을 보고 느끼는 경험을 나는 정말 소중하게 생각한다. 내 젊음을 무기 삼아 앞으로도 더 많은 곳에서 더 많은 것들을 보고 느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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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경우
    왜 전쟁중인데도 그 곳에서 공사가 벌어졌냐 하는 의문은 그 때 그 전쟁이 그 곳과는 무관하였다고 보면 풀립니다. 신라는 경상남북도에 국한된 나라도 아니였고, 백제도 전라남북도와 충청남북도 정도 크기의 나라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현재의 한반도 거의 전부와 중국대륙의 동해안지방까지 이르는 영역이 백제의 영토였고 신라는 더 윗쪽에 있는 큰 나라였을 것입니다. 고구려는 만주와 사할린 그리고 몽고지방까지 이르는 대 국가였어야 모든 의문이 풀립니다. 아끼히도 일본천황이 내한했을 때 자기의 조상이 백제의 왕손이라 하였습니다. 신라가 경상도지방에 있었다면 그보다 먼 백제의 왕이 일본에 가서 왕이 될 연관성이 멀어집니다. 경주는 당시의 전쟁과는 아주 먼 후방이었고 낙동강전선 이남의 백제의 영역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이 후 지금의 북한땅에서 벌어졌던 전투에서 백제가 항복하면서 전쟁은 끝났고 경주와 부산등지에 피신하였던 백제 왕실은 당시 백제의 식민지였던 일본으로 건너가 버린 것이 분명합니다. 우리가 일본역사선생으로부터 교육받은 역사선생님들로부터 배운 우리의 역사를 이제 이상한 점은 파 헤쳐 진실을 밝힐 때입니다. 임진왜란과 일제시대에 우리의 역사는 말살되고 조작되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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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피해가 컸던 수해는?
을축년 대홍수 


 우리나라를 휩쓸고 간 1925년 을축년 대홍수는 7월 6일부터 20일까지 15일간의 장마로 전국에 걸쳐 1년간의 내릴 비의 80%정도인 700~970mm의 비가 내렸고, 장마 전선이 한 달 이상 한반도를 오르락내리락 하면서 서울, 지방을 비롯한 전국에 엄청난 피해를 주었다.


 1925년 을축년 대홍수는 대한민국에서 일어난 네 차례의 큰 홍수이다. 7월부터 9월 초에 걸친 호우 피해로 인하여, 당시 조선총독부 1년 예산의 58%에 해당하는 1억 300만원의 피해를 냈고,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1차 홍수는 7월 7일 대만 부근에서 발생한 태풍(열대저기압)이 11일과 12일에 중부지방을 통과하여 북쪽으로 빠져나갔는데, 이 때문에 황해도 이남지방에 300~500mm의 호우가 내려 한강, 금강, 만경강, 낙동강 등이 범람하였다.

 2차 홍수는 1차 홍수의 물이 충분히 빠져나가기도 전인 7월 14일에 다시 대만 부근에서 열대성 저기압(태풍)이 발생하여 중국을 거쳐 한국의 황해 북부 근해를 지나가면서, 그 오른쪽 반지름에 들어간 임진강과 한강 유역에 집중호우가 쏟아졌다. 16~18일까지 계속내린 비의 양은 한강과 임진강 분수령부근에서 650mm에 이르렀고, 이로 말미암아 임진강과 한강이 크게 범람을 일으켰다. 18일 한강의 수위는 뚝섬 13.98m, 인도교 11.66m, 구용산 12.74m로서 사상 최고기록을 남겼다.

 3차 홍수는 8월 들어 중국에서 발생한 저기압이 황해로 나와 한만 국경을 관서지방에 호우를 뿌려서 대동강, 청천강, 압록강이 범람하여 숱한 피해를 냈다.

 4차 홍수는 8월말 마리아나제도 부근에서 발생한 열대성 저기압이 9월 6일 제주도 남방에서 목포 ․ 대구를 거쳐 동해로 빠져나가면서, 남부지방에 많은 비가 내려 낙동강, 영산강, 섬진강이 범람하였다. 이와 같이 4차례에 걸친 열대성 저기압에 의한 홍수로 전국에서 사망자가 647명, 가옥유실 6,363호, 가옥붕괴 17,045호, 가옥침수가 46,813호에 이르렀다. 또한 유실한 논이 3,218ha, 밭이 6,755ha 등으로 그 당시의 피해액은 무려 1억여원이었다. 이 금액은 당시 조선총독부 1년 예산의 58%에 해당하는, 실로 엄청난 피해를 겪은 사상 최대의 대홍수였다.

자료제공: 국가기록원

수해에 대한 더 많은 기록이 국가기록원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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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기록원의 경부고속도로 페이지 후기!
국토의 대동맥’이라 불리는 경부고속도로의 건설기록과 현장을 자료로 한 눈에 볼 수 있는 장이 마련되었습니다.

 국가기록원은 경부고속도로에 관한 주요 소장기록물을 콘텐츠로 개발해 경부고속도로 전구간 개통일에 맞춰 7월 7일(화)부터 나라기록포털(contents.archives.go.kr)을 통해 제공한다고 밝는데요.
제가 직접 체험해봤습니다.



먼저 메인화면입니다. 한반도 지도에 경부고속도로가 표시되어 있어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다음은 메뉴구성입니다. 개요에서는 이 페이지의 개설 취지와 경부고속도로의 개통 목적에 대해 다루고 있었습니다. 가장 기본적인 것이지만 빼 놓을 수 없는 중요한 내용이죠!

 메인 페이지 중앙 부분에는 사진현장이라는 공간이 있었는데, 경부고속도로 계획부터 완공까지 사진들을 분류해놓아 네티즌들의 흥미 유발과 편의를 위해 노력한 모습이 보입니다. 


 그리고 그 바로 밑에는 경부고속도로 길 여행이라는 메뉴가 있었는데, 경부 고속도로 곳곳의 과거와 현재 사진을 쉽게 볼 수 있었습니다.

 좋은 취지로 개설한 페이지니만큼 많은 사람들이 찾았으면 좋겠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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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부고속도로 준공이 주는 의미

 서울-부산 고속도로 준공은 주는 의미는 참으로 크다. 서울-부산의 고속도로 건설은 우리국토를 새롭게 재구성하고 그 기능을 강화시키는 우리의 창조사업 이였으며 우리 한민족의 운명과 국운을 바꿔놓은 역사적인 사업이었다.

 1970년 경제발전 초기단계에 건설된 경부고속도로는 산업 도로로서의 기능과 대도시간을 연결하는 지역간 간선도로로서의 기능을 공유하게 되었다. 우리나라 전체 인구의 63%, 국민총생산액의 63% 및 공업생산액의 81%에 해당하는 우리나라 경제 중추지역을 통과하고 있다. 또한 지역간 연계를 도모하여 경제발전을 유도함과 동시에 집결된 경제력을 1일 생활권으로 연결시켜 승수효과를 유발하고 있다.

 고속도로가 미치는 효과는 물류비용 및 운송시간을 감축하여 생산원가를 저하시켜 생산성 향상 및 경쟁력 강화를 낳게 함은 물론 도시화 촉진, 국토이용 효율성 증진, 지역분화 가속, 생산효율 증진에 의한 물가안정 및 하락, 고속도로의 건설 및 이용 산업과 관련된 기술혁신, 지역 고유성의 붕괴, 개방화, 삶의 행태 및 가치관 변화 등 다양하다.

 경부고속도로는 국가 전체적으로 볼 때 주거·산업의 절반이상이 밀집된 노선으로 국가산업·경제의 중심축이 되고 있다. 경부선은 ① 경제개발계획을 지원하는 산업고속도로 ② 국토의 남북을 관통함으로써 지역간 교류를 가장 확대시킬 수 있는 국가 기간도로망으로서의 역할을 담당 ③ 농어촌 개발과 지역격차를 해소하고 국민에게 편익을 주는 생활·경제 고속도로이다.

 경부고속도로에 대한 더 많은 기록을 보고 싶으시면 국가기록원의 경부고속도로 토픽을 방문하세요!


위의 내용은 국가기록원에서 제공받은 것으로 본 블로그와 의견이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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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부고속도로의 개통효과는?

 서울-부산 고속도로 준공의 의미를 긍정적인 측면에서 평가하면 다음 몇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로, 우리나라 경제발전에 기틀을 다졌다. 서울-부산 고속도로가 있었기에 오늘날의 한국이 가능하였다. 서울-부산 고속도로는 공업발전을 가속화 시켰고 수출을 통한 한국 경제발전의 초석으로, 한국이 세계 경제 10위권으로 진입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둘째로, 우리 국토의 균형발전에 기여했다. 서울과 부산이 하나로 이어 지면서 내륙의 많은 도시와 지역이 상호 연계되어 국토통합을 가져왔고, 경제발전에 필요한 인력과 물자의 원활한 유통으로 인해 지방이 동반 발전됨으로써 지역격차가 해소되고 국토의 균형발전을 가져올 수 있었다.

 셋째로, 건설 산업의 발전을 가져왔다. 우리의 서울-부산 고속도로 건설은 인력, 장비, 예산, 총 연장, 공기(工期), 공법 등에서 한민족 역사 이래 그 유래를 찾을 수 없는 민족적 대사업이었다. 따라서 서울-부산 고속도로 건설은 우리 건설 산업의 기술발전을 향상시키고 국제적 경쟁력을 강화하여 중동건설수출에 크게 기여하였다. 오늘날 우리나라가 세계적인 건설 회사를 보유하게 된 것도 서울-부산 고속도로 건설에서 다져진 경험과 기술력의 향상에서 연유한다고 볼 수 있다.

 넷째로, 국토방위에 크게 기여하였다. 우리나라는 항시 전쟁의 위험을 안고 있다. 서울-부산 고속도로 건설은 잘 발달된 도로망 시스템으로 인해 유사시에 전투기의 이착륙과 첨단장비를 포함한 전투 병력을 신속하고도 능률적으로 동원함으로써 적의 침공으로부터 국토를 효과적으로 방어할 수 있게 됐다.

 마지막으로, 정신개혁에 기여했다. 우리의 경부고속도로가 준공된 1960년대 말만 해도 우리 국민의 의식은 일제의 식민통치와 6·25전쟁에 따른 가난과 폐허로 인한 패배의식과 상실감 그리고 좌절감이 팽배하였다. 이러한 시기에 서울-부산에 이르는 428㎞에 달하는 경부고속도로가 우리의 기술력과 우리 건설 회사들로 완공됐다는 것은 우리민족의 저력이 무궁함을 확인하고, 우리 국민들에게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의식을 심어주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경부고속도로에 대한 더 많은 기록은 국가기록원의 경부고속도로 토픽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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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부고속도로의 개발 목적은 무엇일까?


 경부고속도로는 우리나라 기간 고속도로로, 1968년 2월 1일 착공하여 1970년 7월 7일 완전 개통되기까지 2년 5개월이 걸렸습니다. 당초 고속도로 건설은 재정과 기술 및 인적 자원이 부족한 상태에서 시작되었으나, 정부는 “국토 대동맥” 건설을 향한 다양한 노력을 경주하였습니다.

 빠른 시간에 완공되었기에 곳곳에서 보완 작업도 있었지만, 경부고속도로가 국토개발의 효율적 활용과 경제적, 사회적 발전의 전환점이 되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서울과 부산을 잇는 이 고속도로는 전체 길이 428km로, 약 429억원의 예산, 900만여명의 인력이 동원된 대규모 공사였습니다. 이러한 “피와 땀”의 결과가 우리나라 성장의 디딤돌이 되었습니다.

 1960~1970년대, 고속도로 건설을 향한 의지와 열정은 기록물에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그 기록물들을 쉽게 볼 수 있는 경부고속도로 건설 나라기록 토픽이 오픈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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