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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6)
글레디에이터, 어디까지가 진짜?


 로마의 오헌제 시대를 이룩한 다섯 명의 황제들 중 네명은 가장 현명하다고 생각한 사람에게 황제의 자리를 물려주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다섯 번째 황제이자 철학자로도 유명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자신의 아들인 어리석은 콤모두스에게 황제의 자리를 남겨줍니다. 이 콤모두스가 바로 영화 '글레디에이터'에 나오는 악당 황제입니다.

 영화 '글레디에이터'에서는 사실 황제가 막시무스에게 황제의 자리를 넘겨주려고 했지만 그 사실을 안 콤모두스가 아버지 아우렐리우스 황제를 독살하고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는 내용으로 전개됩니다. 이 이야기는 픽션이지만 아우렐리우스 황제가 아들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왕위를 물려주려고 했다는 것은 어느 정도 일리가 있는 이야기입니다. 로마에서는 황제의 혈육이 아니더라도 황제의 자격을 갖추고 있다면, 황제는 그 사람을 양자로 삼아서 제위를 물려줄 수 있었기 때문이죠. 게다가 콤모두스는 네로와 비슷한 폭군으로 충분히 아버지를 죽일 수 있는 사람이었죠. 하지만 콤모두스의 죽음은 영화와 역사적 사실히 완전히 다릅니다. 영화에서는 콤모두스가 막시무스에게 죽지만, 실제로는 목욕탕에서 암살자에게 목졸려 죽습니다.

 이 영화의 가장 큰 미지수는 바로 막시무수예요. 그는 이 영화의 주인공이지만 실존인물인지는 알 수 없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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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흐.. 로마인 이야기를 11권까지 한 번 보고 다시 6권까지 봤는데.. 가물가물 합니다. -_ -;;;;;
  • 비공식 우수 블로거 앰블럼은 뭥미? ㅋ
  • corblo
    콤모두스가 아버지를 죽이고 황제자리를 차지했다는 설은 오래 전부터 꾸준히 제기되어 오는 의혹이었으나 근거없는 일종의 음모론으로 허구에 불과합니다. 글쓴 분의 말대로 오현제 시대엔 전임황제가 능력있는 사람을 양자로 들여 후계자로 삼는 방식으로 유능한 군주들이 연이어 통치를 했습니다. 이것은 이들에게 친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고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에게는 콤모두스라는 친아들이 있었기에 세습을 결정했습니다. 아들을 권력에서 배제해서 후일 분란의 씨앗을 만들기 보다 후계자로 삼아서 안정적인 제위계승을 하기로 결정한 거지요. 물론 결과는 대실패였지만요. 로마제정에서 제위의 세습은 제도적으로 정착되진 않았지만 친아들이나 가까운 친족이 제위를 물려받는 것은 자주 있엇던 일입니다. 실제로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어린 아들에게 차기황제에게 부여하는 카이사르 칭호를 주었고 호민관 특권을 부여했으며 부자가 공동으로 집정관에 취임하는 등 제위를 물려받기 위한 일들을 마치고 죽었습니다. 가만 있으면 다음 황제가 자기일텐데 무리수를 두면서 아버지를 죽일 이유가 없지요. 아우렐리우스 황제가 임종할 당시 중신들과 장군들을 불러 자기 아들에게 충성을 맹세할 것을 요구한 것만 보아도 제위에서 콤모두스를 배제할 생각이 없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또한 즉위할 당시 콤모두스는 이십대의 젊은 나이였고 그 전까지 제위계승자로서 결격사유를 딱히 찾을 수 없었습니다. 제위에 오르고 나서야 그런 변화가 나타나고 결국 역사에 남는 악제가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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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 개수를 계산 하는 사람, 아르키메데스

 모래 개수를 계산 하는 사람, 아르키메데스

 아르키메데스는 가까운 친척인 사라쿠사의 하에론 왕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내게 지구 밖 어딘가에 발 디딜 곳과 충분한 길이의 막대를 준다면 지구를 움직여 보겠다."고 뽐내며 말해였다. 하에론 왕은 크게 놀라 실제 실험을 통해 작은 힘으로도 무거운 물체가 움직이는 것을 보여달라고 청하였다. 그래서 아르키메데스는 병기고에서 배를 하나 골라 거기에 많은 사람과 화물을 싣게 하고는 혼자서 아무 힘도 들이지 않고 그저 도르래에 걸린 밧줄을 끌어당기기만해서 배를 끌어올려 바다에 띄웠다.      -플루타르코스, 「전기」



 아르키메데스는 헬레니즘 시대의 천재 과학자로, 윗글에 나온 '도르래의 원리' 외에도 '부력의 원리'를 비롯한 수많은 과학적 업적을 남겼습니다. 또 조국 사라쿠사가 로마의 침략을 받자, 아르키메데스는 투석기, 기중기 등 지렛대를 응용한 신형 무기를 만들어 내기도 했죠. 하지만 사라쿠사는 신흥 강국 로마를 이기지 못하고 결국 함락되는데, 그 날도 아르키메데스는 뜰의 모래 위에 도형을 그리며 기하학의 연구에 몰두하고 있었어요. 그러던 중 사람의 그림자가 비치자 그것이 로마 병사인 줄도 모르고 "비켜! 내 도형이 가려지잖나"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이 말에 화가 난 로마 병사는 아르키메데스를 몰라 보고 그의 목을 쳤는데, 평소 아르키메데스의 학식을 존경하던 로마의 장군이 이 사실을 안타깝게 여겨 아르키메데스의 묘비석에 죽는 순간까지 그가 연구하던 도형을 그려 주었다고 합니다. 죽는 순간까지 연구에 골몰했던 아르키메데스 같은 과학자들의 노력에 힘입어, 헬레니즘 시대에는 자연과학이 크게 발전할 수 있었습니다.

부력의 발견

 아르키메데스는 천문학자 피라쿠스의 아들이었다. 그가 이집트로 유학을 갔다가 돌아와서 피라쿠스가 왕에게 아르키메데스를 인사시키러 갔다. 그 때, 왕은 새로 만든 왕관이 순금으로 만들어졌는지, 아니면 다른 물질과 섞였는지 궁금해하던 참이었다. 왕의 이 문제를 풀어달라고 아르키메데스에게 부탁을 하자, 아르키메데스는 하루나 이틀 동안 시간을 . 피라쿠스가 아르키메데스에게 목욕이나 하러 가자해서 그들은 목욕탕에 갔고, 아르키메데스는 목욕탕 속에 들어갔다. 그러다가 아버지의 목욕탕 물은 넘치지 않는데, 자기의 목욕탕물은 넘치는 것을 보고, 갑자기 어떤 생각이 든 아르키메데스는 유레카("알았다" 뜻의 그리스어)를 외치면서 몸으로 밖으로 뛰어나갔다. 거리에 있던 사람들은 아르키메데스를 보고 정신병자라고 놀렸지만, 아르키메데스는 듣지 못했다. 문제를 풀 방법을 찾았기 때문이었다. 왕에게 간 아르키메데스는 왕관을 물 속에 넣고 물이 넘친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러고 나서 그는 왕관을 저울에 놓고 금화 몇 개와 숫자가 같다는 것을 증명한 다음 발견해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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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잔틴 제국, 천년의 역사와 만나다


로마 제국은 쇠퇴하여 395년에는 동로마와 서로마로 분리되어버립니다. 그 후 서로마 제국은 게르만 족의 대이동에 의해 멸망하지만, 동로마 제국은 천년동안 명맥을 이어 나갑니다. 이 반쪽짜리 로마제국은 앞의 로마 제국과 구분하기 위해 비잔틴이라는 새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답니다. 

비잔틴 제국의 발전과 쇠퇴

십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산천이 수백 번도 넘게 변할 만큼의 긴 시간을 유지한 나라라면 뭔가 특별한 것이 있었겠죠? 우선 비잔틴 제국은 아시아와 유럽을 갈라놓는 보스포루스 해협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동서 무역의 중심지로 자리잡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비잔틴 제국이 정치적으로 쇠퇴한 이후에도 여젆시 콘스탄티노플은 경제의 중심지 자리를지킬 수 있었죠. 또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은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데다 로마 시대부터 건설된 성벽이 버티고 있었기 때문에 이민족들이 쉽게 침범할 수 없었어요. 게다가 비잔틴의 황제는 황제 교황주의를 바탕으로 정치의 지도자 뿐아니라 교회의 수장까지 겸하고 있었으므로 막강한 힘을 행사할 수 있었답니다.




이러한 여건을 바탕으로 비잔틴 제국은 6세기 중엽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때 전성기를 누립니다. 527년에 황제의 자리에 오른 유스티니아누스는 백 년전에 멸망한 로마제국의 영광을 재현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로마의 재건을 위해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제일 먼저 착수한 일은 비잔틴 제국 내부를 안정시키는 것이었어요. 그는 국내의 안정을 위해서는 사람들에게 해야 할 일과 해서는 안되는 일을 명확히 알려주는 법체계를 다지는 일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유스티니아누스 대제는 법전 편찬에 가장 먼저 매달리지요. 이 때 만들어진 로마법 대전은 기존의 로마법을 집대성하여 만든 것으로 그 뒤 유럽 각국의 법에 큰 영향을 주게 됩니다. 또한 유스티나아누스 대제는 양잠법을 몰래 페르시아에서 들여와 견직 공업이 발달하는데 빛나는 공을 세우기도 해요.

나라가 어느 정도 안정된 후에, 유스티니아누스 대제는 해외로 눈을 돌립니다. 유스티니아누스 대제의 정복 사업으로 비잔틴 제국은 지중해 연안, 소아시아, 아프리카의 옛 로마영역을 차지했고, 로마 제국의 고향이라고 할 수 있는 이탈리아 반도도 반쯤 되찾아서 로마제국의 영광을 재현하는 듯 보였습니다.



하지만 유스티니아누스 대제 사후, 비잔틴 제국은 롬바르드 족의 침입을 시작으로 북쪽의 슬라브 족, 동쪽의 사산 왕조 페르시아의 침공에 시달립니다. 따라서 후대 황제들은 영토를 지키기 위해 모든 영토를 31개의 군관구로 나누고 황제가 직접 임명한 사령관에게 군사관, 행정권, 사법권을 주는 군관구제와 농민에게 군역에 종사하는 대가로 토지를 주는 둔전병제를 시행합니다. 그러나 7세기에 강성해진 이슬람 제국의 침입으로 비잔틴 제국은 대부분의 영토를 빼앗기고 수도 콘스탄티노플이 있는 발칸 반도와 소아시아의 남부로 영토가 축소됩니다. 이후 9세기에 비잔틴 제국은 이슬람 제국이 분열된 틈을 타 영토를 회복하고 다시 번성하는 듯 했지만, 군관구를 장악한 지방 세력가들이 황제의 명령을 무시하고 농민의 토지를 빼앗아 차지하는 바람에 강력했던 황제권을 잃어버리면서 다시 쇠퇴의 길로 접어들게 됩니다. 겨우 명맥만 이어가던 비잔틴 제국은 베네치아 상인의 사주를 받은 제4차 십자군 원정군의 침입으로 더욱 약해져, 결국 1453년에 오스만 투르크 군에게 정복당하고 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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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비류
    와~ 비잔틴 제국의 역사를 한페이지로 알 수 있는 포스팅이네요ㅋ
    제가 비잔틴 제국과 이스탄불에 대해서 관심이 많은데 관련 문화나 관련글 있으면
    또 올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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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아버지 왕(Rex Pater Europae), 샤를마뉴


초기생애

 샤를마뉴는 샤를1세(Charle Ⅰ), 카알 대제(Karl der Grosse), 찰스 대제(Charles the Great), 카롤루스 대제(Carolus Magnus) 등으로도 불린다. 그는 742년경 4월 2일 피핀 3세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메로빙거 왕조 말기 프랑크 왕국의 권력은 궁재(宮宰)에게로 집중되었으며 샤를마뉴가 태어날 무렵엔 그의 아버지 피핀과 숙부 카를로만이 프랑크 왕국의 궁재가 되어 프랑크 왕국을 장악한 직후였다. 나중에 카롤링거 왕조라고 부르게 된 이 가문은 메로빙거 왕조의 궁재직을 세습하며 프랑크 왕국 전체에 대한 지배권을 장악해왔다. 샤를마뉴의 할아버지 카를 마르텔은 분열 직전에 처한 왕국을 재건했고 732년에는 투르와 푸아티에 전투에서 사라센(이슬람)을 물리쳐 유럽과 기독교 세계를 지켜낸 공로로 인망이 있었다. 그는 힘없는 메로빙거 왕조가 유일하게 갖고 있던 이름뿐인 국왕의 대권을 침해하지 않은 채 사실상 왕국을 아들인 피핀과 카를로만에게 세습하듯 물려주었다.

 샤를마뉴가 어렸을 때 그의 아버지 피핀은 왕족 및 자신의 형제들을 쓰러뜨리고 권력을 차지했으며 751년에는 힘 있는 자가 국왕이 되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며 교황 자카리아스로부터 승인을 받아 실권 없는 메로빙거 왕가의 마지막 왕 힐데리히 3세를 폐위시킨 뒤 프랑크 회의에 의해 왕위에 올랐다. 자카리아스의 후임 교황인 스테파누스 2세는 롬바르드족(랑고바르드)의 침공으로부터 로마를 보호하는 데 도움을 청하려고 754년 알프스를 넘어 프랑크 왕국을 방문했는데 당시 12세였던 샤를마뉴는 왕국의 장자로서 교황을 영접했다. 교황은 생드니 대성당에서 성유식(聖油式)을 집전해 피핀과 그의 두 아들 샤를마뉴 및 카를로만에게 왕의 칭호를 수여했다. 이 귀중한 봉사의 대가로 피핀은 롬바르드족을 교황의 영지에서 축출할 것을 다짐했다. 피핀은 760년부터 해마다 원정을 해 아키텐(루아르 강 남쪽의 프랑스)을 정복함으로써 피레네 산맥까지가 모두 프랑크 왕국의 영토임을 재확인했다. 이 일련의 원정에는 샤를마뉴가 늘 동행했다.

 이런 젊은 시절의 경험은 아마 샤를마뉴의 성격과 목표 형성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그는 아버지를 닮아서 권력에 대한 불굴의 의지를 갖고 있었다. 외적에 대항해 단호하게 싸우고 기회만 있으면 영토를 넓히려는 경향, 가까운 친척들의 권리를 빼앗는 한이 있더라도 혼자 나라를 다스리겠다는 결심도 아버지와 똑같았다. 샤를마뉴는 세속 권력과 교회 권력의 밀접한 관계를 일찍부터 인정했다. 그는 교회를 존중했고 크리스트교 신앙을 널리 전파하는 것이 왕의 의무라고 생각했다. 또 교회에 대한 왕의 종주권을 주장하면서도 신이 그에게 크리스트교도들을 맡겼기 때문에 신에게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프랑크의 왕

 768년 피핀이 죽자 프랑크 왕국의 오랜 관습에 따라 왕국은 그의 두 아들에게 분할되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형제 사이에 격렬한 대립이 일어났다. 샤를마뉴의 동생 카를로만은 부르군트 일대를 다스렸는데 롬바르드 선왕의 왕비였던 게르베르가와 결혼하였다. 롬바르드 왕 데시다리우스는 카를로만이 프랑크 전체의 왕이 되기를 원하여 그를 암암리에 지원하였다. 그러나 동생과의 갈등에서 샤를마뉴는 승리했고 771년 카를로만이 사망하자 프랑크 왕국의 단일 지배자가 되었으며 카를로만의 편을 든 롬바르드를 멸망시켰다. 롬바르드의 수도인 파비아 포위 공격이 아직 진행되고 있는 동안 샤를마뉴는 로마로 가서 교황과 함께 774년의 부활절을 축하하고 이탈리아의 대부분을 교황령으로 이양하겠다는 아버지의 약속을 성 베드로 성당에서 재확인했다. 그러나 그가 실제로 넓혀준 교황의 땅은 미미했고 롬바르드 왕국 전역에 대한 통치권은 자신이 차지했다.

 샤를마뉴는 이교도인 작센족이 라인 강 하류 지역을 공격한 앙갚음으로 772년에 지금의 니더작센 지방과 베스트팔렌 지방에 사는 작센족을 공격했다. 그러나 775년부터는 복수보다는 작센족 전체를 정복하여 크리스트교로 개종시키고 그들의 영토를 프랑크 왕국에 통합하는 것이 그의 목표가 되었다. 이 목표는 여러 차례의 원정 끝에 실현된 것처럼 보였다. 작센족 귀족들이 그에게 충성을 서약하고 775~777년에 대규모 세례식이 거행되었기 때문이다. 777년에 파더보른에서 열린 제국의회는 작센족의 항복을 조인했다. 의회에 참석한 사람들 중에는 코르도바의 우마이야 왕조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키는 데 샤를마뉴의 도움을 얻으려고 스페인 북부에서 찾아온 아랍인들도 끼어 있었다. 778년 여름 샤를마뉴는 스페인으로 진격해 사라고사를 포위했지만 그 도시를 점령하지는 못했다. 피레네 산맥을 넘어 퇴각하던 프랑크 군대는 바스크족의 공격을 받고 참패를 당했다. 브르타뉴 원정 때 활약했던 샤를마뉴의 기사 롤랑도 이때 죽었는데 그는 나중에 전설과 시(롤랑의 노래)로써 불멸의 존재가 되었다.

 이후 그는 영토 보전에 힘쓰는 한편 내정을 강화하고 문화생활과 법의 지배를 보호했다. 샤를마뉴가 스페인에서 패배한 직후 작센족이 다시 봉기했다. 샤를마뉴가 생각하기에 세례를 받고 충성을 서약한 이 작센족의 저항은 정치적 배신이자 종교적 변절로 이런 범죄에는 가혹한 처벌을 내릴 필요가 있었다. 샤를마뉴는 작센족과 18회나 전쟁을 치르고 난 뒤에야 그들을 완전히 정복했다. 결국 그는 작센족을 자신의 지배 아래 복종시키겠다는 목표만이 아니라 제국에 완전히 통합시키겠다는 목표도 달성했다. 세속 권력과 크리스트교 신앙 사이의 뗄 수 없는 유대관계를 생각하면 이것은 작센족을 크리스트교로 개종시켜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샤를마뉴는 781년에 2번째로 로마를 방문해 교황이 어린 두 아들 피피노와 루이(루트비히)에게 각각 롬바르드와 아키텐의 왕관을 씌워주게 했다. 또한 비잔틴 제국의 황태후이며 콘스탄티누스 6세의 모후로서 섭정을 맡고 있던 이레네에게서 자신의 이탈리아 지배를 사실상 승인받았다. 그러나 프랑크 왕국이 787년에 이탈리아 남부를 공격한 뒤 샤를마뉴와 비잔틴 제국의 협약은 깨졌다.

 788년 샤를마뉴는 바이에른 공작이자 사촌인 타실로 3세를 폐위함으로써 라인 강 건너편에 남아 있는 마지막 게르만족의 독립성을 사실상 박탈했다. 이제 서게르만족인 알라마니족, 바이에른족, 작센족, 튀링겐족은 역사상 처음으로 하나의 정치 단위 안에 모이게 되었다. 게다가 아바르 왕국(지금의 헝가리와 오스트리아 북부)에 속해 있던 나머지 공국들과 도나우 강 유역에 새로 건설된 슬라브족 국가들도 느슨하나마 프랑크 왕국에 의존하게 되었고 프랑크 왕국의 종주권을 어느 정도 인정했다.

  프랑크 왕국은 엄청난 팽창을 통해 중세 초기의 부족국가들보다 훨씬 높은 지위로 올라갔기 때문에 이제는 양적인 변화뿐만 아니라 질적인 변화도 필요했다. 그러나 샤를마뉴에게 로마 황제의 칭호를 부여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은 늦게야 떠올랐고 그나마도 특수한 정치적 상황이 조성되었기 때문이었다. 동로마 제국, 즉 비잔틴 제국은 서로마 제국까지 포함한 로마 제국 전체에 대해 발언권을 가질 자격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당시 비잔틴 제국은 로마와 라벤나를 포기하고 이탈리아 남부와 시칠리아 섬에 대해서만 지배권을 주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샤를마뉴의 보호를 받고 있던 교황 하드리아누스는 이탈리아 중부에 자치령을 세우려고 애쓰고 있었다.
 


서로마의 황제

 799년 5월 교황 레오 3세는 로마에서 반대파들의 습격을 받자 샤를마뉴의 궁정으로 피신해 지원을 간청했다. 샤를마뉴는 800년 11월 교황과 함께 로마로 가서 황제의 예우로 영접을 받았다. 성 베드로 성당에서 열린 성탄절 미사 때 로마인들이 샤를마뉴를 황제라고 찬양하자 교황은 성유식을 집전하여 샤를마뉴에게 왕관을 씌워주고 샤를 아우구스투스라는 이름으로 황제에 임명했다. 샤를마뉴가 옛날 로마 제국의 서부지역을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의 황제 지위에 대한 합법성을 구체화해주었지만 동로마 황태후 이레네(797년 아들을 퇴위시키고 장님으로 만들었음), 즉 여성의 지배에 대항하려는 욕망도 그가 제위를 얻으려고 한 이유였다.

 비잔틴 제국은 제위 찬탈자의 공격에 대비했지만 샤를마뉴가 원한 것은 그저 자신의 새로운 지위와 협상에서 얻은 로마 지배권을 인정받는 것뿐이었다. 812년 비잔틴 제국 황제인 미카일 1세가 어쨌든 샤를마뉴를 황제로(로마 황제는 아니었음) 승인함으로써 그는 목적을 달성했다. 황제라는 칭호는 샤를마뉴에게 어떠한 권력도 추가로 주지 않았지만 그의 로마 지배는 합법적인 것이 되었다. 역사적으로 중요한 754년의 사건, 즉 교황이 비잔틴 제국과 소원해지고 그 대신 프랑크 왕국과 친교 관계를 확립한 것은 이제 명백해졌다. 중세의 제국이라는 개념, 그리고 프랑크 왕국 및 그 뒤를 이은 신성 로마 제국의 법률적 전통이 아우구스투스가 세운 고대 로마 제국과 맺고 있는 모든 관계는 샤를마뉴가 가졌던 황제라는 칭호와 지위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궁정과 행정

 제국의 창건은 주로 제국 내부의 문화 수준을 높이려는 샤를마뉴의 노력을 통해 합법화되었다. 샤를마뉴가 권력을 잡았을 때 프랑크 왕국의 문화, 행정, 사법 제도는 아직도 상대적으로 미개한 상태였다. 예를 들어 이 프랑크 왕국의 왕은 일정한 주거지가 전혀 없었다. 따뜻한 봄 날씨 때문에 샤를마뉴가 특히 좋아한 아헨이 왕의 거처가 된 것은 794년에 이르러서였다. 샤를마뉴는 이곳에 궁정과 왕실 교회를 지었다.

 샤를마뉴의 궁정은 그의 가족, ‘카펠라’라는 왕의 개인 예배를 집전한 성직자들, 그리고 속세의 관리들로 구성되었다. 속세의 관리들 중에는 자신의 영지 안에서 왕권을 일부 위임받아 행사하도록 허용된 영주들, 왕실의 집사들, 왕실 관리인들이 포함되었다. 샤를마뉴는 자신의 궁정을 왕국의 정치와 행정 중심지뿐 아니라 지성의 중심지로 만들겠다는 야심이 있었기 때문에 해외에서도 유명한 학자들을 불러들였다. 이들 가운데 중요한 인물로 아인하르트와 앨퀸이 있었다. 샤를마뉴는 이들을 비롯한 여러 문필가들의 도움을 얻어 교회 신부들의 저술과 고대 작가들의 작품을 소장하는 왕실도서관을 설립했으며 프랑크 왕국의 젊은 기사들을 가르치기 위해 궁정 학교를 창설했다. 제국 전역의 종교의식과 도덕성 및 재판절차의 수준을 높이려는 노력도 이루어졌다.

 모든 수도원 학교와 성당 학교에서는 라틴어와 라틴 문학을 집중적으로 공부하라는 지시가 내려졌다. ‘카롤링거 르네상스’라고 불리는 문화적 운동은 제국의 수많은 수도원을 중심으로 활발히 전개되었다. 그러나 전 세계에서 최고의 지성들을 불러들여 성직자를 가르치게 하고 결국에는 백성 전체를 가르치게 한 샤를마뉴의 노력과 그의 궁정을 언급하지 않고서는 이 운동을 제대로 평가할 수 없다. 궁정의 신학적 지식과 지적 자부심은 791년경에 샤를마뉴의 이름으로 작성한 포괄적 논문인 <샤를마뉴의 책 (Libri Carolini)>에 반영되어 있다.

 샤를마뉴는 이 궁정을 통해 제국을 다스리고 관리했으며 정의를 시행했다. 궁정과 제국 각지의 주요행정관 및 귀족들은 적어도 1년에 한두 번씩 프랑크 왕국의 심장부나 정복한 영토에 모여 총회를 열었다. 이것은 군대회의나 귀족들의 입법회의 및 교회의 종교회의를 분명히 구별하지 않은 카롤링거 제국의 독특한 구조를 보여준다. 이들과 궁정의 관계는 샤를마뉴의 명령에 따라 각지를 돌아다니는 왕의 사절들을 통해 유지되었다. 왕의 사절은 대개 2명이 한 조를 이루었는데 관리와 고위 성직자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왕의 명령은 글로 쓰면 안 되는 것이 원칙이었지만 샤를마뉴의 통치가 끝나기 20년 전부터 왕의 포고령이 약간 애매하나마 기록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왕의 포고령이 일정한 틀을 갖는 데는 시간이 걸렸으며 카롤링거 르네상스 시기에 형식이 고안되었다. 샤를마뉴는 그가 지배하는 다양한 민족과 부족의 전통적 권리를 원칙적으로 존중했고 황제가 된 뒤에는 그 전통적 권리를 기록하게 했다. 프랑크 왕국의 법령집은 여러 부족의 율법을 보완하는 기능을 했을 뿐 아니라 공공생활과 개인생활의 가장 다양한 측면에 적용된 규칙이며 왕의 사절과 백작 및 주교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에게 내려진 특수한 명령이기도 했다. 전체적으로 볼 때 샤를마뉴 시대에 만들어진 법률 문서는 샤를마뉴가 사법 행정과 대중 계몽에 관심이 많았다는 것을 뚜렷이 증명해준다.

 
통치의 한계

 그러나 샤를마뉴의 제국에 구조적인 결함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프랑크 제국의 모든 정치제도는 샤를마뉴의 뛰어난 능력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그가 사라지면 모든 것이 무너질 위기에 놓여 있었다. 이것은 샤를마뉴의 후계자인 루트비히 1세 때 프랑크 제국의 양상을 보면 훨씬 명확하다. 샤를마뉴의 교육정책으로 자신감을 얻은 성직자들은 항상 샤를마뉴의 신권(神權)정치를 고분고분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그들은 걸핏하면 자신들의 정치적, 교육적 원칙을 내세워 샤를마뉴의 신권정치에 반대하곤 했다.

 카롤링거 왕조와 함께 제국을 건설한 평신도 귀족들은 새로운 정복이 새로운 이권과 봉토를 약속해주지 않는 한 왕조와 확고한 유대를 맺을 수 없었다. 그러나 800년에 이르자 이미 도달한 국경선을 넘어 밖으로 더욱 팽창하는 것은 사실상 거의 불가능해졌다. 실제로는 이미 얻은 땅을 통합, 관리하며 외적으로부터 보호하는 데 필요한 경제적 자원과 기술적 수단도 불충분한 상태였다. 샤를마뉴의 제국은 로마 제국이 국가를 유지하는 데 사용한 수단들(화폐 경제, 봉급을 받는 관리, 상비군, 정비된 도로망과 통신망, 해안을 지키는 해군)을 갖고 있지 않았다. 샤를마뉴가 살아 있을 때 이미 해안은 노르만족의 위협을 받고 있었다. 806년에 샤를마뉴는 제국을 분할해 아들들한테 나누어줄 계획을 세웠지만 맏아들과 둘째 아들이 죽자 813년 아헨에서 아키텐의 루이(경건왕 루트비히)를 공동 황제로 만들고 유일한 후계자로 삼았다. 샤를마뉴는 불과 몇 달 뒤인 814년 1월 28일 아헨에서 세상을 떠났다.

 
인간성과 영향력

 샤를마뉴가 죽은 뒤 그의 뒤를 이은 후손들이 제국 내부의 평화와 통일성 및 국제적 지위를 유지하지 못했기 때문에 샤를마뉴의 명성은 죽은 뒤에 더욱 빛났다. 카롤링거 왕조가 단절된 뒤에도 서프랑크(프랑스) 왕국과 동프랑크(독일) 왕국의 정치적 전통은 샤를마뉴가 세운 선례에서 자양을 얻어 생명력을 유지했다. 오토 1세 때 아헨은 독일 통치자들이 대관식을 올리는 도시가 되었고 로마 교황에 대항한 대립 교황 파스칼리스 3세는 붉은 수염왕 프리드리히 1세의 요청으로 1165년에 샤를마뉴를 성인으로 추증했다. 프랑스에서는 존엄왕 필리프 2세가 샤를마뉴를 기리는 전통을 되살렸다. 샤를마뉴의 진정한 후계자가 독일인이냐 프랑스인이냐 하는 문제는 중세뿐 아니라 근대에 접어든 뒤에도 계속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나폴레옹은 샤를마뉴의 후계자라 자처했고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크리스트교 국가들이 통합해 ‘서방 유럽’을 구성하자는 논의는 샤를마뉴의 본보기를 상기시켰다.

 민간 전설과 문학도 이런 정치적 전통과 나란히 발전해 롤랑을 다룬 서사시에서 절정에 이르렀다. 샤를마뉴의 명성은 한때 그의 제국이던 지역 내부에만 머물지 않았다. 일부 슬라브어에서 왕을 뜻하는 단어는 그의 이름에서 파생한 것이다. 샤를마뉴는 전기적 문서를 전혀 남기지 않았다. 그의 인간성은 그의 행위와 동시대인들이 남긴 기록으로 조립할 수 있을 뿐이다. 샤를마뉴의 강렬한 개성은 분명 신의 뜻이 자신과 함께 한다는 굳은 신념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그는 마음속으로 전혀 모순을 느끼지 않고 개인의 독실한 신앙심과 일상생활의 쾌락, 종교적 사명감과 권력에 대한 강한 의지, 거친 태도와 지적 성장에 대한 갈망, 적과 타협하지 않는 태도와 공정함을 양립시킬 수 있었다. 그의 독실한 신앙심에는 정치적 조건이 붙어 있었기 때문에 제국과 교회는 제도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하나의 단위가 되었다.

  그의 제국은 2대 황제인 루트비히에서 끝났지만 로마 제국 멸망 이후 갈기갈기 찢어졌던 서유럽 사람들이 그 후 몇 세기 동안 의지할 수 있는 공통된 지적, 종교적, 정치적 유산을 재구성하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 물론 이런 유산이 샤를마뉴 혼자 힘으로 만든 것은 아니지만 그가 없었다면 상상하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그의 궁정 시인들 가운데 한 사람은 그를 ‘유럽의 아버지 왕(Rex Pater Europae)’이라고 불렀다. 사실 중세의 수백년 동안 유럽 역사에 그와 비슷한 발자취를 남긴 사람은 아무도 없다
 


제국의 분열

 샤를마뉴가 814년에 죽자 그의 아들 루이트비히 1세가 제국을 물려받았다. 그는 신앙심이 두터워 교회로부터 환영을 받았고 경건왕이라는 별칭도 얻었지만 난세를 헤쳐 나갈 능력이 부족하였으며 무능한 군주로 평가되고 있다. 제국 분열의 조짐은 루트비히 1세의 황후 에르멘가르드가 세 아들을 남기고 818년에 세상을 떠날 때부터 시작되었다. 이미 루트비히는 게르만족의 상속 유풍에 따라 제국을 그의 세 아들에게 분할 상속하기로 정해 놓았다. 장자 로타르 1세에게는 제위를 물려주어 제국의 중심부를, 차남 피핀과 삼남 루이 2세에게는 변경을 주기로 하였다. 그러나 에르멘가르드가 죽고 4개월 후 루트비히는 유디트와 재혼하여 사남 샤를(대머리 왕 샤를 2세)을 낳았고 그에게도 상속권이 생겼다. 그것도 늦게 얻은 귀여운 자식이고 형들에 비해서 어린 연령은 불이익을 받을 수도 있기 때문에 부친으로서는 자기가 살아 있을 때 상속 문제를 확실히 해둘 필요가 있었다. 이에 루트비히는 829년에 회의를 소집하고 샤를에게 제국의 중심부를 준다고 선언해 버렸다.

 여기서부터 부자간 혹은 형제간에 추잡한 상속 싸움이 시작되었다. 로타르는 아우 피핀과 일부 호족들의 호응을 얻어 반란을 일으켜 황후 유디트를 감금하고 로타르의 측근들이 궁중의 요직을 차지하여 영토 상속문제를 원점으로 돌렸다. 그러나 6개월 후 다시 루트비히가 일부 호족과 교회, 수도원의 도움으로 세력을 회복하여 영토 상속문제를 다시 논의하게 되었고 이에 불리함을 느낀 장자 로타르는 교황청과 말을 맞추어 놓고 알자스에서 회의를 열어 아버지인 루트비히를 퇴위시키고 세 아들은 유디트의 아들 샤를을 배제하고 합의하에 영토를 셋으로 나누어 가졌다. 하지만 이 합의는 오래 가지 않았다. 겨우 1년을 못 넘기고 형제들 간에 다시 싸움이 시작되었고 차남 피핀이 부친 루트비히와 손을 잡고 로타르에게 대항하였다. 호족들은 우왕좌왕하였고 교회는 에르멘가르드의 아들들을 외면하였으며 수도원이 확실하게 루트비히를 지지하자 로타르는 이탈리아로 도망갔고 그를 지지했던 많은 사람들은 처형되었다. 그리고 루트비히는 834년에 복위하였다.

 그 후 몇 년간 잠잠하였지만 차남 피핀이 죽자 부왕 루트비히는 기다렸다는 듯이 그 땅을 샤를에게 주었고 840년에 루트비히가 세상을 떠나자 다시 상속 분쟁이 전개되었다. 결국 843년에 베르됭 조약으로 제국을 삼분하여 로타르는 제호(帝號)와 중심부를, 삼남 루이는 라인강 동쪽의 동프랑크를, 샤를은 제국 서쪽의 서프랑크를 차지하였다. 이래서 제국은 동프랑크, 서프랑크, 중프랑크로 분할되었고 855년에 로타르가 죽고 세력이 약해지자 동프랑크의 루이와 서프랑크의 샤를이 870년에 메르센에서 다시 조약을 맺어 중프랑크의 로트링겐 일대를 빼앗아 나누어 가졌다. 이것이 오늘날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 세 나라의 출발이었고 그 판도도 지금과 비슷하였다.

 샤를 대제의 손자들은 이렇게 해서 영토를 얻었지만 그것은 오래갈 수는 없었고 결국 875년에 중프랑크에서, 이어 911년에 동프랑크에서, 987년에는 서프랑크에서 카롤링거의 왕통은 단절되었고 노르만인과 마자르인 그리고 이슬람인의 침입으로 유럽은 혼란에 빠졌다.


자료 출처
http://mtcha.com.ne.kr/world-man/france/man32-syarulmanyu.htm
http://tiny.britannica.co.kr/bol/topic.asp?mtt_id=88304

http://www.nobelmann.com/history/history_.htm

cafe.naver.com/fatewhtenight.cafe?iframe_url=/ArticleRead.nhn%3Farticleid=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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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초대황제 아우구스투스 리더십의 비밀?


로마가 이탈리아 반도의 작은 나라에서 시작하여 서유럽과 북아프리카 그리고 서아시아를 지배하는 제국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카이사르가 공화정을 타파하고 제정으로 전환하는 기틀을 마련한 데서 찾을 수 있다. 카이사르는 로마제국의 기초공사를 위한 청사진을 만들었고, 그 설계를 토대로 초대황제 아우구스투스는 건물을 지어 준공을 하였다. 


로마인이야기는 인류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대국으로 존속하고 유지된 로마의 역사를 11권의 책 속에 담아내고 있다. 로마인이야기의 주인공은 사실상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카이사르가 로마제국의 창업자라면 아우구스투스는 수성에 성공하여 제국이 장기간 동안 존속할 수 있도록 기여하였기 때문이다.

기업의 성장 역시 비슷한 맥락에서 관찰이 가능하다. “창업은 쉬워도 수성이 어렵다”고 흔히들 말한다. 로마제국의 창업과 수성이 어떻게 가능하였는지 최근의 경영이론과 비교하면서 지난 호에 살펴본 카이사르의 리더십에 이어 아우구스투스의 리더십을 조명해 본다.

기원 전 44년에 카이사르가 암살된 직후 후계자로 지명된 옥타비아누스는 당시 18세로서 정치권에서는 애숭이에 불과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런 그가 당대의 쟁쟁한 실력자인 안토니우스를 제압하고 14년 만에 최고권력자에 올랐다는 사실 자체가 그의 지혜와 능력을 웅변적으로 입증해 주고 있다.

그의 리더십 특성은 첫째, 철저한 목표관리를 실시한 점을 들 수 있다. 아우구스투스는 ‘공화정 폐지와 제정의 구축’이라는 목표를 세우고 이를 실천하기 위해 철저한 계획을 세워 목표를 달성했다. 특히 카이사르가 암살당한 원인을 분석하고 기득권의 반발을 무마하면서 뜻을 달성하기 위해 늘 마스터 플랜을 마련하여 일을 추진했다. 예를 들면 그는 권력을 장악한 후에 공화정으로의 복귀를 선언하여 원로원을 안심시키고 환영을 받는다. 그러나 결과는 공화정은 폐지되고 제정시대가 열리게 된다.

그래서 “아우구스투스가 하는 일은 하나 하나는 합법적이지만 서로 연결하면 비합법이 되는 제정으로 연결되었다”는 평가를 받게 되었다. 그는 목표를 세우고 그 목표를 달생했을 때의 예상되는 이점을 그려본 후 치밀하게 장애요인을 살펴봄으로써 구체적인 실천 전략을 수립하였다. 그러므로 아우구스투스는 오늘날의 MBO(management by objective)개념을 도입하여 점진적이고 지속적인 개혁을 추진하여 목표를 이룬 황제라고 말할 수 있다.

둘째, 제국 통치를 위한 시스템을 구축하였다.
카이사르는 로마가 제국으로 가기 위한 제도를 구축하기 위해 설계를 하였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미완성이었다. 이를 이어 받은 아우구스투스는 사람의 자의성을 방지하기 위해 가능하면 무슨 일이든 제도화함으로써 행정이 합리성과 공정성을 바탕으로 운영될 수 있도록 기반을 구축하였다.

상비군제 도입, 원로원 의원수의 구조조정, 화폐개혁, 국세청 창설, 선거제도 개혁 등을 통해 제국을 효율적으로 운영하기 위한 시스템을 마련하였다. 특히 당시에 50만에 달하는 군인을 구조조정하여 16만 8천 명으로 감축한 후 상비군 제도를 도입함으로써 군대를 양적관리에서 질전관리로 전화하였고, 이를 위해 퇴직금 제도를 법제화했다는 사실에 놀라움에 금할 수 없다.

셋째, 시스템에 대한 지속적인 평가를 통해 점진적인 개혁이 가능하도록 하였다. 아우구스투스가 통치기간 동안에 경험한 로마제국의 평화는 그의 수많은 개혁이 처음부터 완벽했기 때문이 아니다. 그 개혁이 제대로 기능을 발휘하고 있는지 어떤지를 그가 쉬지 않고 감시했기 때문이다.

그는 로마가 도로를 건설하고 유지와 보수를 지속적으로 하였듯이 개혁도 마찬가지라고 보았다. 계획(Plan)과 실천(Do)과 평가(See)의 선순환을 끊임없이 체계화하였기에 시스템의 작동이 가능했던 것이다.

넷째, 솔선수범하는 노블리스 오블리제(Nobless Oblige)의 리더십을 보여 주었다. 카이사르가 아우구스투스를 후계자로 지명하게 된 가장 큰 배경이 투철한 책임감을 바탕으로 한 솔선수범하는 자세였다고 한다. 그는 재임 중에 국가가 어렵거나 돈이 필요할 때 개인 돈으로 국고를 네 번이나 지원했다. 돈이 모자라면 먼저 자기 주머니를 턴 후에 모금을 하였던 것이다.

또한 그는 딸 율리아를 자손들을 번성시킬 목적으로 세 번씩이나 결혼시킬 정도로 혈연에 지나치게 집착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가족이나 친척이 법을 어기면 엄격하게 처벌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의 딸과 친척들이 유배형을 받고 쓸쓸하게 노년을 보냈고, 아우구스투스의 유언장에서도 유배된 딸과 손녀는 영묘에 묻히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고 적은 사실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그는 강한 책임감과 더불어 공적인 일과 사적인 일을 구분하는 솔선수범이 몸에 벤 지도자였다.

다섯째, 권한 위임을 생활화하였다.
아우구스투스는 자신의 능력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부족한 부분에 대해서는 전문가를 활용함으로써 권한을 위임하는 모범을 보여 주었다. 예를 들면 군사와 내정은 아그리파, 외교와 문화는 마이케나스에게 위임하여 성공할 수 있었다.

아그리파는 카이사르가 아우구스투스의 군사적인 분야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추천한 인물로서 모든 군사전략과 지휘는 그가 맡았다. 마이케나스는 외교와 문화 분야에서 충실한 조언을 하여 원활한 통치가 가능하게 만들었다.

요즈음 기업인들이 문화사업 육성을 위해 아낌없이 지원하는 매세나 운동이 바로 마이케나스의 뜻을 기리기 위한데서 시작되었다는 역사적 의미를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아우구스투스의 건강이 좋지 않았던 것도 권한위임을 할 수 있는 중요한 요인이었다.

끝으로 놀라운 자제력을 보여 주었다.
인류 역사상 각종 개혁이 실패하는 이유는 서두르는 데 중요한 원인이 있다. 기득권층의 반발이 계속될 경우 개혁을 추진하면서 성공하기란 쉽지 않다. 아우구스투스가 개혁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어떠한 비난과 불편함도 참고 견디면서 오로지 목표를 향해 한 걸음 한 걸음씩 나아갔기 때문에 마지막에는 자신이 원하는 바를 관철시킬 수 있었다.

신중한 성격을 타고난 아우구스투스가 뛰어난 자제력을 발휘했던 게 성공의 비결이었다고 할 수 있다. 아우구스투스가 원로원 의원들의 무례한 행동에 대해 의붓 아들에게 보낸 다음과 같은 편지에서 그의 자제력을 엿볼 수 있다.

“나의 티베리우스여, 젊은 너로서는 무리도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나를 나쁘게 말하는 사람이 있더라도 분개해서는 안된다. 그들이 우리에게 칼을 들이대지 않는다는 것만으로도 만족해야 하지 않겠느냐.”

개혁이란 미명하에 목청만 높이는 개혁은 곧 한계에 부딪히고 만다. 준비된 개혁, 말 하지 않는 개혁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아우구스투스는 행동으로 보여준 셈이다.

카이사르는 창업형 리더십, 아우구스투스는 수성형 리더십을 발휘하여 로마제국을 반석 위에 올려 놓았다. 사실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는 절묘한 보완관계에 있다. 성장과 안정, 창업과 수성, 진보와 보수의 조화를 통해 목표를 달성할 수 있었다.

지금 우리 사회는 곳곳에서 리더십의 중요성을 절감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의 리더십이 오늘날 지식 정보사회에서 더욱 돋보이는 이유이기도 하다.

로마제국의 초석을 닦은 두 지도자에 대한 철저한 연구와 벤치마킹이 무한경쟁시대의 높은 파고를 뛰어넘는데 좋은 참고가 되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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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네르바가 누구인지 제대로 알아보자!
 다음 아고라의 논객 미네르바와 미네르바 효과가 계속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논객 미네르바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곳에서 상세히 다루어졌으니, 저는 여신 미네르바와 미네르바의 부엉이에 대해 다루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 무렵에야 날개를 펴기 시작한다."
 이는 독일의 철학자 헤겔이 「법철학」의 서문에서 한 말입니다. 여기서 미네르바는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지혜의 여신 아테나의 로마식 이름입니다. 그녀는 부엉이를 좋아하여 항상 부엉이를 데리고 다닌다고 합니다. 이성적인 철학이나 진리에 대한 인식은 시대에 선행하기보다는 일이 다 끝날 무렵에야 알게 된다는 뜻이죠. 무슨 일을 하다가 한참 후에야 비로소 깨닫게 됨을 뜻하기도 합니다.

아테나 - 지혜와 공예의 수호신

1. 아테나는 어떤 여신인가?

 아테나는 지혜와 공예의 수호신으로 로마인에게는 미네르바로 알려져 있으며 아르테미스처럼 순결을 지킨 처녀 여신입니다. 그녀는 단단한 몸매를 지닌 아름다운 무사로 자신이 선택한 영웅들을 보호하고 자신의 이름은 딴 도시 아테네를 수호하였습니다. 올림포스산에서 갑옷을 입고 있는 여신은 아테나 하나 뿐이며, 헬멧을 뒤로 비스듬히 써 아름다운 얼굴을 드러내면서 한 손에는 방패를, 한 손에는 창을 든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아테나는 전쟁시에는 전략을 짜고 평화시에는 집안에서의 여러 가지 기술들을 관장했습니다. 그래서 한 손에 그릇이나 물레를 들고 있는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하죠. 아테나는 도시의 수호신이었으며, 군대의 후원자였고, 수직공, 대장장이, 도공, 제단사들의 수호신이기도 했습니다.

 아테나는 합리적인 사고에 가치를 두며, 본능과 자연보다는 의식과 지식을 주도하는 여신이었습니다. 그래서지혜를 지닌 커다란 눈의 부엉이로 그녀를 묘사하기도 합니다. 아테나의 기질은 도시적인 것으로 그 점에서 아르테미스와는 대조적인 여신이었습니다.


2. 아테나의 탄생


 아테나의 탄생에 대해선 두 가지 설이 있는데, 두 가지 모두 극적인 신화입니다. 아테나는 제우스의 머리에서 태어났는데 날 때부터 성숙한 여성이었으며 번쩍이는 갑옷을 입고 한 손에는 날카로운 창을 들고 괴성을 지르면서 태어났습니다. 또 다른 일화에 의하면, 제우스가 그녀의 해산을 앞두고 지독한 진통에 시달리자 대장간의 신인 헤파이투스가 도끼로 제우스의 머리를 절개하여 아테나가 태어났다고도 합니다.
 그래서 아테나는 그의 부모가 제우스 하나 뿐이라고 생각했으며, 끝까지 제우스의 편에 섰습니다. 아테나는 자신의 어머니인 메티스를 인정하지 않았는데, 사실상 그녀는 자신에게 어머니가 있다는 것도 몰랐습니다.

 메티스는 제우스의 첫 번째 부인으로, 대양을 다스리며 그 지혜가 널리 알려져 있는 여신이었습니다. 메티스가 아테나를 임신하고 있을 때 제우스가 메티스를 작게 만들어 삼켜 버렸습니다. 메티스는 두 아이를 낳을 예정이었는데, 딸은 제우스에게 지혜로운 의논 상대가 되고 아들은 이 세상의 모든 신과 사람들을 다스리는 왕이 될 예정이었습니다. 하지만 제우스가 메티스를 삼킴으로써 그 계획이 무산되었고, 그 결과 아테나만이 제우스의 머리에서 태어나게 된 것이죠.

3. 신화


 아테나는 영웅들의 친구이며 보호자이고 조언을 해주는 수호신이었습니다. 영웅들과 연관된 그녀의 신화는 이루 열거할 수 없을만큼 많죠. 아테나는 트로이 전쟁 중에는 그리스를 적극적으로 도와주었고 특히 그리스 최고의 용사인 아킬레스를 돌봐주었으며, 오디세우스(율리시즈)가 집을 찾아오는 오랜 세월 동안 그를 지켜주었습니다.

 영웅들을 돕고 제우스를 보좌하는 것 외에, 또 한편으로 아테나 여신은 가부장제를 옹호하는 역할도 했습니다. 서구 역사에 등장하는 최초의 재판인 오레스테스 사건의 경우를 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오레스테스는아버지를 살해한 어머니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 어머니를 죽였다. 아폴로가 그를 변론하였는데, 그때 아폴로가 주장하기를 남성은 여성보다 우월하고 여성은 그저 남성이 뿌린 씨앗을 키우는 존재일 뿐이며, 그 예로 어머니 없이 태어난 아테나의 탄생을 증거로 들었습니다. 재판은 결국 아테나의 한 표에 의해 결정지어지는 순간에 이르렀는데, 이때 아테나는 아폴로의 편을 들어 오레스테스가 자유의 몸이 되게 함으로써 어머니와의 연대감보다는 가부장제의 원리를 지키는 것을 우선시 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아테나에 대한 신화 중에 여성이 관련된 유명한 일화가 하나 있는데, 아테나에 의해 거미로 변해 버린 아라크네에 대한 얘기가 그것입니다. 수공의 여신인 아테나가 어느날 유명한 수직공인 아라크네와 누구의 솜씨가 더 좋은지를 놓고 시합을 벌였습니다. 아테나는 아라크네의 놀라운 솜씨에 감탄했지만, 아라크네가 완성한 융단에 수놓인 내용을 보고는 크게 분노하였습니다. 그 융단에 놓인 수가 아테네의 아버지인 제우스의 애정 행각을 담은 내용이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아라크네는 아테네의 분노에 의해 거미로 변했으며 영원히 실에 묶여서 실을 짜는 운명을 맞게 되었습니다. 이렇듯 아테네 여신에게 있어 제우스를 모독하거나 가부장제를 흐트리는 일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물론 요즘 이슈화 되고 있는 내용과는 좀 다른 얘기입니다만, 곁가지식으로 그리스 신화의 아테네 여신에 대해 살펴보는 것도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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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대생
    좋은 시도인 것 같네요~
    아고라 미네르바는 알아도 진짜 미네르바가 누군지 모르는 사람도 많았을듯요^ㅡ^
  • demiansfox
    오빠, 내가 요즘 읽는 책이 여신 유형과 심리에 대한 책인데- 아테나 유형의 여성은 권위와 책임감과 권력을 모두 지닌 강력한 남성에 대해서만 자연적으로 끌리기도 하지만 레즈비언 여성들에게도 잘 보인다네 신기하지 'ㅁ'
  • 미네르바 띄우느라 참 열심히도 조직적으로 애쓰십니다 운동권 노빠분들....
    상반기엔 광우병 구라 만드셔서 어떻게 나라 망조들정도로 흔들려다 안되고
    이젠 또 경제 위기설 그래요...경계하고 조심해서 나쁠거 없는데도 미네르바가 말 엄청 바꾸고 심지어는 통계 자료 조작한거 까지도 좀 이야기 하시지 전문가들 사이에선 똥 취급 당하는데 파블로프의 개들이 추천하는 미네르바로 여론 몰이하는 이런 현실 정말 창피하고 부끄럽네요 인터넷 더럽게 만들지 말고 좀 순수하게 사세요 ...적어도 우파들은 이런짓은 안하죠 이런짓을 안하는게 아니라 인터넷은 한 몇백명만 조직적으로 여론선동해서 얼마든지 조작 가능하단걸 별로 중요하게 생각안하는거겠지만 노빠님들은 노무현씨와 함께 오로지 한게 그 인터넷 여론 조작 점령으로 기존 여론 타파하는거였죠? 근데 그것도 진실과 정직함이 있고 뭔가 잘했어야 먹히지 어디서 나라 개판쳐놓고 물러난 주제에 이제 와서 정권 좀 다시 잡아보겠다고 나라까지 흔들면서 수작질인지 구역질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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