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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사 (2)
경험을 토대로 작성한 답사의 모든 것

 


1. 답사와 답사의 종류

내력 있는 곳을 찾아가서 삶의 흔적을 더듬고 역사를 되새김으로써 그 지역의 자연․역사․문화를 종합적으로 이해하고 애국심을 고취하며, 나아가서 자신을 돌이켜보는 기회를 만드는 일이다.

문화유적지 답사, 역사유적지 답사, 향토유물 답사, 종교유적지 답사 등이 있다. 대표적인 문화유적 답사에는 고궁, 수원 화성, 중원 문화유적지, 박물관 및 전시관 탐방 등이 있으며, 역사유적 답사에는 서대문독립공원, 동학농민운동이나 임진왜란의 사적지, 우리나라의 근대사를 알 수 있는 강화도 탐방 등이 있다. 향토유물 답사에는 남도 문화와 역사, 진도 사람의 삶과 문화, 섬 문화와 섬 사람들, 도자기 굽는 마을 탐방, 방언이나 옛날 이야기 수집 등을 테마로 한 기행이 있고, 절두산성지, 양화진, 제암리 교회, 발암 시장, 여수애양원 등이 종교유적 답사지의 대표격으로 꼽힌다.(네이버 지식인 참고)

 

2. 우리나라의 현재 답사문화의 문제점

우리나라 사람들은 답사의 개념이 정확하지 않는 것 같다. 답사와 여행의 의미를 혼돈하는 사람이 대부분이라고 생각된다. 가장 처음 답사를 하는 것이 바로 초등학교 수학 여행일 것이다. 물론 요즘은 부모님과 함께 유명한 곳을 찾아가기는 하지만 정식으로 공부를 목적으로 하는 답사는 바로 초등학교 수학여행이라고 생각된다.

거의 대부분의 학교에서 경주를 수학여행지로 정하고 있다. 물론 경주가 우리나라 최고의 수학여행지 임은 틀림이 없다. 하지만 수학여행을 가기 전에 목적지에 대해 별도의 공부를 하는 학교는 거의 없다고 생각된다. 아이들은 주로‘경주는 옛날 신라의 수도였다.‘라는 얇은 지식을 가지고 목적지에 가게 되는 것이다. 수학여행은 2박 3일 동안의 짧은 여행이지만 초등학생들에게 주는 의미는 그 이상으로 아주 크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초등학교 수학여행 뿐 아니라 중학교 고등학교 수학여행도 마찬가지다. 시간이 지나 어른이 되면 중학교 고등학교 수학여행지는 모두 잊어버리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우리의 답사문화는 이렇게 어렸을 때부터 길러진다. 그냥 그 곳에 다녀왔다는 것이 가장 큰 의미인 것이다.

“나도 천마총 갔었는데……. 좋더라.” 우리는 이런 대화를 하면서 뿌듯함을 느낀다. 이런 대부분의 답사는 천마총이 경주에 있다는 것밖에 모르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다. 한번 가 보았다면 그곳에 대해서 모두 다는 몰라도 어느 정도의 지식을 가져야 하지만 현재 우리의 답사문화는 그러하지 못하다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우리 민족은 손에 들고 다니며 쓰는 것을 싫어한다. 초등학교 때 잠깐 선생님의 권유로 연필을 준비한다. 하지만 해외 여행을 가서도 그냥 보기만 하지 무엇을 적는 사람은 드물다. 사람 머리는 컴퓨터가 아니다. 한번보고 그 것을 모두 다 기억하기는 힘이 든다. 그리고 우리가 답사하는 곳이 보통 서너 군데가 넘을 것이다. 그 많은 곳을, 그 많은 곳의 유물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이제 이런 답사 문화는 우리가 지양해야 할 것이다. 보다 효율적이고 알찬 답사를 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하는 것인가를 알아보도록 하자.

 

3. 올바른 답사를 위한 제안.

 

1) 답사의 주제 정하기

논설문도 아니고 답사의 주제를 정한다는 것이 의아하다는 생각을 할지 모른다. 하지만 답사에도 주제가 필요하다. 그 이유는 우리는 오랜 시간 답사를 할 수가 없다. 그래서 자신이 원하는 답사를 위해서 주제를 정하는 것이 좋다.

‘천년 신라의 경주’, ‘아름다운 섬 제주’와 같이 주제를 너무 크게 잡는다면 주제를 정하는 의미를 상실 할 수도 있다. 주제는 일정과 맞게 작을수록 더 좋을 것이다. 예를 들면 ‘경주의 신라고분들’,‘제주도의 향토음식’과 같이 좀 더 구체적으로 잡는 다면 분명 답사에서 얻어 오는 것이 많을 것으로 생각된다.

 

2) 답사 전 자료조사

답사의 주제를 정하고 주제에 맞는 답사를 하기 위해 답사 전 자료조사는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답사 전 자료 조사를 사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첫째는 보다 많은 사실과 감동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답사 전 아무것도 모른 상태에서 유적이나 유물을 본다면 이해력이 매우 떨어질 것이다. 예를 들면 천마총을 모르는 상태에서 답사했다면 그냥 신라인들은 무덤을 크게 만들었다는 것밖에는 모를 것이다. 하지만 사전 자료조사를 하면 천마총이 천마도가 나와서 천마총이라는 것과 천마도는 신라의 흔하지 않는 회화작품이라서 더욱 귀중하다는 것, 그리고 무덤형태는 적석목곽분이고 천마총 안에서 금제 허리띠. 금관등 많은 금제 유물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간다면 감동은 열 배가 될 것이다.

또 하나의 이유는 주제에 맞는 장소를 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답사의 목적은 신라의 고분인데 그냥 자료조사 없이 여행한다면 천마총을 비롯해서 대릉원, 무열왕릉, 김유신 묘, 오릉 등 무수히 많은 고분들을 지나 칠 수도 있다. 이처럼 답사 전 자료조사는 답사를 하는 것 만큼 중요한 것이다.

 

3) 답사 예산 및 답사 일정

우리가 집을 나서면 돈이 들게 마련이다. 물론 답사를 할 때도 돈이 든다. 우리가 부자가 아니라면 알뜰하면서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는 답사가 되어야한다고 생각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확하고 치밀한 답사일정과 거기에 맞는 예산을 적절히 짜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사전 자료 조사는 답사의 유물과 유적지뿐만 아니라 예산과 관련한 식비. 숙박비, 교통비와 같은 것도 매우 중요하다. 일정표와 예산표를 짜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 일정․예산표

시각

장소

수입

지출

잔액

09:00

경주역

회비5만원 * 4명 =20만원

0

20만원

09:30

대릉원

 

입장료1500원*4명=6000원

19만4천원

11:00

 

자전거 5천원*4명=2만원

17만4천원

11:30

김유신장군묘

 

입장료500원*4명=2000원

음료수1000원*4명=4000원

16만8천원

12:30

점심식사

 

10000원 *4명=4만원(음료)

12만8천원

13:30

무열왕릉

 

입장료1000원*4명=4천원

12만 4천원

 

위의 예산․일정표는 예로 간단히 짜 보았다. 일정표와 예산은 아주 자세히 짜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리고 예산은 조금 넉넉히 하는 것이 좋다. 왜냐하면 답사 중 예상치 못한 경우가 생길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일정표 역시 약간 넉넉히 하는 것이 보다 좋은 답사가 될 것이다.

 4) 준비물 준비

꼼꼼히 준비물을 준비하는 것은 답사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메모지와 필기 도구, 카메라는 기본일 것이다. 그리고 지도는 준비해 가는 것이 좋지만 답사하는 곳에서 사는 것도 나쁘지 않다. 왜냐하면 그 지역의 알맞은 지도는 그 곳에서 구하는 것이 더 효율적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비상약을 준비하는 것은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계절에 맞는 의복과 여벌의 옷 등 여행을 할 때와 같이 꼼꼼히 준비 해야할 것이다.

 5) 답사 중 주의점

자신이 철저한 준비와 자료조사가 되었다면 이제 답사하는 것만이 남았다고 생각된다. 답사는 자신이 원하는 것과 그 보다 더 값진 것을 얻어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냥 보는 것 외에 사진을 찍어 그 모습을 담는 것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모든 유적에는 유적을 설명하는 팻말이 붙어 있다. 이 것을 그냥 지나치는 일이 없도록 해야할 것이다. 그리고 의문나는 점이 있으면 안내원이나 그곳을 관리하는 사람에게 문의하는 것 또한 좋은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많은 것을 보고 느끼는 것도 매우 중요하지만 우수한 문화유산을 훼손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사진촬영이 금지된 곳에서 사진을 촬영하는 행위나 쓰레기를 버리는 행위, 고분이나 잔디밭에 올라가는 행위는 우리가 답사를 하는 동안 하지 말아야 할 행동 중 하나이다. 박물관이나 여러 사람이 모여있는 공공장소에서 휴대폰 통화나 시끄럽게 떠드는 행위도 주의해야 할 점이다.

많은 것을 얻어오는 답사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우리가 꼭 지켜야하는 답사예절이라고 생각된다.

 6) 답사를 다녀와서

답사를 다녀와서 “아! 다녀왔는데 좋더라”로 끝이 나면 안될 것이다. 답사보고서나 기행문을 쓰면서 다시 한번 답사의 감동을 느끼는 것, 또한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될 올바른 답사를 위한 제안 중 하나 일 것이다. 자신이 전문성을 가지는 답사를 했다면 보고서를, 전문성보다 감동을 주는 답사를 했다면 기행문을 쓰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리고 사진 자료를 잘 정리하는 것 또한 중요한 일이다. 그리고 아쉬운 점을 기록하고 다음 2차 답사를 준비하거나 다른 답사를 할 때 유용하게 쓰면 더욱 알찬 답사가 될 것이다.

 4. 결론

지금 까지 나름대로 올바른 답사문화에 대한 제안을 해 보았다. 물론 힘들겠지만 이렇게 한다면 보다 좋은 답사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올바른 답사문화에 대한 제안’을 하면서 나름대로 하나의 정의를 하고 싶다. 답사란 세 가지가 중요하다. 답사 전 철저한 준비, 답사 중 올바른 답사 행위, 답사 후 답사를 정리하는 보고서나 기행문. 이 세 가지가 완벽하게 이루어진다면 가장 이상적인 답사가 될 것이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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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답사기 - 신라의 천년고도를 만나다.

 


 우리가 처음 간 곳은 국립 경주 박물관. 도착하니 최경숙 교수님과 조교님이 우릴 기다리고 계셨다. 이 곳은 어릴 때부터 여러번 와본 곳이지만 그 날은 죽은 박물관이 아닌, 살아있는 국립 경주 박물관과 대화를 해 볼 참이였다. 그러나 내 노력이 부족했는지, 아무리 말을 걸어도 박물관을 잘 대답을 해주지 않았다. 내가 가장 먼저 찾은 것은 성덕대왕신종. 일명 에밀레종이다. 아이를 녹여 만들었다는 이야기는 카이스트의 성분 분석 결과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지만 나는 예전에 들은 에밀레종의 소리를 잊을 수 없다. 직접 타종된 것은 아니고 녹음된 것이었지만 충분히 아름다웠었다. 시간관계상 나는 에밀레종 앞에 오래 있을 수 없었다. 에밀레종 이외에 나의 눈길을 끈 것은 두개의 금관이었다. 고등학교 때 읽은 ‘역사스페셜’이라는 책에서 본대로 금관의 모양은 사슴 뿔이 두 개 그리고 나무가 세 그루였다. 두개의 사슴뿔은 토테미즘의 흔적인데, 나무의 의미는 잘 기억이 나질 않았다. 또한 신라의 금관은 왕이 평소에 착용하던 것이 아니라 장례용이라고 한다. 역시 시간관계상 금관을 지나쳐 다른 것들을 차례로 보았다. 유홍준 교수의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마음에 와 닿았다. 내가 조금이라도 아는 유물에는 관심이 생겼지만 내가 전혀 모르는 유물은 그냥 보고 지나치게 되었다. 부산에 돌아가면 공부를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박물관을 나와 우리는 차도를 따라 걸었다. 조금 걷다 보니 넓은 터가 나왔다. 이곳이 반월성터. 신라 궁전의 일부였다는 이 곳이 지금은 숲이 우거지고 풀이 나 있어 세월의 무상함을 떠올리게 했다. 야은 길재의 ‘오백년 도읍지를’이라는 시조가 떠오르는 순간 이였다. 우리는 이 곳에서 도시락으로 점심을 해결했다. 
 


 점심을 먹고 월성 안에 있는 석빙고로 달려갔다. 한 여름에도 거의 완벽하게 얼음을 저장했다는 석빙고는 안타깝게도 입구에 철문이 설치되어 잠겨있었다. 사전조사에 따르면 선조들은 매년 2월말 강가에서 얼음을 잘라서 저장한 뒤 6월부터 10월까지 수시로 그 얼음을 꺼내 더위를 물리쳤다고 한다. 현존하는 6개의 석빙고의 하나인 이곳도 두 단계의 과정을 통해 얼음을 저장했을 것이다. 1단계는 얼음 저장에 앞서 겨울 내내 내부를 냉각시키는 것이고, 2단계는 얼음을 넣은 뒤 7~8개월 동안 얼음을 녹지 않게 저장하는 것이다. 우선 1단계의 과정에 숨어있는 비밀은 바로 출입문 옆에 있는 날개벽이다. 겨울에 찬 바람은 이 곳에 부딪쳐 소용돌이로 변하고 이 소용돌이는 빠르고 힘차게 내부 깊은 곳 까지 밀고 들어간다고 한다. 그래서 겨울철 보통의 지하실 온도가 섭씨 15도인 것에 비하여 석빙고 내부 기온은 영하 0.5도에서 영상 2도라고 한다. 그 다음 단계는 얼음을 어떻게 보존하는가인데 실재로 석빙고 안의 얼음은 녹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거의 미미할 정도로 녹았을 뿐이다. 이렇게 찬 기온을 유지한 데는 3가지 열쇠가 있는데, 첫 번째는 절묘한 천장 구조이다. 화강암의 천장은 1-2 미터의 간격을 두고 4.5개의 아치형 모양으로 만들어져 그 사이에는 움푹 들어간 빈 공간이 있다. 이곳이 바로 내부의 더운 공기를 빼내는 일종의 에어포켓인 것이다. 두 번째는 바로 환기구이다. 위쪽에 설치된 환기구는 에어포켓에 갇힌 더운 공기를 밖으로 빼낸다. 이것은 바로 더운 공기는 위로 뜬다는 사실을 이용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석빙고 내부의 온도는 한여름에도 0도 안팎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다 3번째는 얼음에 치명적인 물과 습기를 빠르게 밖으로 빼내는 배수로이다. 또한 빗물을 막기 위하여 석빙고 외부에 석회와 진흙으로 방수층을 만들었다. 그리고 얼음과 벽 및 천장 틈 사이에는 밀집, 왕겨, 톱밥 등을 단열재로 채워 넣어 외부열기를 차단하였다. 거기에다 외부의 잔디는 햇빛을 흐트러뜨려 열 전달을 방해하는 효과가 있으니 석빙고의 얼음은 한여름에도 거의 녹지 않고 견디었던 것이다. 인터넷에서 검색한 것들을 눈으로 확인해보고 싶었는데 아쉬움이 컸다. 석빙고 입구를 막고 있는 철문이 원망스러웠다. 어쨌든 선조들의 지혜에 경외감이 들었다.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또 다시 바쁘게 발걸음을 재촉했다. 얼마 쯤 걸었을까. 우리는 곧 고풍스러운 나무들을 볼 수 있었다. 김알지의 탄생설화와 관련된 계림이었다. 한번도 가본적은 없었지만 김알지의 설화는 익히 알고 있었다. 최경숙 교수님이 설명하실 때 박혁거세의 설화가 얽힌 곳이라고 해서 의아했었는데 집에 와서 찾아보니 내가 알고 있었던 것이 맞았다. 아마 교수님께서 잘못 말씀하신 듯 하다. 이미 녹초가 되어있던 나는 계림의 멋들어진 나무들과 사진을 몇 장 찍고 나서 벤치에 쓰러지듯 앉았다. 그러나 휴식도 잠시 우리는 또 다시 걸어야 했다. 좌우로 커다란 봉분들을 지나 도착한 것은 내물왕릉. 중․고등학교 때 많이 듣던 왕중의 하나 인데 별로 기억이 나질 않았다. 그냥 내물왕 때부터 중국문화를 수용하기 시작했다는 정도밖에는. 거대한 내물왕릉을 지나 천마총에 도착했다. 이 곳은 6학년 수학여행 때 한번 와 본적이 있어서 이번이 두 번째였다. 몇 점 안되는 유물들을 보고 밖으로 나왔다. 천마총 입구에는 에어커튼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피곤과 더위에 힘겨워 하던 나에겐 에어커튼에서 나오는 바람이 감로수처럼 느껴졌다.

 


 다음 목적지는 안압지. 역시 초등학교 수학여행 때 와 본적은 있었지만 다른 곳처럼 느껴졌다. 지금의 기러기와 오리가 노니는 연못이라는 뜻의 안압지라는 이름은 신라가 망하고 폐허로 변한 한참 뒤에 조선시대 묵객들이 갈대와 부평초가 무성하고 기러기와 오리만 날아다닌다 해서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삼국사기를 보면 674년에 안압지가 조성된 것으로 되어있는데 여기에 한가지 의문이 드는 점이 있다. 674년이면 나․당 전쟁이 끝나지 않았을 때로 알고 있는데 그럼 전쟁 중에 대규모 공사를 벌인 이유는 무엇일까? 네이버 지식인에 물어봤지만 아직 대답이 올라오질 않았다. 권덕영 교수님께서 내 글을 읽고 의문을 시원하게 대답해주시리라 굳게 믿는다.

 이번 경주 답사의 마지막 코스는 황룡사지였다. 한번도 가본 적은 없었지만 중학교 때부터 교과서나 여러 참고서에서 많이 봤었던 곳이다. 사진에서 보던대로 13세기에 몽고군의 침입으로 모든 건물이 불타버려 넓은 벌판에 주춧돌들만 보였다. 비록 실물은 볼 수 없었지만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지식은 나로 하여금 황룡사를 느낄 수 있게 만들었다. 백제의 미륵사와 비견될 만한 거대한 규모와 신라 삼보중 하나인 거대한 9층 목탑 등 신라 제일의 국찰의 기상이 느껴졌다. 하루 종일 정말 너무 피곤했지만 이렇게 새로운 것을 보고 느끼는 경험을 나는 정말 소중하게 생각한다. 내 젊음을 무기 삼아 앞으로도 더 많은 곳에서 더 많은 것들을 보고 느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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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경우
    왜 전쟁중인데도 그 곳에서 공사가 벌어졌냐 하는 의문은 그 때 그 전쟁이 그 곳과는 무관하였다고 보면 풀립니다. 신라는 경상남북도에 국한된 나라도 아니였고, 백제도 전라남북도와 충청남북도 정도 크기의 나라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현재의 한반도 거의 전부와 중국대륙의 동해안지방까지 이르는 영역이 백제의 영토였고 신라는 더 윗쪽에 있는 큰 나라였을 것입니다. 고구려는 만주와 사할린 그리고 몽고지방까지 이르는 대 국가였어야 모든 의문이 풀립니다. 아끼히도 일본천황이 내한했을 때 자기의 조상이 백제의 왕손이라 하였습니다. 신라가 경상도지방에 있었다면 그보다 먼 백제의 왕이 일본에 가서 왕이 될 연관성이 멀어집니다. 경주는 당시의 전쟁과는 아주 먼 후방이었고 낙동강전선 이남의 백제의 영역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이 후 지금의 북한땅에서 벌어졌던 전투에서 백제가 항복하면서 전쟁은 끝났고 경주와 부산등지에 피신하였던 백제 왕실은 당시 백제의 식민지였던 일본으로 건너가 버린 것이 분명합니다. 우리가 일본역사선생으로부터 교육받은 역사선생님들로부터 배운 우리의 역사를 이제 이상한 점은 파 헤쳐 진실을 밝힐 때입니다. 임진왜란과 일제시대에 우리의 역사는 말살되고 조작되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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