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터데스크 관리자

도움말
닫기
적용하기   첫페이지 만들기

태터데스크 메시지

저장하였습니다.
TODAY 271 TOTAL 18,691,344
역사 (19)
한국인은 강간 민족이다?


일제의 만행을 옹호하고 한국사를 왜곡해 논란을 불러 일으켰던 야마노 샤린(山野車輪·38)의 만화 시리즈 ‘혐한류(嫌韓流)’가 4권 발행을 앞두고 있다고 합니다.


일본 출판사 신유샤는 최근 홈페이지(shinyusha.co.jp)를 통해 오는 30일 발매를 앞둔 혐한류 4권의 특별 페이지를 신설하고 목차와 줄거리, 캐릭터 등을 소개했습니다. 신유샤에 따르면 혐한류 4권은 한·일 간 역사 문제 외에도 재일 한국인들과 한국의 성범죄 등 현재 상황들을 다루고 있답니다.

여기서 재일 한국인의 경우 “일본을 침략했고 영구 거주할 수 있는 특권을 얻었다”는 식으로 묘사했다네요. 또 한국의 성범죄에 대해서는 “강간 민족, (일제 강점기시절) 속국의 슬픈 역사”라는 표현을 서슴지 않았다고 합니다.

혐한류 시리즈는 안중근 등 독립 운동가들을 테러리스트로 묘사하거나 “한글이 일본인에 의해 배포됐다”는 식의 왜곡된 정보로 한국사를 소개해 물의를 빚어왔습니다. 또 한국이 검도와 유도, 스시 등 일본 문화를 도둑질했다며 높은 경계심을 보여왔는데요.

혐한류 시리즈는 대형 온라인 서점 ‘일본 아마존(amazon.co.jp)’에서 한 때 예매율 1위를 기록하는 등 일본인들의 높은 관심을 받아왔습니다. 이 시리즈들 중에는 혐중국류(嫌中國流)도 발행돼 중국 네티즌들의 반발을 사기도 했었습니다.

대한민국 국민이로서 분노를 참을 수가 없네요.

  Comments,   2  Trackbacks
댓글 쓰기
경험을 토대로 작성한 답사의 모든 것

 


1. 답사와 답사의 종류

내력 있는 곳을 찾아가서 삶의 흔적을 더듬고 역사를 되새김으로써 그 지역의 자연․역사․문화를 종합적으로 이해하고 애국심을 고취하며, 나아가서 자신을 돌이켜보는 기회를 만드는 일이다.

문화유적지 답사, 역사유적지 답사, 향토유물 답사, 종교유적지 답사 등이 있다. 대표적인 문화유적 답사에는 고궁, 수원 화성, 중원 문화유적지, 박물관 및 전시관 탐방 등이 있으며, 역사유적 답사에는 서대문독립공원, 동학농민운동이나 임진왜란의 사적지, 우리나라의 근대사를 알 수 있는 강화도 탐방 등이 있다. 향토유물 답사에는 남도 문화와 역사, 진도 사람의 삶과 문화, 섬 문화와 섬 사람들, 도자기 굽는 마을 탐방, 방언이나 옛날 이야기 수집 등을 테마로 한 기행이 있고, 절두산성지, 양화진, 제암리 교회, 발암 시장, 여수애양원 등이 종교유적 답사지의 대표격으로 꼽힌다.(네이버 지식인 참고)

 

2. 우리나라의 현재 답사문화의 문제점

우리나라 사람들은 답사의 개념이 정확하지 않는 것 같다. 답사와 여행의 의미를 혼돈하는 사람이 대부분이라고 생각된다. 가장 처음 답사를 하는 것이 바로 초등학교 수학 여행일 것이다. 물론 요즘은 부모님과 함께 유명한 곳을 찾아가기는 하지만 정식으로 공부를 목적으로 하는 답사는 바로 초등학교 수학여행이라고 생각된다.

거의 대부분의 학교에서 경주를 수학여행지로 정하고 있다. 물론 경주가 우리나라 최고의 수학여행지 임은 틀림이 없다. 하지만 수학여행을 가기 전에 목적지에 대해 별도의 공부를 하는 학교는 거의 없다고 생각된다. 아이들은 주로‘경주는 옛날 신라의 수도였다.‘라는 얇은 지식을 가지고 목적지에 가게 되는 것이다. 수학여행은 2박 3일 동안의 짧은 여행이지만 초등학생들에게 주는 의미는 그 이상으로 아주 크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초등학교 수학여행 뿐 아니라 중학교 고등학교 수학여행도 마찬가지다. 시간이 지나 어른이 되면 중학교 고등학교 수학여행지는 모두 잊어버리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우리의 답사문화는 이렇게 어렸을 때부터 길러진다. 그냥 그 곳에 다녀왔다는 것이 가장 큰 의미인 것이다.

“나도 천마총 갔었는데……. 좋더라.” 우리는 이런 대화를 하면서 뿌듯함을 느낀다. 이런 대부분의 답사는 천마총이 경주에 있다는 것밖에 모르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다. 한번 가 보았다면 그곳에 대해서 모두 다는 몰라도 어느 정도의 지식을 가져야 하지만 현재 우리의 답사문화는 그러하지 못하다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우리 민족은 손에 들고 다니며 쓰는 것을 싫어한다. 초등학교 때 잠깐 선생님의 권유로 연필을 준비한다. 하지만 해외 여행을 가서도 그냥 보기만 하지 무엇을 적는 사람은 드물다. 사람 머리는 컴퓨터가 아니다. 한번보고 그 것을 모두 다 기억하기는 힘이 든다. 그리고 우리가 답사하는 곳이 보통 서너 군데가 넘을 것이다. 그 많은 곳을, 그 많은 곳의 유물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이제 이런 답사 문화는 우리가 지양해야 할 것이다. 보다 효율적이고 알찬 답사를 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하는 것인가를 알아보도록 하자.

 

3. 올바른 답사를 위한 제안.

 

1) 답사의 주제 정하기

논설문도 아니고 답사의 주제를 정한다는 것이 의아하다는 생각을 할지 모른다. 하지만 답사에도 주제가 필요하다. 그 이유는 우리는 오랜 시간 답사를 할 수가 없다. 그래서 자신이 원하는 답사를 위해서 주제를 정하는 것이 좋다.

‘천년 신라의 경주’, ‘아름다운 섬 제주’와 같이 주제를 너무 크게 잡는다면 주제를 정하는 의미를 상실 할 수도 있다. 주제는 일정과 맞게 작을수록 더 좋을 것이다. 예를 들면 ‘경주의 신라고분들’,‘제주도의 향토음식’과 같이 좀 더 구체적으로 잡는 다면 분명 답사에서 얻어 오는 것이 많을 것으로 생각된다.

 

2) 답사 전 자료조사

답사의 주제를 정하고 주제에 맞는 답사를 하기 위해 답사 전 자료조사는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답사 전 자료 조사를 사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첫째는 보다 많은 사실과 감동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답사 전 아무것도 모른 상태에서 유적이나 유물을 본다면 이해력이 매우 떨어질 것이다. 예를 들면 천마총을 모르는 상태에서 답사했다면 그냥 신라인들은 무덤을 크게 만들었다는 것밖에는 모를 것이다. 하지만 사전 자료조사를 하면 천마총이 천마도가 나와서 천마총이라는 것과 천마도는 신라의 흔하지 않는 회화작품이라서 더욱 귀중하다는 것, 그리고 무덤형태는 적석목곽분이고 천마총 안에서 금제 허리띠. 금관등 많은 금제 유물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간다면 감동은 열 배가 될 것이다.

또 하나의 이유는 주제에 맞는 장소를 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답사의 목적은 신라의 고분인데 그냥 자료조사 없이 여행한다면 천마총을 비롯해서 대릉원, 무열왕릉, 김유신 묘, 오릉 등 무수히 많은 고분들을 지나 칠 수도 있다. 이처럼 답사 전 자료조사는 답사를 하는 것 만큼 중요한 것이다.

 

3) 답사 예산 및 답사 일정

우리가 집을 나서면 돈이 들게 마련이다. 물론 답사를 할 때도 돈이 든다. 우리가 부자가 아니라면 알뜰하면서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는 답사가 되어야한다고 생각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확하고 치밀한 답사일정과 거기에 맞는 예산을 적절히 짜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사전 자료 조사는 답사의 유물과 유적지뿐만 아니라 예산과 관련한 식비. 숙박비, 교통비와 같은 것도 매우 중요하다. 일정표와 예산표를 짜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 일정․예산표

시각

장소

수입

지출

잔액

09:00

경주역

회비5만원 * 4명 =20만원

0

20만원

09:30

대릉원

 

입장료1500원*4명=6000원

19만4천원

11:00

 

자전거 5천원*4명=2만원

17만4천원

11:30

김유신장군묘

 

입장료500원*4명=2000원

음료수1000원*4명=4000원

16만8천원

12:30

점심식사

 

10000원 *4명=4만원(음료)

12만8천원

13:30

무열왕릉

 

입장료1000원*4명=4천원

12만 4천원

 

위의 예산․일정표는 예로 간단히 짜 보았다. 일정표와 예산은 아주 자세히 짜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리고 예산은 조금 넉넉히 하는 것이 좋다. 왜냐하면 답사 중 예상치 못한 경우가 생길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일정표 역시 약간 넉넉히 하는 것이 보다 좋은 답사가 될 것이다.

 4) 준비물 준비

꼼꼼히 준비물을 준비하는 것은 답사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메모지와 필기 도구, 카메라는 기본일 것이다. 그리고 지도는 준비해 가는 것이 좋지만 답사하는 곳에서 사는 것도 나쁘지 않다. 왜냐하면 그 지역의 알맞은 지도는 그 곳에서 구하는 것이 더 효율적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비상약을 준비하는 것은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계절에 맞는 의복과 여벌의 옷 등 여행을 할 때와 같이 꼼꼼히 준비 해야할 것이다.

 5) 답사 중 주의점

자신이 철저한 준비와 자료조사가 되었다면 이제 답사하는 것만이 남았다고 생각된다. 답사는 자신이 원하는 것과 그 보다 더 값진 것을 얻어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냥 보는 것 외에 사진을 찍어 그 모습을 담는 것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모든 유적에는 유적을 설명하는 팻말이 붙어 있다. 이 것을 그냥 지나치는 일이 없도록 해야할 것이다. 그리고 의문나는 점이 있으면 안내원이나 그곳을 관리하는 사람에게 문의하는 것 또한 좋은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많은 것을 보고 느끼는 것도 매우 중요하지만 우수한 문화유산을 훼손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사진촬영이 금지된 곳에서 사진을 촬영하는 행위나 쓰레기를 버리는 행위, 고분이나 잔디밭에 올라가는 행위는 우리가 답사를 하는 동안 하지 말아야 할 행동 중 하나이다. 박물관이나 여러 사람이 모여있는 공공장소에서 휴대폰 통화나 시끄럽게 떠드는 행위도 주의해야 할 점이다.

많은 것을 얻어오는 답사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우리가 꼭 지켜야하는 답사예절이라고 생각된다.

 6) 답사를 다녀와서

답사를 다녀와서 “아! 다녀왔는데 좋더라”로 끝이 나면 안될 것이다. 답사보고서나 기행문을 쓰면서 다시 한번 답사의 감동을 느끼는 것, 또한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될 올바른 답사를 위한 제안 중 하나 일 것이다. 자신이 전문성을 가지는 답사를 했다면 보고서를, 전문성보다 감동을 주는 답사를 했다면 기행문을 쓰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리고 사진 자료를 잘 정리하는 것 또한 중요한 일이다. 그리고 아쉬운 점을 기록하고 다음 2차 답사를 준비하거나 다른 답사를 할 때 유용하게 쓰면 더욱 알찬 답사가 될 것이다.

 4. 결론

지금 까지 나름대로 올바른 답사문화에 대한 제안을 해 보았다. 물론 힘들겠지만 이렇게 한다면 보다 좋은 답사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올바른 답사문화에 대한 제안’을 하면서 나름대로 하나의 정의를 하고 싶다. 답사란 세 가지가 중요하다. 답사 전 철저한 준비, 답사 중 올바른 답사 행위, 답사 후 답사를 정리하는 보고서나 기행문. 이 세 가지가 완벽하게 이루어진다면 가장 이상적인 답사가 될 것이라고 본다.


  Comments,   0  Trackbacks
댓글 쓰기
조선시대에도 남성 출산휴가가 있었다?

출산휴가, 남자들에게도 해당되는 말일까요?

관련 법 조항을 살펴보니

"남녀고용평등과 일.가정 양립지원에 관한 법률" 제 3장 18조의 2(배우자출산휴가)에따르면,
1.사업주는 근로자가 배우자의 출산을 이유로 휴가를 청구하는 경우에 3일의 휴가를 주어야한다.
라고 되어있습니다.

대기업을 비롯한 일부 기업에서는 3일의 휴가를 인정해주고는 있는데
그렇지 못한 곳이 훨씬 많은 것이 현실입니다.

21세기에도 생소한 남자들의 출산휴가, 조선시대에도 있었다면 믿으시겠어요? 


놀랍게도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남자도 출산휴가가 있었다고 합니다.
노르웨이 같은 복지 선진국들처럼 우리나라의 출산휴가도 확대된다면 출산 장려에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Comments,   0  Trackbacks
댓글 쓰기
역사란 무엇인가

 

 
 과거의 단순한 사실을 가지고 새로운 해석과 가치를 부여해 역사적 사실로 만드는 것이 역사가의 작업이자 몫입니다. 단순한 사실도 역사가의 새로운 생각과 역사적 상상력을 통해서 재구성되어 살아 숨쉬는 새로운 역사가 되는 것이죠이런 의미에서 모든 역사를 생각의 역사라고도 하는 것입니다. 역사가는 과거의 사실이 없으면 뿌리가 없는 쓸모없는 존재이며, 과거의 사실은 역사가가 없으면 생명을 얻지 못해 무의미합니다. 역사가와 사실은 대등하게 서로 상호 작용하여 영향을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거죠. 이런 뜻에서 영국의 역사학자 E.H.Carr는 역사는 역사가에 의해 항상 다시 쓰여진다는 점을 밝히면서 '역사는 역사가와 사실 사이에서 일어나는 상호 작용의 계속적인 과정이며,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결국 역사를 배우는 이유는 과거의 사실을 반추하여 현재의 상황을 이해하고, 보다 진보적이고 발전적인 미래를 준비하는 것이기 때문에, 과거와 현재 및 미래는 시간적으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연속적인 과정 중의 일부라고 볼 수도 있다는 것의 Carr의 주장입니다
 

 
 이러한 카의 생각은 '역사가는 자기 자신을 죽이고 과거가 본래 어떠했는가를 밝히는 것을 지상 과제로 삼아, 오직 역사적 사실로 하여금 이야기하게 해야한다'고 말한 독일의 역사가 랑케의 역사인식과는 다른 것이었죠. 역사는 주관을 철저히 배제해야 한다는 랑케의 주장과는 달리, 그는 역사가 주관적일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 셈이니까요.

 '
역사가 오늘의 사건을 심판해 줄 것이다'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에게는 지금은 별로 중요하지 않게 여겨지거나 혹은 나쁘게 여겨지는 자신의 행동이, 후에는 분명 좋은 평가를 받게 될 것이라는 확신이 있죠. 이처럼 어떤 사건에 대한 평가는 고정불변의 것이 아닙니다. 시대가 변하게 되면 그에 따라서 과거에 일어난 역사적 사건의 의미도 변할 수 있는 것입니다.

 


  Comments,   0  Trackbacks
  • 아~ 국사 진도 나가기 전 첫강의마다 들었던 이야기다 "역사란 무엇인가"
    요고는 "역사" 뿐 만 아니라 개인의 '히스토리'에도 마찬가지 이야기인거같애 - ㅋ
  • 잘 읽어 봤습니다. 세계사 배우면서 E.H 카아에 대한것은 들어는 봤는데 님글 보니 여러 생각이 드네요 앞으로 역사관련 포스팅 자주 올릴생각인데 가끔씩 들러서 충고해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ㅎㅎ
댓글 쓰기
인문학의 위기에 대한 단상


 인문학을 그 자체로 가치있는 것으로 물신주의화하는 관념론자들, 그리고 배부른 사치로 여기는 유물론자들 둘은 동일한 족속이라는 것. 둘다 인문학은 고상한 거라는 허구적 정체성의 형성에 기여하고 있다. 혹은 그것에 기반해 있다.

인문학을 제도화하고 거기에 대해서 시장의 분배를 정책적으로 기대하는 사람들이 인문학의 위기를초래한 장본인들이다. 그들은 시장에 반대한다면서 동시에 시장의 분배를 그것도 인문학에 대한 특권적 분배를 기대한다. 얼마나 아이러닉한 일인가. (이것은 한국의 인디음악담론도 마찬가지다.)

 인문학은 삶의 증상이자 삶의 틈새를 사유하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조건 안에서 곧바로 길어져오는 것이지 특정 제도들이 독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인문학이 직업이나 제도로서 사회에서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인문학을 배우는 것을 꺼려하는 것. 그것이 인문학의 위기인 것은 아니다. 인문학이 제도적, 시장적으로 엄청 호황을 누린다고 해도 그게 꼭 위기가 아니게 되는 것도 아니다.

 인문학의 위기는, 사람들이 세계를 자기자신을 타인을 삶을 더이상 사유하려 하지 않는다는, 그 근원적인 사실에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런 질문을 던져볼 수도 있을 것이다. 꼭 사유를 해야만하는가? 그렇지 않다. 사유는 삶에서 강제되는 것이다. 더이상 사유가 강제되지 않는다면 굳이 나서서 제도적으로 혹은 시장적으로 사유를 권장할 필요는 없다. 특히 교양화할 필요는 더 더욱 없다.

 가라타니 고진이 근대문학의 종언을 외쳤던 것처럼 우리는 우리 시대에 이 포스트모던한 시대에 인문학의 종언을 외쳐야 할지도 모른다. 언젠간 그런 때가 오게 될지도 모른다. 인문학이 삶의 증상이고 간극과 틈새에 의해 생겨나는 것이라면 그런 간극과 틈새가 없는 세계에는 인문학 자체의 필요성도 없어지는 셈이다. 우리 시대가 그런 시대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문학이 항상 그런 틈새와 간극을 사유하는 것이라는 고진의 말은 인문학의 위기를 조금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게 만든다. 즉 그런 틈새와 간극이 사라진 시대에는 인문학은 종언을 자연스럽게 맞이한다는 것이다. 

 즉 후역사적, 탈역사적, 포스트모던 시대인 지금 시대는 옛날에 가능했던 틈새와 간극의 사유로서
삶의 증상으로서의 인문학이 더이상 불가능해진 건 아닌지 하는 생각인 것이다. 인문학의 조건이 이미 와해된 것이다. 이 조건은 제도적, 시장적 조건이 전혀 아니다. 그것은 사유할만한 틈새와 간극 증상이 전부 사라져버린 것에 가깝다. 혹은 적어도 사라진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인문학이 항상 항구적으로 존재해야만 한다는 것. 이런 관점이 오히려 오류라면 어쩔 것인가. 인문학이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는 인문학의 조건이 이미 와해되버린 시대가 지금이라면 어쩔 것인가. 제도와 시장에 대한 호소는 그 조건의 와해를 감추는 산소마스크라면 어쩔 것인가. 근대문학이 종언한 것처럼 인문학 전체가 종언한 거라면 어쩔 것인가. 충분히 그럴 가능성은 있다. 문학이 시대와 세계에 대한 사유를 중단한 것처럼 인문학도 더이상 인간조건 자체에서 나오는 증상이나 간극 틈새에 대한 사유는 아니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 한에서 제도와 시장이 그걸 인공적으로 생명을 연장시키려 노력한다 해도 그건 부질없는 짓이다. 

 나는 요즘들어 굉장히 자주 속물들의 자기고백적인 글을 보곤 한다. 인문학을 고상하게 여기는 부류
들. 그들은 이젠 한치의 부끄러움도 없이 단지 상징가치와 고상함을 획득하기 위해 인문학을 본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리고 사실은 당신들도 그렇지? 하고 은밀하게 동의까지 구하고 있다. 그런 글이 인기를 끌고 유행하는 것이야말로 인문학의 위기를 증거하는 하나의 징후인 셈이다. 인문학은 그런 속물들에겐 삶에 덧붙이는 하나의 악세사리로 사치로 기능하고 있다. 그리고 마치 그 사치와 악세사리 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 최후의 인문학적 제스츄어인 것처럼 여겨지고 있다. 이미 대학 세미나의 뒷풀이는 바로 그런 의미 밖에는 없어졌다. 그들은 철학 뭐 있겠어? 하면서 자신들이 배우는 것에 대해 이미 냉소적 주체가 되어가고 있다. 문학 동호회에서도 마찬가지다. 속물들의 자기고백적 글은 도처에 있다. 어쩌면 그것은 솔직함이라는 미덕은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비판받아야 하는 이유는 다른 모든 사람들도 그럴거라고 성급하게 일반화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에게 인문학은 밥이나 잠이나 공기를 마시는 것처럼 삶의 일부분이다. 전혀 악세사리가 아닌 것이다. 그런 식의 속물의 고백과 동의를 구하는 식의 글들을 보다보면 언제나 나에겐 아무것도 고백할 것도 자백할 것도 동의할 것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삶의 증상으로서의 인문학. 그게 모든 인간에게 꼭 필요하다는 것은 아니다. 단지 그런 증상이 간극이 틈새가 사유를 강제하게 되는 그런 종류의 인간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이다. 나도 그런 사람 중 하나이다. 그런 사람들에겐 속물의 자기고백과 동의를 구하는 식의 은밀한 미소는 그저 순수하게 구역질 밖에는 불러올 수 없는 것이다.

 그들은 정확하게 이글의 맨 처음에 말했던 그 두가지 사이를 맴돌고 있다. 인문학 자체를 물신주의화 해서 고상한 것으로 항유하면서 동시에 그것을 배부른 자의 사치로 짐짓 유물론적으로 깎아내린다. 리고 결국 자신들의 생활, 삶, 가족, 직장, 이런 것의 중요성을 내세운다. 이런게 아마 전형적인 물들의 자기고백 패턴일 것이다. (키치적 취향을 유물론적으로 정당화하는 것은 옵션이다.) 그들은 군가의 삶, 생활, 가족, 직장, 그런 것들이 바로 인문학의 조건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다. 혹은 망각하고있다. 혹은 그 둘을 허구적 이분법으로 분리시키고 있다. 인문학은 고상한 것도 아니고 배부른 사치도 아니다.(사실 이 두가지 관점은 똑같은 말을 하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다. 고상한 것이 곧 배부른 사치이니까 말이다.) 내가 보기에 저런 속물들에겐 인문학은 굳이 필요가 없다. 필요가 없으니 사치가 되는 것이다. 고상한 교양이 되는 것이다. 악세사리나 상징가치를 부여하는 삶의 장식품이 되는 것이다. 저런 사람들이 대다수라는 것. 속물들의 자기고백이 판을 치고 유행한다는 것. 이것이 바로 인문학의 위기의 가장 대표적인 징후인 것이다. 즉 인문학은 대다수의 사람들에겐 사치이지 이미 필요한 무엇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인문학이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불필요한 사치가 된 거 자체는 잘못이 아니다. 잘못은 그것을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기정사실로 여기는 것이다. 아직은 인문학은 종언을 맞이하지 않았고 누군가에겐 사치가 아니라 삶과 생활과 가족과 직장과 모든 인간조건의 틈새와 간극과 증상에서 직접 길어져나오는 필요라는 것이다. 필요는 사치에 반대되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에게 인문학이 필요없게 될때 그때 인문학은 위기를 넘어서 종언을 맞이할 것이다. 그때도 속물들이 인문학을 장식품으로 사치로 악세사리로 이용할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그런건 이미 그때가서는 중요하지도 않은 문제일 것이다. 그때엔 이미 아무래도 좋은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지금은 인문학을 필요로 느끼는 사람들이 많으며 그 필요를 사치로 환원하는 것은 대단히 잘못된 것이다. 인문학의 위기는 제도든 시장이든 속물이든 무엇이든 간에 인문학을 필요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 사치로 여기는 것에서부터 존재하는 것이다. 즉 삶과 사상, 삶과 철학을 따로국밥으로 여기는 관점에서 비롯된 것이다. 언젠가는 인간조건이 어떤 사유도 필요로 하지 않고 강제하지 않을 시대가 올지도 모른다. 나도 그런시대를 바란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나는 인문학을 내 삶에 있어서 여전히 절실히 필요로 하고 있다.



  Comments,   1  Trackbacks
  • 인간이 사유하지 않게된 결정적 이유는 매스미디어 또는 대중문화 때문이라고 봅니다.
    그들은, 생각하고 싶지 않아도 이미 온갖 생각으로 자신들의 삶이 뒤덮혀있죠. 과거 정보의
    부족이었던 세상에서, 오히려 정보의 과잉 또는 정보의 사치의 시대에 놓여있습니다.
    블로거들 또는 제가 그렇게도 싫어하는 조중동도 이러한 과잉정보들의 중심에서
    이슈를 만들어낸후, 사람들이 사유하도록 강요하고 있죠. 자신들이 원하는대로...

    또한 과거의 철학자들은, 세상을 어떻게 열어가야 할지 길을 열어주는, 또는 인간이라는
    개개의 소프트웨어들을 작동시켜줄만한 운영체제를 확립하는데 힘을 쏟았었습니다.
    그러한 그들의 노력이 지금, 현대를 만들었고 과거의 철학은 이미 현실화 되어있죠.
    그들이 만든 세상이 지금 바로 여기에 존재하고 있는데, 그걸 다시 배운다는것이
    조금은 아이러니할수도 있습니다만.. 그들이 만들어놓은 세상을 다시한번 점검해보는게
    세상을 올바로 볼수 있는 길인것같기도 하고..

    무엇보다 중요한건, 지금 신자유주의와 복지사회 사이에서 새롭게 나아가야만 하는
    새로운 "근대"에 놓여있건만, 철학자들은 전혀 새로운 인간 세상의 운영체제를 내놓지 못하고
    있는게 아닐까 싶습니다. 그들은 이미 너무 배부른 인간들이 되어버려서, 앞으로 인간이
    나아가야할 뭔가를 찾기보단, 그들이 알고 있는 지식을 돈벌이로 파는데에만 급급하다든지..

    어찌보면 블로그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사람들이 생각을 정리하고 있는 것들이
    과거의 철학이 인간을 변화시킨 역할을 대신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과거 프랑스 혁명전에
    이성주의자들이 백과사전 편찬을 필두로 하는 계몽주의라는 "바람"이 잠시나마 불었던것이
    그들의 혁명에 도움이 되었던것처럼, 새로운 인터넷 이성주의가 열린다면 소수의 네티즌
    또는 블로거들이 세상을 뒤흔드는 새로운 길을 열지도 모르겠네요.

    미네르바 라는 사람처럼 말입니다.
  • Fashion community attracts numerous teenagers today not simply given that it is a alternatively new career, but additionally it really is intended to realise person's likes from the field of trend. Furthermore, it can be really a high-paid profession currently. Any time a younger human being decides to link her or his exercise using the vogue market place next to nothing arrives to thoughts apart from an individual its part - style layout. In all probability, several persons in fact know that it truly is a separate discipline of vogue industry. Believe it or not, you can find a fantastic quantity of other professions and specialties in such as creating clothing, design and style, selling, merchandising, and so on.
  • 거대한 평가 사과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그냥 순수하게이 특정하고, 또한 몇 가지 다른 사람들이 발표했습니다 예외적인 평가는, 그것이 대답을하지 않는 경우가 찾고 평가에 도움을 줄 것입니다 기대와 함께, 현대 마이크로 소프트 준을 따뜻하게 오전 하십시오.
댓글 쓰기
<아라비아 로렌스>의 거짓말

  영국의 거장 데이비드 린 감독이 미국 자본으로 만든 70MM 영화 <아라비아의 로렌스>(1962)는 사막의 아름다움과 영웅의 열정, 그리고 감동을 담은 세기의 걸작이다.

 
여기에 사막을 종횡무진하는 영국인 T . E . 로렌스가 있다. 그는 아랍인들의 독립을 위해, 외세배척을 위해 아랍인들을 이끌고 몇 안되는 군사로 연전연승을 거두며 아랍인들의 존경심을 얻는다. 그러나 아랍인들의 독립을 위한 명목으로 시작된 이 아랍반란이 끝난 직후, 영국이 약조를 어기고 아랍인들의 독립을 인정해주지 않자, 회의를 느낀 로렌스는 양심에 따라 장교를 그만두고 오토바이 사고를 내서 사망하며 불꽃같은 인생을 마감한다. 
 
 
아름다운 금발 머리와 푸른 눈을 가진 그는 현대영웅의 초상으로 남았다. 로렌스에 대한 이 이야기들은 그의 저서 <일곱 가지 지혜의 기둥>과 <사막의 반란>에 기초한 이야기들이다.

  "아랍인들은 영웅으로서의 로렌스는 전혀 모른다."

  영웅은 만들어진다. 로렌스 또한 그런 부류 중 하나이자 자신의 거짓말로 거짓된 역사를 완성한 인물이다. 로렌스에 대한 모든 이야기는 그의 입과 그의 저서로써 밝혀진 이야기들이지 다른 사람의 증언은 없다. 그에 대한 사진을 비롯해 몇몇 자료들이 있지만 그가 아랍반란의 선두를 지휘한 영국인 지도자라는 증거는 일절 없다. 결국 당시 아랍인들의 증언을 통해 사실을 알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아랍인들은 로렌스가 누군지 모른다고 한다. 이것은 도대체 어찌 된 사실인가?

  아랍반란의 주역은 로렌스가 아니다. 파이잘 왕자의 아버지인 후세인왕 휘하에 있던 아랍인청년들이었다. 
 
 (당시 영국은 아랍반란의 전면에 나선 적이 없었다. 외교사절단 몇명, 보급물자 몇몇, 전쟁경과를 보고해주는 종군기자 몇명. 이 정도가 아랍에 대한 영국의 모든 지원이었다. 영국은 1차대전 터키와의 싸움에서 위기를 피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아랍이 뒤를 치도록 만드는 것이 목적이었을 뿐 아랍의 독립을 생각하진 않았다. 파리강화회의에서 아랍의 독립을 철저히 무시한 것이나, 맥마흔 선언으로 아랍의 독립을 보장하고서도 밸포어 선언을 하여 이스라엘 건국의 기초를 세우게끔 빌미를 줘 아랍인들을 기만한것을 봐도 알 수 있다. 무식한 아랍인들은 처음에 그 사실을 믿었다.)

 
로렌스는 파이잘 왕자와 만나 그의 군대를 이끌고 선봉에 서서 전략을 지휘했을까? 이것 역시 거짓말이다. 파이잘군의 지휘관은 이라크인 장교들이었으며, 모든 군단은 아랍인들로 구성되어 있었다.그렇다면 최후의 다마스쿠스 해방은? 이것은 성 안에 있던 아랍인 지도자들과 후세인왕 지휘하 장교들의 내통으로 이룬 승리였다. 이런 자리에 로렌스는 낀 적도 없을 뿐더러 그가 활약할 무대는 없었다. 아랍반란의 모든 것은 아랍인들끼리 이룩해낸 것이었다.

 
로렌스의 이야기를 알게 된 아랍인들측에서는 이러한 로렌스 신화가 너무나도 의심스우며 있지도 않은 사실이라고 이야기 한 바가 있었다. 아랍반란은 많은 아랍인들의 피와 땀으로 이루어진 것. 그런데도 한 영국장교가 영국으로 귀환한 그 날부터 아랍반란의 모든 공로가 로렌스에게 돌아가 버릴 줄은 꿈에도 몰랐다고 말하였다.

  그렇다면 로렌스는 누구인가?

  로렌스는 영국의 고고학자이자 중동 문명에 관심이 깊던 사람이었다. 그는 1차대전에서 영국 외교사절단의 외교관을 맡았고, 아랍반란의 경과를 영국에 계속해서 제공하는 중재자이자 종군기자 수준이었던 인물이다. 전쟁에 나선 적은 전혀 없으며, 일부 아랍 장교들의 눈에 띈 적 조차 없었다.

 아랍인들은 그를 기억한다. 그는 후세인 왕에게 1921년 팔레스티나에 유태인들의 독립국가를 가지게끔 보장한 '밸포어선언'을 인정하라고 협박적인 외교를 한 인물이었다. 영국의 무력을 등에 엎고 후세인 왕을 협박한 더러운 영국인 외교관. 이것이 아랍인들이 기억하는 로렌스의 모든 것이다.

 슐레이만 무서라는 작가가 있다. 그는 <아랍이 본 아라비아의 로렌스>라는 저서를 출판한 적이 있다. 로렌스에 대한 허구를 알리고 진실을 외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이런 시도는 크게 성공하지 못했다. 데이비드 린의 영화 <아라비아의 로렌스>가 너무나도 확고하게 로렌스의 이미지를 완성하였으며, 서구인들이 기록한 역사를 세상은 무조건 믿었기 때문이다.

  <아라비아의 로렌스>는 명백한 역사왜곡이자 아랍인들에 대한 모독이자 기만이다. 지금 사전과 미디어, 모든 검색 매체에서 로렌스를 찾으면 그는 아랍반란의 영웅. 아라비아의 로렌스. 이런 모습으로 그려진다. 보여지는 것만이 진실은 아니다. 사실과 역사는 다르다. 하지만 <아라비아의 로렌스>는 너무나도 서구 우월주의적인 사고방식과 아랍의 미개함과 열등함을 노골적으로 표현한 예이다. 이것에 대해 우리는 어떤 딴지조차 걸어보지 않는다. 우리 역시 서구 우월주의 이데올로기에 우리도 모르게 쪄들어 버렸기 때문이다.

  Comments,   0  Trackbacks
댓글 쓰기
일본, 삼국시대에도 한반도 지배?

 지난주에 화제가 되었던 일본 지유샤의 새로운 우익교과서에 임나일본부설이 또 끼어있다는 군요. 먼저 임나일본부설은 일본의 야마토왜[大和倭]가 4세기 후반에 한반도 남부지역에 진출하여 백제·신라·가야를 지배하고, 특히 가야에는 일본부(日本府)라는 기관을 두어 6세기 중엽까지 직접 지배하였다는 설입니다.

 일본이 주장하는 임나일본부설의 근거로는  여러가지가 있지만 그 중 하나로 만주에 있는 광개토대왕비를 들 수 있겠습니다. 일본은 제국주의의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해 광개토대왕비의 글자를 교묘하게 변조합니다.

百殘新羅舊是屬民 由來朝貢
而倭以辛卯年來 渡海破
百殘 □□□羅 以爲臣民
以六年丙申 王躬率水軍
討利殘國

백잔신라구시속민 유래조공
이왜이신묘년래 도해파
백잔□□□라 이위신민
이육년병신 왕궁솔수군
토리잔국

일본의 주장은 □□□에 들어오는 글자가 "임나신"이라고 해서 "일본이 바다를 건너 백제와 신라를 깨뜨리고 신민을 삼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주장은 □□□에 들어가는 글자의 첫칸에 들어갈 글자가 "동"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앞자가 "동"자가 들어가면 그 뒤엔 정, 벌, 침,등의 동사가 오게 되고 주어는 자연히 백제가 되어버린다는 주장입니다. 그러면 해석은 "병신 육년 대왕은 수군을 거느리고 백제를 토벌했다 라는 해석이 됩니다.

광개토대왕비는 이렇듯 교묘하게 변조되어 있습니다.
물론 한국사학계에서조차 광개토대왕비가 어떻게 변조되었다고 단정짓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정황증거들이 있습니다.
이번 지유샤판 왜곡 교과서에 또 다시 기재될 임나일본부설은 일본의 청소년들에게 한반도는 한때 일본이 지배했던 땅이니 언제가는 다시 찾아야 한다라는 아주 위험한 생각을 심어 주고 있습니다. 사실 교육계뿐만 아니라 일본 사회 전체에 창궐하고 있는 우경화는 우리가 반드시 경계해야하며 일본은 이 같은 행위를 당장 중단하고 전범국으로서 국제 사회에 대해 진심으로 사죄해야할 것입니다.



아래는 백과사전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야마토 왜의 '남선경영설(南鮮經營說)'이라고도 불린다. 이 주장은 현재 일본의 교과서에 수록되어 일본인의 한국에 대한 편견과 우월감을 조장하고 있다. 일본의 임나일본부에 관한 연구는 이미 17세기 초에 시작되어 19세기 말에는 본격적인 문헌고증에 의해 정설로 뿌리를 내림과 동시에 각국에 소개되었다. 이를 통해 3세기경에는 외국에 식민지를 건설할 정도로 일본의 고대사회가 발전하였다는 논리로 나아갔고, 한편으로는 일본 제국주의의 한반도 식민지배를 정당화하는 논리로 이용하였다.

이처럼 임나일본부설은 일본의 한국에 대한 제국주의적 침략행위를 과거로의 환원으로 정당화하는 도구로 사용되었으며, 일본인과 한국인은 본래 같은 뿌리에서 태어났다는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과 함께 표리관계를 이루면서 35년간의 식민통치를 합리화하는 관념적 버팀대로서 기능했던 것이다. 따라서 식민사학의 극복을 논의할 때, 임나일본부설에 대한 비판과 부정이 빼놓을 수 없는 과제가 됨은 당연하다.

임나일본부설의 근거로는 보통 4가지가 제시되고 있다. 그 중 핵심적인 것이 《일본서기(日本書紀)》에 적힌 내용이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진구황후[神功皇后]가 보낸 왜군이 369년 한반도에 건너와 7국(國)과 4읍(邑)을 점령하였고, 그뒤 임나(任那:伽倻)에 일본부가 설치되었으며, 562년 신라에 멸망하였다고 한다. 즉 일본은 369년부터 562년까지 약 200년간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으며 중심기관이 가야에 두어진 임나일본부라는 것이다. 광개토대왕비(廣開土大王碑)도 그 주장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거론되었다. 비문의 신묘년(391년) 기사를 "왜가 바다를 건너와 백제와 임나·신라 등을 격파하고 신민(臣民)으로 삼았다"고 해석하여, 당시 왜국의 한반도 남부 지배를 알려주는 결정적 증거라고 주장하였다.

한편 남조(南朝)·송(宋)·제(齊)·양(梁) 나라의 역사기록에 나오는 왜왕의 책봉기사도 들고 있다. 여기에는 왜왕이 "왜백제신라임나진한모한제군사왜국왕(倭百濟新羅任那秦韓慕韓 諸軍事倭國王)"이라는 관작(官爵)을 인정해줄 것을 요청하였고, 송에서는 백제를 제외한 나머지 지역에 대한 왜의 지배권을 인정하는 듯한 칭호를 내린 것으로 되어 있다. 그리하여 이소노카미신궁[石上神宮]의 칠지도(七支刀)도 왜의 군사적 우세와 한반도 남부 지배를 인정한 '번국(蕃國)' 백제가 야마토조정에 바친 것으로 해석되었다.

그러나 '임나일본부'란 명칭은 《일본서기》의 6세기 전반에 해당하는 기록에는 빈번히 나타나지만 한국의 기록에는 전혀 나오지 않는다. 이 때문에 그 존재 여부조차 의심되었고 이에 대한 반론들이 제기되었다. 제일 먼저 나온 것이 북한학계 김석형(金錫亨)의 분국설(分國說)이다. 이 설에 의하면 삼한·삼국 시대에 수많은 사람들이 한반도에서 일본열도로 건너가 그곳에서 삼한·삼국의 식민지라 할 수 있는 분국들을 곳곳에 설치하였고, 이때 임나일본부는 일본열도 내에 수립된 가야의 분국 임나에 설치된 것이라는 것이다. 이 설은 광개토대왕비문이 석회가 발라져 변조되었다는 주장과 함께, 그 사실 여부보다는 근대 일본역사학의 '제국주의적 체질'에 대한 반성을 촉구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 의미가 있었다.

현재 일본학계에서는 예전처럼 한반도 남부에 대한 식민지경영과 같은 주장은 거의 사라졌으나 임나일본부의 존재를 기내(畿內)의 야마토조정과는 무관한 규슈[九州]의 지방호족에 의해 설치되었다고 보는 견해로부터, 일본의 '출장소' 또는 '‘출장기관'과 같은 출선기관설(出先機關說) 등을 계속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것의 신빙성이 의심을 받자 이제는 선사시대부터 가야지역과 일본열도의 활발한 교류를 들어, 가야지역에 일부의 왜인들이 집단적으로 거주하게 되었고 이러한 왜인들을 통제하는 행정기관이 임나일본부였다는 '가야의 왜(倭)'설이나 왜의 식민지 지배기관이 아니라 가야에 파견된 왜의 사신들로 이해하는 외교사절설(外交使節說) 등 다양한 견해가 제기되고 있다.

반면 한국 학계에서는 대체로 임나일본부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있는데, 가야를 지배했다고 하는 《일본서기》의 '왜'가 실제로는 백제라는 견해와 한반도 남부지역에서 활동한 왜군을 백제의 용병으로 보는 백제군사령부설(百濟軍司令部說)이 있다. 최근에는 임나일본부는 왜의 통치기관이나 백제의 군사령부와 같은 것이 아니었으며, 임나(任那)와 안라(安羅)에 파견된 왜의 사신인 기비노오미[吉備臣]와 가와치노아타이[河內直]였다는 주장도 나왔다.

한반도 남부에서 활동했던 '왜(倭)'의 문제의 총합으로서 제기되는 임나일본부 문제는 한국고대사의 복원뿐만 아니라 한일관계사 및 동아시아 역사상(歷史像)의 재구축과 올바른 한·일관계 정립을 위해서도 중요한 문제이다.

  Comments,   0  Trackbacks
댓글 쓰기
공중정원, 영원한 고대의 불가사의

세미라미스의 공중정원


 공중정원은 실제로 공중에 떠있는 것이 아니라 높이 솟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연속된 계단식 테라스로 된 노대에 풀과 꽃, 수목을 심었기 때문에 멀리서 보면 마치 삼림으로 뒤덮인 작은 산과 같다. 현대적 관점에서 보면 계단식 아파트의 발코니에 꽃과 커다란 나무들을 심은 것과 유사하다. 공중정원이 있었다는 바빌론은 고대 바빌로니아의 수도다. 바빌론은 수많은 정복자들에 의해 정복을 당했는데 그것은 이 지역을 차지하는 민족이 세계를 지배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곳을 지나간 유명한 왕들은 수없이 많으며, 그 중에서도 바빌론을 재건하고 공중정원을 직접 건설했다는 아시리아의 정복자 세미라미스가 매우 유명하다.

 놀랍게도 세미라미스는 남자가 아니라 여자다. 세미라미스에 대한 전설은 오래전부터 알려져 있었다. 학자들은 세미라미스를 기원전 8백23년에서 8백10년까지 바빌론을 통치했던 삼시 아다드 5세의 왕비인 ‘사무-라마’로 여긴다. 삼시 아다드 5세는 유명한 아슈르나시르팔왕(기원전 883-859)의 손자다. 세미라미스가 역사상 가장 유명한 왕 중 한명으로 거론되는 것은 바빌론을 재건축했기 때문이다. 당시까지는 님루드가 수도였는데 그녀는 수도를 바빌론으로 옮겼다. 수도를 옮기기 위해 재건한 바빌론은 고대의 바빌론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거대한 성곽을 가진 도시였다.

 고대에서 가장 넓은 성곽이라고 해도 폭이 8m에 지나지 않았으나 바빌론의 성곽은 무려 17.7m가 됐다는 것이 근래의 발굴에 의해 알려졌다. 외부 성곽은 11.3km이며, 내부 성곽은 6km다. 성곽 옆으로 흐르는 유프라테스강을 건널 수 있는 커다란 기둥으로 된 다리가 놓여졌는데, 기둥들의 간격은 3.6m, 다리의 폭은 9m였으며 4마리의 말이 끄는 전차가 다닐 수 있을 만큼 폭이 넓었다. 이 성채는 1백개의 문을 갖고 있었다. 성벽이 어찌나 거대하고 방문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는지 현재의 세계 7대 불가사의가 확정되기 전부터 세계의 불가사의에 단골로 들어간 기념물이었다. 사실 세계 7대 불가사의의 명명자라고도 볼 수 있는 필론도 자신이 선정한 세계 7대 불가사의에 파로스섬의 등대 대신 바빌론의 성벽을 선정했다. 바빌론은 세계 7대 불가사의에 거대한 성벽과 공중정원 등 두개가 포함됐다는 뜻이다.

설계자는 누구인가

 한편 공중정원은 기원전 5백년경 신바빌로니아의 네부카드네자르 2세가 왕비 아미타스를  수도인 바빌론에 건설한 정원이라고도 알려져 있다. 네부카드네자르 2세(성경에서는 느브갓셀 2세라고도 함)는 바빌론의 왕이 되자 메디아왕국 키약사레스왕의 딸 아미티스를 왕비로 맞았다. 산이 많아 과일과 꽃이 풍성한 메디아에서 자란 왕비는 평탄하고 비가 잘 오지 않는 바빌론에 마음을 두지 못한 채 항상 아름다운 고향의 푸른 언덕을 그리워했다. 이 모습을 보고 안타깝게 여긴 왕은 왕비를 위해 메디아에 있는 어떤 정원보다도 아름다운 정원을 바빌론에 만들라고 명령했다. 왕의 명령을 받은 건축가는 곧장 작업에 들어가 왕궁의 광장 중앙에 가로·세로 4백m, 폭 15m의 토대를 세우고 그 위에 계단식 건물을 세웠다. 한층이 만들어지면 그 위에 기름진 흙을 옮겨 놓고 넓은 발코니에 잘 다듬은 화단을 일궜다.

 그렇다면 이쯤에서 진짜 공중정원을 건설한 사람은 누구일지 궁금해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세계 7대 불가사의의 경우 공식적인 이름은 ‘세미라미스의 공중정원’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 공중정원을 건설한 장본인으로는 네부카드네자르 2세도 거론되기 때문이다. 결국 두사람 모두 공중정원을 건설했다고 보면 의문점이 해결된다. 사실 테라스에 나무나 풀을 심는 것은 메소포타미아의 강가에 사는 사람들에게 매우 보편적인 것이었다. 즉 도시 주위를 흐르는 강물을 이용해 식물을 재배하는 정원은 매우 오래전부터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대영박물관에 보관된 니니브의 소위 ‘나무로 꽉 채워진 장소 아래에서의 향연’으로 유명한 아수르바니팔왕과 왕비가 나무 그늘 아래에서 향연을 베푸는 그림으로도 알 수 있다.

 디디오르가 기록한 공중정원의 모습은 다음과 같다. “인공정원은 한변이 거의 1백20m의 사각형으로 마치 극장과 같이 계단으로 한단씩 올라가게 설계됐다. 테라스 또는 플랫폼에 재배되는 모든 식물의 무게는 높낮이가 있는 기둥으로 지지되도록 했다. 가장 높은 기둥은 약 25m로, 정원 최상부를 지지하며 벽체의 두께는 6.6m나 된다. 테라스는 돌출부분을 포함해 16×4피에(1 피에 = 0.3m)의 크기로 아스팔트로 많이 칠해진 벽돌(갈대를 포함)로 주의를 구분한 후 다시 구운 벽돌로 치장했다. 이곳에 얇은 납판을 붙여 물이 기초 부분으로 흘러 들어가지 않도록 했다. 테라스에서 거대한 나무들의 뿌리가 충분히 자랄 수 있도록 해 준 장치인 것이다. 테라스에는 각종 종류의 크고 작은 나무들이 심어져 있어 그 규모나 아름다움이 빼어나다. 기둥의 높낮이도 다르게 만들어 강도가 다른 빛이 들어오도록 유도함으로써 호화롭게 장식된 궁전의 내부 공간에 신비감을 주도록 했다. 단 하나의 기둥이 천장부터 기초까지 내려져 있는데, 이 안에 다량의 강물을 테라스까지 올릴 수 있도록 만드는 수력기계가 들어 있다. 그러나 이 기계는 밖에서 볼 수 없다.”

물을 공급하는 두가지 방법

 비가 거의 오지 않아 사막과 같은 기후를 갖고 있는 바빌론에서 약 4천3백64평이라는 큰 정원에 물을 대는 것은 여간 어려운 문제가 아니었다. 수력기계에 대해서는 두가지 설이 있다. 첫번째 방법은 정원의 맨 위에 커다란 물탱크를 만들어 유프라테스강의 물을 펌프로 길어 올렸다는 것. 체인에 물통을 연속적으로 매달아 상부로 물을 올린 다음 물탱크에 저장했다가 필요한 곳에 물을 흘려주거나 물뿌리개를 이용해 물을 공급했다는 매우 단순한 방법이다. 두번째 방법은 디오도르와 스트라본이 기록한 것으로 아르키메데스가 고안한 수력기계 방식이다. 아르키메데스의 수력기계란 물레방아를 타고 올라온 물을 아르키메데스의 나사에 연결해 꼭대기까지 퍼올리는 구조다. 특히 이 방식의 장점은 물레방아가 도는 힘으로 아르키메데스 나사가 돌면 물이 달팽이식 나선형 홈을 타고 올라간다는 것이다. 이 방식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비롯한 중세시대의 기술자들이 실현시키려고 했던 기술이기도 하며, 광산의 지하에서 물을 퍼올리거나 고층 건물에 물을 공급하기 위해 사용됐다.

 첫번째 방식의 경우 물을 상부로 올리는 체인이 밖에서 보일 수밖에 없다는 단점(일설에는 외부에서 보이지 않는 물레방아를 각 층마다 설치했다고 함)을 갖고 있다. 두번째 방식은 디디오르가 지붕에서 기초까지 내려져 있는 기둥으로 물이 올라갔다는 설명에 부합된다. 하지만 이 경우 각층에 수많은 아르키메데스의 나사, 즉 기둥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설명이 보이지 않는다. 결국 상층부까지 물을 길어 올리는 방법은 이 두가지 방식을 병용하거나, 방문자들이 잘 볼 수 없는 곳에서 사람들이 직접 물을 상부로 길어 올렸다고 가정할 수밖에 없다.

 비가 거의 오지 않아 사막과 같은 기후를 갖고 있는 바빌론에서 약 4천3백64평이라는 큰 정원에 물을 대는 것은 여간 어려운 문제가 아니었다. 수력기계에 대해서는 두가지 설이 있다. 첫번째 방법은 정원의 맨 위에 커다란 물탱크를 만들어 유프라테스강의 물을 펌프로 길어 올렸다는 것. 체인에 물통을 연속적으로 매달아 상부로 물을 올린 다음 물탱크에 저장했다가 필요한 곳에 물을 흘려주거나 물뿌리개를 이용해 물을 공급했다는 매우 단순한 방법이다. 두번째 방법은 디오도르와 스트라본이 기록한 것으로 아르키메데스가 고안한 수력기계 방식이다. 아르키메데스의 수력기계란 물레방아를 타고 올라온 물을 아르키메데스의 나사에 연결해 꼭대기까지 퍼올리는 구조다. 특히 이 방식의 장점은 물레방아가 도는 힘으로 아르키메데스 나사가 돌면 물이 달팽이식 나선형 홈을 타고 올라간다는 것이다. 이 방식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비롯한 중세시대의 기술자들이 실현시키려고 했던 기술이기도 하며, 광산의 지하에서 물을 퍼올리거나 고층 건물에 물을 공급하기 위해 사용됐다.

 첫번째 방식의 경우 물을 상부로 올리는 체인이 밖에서 보일 수밖에 없다는 단점(일설에는 외부에서 보이지 않는 물레방아를 각 층마다 설치했다고 함)을 갖고 있다. 두번째 방식은 디디오르가 지붕에서 기초까지 내려져 있는 기둥으로 물이 올라갔다는 설명에 부합된다. 하지만 이 경우 각층에 수많은 아르키메데스의 나사, 즉 기둥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설명이 보이지 않는다. 결국 상층부까지 물을 길어 올리는 방법은 이 두가지 방식을 병용하거나, 방문자들이 잘 볼 수 없는 곳에서 사람들이 직접 물을 상부로 길어 올렸다고 가정할 수밖에 없다.

공중정원의 발굴
 


 학자들은 아직 공중정원의 위치를 확정한 상태는 아니지만, 비교적 예전부터 공중정원의 위치로 알려진 아무란의 언덕으로 추정한다. 바빌론은 내외 이중성벽에 둘러싸여 있었는데 공중정원은 내성에 위치하며, ‘텔 아무란 이븐 알리’(Tel-Amuran-ibn-Ali, 추장의 언덕)라고도 불렸다.

 바빌론의 폐허는 오늘날까지도 그 모습이 남아 있는데, 이라크 정부는 특히 공중정원을 집중적으로 복원할 계획을 갖고 있다. 바빌론의 공중정원이 다른 불가사의보다 더 유명해진 것은 수많은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불러 일으켰던 바벨탑과 로맨틱한 분위기를 갖고 있는 공중정원의 신화가 혼합됐기 때문이다. 또한 공중정원은 다른 불가사의처럼 인간을 압도하는 것은 아니지만 사랑으로 이뤄진 건물이라는데 더욱 매력이 있다. 천하의 영웅 알렉산더가 자신이 죽을 장소로 바빌론을 지목한 것도 이해가 될 법하다.

  Comments,   0  Trackbacks
댓글 쓰기
한일 해저터널, 뚫어? 말어?

한일 해저터널은 총길이 209.8㎞, 최대수심 192m, 전체공사비는 약 113조원에 이를 것으로 추정하며,토론자로 나선 일한터널연구회 후지하시 겐지 상임이사 역시 건설비용은 10조엔, 공사기간은 최근 터널기술 발전을 고려할 때 약 10년 내외로 추정된다며 적극추진 필요성을 역설했다고 합니다.

 이에 대하여 전 통일원 장관인 허문도씨는 "한일 해저터널이 동아시아 경제를 이끄는 대동맥의 인프라이며, 완성되면 동아시아의 지역통합의 문을 여는 것이라 평가를 했으며, 성장세로 볼 때 북미자유무역협정을 능가하는 공동체로 발전할 것이다" 라고 하면서도 덧붙여 “한일터널은 양국 국민 간 신뢰관계 구축 없이는 엄두를 낼 수 없기 때문에 이전에 마음의 문제이고 역사·문화의 문제”라며, 최대 난제는 한국민의 정서임을 지적했다고 합니다.

 

일제시대의 해저 터널 구상

일제시대일본에 의한 터널 계획은 일본규슈에서 출발하여 한반도를 통과하는 동아시아 종단 철도로서 구상되었으며, 1930년대에 세워진 '동아시아 종단철도'에 대한 구상이 시작이다. 이것은 당시 일본 지배하에 있던 한반도부산을 기점으로 하여, 경성(현재 서울)을 지나, 안동(현 중국 단둥)에서 당시 만주국 영토로 진입, 선양을 지나 중국 영토에서 베이징, 난징 등을 경유하여 베트남의 하노이, 사이공, 프놈펜, 말레이 반도 까지 이어지는 약 10,000km의 노선으로 구상되었다.
또한 1940년대도쿄시모노세키를 연결하는 탄환열차 계획이 세워진 이후, 1942년에 동아시아 교통학회가 설립되고 일본에서 쓰시마 섬을 거쳐 부산과 연결되는 해저 터널을 건설하여 위에서 설명한 동아시아 종단철도와 연결하는 계획을 세웠다. 일본에서의 기점은 시모노세키, 하카타, 카라츠 등이 유력하게 검토되었지만, 확정된 사항은 없다.
이 같은 계획은 일본이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패배함으로서 좌절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후의 구상

1980년대 부터, 한국에서 한일 해저 터널(일본에서는 '일한터널'이라 부른다)을 개통하고자 하는 의견이 일부 단체에서 제시되었다. 그 이후에 일본에서도 시민 단체 등이 한일 해저터널 추진 단체를 설립하여 활동하고 있다.
경로는 일제시대의 해저 터널과 비슷한 노선으로, 사가 현에서 쓰시마 섬을 지나 부산 또는 거제도를 연결하는 구상이 세워져 있다. 이 구상은 자동차 도로와 철도를 같이 건설하는 것을 전제로한다. 공법에 있어서는 해저 지층을 뚫는 방법과 콘크리트로 만든 케이슨(Caisson)을 일정한 해저 심도에 늘어놓아서 구성하는 '해중 터널' 방식이 제안되었다.
또한 한일 양국 정부 모두 현재는 한일 해저 터널은 "앞으로의 계획"이라고만 언급하는 정도이고, 본격적인 착공을 위한 계획은 없다.

 찬성과 반대
찬성하는 쪽은 한일간의 우호 증진이나, 또는 철도가 한반도를 경유하기 때문에 유라시아 대륙 각지를 통과하는 물류 허브로서의 기능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추진 이유로 내세우고 있다. 반대하는 쪽은 항공편을 이용한 수송이 주류인 이 시대에 큰 예산을 들여서까지 이런 터널을 건설할 필요가 있는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있으며, 육상을 통한 대륙 진출을 꿈꾸는 일본에게만 좋은 일을 해 주는 꼴이 되는 것 아니냐는 주장 또한 있으며, 국방에 관계된 문제와 무역관세 등의 문제가 주요한 반대 이유이기도 하다. 최근에는 동북아 물류중심지, 유라시아 철도건설을 표방하고 있는 대한민국이 한일 해저 터널을 설치하면 한국은 간이역이 된다는 주장이 절대적이다.


 

 


  Comments,   0  Trackbacks
댓글 쓰기
십자군, 성전과 약탈의 역사
 지중해를 무대로 전개된 문명교류의 역사

- 십자군, 성전과 약탈의 역사를 읽고

서점을 찾았을 때, 이 책이 바로 눈에 들어왔다. 요즘 읽고 있는 책이 '아랍인의 눈으로 본 십자군 전쟁’인데다가 요즘 문화교류사에 관심이 많기 때문이었다.

이 책은 십자군 전쟁을 통해 지중해를 무대로 전개된 문명교류를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다.

저자는 십자군전쟁을 지중해 양편의 기독교 유럽과 이슬람교 중동이 본격적으로 대립하고 충돌한 사건임과 동시에 기독교와 이슬람 문화의 융합을 촉진한 사건으로 보고 있었다.

11세기 이후 서유럽 사회는 안으로 인구의 증가, 농업 생산의 증대, 도시의 부활 등으로 오랜 침체 끝에 수세의 입장에서 벗어나 적극적인 대외 진출을 꾀하였다. 엘베 강을 넘어 독일인이 슬라브 땅에 식민 운동을 시작하였고, 이베리아 반도에서는 이슬람교도에 대한 재정복 운동이 전개되었다. 무엇보다도 교황권의 신장, 이탈리아 상인과 봉건 제후들의 세속적 욕망, 성지 탈환등 여러 요인이 복합되어 일어난 십자군 전쟁이 유럽 세력 팽창의 대표적 사건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십자군 전쟁처럼 성스러운 이름에 가장 세속적인 욕망이 결합된 전쟁은 없으며, 신의 이름을 빌어 약탈과 살인․만행이 판을 친 전쟁이 없을 것이다. 전쟁의 발단은 예루살렘이었다. 예루살렘은 유대인․기독교인․이슬람 인 공통의 성지였다. 유대인에게는 다윗의 우물이 있는 어머니 도시요, 기독교도에겐 예수가 죽어 부활한 곳, 이슬람교도에겐 마호메트가 머무른 곳이기 때문이다. 당시 예루살렘을 지배하고 있던 이슬람 인들은 기독교인의 성지 순례를 방해하지 않았다. 그런데 셀주크 투르크 족이 이 지역을 장악하면서부터 기독교인의 성지 순례는 금지되었다. 셀주크 투르크 족은 중앙 아시아에서 일어난 민족으로서 열렬한 이슬람교도가 되어 세력을 팽창시키고 있었다. 위협을 느낀 동로마 제국 황제 알렉시우스 1세는 교황 우르반 2세에게 원조를 요청했다. 우르반 2세는 이것이 비잔틴 교회를 로마 교회에 복속시킬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1095년 11월 우르반 2세는 클레르몽에서 회의를 개최, 성지탈환을 위한 십자군 파병을 제창했다. 웅변술 이 뛰어났던 그는 성지 예루살렘을 잃은 기독교도들의 비참한 생활과 투르크 족의 위협을 설명하고, 이슬람의 승리는 기독교 세계의 불명예라고 열변을 토했다. 이 전쟁은 성전이며, 전사자는 모두 천국에 가서 그 보상을 받을 거라고 역설했다. 그뿐 아니라, 동방엔 금은 보화가 깔려 있고 아리따운 이슬람 여인들이 기다리고 있다고 하며 제후들의 욕심을 부채질했다.

1095년 삐아첸자(piacenza)와 끌레르몽(Clermont) 교회 회의에서 교황 우르바노 2세는 동로마제국의 알레시오 황제가 파견한 자들로부터 동로마제국의 위급한 상황을 전해듣고 그리스도의 무덤을 되찾고 동방의 그리스도인들을 구출하기 위해 원정군을 보내자고 호소하여 제1차 십자군 원정(1096~1099년)이 시작되었다.

그리스도께서 사시고 돌아가시어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준 이스라엘 성지순례에 대한 열망, 동방과의 무역을 원하는 이탈리아 상인들의 상업적인 야심등의 요인 복합적으로 결합되어 십자군이 결성되었다. 특히 십자군에 참가하여 대사를 받고 전사할 경우 순교자가 된다는 것도 열성적인 신자들을 원정군에 쉽게 참가하게 하였다. 그러나 제대로 준비되지 않은 제1차 원정에서는 비조직적이고 계몽되지 않은 농부들도 많이 참가하여 교회 역사에 커다란 오점을 남기는 일들이 일어났다.

그들이 라인 지방을 지날 때, 흥분한 나머지 유태인들에 대한 박해로 유혈 참사가 일어났는데 발칸 지역을 지날 때에도 지휘자의 통솔을 제대로 받지 않은 이들은 지방 주미들에게도 방화와 학살로 참극을 일으켰다. 전투경험이 전혀 없는 많은 원정군들이 예루살렘에 도달하기도 전에 셀주크족의 공격을 받아 전멸하였다. 그러나 나머지 원정군들이 악전고투 끝에 1098년 안티오키아를 함락하고 1099년 7월 예루살렘을 정복하였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도 부녀자와 유아와 노인들까지 무차별적으로 참살하는 비 그리스도교적인 만행을 저질렀다. 서유럽에서 이곳까지 도달하는 전투에서 이슬람군들의 매복병들의 습격을 받아 매일 매일 수많은 동료들이 전사하는 가운데 겨우 살아 남은 이들의 보복심리와 이슬람 군들의 항전의 악순환이 서로를 살육의 참상으로 몰고 갔다.

이런 악순환의 결과는 생사의 기로에서 양측 모두 이성적인 자제력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서 자신들의 신앙의 가르침과는 전혀 무관하게 생존의 본능만이 절대 기준이었다고 볼 수 있다.

제2차 원정은 이슬람 세력의 반격으로 에뎃사가 함락(1144년)되면서 시작되었는데(1147~1149), 끌레르보의 베르나르도 성인의 설교로 추진되었지만 터키인들과의 여러 번의 전투에서 전멸되어 결국 예루살렘에까지 이르지 못하고 실패하였다.

제3차 원정(1188~1192)은 붉은 수염의 프리드리히(Friedrich)황제가 인솔한 잘 조직된 십자군들이 이코니움에서 터키인들과 싸워 혁혁한 승리를 거두었지만, 황제가 1190년 살레프에서 익사함으로써 지휘자를 잃은 군대는 더 이상 진군할 수 없었다.

영국의 왕 리차드(Richard) 1세, 프랑스의 필립(Philipp) 2세등이 참가하여 예루살렘 재탈환에는 실패하였지만 십자군들이 성지의 새로운 지역을 정복하고 살라딘 술탄과 화해하여 그리스도교인들에게 평화로운 예루살렘 순례의 자유가 보장되었다.

제4차 원정(1202~1204)은 교황 인노첸시오 3세 교황의 호소로 시작되어 서방 그리스도교 세계의 모두가 마지막으로 이 원정에 참가하였다. 그러나 십자군들은 완전히 교황의 의사를 거스르고, 이기적이고 상업저인 이해관계에서 베네치아의 상인들에 의해 콘스탄티노플을 함라가하고(1204. 4.13)라틴 제국이 그곳에 설립되는 엉뚱한 결과를 낳게 하였다. 이 과정에서 이 되시는 심하게 약탈되고 황폐하였으며, 이러한 난폭하고 비이성적인 행동은 동서교회의 분열을 더욱 심화시키고 이슬람 세력에 대한 동방세계의 방위력이 결정적으로 약화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제 5차 원정(1217~1221년)은 1215년 제4차 라테란 공의회에서 십자군 원정이 결정되어 1217년에 실행되었다. 프리드리히 2세가 십자군 파견을 약속했으나 이행하지 않아 파문을 받았다. 원정군은 동유럽의 신흥 그리스도 국가의 약소한 군사력으로 편성되어 이집트를 공격하여 다미에타를 공격하는 적은 성과를 거두었을 뿐이었다.

아씨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은 성지 재탈환을 복음 정신에 따라 평화로운 포교로 해야 한다는 본래의 정신에 따라 무방비 상태로 성지에 가서 술탄을 설득시키려 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포로가 되었다. 그러나 술탄이 성인을 너그럽게 대우하여 풀려났고, 이것을 계기로 프란치스코회의 평화로운 선교활동이 성지에서 시작되었다.

제 6차 원정(1228~1229년)은 교회 당국과는 무관하게 파문 중에 있는 프리드리히 2세 황제의 개인적인 원정이었다. 그는 이집트 술탄과의 담판을 통해 예루살렘을 그리스도인들에게 반환시키는데 성공하였지만, 그후 1224년 결정적으로 다시 잃게 되었다.

제 7차 원정(1248~1254년) 및 8차 원정(1270년)이 모두 실패함으로써 실제적인 원정은 모두 끝났다. 프랑스의 성왕 루이 9세는 우선 이집트를 정복한 후에 성지를 점령하려 하였으나 1205년4월 카이로에서 완패 당해 후퇴했는데 그의 군대에 전염병이 돌아 전의를 상실하고 포로가 되었고 그의 부하를 위해서는 거액의 몸값을 지불하고 그 자신은 이슬람에게 다미에타(Danietta)를 넘겨주는 조건으로 풀려났다.

서방에서는 차츰 십자군 원정에 반대하는 여론이 조성되고 비폭력적인 설교를 통해 이 지역에 복음을 전파하려는 운동이 일어났으며 유럽 자체 내에서는 이교도 문제, 즉 스페인의 무어인, 이교 슬라브인, 프랑스 남부의 알비파 이단등 더 현실적인 문제들이 다가왔다. 이로 인해 십자군 원정은 사실상 실패로 끝났다.

사실 십자군 전쟁은 모든면에서 성공할 수 없는 전쟁이었다. 십자군전사들이 훈련을 제대로 받지 못한 데다 무장마저 허술 했던 것, 당시의 교통통신 수단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먼 지역으로 원정한 것, 국왕과 대영주들이 참전해 지휘부가 대립한 것, 중동 이슬람에 대한 정보가 부족한데다 심자군 원정의 기본 이념마저 변질된 것 등을 실패의 중요한 원인이라 하겠다.

십자군운동은 우선 유럽에서 교황권의 후퇴, 국왕 권력의 강화와 중앙집권화, 도시와 상업의 발달, 이슬람문화와의 접촉에 의한 문화의 발달 등 모든 일과 관계가 있다. 즉 교황에 의해 제창된 운동의 실패는 그대로 교황의 권위를 약화시켰다. 전사(戰死)에 의해 단절된 귀족 가의 소유영지는 왕령(王領)에 편입되어 왕권의 기반을 강화하였다.

십자군운동으로 최대의 경제적 이익을 본 것은 북이탈리아의 여러 도시였다. 십자군에 참가한 유럽인들은 미지의 이질적인 세계를 발견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영향을 과대하게 평가할 수는 없다. 왕권의 강화는 봉건사회 내부 전개에 기본적 요인을 가지고 있었다. 봉건적인 분열상태에 있을 때에만 유럽세계를 관념적으로 통합할 수 있었던 교황권은 왕권에 의한 중앙집권화와 더불어 쇠퇴할 수밖에 없었다.

도시와 상업의 발달은 십자군운동의 전제조건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대규모의 군대를 먼 곳까지 보낼 수도 없었고 다량의 식량과 무기를 모으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또한 동방문화 유입의 중심지는 시칠리아와 에스파냐였다. 유럽인은 이교문화(異敎文化)에 접하면서도 최후까지 관용의 정신을 배우는 일이 없었다.

또한 제4회 십자군에 의해 와해된 비잔틴제국은 다시 부활하지만 이미 소국에 지나지 않았으며 몰락은 결정적이었다. 그 때문에 비잔틴제국은 이제까지 수행해오던 유럽의 방벽 역할을 잃게 되었다. 이슬람세계에 대한 영향도 컸다. 이슬람교도는 관용의 정신이 풍부했다. 그러나 십자군의 공격을 받게 되자 그들 사이에 점차 비관용성과 민족의식이 고취되었으며, 성전(聖戰)에 대한 정열은 높아갔다.

이 책을 읽으면서 지중해를 배경으로 비록 무력을 동원한 충돌이었지만 두 문명이 교류하는 과정을 볼 수 있었다. 그렇지만 이 책 또한 그동안 읽었던 많은 십자군 전쟁에 관한 책들과 마차가지로 지나치게 유럽의 관점에서 쓰여졌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Comments,   1  Trackbacks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