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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10)
레바논, 천국과 지옥의 혼재


수도 베이루트(Beirut)

 중동의 파리라는 별명을 가진 이 도시는 프랑스 파리와 자매결연이 되어있다. 레바논의 수도이며 가장 큰 도시. 인구는 150만 안팎이다. 서울특별시의 한개 구 정도의 면적에 두개구 이상의 인구를 합쳐놓은 사람들이 사는지라 인구밀도는 매우 높다.

 

*베이루트 시내전경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이루트는 두 개의 도시가 하나로 합쳐진 것으로 봐도 무방할 만큼 동베이루트와 남베이루트가 천지차이를 이룬다. 동베이루트는 레바논 인구의 41%를 차지하는 카톨릭 기독교도 마로니테스(Maronites) 의 거주지역이다. 동베이루트의 전경은 그야말로 파리를 중동으로 옮겨온 것과 다를바 없다. 전쟁 전에는 지중해에서 최고의 휴양도시중 하나였던 베이루트. 동베이루트에 한해 아직 그 말이 유효하다. 고급승용차가 거리에 즐비하고 빌딩들이 우뚝 솟아 있으며 남녀 쌍쌍 모여 다니고 각양각색의 옷차림을 자랑한다. 여자들의 노출도 이곳에서는 이상한 현상이 아니다. 동베이루트는 이슬람지역이 아니기 때문이다. 

*폭격당해 폐허가 된 남베이루트

 반면, 남베이루트는 아귀지옥이다. 남베이루트는 레바논의 국제적으로 악명높은 테러조직 헤즈볼라가 속해있는 종파인 이슬람 시아파 주민들의 거주지역이다. 시아파는 레바논 전체인구의 25%를 차지한다. 즉, 이스라엘 공군이 베이루트를 폭격했다는 말은 사실은 동베이루트가 아닌 남베이루트를 폭격했다는 말이다. 동베이루트는 애초에 이스라엘 공군의 폭격대상에 포함되어 있지도 않은, 완전 다른 도시라는 것이다. 남베이루트의 상황은 처참하다. 길거리의 건물들은 폭격을 당해 모두 폐허가 되어있고 하루에도 몇 번씩 폭탄이 터지며 도시의 모든 기능이 마비되어있는 아비규환의 상태이다. 밤마다 공습의 공포에 시달린다. 남베이루트는 죽은 도시다. 길거리에는 인적이나 차량을 찾아보기 힘들다.

 
레바논의 1인당 국민 소득은 7천불. 우리나라의 반 수준이고, 태국과 비슷하지만 태국보다는 약간 우위에 있다. 이 나라는 세개의 종파가 각기 다른 공동체를 이루면서도 하나의 정부를 구성하는 조화속에서 살아가는 평화로운 나라였고 십여년전에는 최고의 휴양국가로 손꼽히는 지중해의 꽃이었다. 이 나라가 전쟁의 화염에 휩싸이게 된것은 역시나 종교 때문이다. 레바논은 마로니테스 41%, 이슬람 50%(시아파 25%, 수니파 25%)로 구성되어 있다. 민족은 아랍인이지만 여타 중동의 아랍인들과는 조금 달라 생김새가 유럽에 가깝다. 공용어는 아랍어이나 동베이루트 지역에서는 프랑스어나 영어가 사용가능하다. 레바논은 전체적 인구 비율로 보아서는 이슬람 인구비율이 50%가 넘는 이슬람 국가이지만 이들은 수니와 시아로 구별되기 때문에 최대정파를 이끌고 대통령을 당선시키는 나라의 주류종파는 41%의 마로니테스들이다. 이 탓에 레바논은 터키와 마찬가지로 일부다처제가 불법인 세속주의국가다. 이 나라는 아랍 최대의 연예계를 가지고 있다. 다른 아랍국가 청년들은 (가부장 아버님의 눈길을 피해)레바논TV를 시청한다. 여자 가수나 여배우들의 공공연한 노출이 가능한 곳이 중동에서는 유일하게 레바논 하나뿐이다.

 

 *미스 레바논 출신의 레바논 여가수 하이파 와흐비(Haifa Wahbe). 그녀는 남베이루트 출신이고, 종교는 시아파 이슬람이다. 하지만 레바논에서는 이러한 그녀의 과도한 노출(?)이 문제되는 경우는 없다. 하지만 레바논도 한계점은 여실히 드러난다. 그녀는 올해 나이로 30세. 한 번 이혼한 전력이 있는데, 역시 이슬람인구가 반이 넘는 국가답게 아직도 커스터디 로(Custody law)가 적용된다. 그녀는 전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딸을 이혼 후 한 번도 만나보지 못했다고 한다. 하지만, 사우디 배불뚝이 석유재벌이 던져주는 고급 승용차와 향수에 혹해서 약혼까지 갔다고 하니, 그녀가 딸을 만나지 못하는 안타까움에 애끓는 모성을 소유한 것 같다고는 생각되지 않고, 자연히 동정이 가지도 않는다. 아, 한 가지 더. 오빠가 24살 때에 이스라엘과의 교전에서 전사했기 때문에 이스라엘을 증오한다고 한다.

 

*헤즈볼라 지도자 하산 나스랄라.

 헤즈볼라는 이슬람 시아파에 속하는 레바논의 정당임과 동시에 무장조직이다. 헤즈볼라는 무장조직이긴 하지만, 선거를 통한 정당한 방식으로의 이슬람 국가 건설에 목표를 두고, 여러 사회 복지 시설도 많이 운영하는 비교적 온건한 단체로 레바논 국민들도 처음에는 그들에 대해 그다지 거부감이 없었다. 그들은 이스라엘과 그를 돕고 있는 미국을 증오한다. 흔히들 시아파라고 하면 무장 테러집단을 떠올리고, 수니파는 온건한 이슬람 종파라고 생각하는데, 이는 한참 잘못된 오해이다. 알 카에다를 비롯한 이슬람 원리주의 무장 테러조직의 대부분은 수니파이다. 헤즈볼라만이 규모가 큰 시아파 테러조직이다. 수니파가 온건하다는 것은 그만큼 말 안 통하고 고집스럽게 이슬람 식으로 산다는 것을 뜻한다. 수니파는 코란의 해석을 자신들의 정통식 이외의 다른 방면으로 접근하는 것을 철저히 거부한다. 반면 민주화를 이룩해내 상당수준의 여성복지와 여성참정권을 만들어낸 이란은 시아파다. 시아파는 소수파이긴 하지만 과격파는 아니다.  헤즈볼라의 테러수준은 알카에다의 그것에 비교하면 어린애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레바논과 이집트라면 이를 갈기 때문에 헤즈볼라는 레바논의 밉살맞은 이슬람에게 폭탄을 떨어트릴 괜찮은 트집거리가 된것이다.

 레바논은 아직도 치안이 불안하다. 수도 베이루트의 한부분에서는 여전히 지금도 포탄이 떨어지고 있는 가운데 동베이루트에서는 메르세데스 벤츠 안에서 오렌지족 남녀가 서로 좋아 뜨거운 키스를 퍼붓고 있다. 레바논 기독교사회는 이스라엘의 공습이 레바논 전체에 대한 공습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고작 "그래도 같은 나라 국민인데, 시아파 사람들을 구호해야 하지 않겠느냐" 하고 물자를 지원하는 정도이다. 세 종교가 섞여 사는 나라 레바논. 천국과 지옥이 혼재하는 나라 레바논. 그렇기에 앞으로 어찌될 지 전혀 예상할 수 없는 나라, 바로 레바논이다.

 

*레바논 국기. 가운데의 삼목은 레바논에서 가장 많은 수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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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손에는 코란, 한 손에는 칼?

'한 손에는 코란(꾸란), 한 손에는 칼'이라는 말을 들어보셨나요?

이슬람 교의 호전적인 성격과 무력을 이용한 강압적인 종교 전파를 강조하는 말이죠. 이 말은 13세기 중엽 십자군이 이슬람 원정에서 최후의 패배를 당하던 시기에 활동한 이탈리아의 스콜라 철학의 대부인 토마스 아퀴나스가 처음으로 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즉, 서구인들이 이교도(서구인들 기준으로)에 대한 위기감으로 인해 만들어 낸 말에 불과한 것이죠. 당시 비잔틴 제국과 페르시아의 수탈과 착취에 시달리던 백성들은 이슬람의 진출을 오히려 환영하였고, 이슬람의 정복 과정에서 강제 개종은 실제로 거의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개종하지 않더라도 지즈야(일종의 세금)만 내면 신앙의 자유를 보장하였죠. 「코란」에도 '종교에는 강요가 없나니 진리는 암흑속에서부터 구별되느니라(코란 2:256)'라는 말이 있답니다. 또한 이슬람 세력이 진출한 지역은 그들이 후퇴한 이후에도 다른 종교로 돌아서지 않았음은 물론, 오늘날까지도 이슬람 문화권으로 남아 있는 것을 봐도 이들이 강압적이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겠죠? 강제로 개종시킨 것이었다면 곧 이슬람 교를 버렸을 테니까요.

오늘날에도 우리는 이슬람 교도들이 테러나 자행하는 무자비한 무리들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매스컴을 통해 접하는 이슬람에 대한 뉴스가 대부분 테러나 전쟁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죠. 그렇지만 이것은 서구의 시각에 불과합니다. 이제부터라도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균형 잡힌 시각으로 이슬람 교를 바라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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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바이-기적의 리더십


 

 <두바이 기적의 리더십은> 세계 최고의 호텔과 인공 섬, 사막의 스키장과 골프장 등 상상을 초월하는 일이 눈앞에 현실로 이루어지고 있는 두바이의 지도자, 셰이크 모하메드의 비전과 리더십에 대해 다룬 책이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황량한 사막, 몇 년만 퍼내면 고갈될 것이 뻔히 예견되는 석유 매장량, 30만 명도 채 되지 않는 인구, 게다가 중동 지역이면서도 볼 만한 역사적 유적지 하나 없는 보잘 것 없는 불모지의 나라였던 중동의 작은 부족국가 두바이는 셰이크 모하메드의 리더십 아래 다른 도시와 국가가 감히 엄두도 못내는 창의력과 역발상으로 전 세계 금융과 물류와 관광과 엔터테인먼트와 언론, 심지어 고급문화까지 모두 끌어 모으겠다는 야심을 실천해 나가고 있다. 두바이가 세계적인 주목을 받는 것은 단순한 물량적 성장 때문만은 아니다. 세계 최고층 빌딩 버즈 두바이나 세계 최고급 호텔 버즈 알 아랍이나 인공 섬 팜 아일랜드, 해저호텔 하이드로폴리스 등에서 온갖 상상력과 창의력이 번득이기 때문인데, 이 모든 과정에는 셰이크 모하메드의 기적의 리더십이 있다. 이 책은 기발한 상상력과 창의적인 아이디어로 세계를 놀라게 하고 있는 그런 두바이의 모습을 화려한 컬러 사진과 생생한 여행정보를 곁들여가며 전달하고 있다. 그럼 이 책이 다루고 있는 주요 내용과 핵심 메시지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다.

2 <두바이 기적의 리더십> 감상 및 분석

(1) 셰이크 모하메드의 리더십

 두바이는 요즘 전 세계의 벤치마킹 대상이 되고 있다. 이러한 두바이의 천지개벽은 셰이크 모하메드의 진두지휘에 따라 진행되고 있다. 그는 현재 세계 리더십 전문가가 주목하는 인물이 되었고, 국가적 리더십 결핍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나라에서도 그의 리더십에 찬사를 보내는 사람이 많다. 셰이크 모하메드는 현실을 냉철하게 진단하는 통찰력, 도전과 모험정신으로 미래를 내다보고 발전상을 머리에 그릴 줄 아는 상상력, 불가능은 없다는 자세로 일사천리로 밀어붙이는 실천력 등 리더십의 3대 조건을 고루 갖추고 있는 지도자인데, 1995년 그가 왕세자로 지명된 뒤 10년 동안 두바이의 GDP는 80억 달러에서 200억 달러로 폭증했다. 이는 두바이의 석유 부존량이 2020년쯤이면 바닥날 것으로 판단한 그가 관광, 금융, 무역, 엔터테인먼트, 전시회 등의 아이디어로 승부를 건 결과라 할 수 있다.

 셰이크 모하메드의 리더십이 돋보이는 것은 그가 행정규제로는 경제발전을 기할 수 없다는 점을 간파하고 있었다는 데 있다. 그런가 하면 인터넷 시티, 미디어 시티 등 다양한 형태의 자유지역(Free Zone)을 지정하여 마이크로소프트, 시스코, CNN 등 세계적인 업체를 마음껏 끌어들이는 데도 성공했다. 또 현재 두바이에는 용적률이나 층고 제한이 거의 없어 건축업체에는 천국이나 다름없다. 또한 비수기 세계 부자의 돈을 끌어들일 목적으로 1월 중순부터 2월 중순까지 두바이 쇼핑 페스티벌이란 바겐세일 행사를 진행하고, 6월부터 8월까지도 이와 비슷한 두바이 여름 깜짝 세일 축제를 개최한다. 지금도 그에게는 늘 새로운 아이디어가 넘치고 있는데, 그는 세계의 자본가들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의 자본가들이 두바이를 필요로 하도록 만들겠다며, 두바이가 세계적인 도시에서 만족하지 않고 두바이가 세계 그 자체라는 말을 듣도록 하겠다는 각오로 임하고 있다.

 셰이크 모하메드는 아버지로부터 어린 시절부터 차근차근 리더가 되기 위한 여러 가지 준비를 해왔다. 세계를 바라보는 시각, 미래를 그릴 줄 아는 상상력, 본질을 꿰뚫는 통찰력, 무엇이 국민에게 진짜 이익인지 생각하는 애국심, 구성원을 신나게 만드는 동기부여 능력을 고루 갖추고 있다. 한국의 리더들이 그로부터 배워야 할 점을 언어, 사고, 행동 등 3가지 측면에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셰이크 모하메드의 말이다. 말이란 시간과 장소에 따라 적절하게 구사되어야 한다. 그는 교언영색이나 감언이설, 허장성세가 아니라, 진실된 말을 통해 국민에게 비전을 제시하고 동기를 부여하고 잠재력을 이끌어내고 있으며, 유머도 있다. 그의 말에는 생기가 넘치고, 정중하고도 힘이 있다. 지도자는 말로써 미래의 비전을 제시해야 하는데, 모하메드는 비전 제시라는 점에서 다시 한 번 탁월성을 과시한다.

 둘째, 셰이크 모하메드의 생각을 배워야 한다. 그는 불가능은 없다는 전제 아래, 역발상을 바탕으로 한 상상력으로 두바이를 보물섬으로 만들었다. 그는 다양한 관점의 질문을 여러 차례 던지면서 사물의 본질을 파고들었고, 수평적이고 열린 마음으로 수많은 전문가들과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누면서, 새로운 아이디어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사람들이 두바이를 가고 싶은 이유는 단순하게 거대한 건축물이 있어서가 아니라, 무언가 새롭고 신기한 발상이 꿈틀거리고 있기 때문이다.

 셋째, 셰이크 모하메드의 행동을 배워야 한다. 그는 언제나 신중하게 결정하되, 행동은 번개처럼 신속하게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상상력을 통해 만들어진 아이디어와 사고는 전광석화와 같이 실천으로 옮긴다. 지금 우리 정부와 기업에 요구되는 것은 이 눈치 저 눈치 보면서 갈팡질팡하는 리더십이 아니라, 셰이크 모하메드처럼 신속한 스피드다. 때로 신속한 행동이 부작용도 낳고 나쁜 결과도 만들 수 있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스피드가 오히려 낫다는 게 최근 경영학계의 트렌드다. 용기도 없고 의지도 상실한 우리나라 각계각층에 있는 리더들은 셰이크 모하메드의 눈빛에서 교훈을 얻어야 한다.

(2) 두바이의 기적



두바이가 오늘날 세계 최고의 신데렐라로 주목받는 비결은 무엇일까? 흔히 오일달러의 위력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하지만 오일달러는 결과로 나타난 것이지, 원인이 아니다. 왜냐하면 두바이가 상상력으로 불가능을 향해 도전장을 던지고 성공할 기미를 보이자, 엄청난 액수의 오일달러가 두바이로 모인 것이기 때문이다. 참고로 두바이와 두바이의 지도자는 오일달러를 비롯한 전 세계 자본을 끌어 모으기 위해 랜드마크(Landmark)를 만드는 데 힘을 쏟았는데, 세계 최고층 빌딩 버즈 두바이, 세계 최고급 호텔 버즈 알 아랍, 인공 섬 팜 아일랜드와 더 월드, 초대형 테마공원 두바이랜드, 초대형 실내 스키장 스키 두바이, 해저호텔 하이드로폴리스, 초호화 골프 클럽 에미레이트 골프 클럽, 테크놀러지- 미디어 프리 존 시티 등 경이적인 시설들이 그것이다.


(3) 모든 항로는 두바이로 통한다

 두바이의 성공은 원유수입에만 의존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즉 외국인의 유입과 활발한 경제활동에 힘입어 상업 및 거주용 건물에서 나오는 수입과 각종 수수료 수입을 극대화시켰고, 여기에다 외국자본을 끌어들이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기 때문이었다. 한편 두바이는 세금이 없는 나라다. 개인소득세도 없고, 법인세도 없다. 부가가치세도 기본적으로 없다. 그리고 국가가 사실상 소유하고 있는 항공사, 정유사, 부동산 개발회사 등이 비즈니스를 통해 수익을 내며 이 돈으로 나라를 운영한다. 아울러 두바이 전체는 하나의 공사판이다. 아라비아만을 바라보는 두바이 해변에는 고급 빌라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건설되고 있고, 고급 빌라 주변에는 흔히 최고급 쇼핑센터가 있으며, 시내 곳곳에도 세계적 명품 판매점이 들어선 대형 쇼핑센터가 관광객들의 지갑을 털고 있다.

 오늘날 두바이의 성공비결은 홍보의 성공에서 찾는 사람이 많다. 특히 모하메드는 자신의 독창적인 국가전략을 대내외에 절묘하게 포장시킬 줄 아는 정치적 홍보능력을 지니고 있다. 그는 외국인의 눈길을 잡아당기지 못하면 실패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세계 최초, 세계 최고, 세계 최대라는 구호를 만들었으며, 세계 최고의 기업과 자본으로 하여금 두바이에 군침을 흘리도록 만들었다. 그의 세계적인 홍보 마케팅은 어느 홍보 전문회사보다 탁월한 기법을 자랑하는데, 우선 각 업계의 간판 기업부터 유치함으로써, 다른 기업이 따라 들어오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었다. 세계 최초, 세계 최대, 세계 최고라는 타이틀도 대외홍보에 커다란 시너지 효과를 거두었는데, 이를 알리기 위해 해외 유명 스타를 동원하여 각종 이벤트 및 대규모 국제행사를 개최하는데 주력했다.

 두바이의 야심은 세계 물류 전초 기지가 되겠다는 전략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두바이는 걸프만 일대에서 대형 선박이 정박할 수 있는 유일한 지역이며, 유럽과 아시아·태평양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어, 지리적으로 발전 잠재력이 크다는 점을 셰이크 모하메드는 최대한 노렸다. 그런 바탕 위에서 두바이의 물류전략은 공항과 항만을 통합하고, 자유지역이라는 파격적인 물류 거점을 건설하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흔히 두바이에 외국기업이 몰리는 이유로 4무(無)와 2다(多)를 지적하는데, 4무란 무세금, 무제한 외환거래, 무노동쟁의, 무스폰서를 말하고, 2다란 다양한 물류여건, 다양하고 편리한 지원 시스템을 갖춘 원스톱 행정을 말한다. 즉 각종 세금과 금융규제, 노사문제가 없는 기업천국이란 의미다.

(4) 우리가 가야 할 길을 앞서 간 두바이



 두바이 프로젝트의 성공요인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독창적 아이디어와 역발상의 도시개발 모델 창출을 들 수 있다. 두바이는 태양과 바다, 사막과 같은 단조로운 자원에,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활용해 세계적 관광 중심지로 도약했는데, 최고급을 지향하는 리조트 시설, 사막에 초고층 초대형의 빌딩 건설과 불가능해 보이는 간척사업을 실현하고, 세계 쇼핑 축제 등 국제적 이벤트를 개최하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고급화 전략을 밀고 나가고, 다양한 아이디어의 현실화를 위해 선 공급, 후 수요 창출의 역발상식 두바이 도시개발 모델이 만들어졌다.

 둘째, 해외자본 유치를 위한 Open Sky Policy를 들 수 있다. 두바이는 외국인 토지임차 및 소유권 보장으로 친비즈니스 환경을 조성했고, 여기에 폭 넓은 세제혜택과 규제완화 등 해외 투자자본 유치를 위한 정책적 노력이 가미됐다. 아울러 외국인 투자자 및 입주자의 물리적·제도적 여건과 생활환경도 개선시켰는데, 예로 약 80개의 외국인학교를 설립했고, 세계적 수준의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는 헬스 케어 시티가 2010년 완공될 예정이다.

 셋째, 국제 관광도시 인프라와 고객중심 서비스 전략을 들 수 있다. 두바이는 인종과 문화가 융합된 140개 이상 다국적 인구의 국제도시로, 해외 관광객들에 대한 편의와 안전을 철저히 배려하고 있다.

 넷째, 세계적인 홍보 마케팅 전략을 들 수 있다. 전 세계적인 쇼 케이스 홍보를 통해 해외 주요 기업을 유치함으로써, 관련 기업의 투자신뢰도 향상은 물론 간접적인 홍보효과도 유발하고 있고, 아울러 세계 최초·최대·최고라는 타이틀을 내걸고 시작한 대외홍보에서도 시너지 효과를 노렸다. 여기에 해외 유명 스타를 동원한 각종 이벤트 및 대규모 국제행사도 한 몫 했다.

 다섯째, 정부의 지속적인 프로젝트 지원과 리더십을 들 수 있다. 두바이 개발 프로젝트의 급속한 추진으로 인한 교통난 해소를 위해 경전철을 도입하고, 대중교통 시스템을 개혁했으며, 부동산 개발 활성화로 주택가격 상승에 따른 중산층 및 저소득층의 주거안정을 위해 대량 주택공급도 촉진하고 있다. 한편 두바이 당국은 부족한 인력문제 해결을 위해, 노동인구 유입을 활성화하고, 노동생산성의 향상도 지원하고 있다.

 한편, 우리나라가 관광레저 기업도시를 개발하는 과정에 두바이의 사례는 다음과 같은 교훈을 던져줄 수 있다. 첫째, 민간기업 주도의 관광·레저 기업도시 개발이 필요하다는 점을 시사해 주고 있다. 오늘날 두바이가 세계적인 관광지가 된 것은 기업의 창의적 아이디어와 개발 전권을 기업에게 위임한 정부의 전폭적인 지지에 기인한다고 하겠다. 따라서 우리나라 정부도 관광·레저도시 건설을 저해하는 출자총액 제한 및 외국 교육·의료기관 설립 제한 등 각종 규제를 완화하는 동시에, 광역 인프라에 대한 지원 강화를 통한 건설추진을 활성화시켜야 한다.

 둘째,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개발에 대한 개혁의지가 필요하다는 점을 시사해 주고 있다. 두바이는 이슬람 신도가 아닌 외국인에게는 주류 판매를 허용하는 등, 이슬람의 엄격한 금기로부터 해방구를 마련했고, 이러한 기본 정신을 바탕으로 1970년대 본격적인 유전개발로 벌어들인 오일머니로 관광·무역·금융 인프라 구축에 투자해 석유고갈에 대비하고, 관광·무역의 메카로 성장해 왔다고 할 수 있다. 아울러 두바이의 성공요인에는 지역 특성을 극복한 개발 컨셉트도 있기에, 우리나라의 관광·레저도시에도 한국 고유의 미와 자연 특색을 살린 컨셉트 확립이 필요하다.

 셋째, 실용적 개발전략 및 고객 맞춤형 마케팅 방안 강구가 필요하다는 점을 시사해 주고 있다. 사실 두바이는 낯선 환경과 테러 위험이 도사리는 아랍국가라는 이미지를 탈피하기 위해, 싱가포르와 홍콩 등 세계적 관광 국가를 철저히 벤치마킹했고, 결국 철저한 치안관리를 통해 싱가포르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안전한 국가이자, 쇼핑의 천국으로 부상하는데 성공했다고 할 수 있다. 우리도 관광·레저도시 내 해외 관광객 유치 활성화를 위해서는, 주요국의 방한 관광객을 중심으로 세밀한 서비스 전략을 수립하는 비즈니스 마인드가 필요하다. 이와 함께 대규모 관광객 동원이 가능한 국제행사를 유치하고 홍보·이벤트 마케팅도 강화해야 한다.

(5) 두바이의 한국 기업

 삼성전자 휴대폰은 두바이에서도 셰이크 모하메드 지도자가 직접 칭찬한 최고의 고급 브랜드로, 왕족과 부유층의 손바닥을 파고들고 있는데, 삼성전자는 이곳에서 소니 등에 이어 호감도 톱3 기업에 들어갔고, 프로젝션TV, LCD-TV, LCD 모니터 등에서는 시장1위를 달리고 있다. 그리고 세계 최고 7성급 호텔이라는 버즈 알 아랍에는 LG전자가 대거 납품을 했고, 현대자동차도 두바이에 아중동지역본부를 두고 20여 명의 직원을 파견했다.

 현재 두바이에 지사를 두고 있는 국내 업체로는, 현대건설, 삼성물산, GS건설, 두산중공업 등인데, 이들은 중동 전체 원유매장량의 95%를 차지하면서 최근 고유가의 최대 수혜를 받고 있는 걸프연안 8개국의 건설·플랜트 공사 수주를 위해 두바이를 센터로 하여 총력 수주활동을 벌이고 있다. 최근 중동 지역 공사발주의 특징은, 발주 분야가 토목·건설 부문에서 석유·가스 부문으로 변화되고 있는데, 국내 업체는 이 점을 노리고 있다.

(6) 두바이의 빛과 그림자

 급격한 성장 뒤에는 환희의 눈길이 있지만, 질시와 우려의 눈길도 동시에 도사리고 있다. 우선 두바이는 대규모 개발로 부동산 가격에 거품이 발생했는데, 문제는 두바이 투자액의 65%가 사우디아라비아·쿠웨이트·이란 등지에서 온 오일달러라는 점이다. 따라서 자칫 국제 유가가 하락하거나, 미국과 이란의 관계가 심각한 지경으로 악화되면, 일거에 버블이 꺼질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다. 아울러 많은 사람들이 장기 모기지론을 통해 부동산 투자자금을 조달하고 있기 때문에, 부동산 버블 붕괴는 더욱 심각할 수 있고, 거품이 터지면 경제 전반에 연쇄적인 타격이 우려된다.

 한편 두바이를 얘기할 때 외국인이 잊어서는 안 되는 점이 있다. 바로 두바이는 철저하게 30만 명에 이르는 자국민 중심 사회라는 점이다. 즉 원칙적으로 외국인은 두바이 현지인을 스폰서로 두어야 사업을 할 수 있고, 스폰서에게는 만만찮은 스폰서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는 것이다. 합작법인도 대부분 스폰서를 끼고 들어가야 하며, 지분도 49% 정도에서 만족해야 한다. 이 때문에 외국인에게 스폰서 비용을 받아 놀고먹는 현지인도 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다수 전문가들은 두바이가 당분간 승승장구 하리라는데 표를 던진다. 왜냐하면 두바이를 이끄는 셰이크 모하메드 지도자의 리더십이 워낙 파격적이고 기발한데다, 실천력에 스피드를 갖추고 있어서 당분간 적수가 없으리라는 전망 때문이다. 특히 경제학적으로 보면 이미 두바이가 규모의 경제를 구축해놓은 상태여서, 돈이 돈을 끌어 모으는, 즉 부익부의 선순환 현상이 수년간은 자동적으로 지속되리라는 전망이 많다. 그래서 두바이는 아직 그림자보다는 빛이 훨씬 더 센 곳이라고 할 수 있다.

3. 결론

 셰이크 모하메드는 불가능은 없다는 전제 아래, 역발상의 상상력으로 국민에게 비전을 제시하고, 동기를 부여하며, 잠재력을 이끌어내고 있다. 그리고 상상력을 통해 만들어진 아이디어와 사고는 빠르게 실천으로 옮기고 있다. 특히 지도자란 나라를 살피고 부흥시킬 수 있다면 어떤 길도 외면하지 말아야 하는데, 그는 아랍인의 피가 흐르면서도 미국에 대한 이해가 누구보다 높았고, 미국을 활용하기 위해 아랍권 내부에서 비판받을 정도로 친미 정책을 시행해 왔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또한 그가 모든 정책을 결정하기 전에 2천여 명의 싱크탱크들로부터 충분한 의견을 수렴, 분석하고 결정짓는 순서들을 거쳤다는 점이 인상적이었으며, 바로 이러한 점들이 두바이를 오늘날 전 세계가 주목하게 한 가장 큰 요인이라 생각된다. “미래를 바꾸려고 시도하지 않는 사람은 과거의 노예 상태로 머무르게 될 것”이라는 그의 신념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예이다.

 한편, 우리나라도 두바이 같은 기적의 성장을 이루기 위해서는 민간기업 주도의 관광·레저 기업도시 개발이 필요하고,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개발에 대한 개혁의지가 필요하며, 실용적 개발전략 및 고객 맞춤형 마케팅 방안 강구가 필요할 것이다. 또한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나라에서도 셰이크 모하메드처럼 세계를 바라보는 시각, 미래를 그릴 줄 아는 상상력, 본질을 꿰뚫는 통찰력, 무엇이 국민에게 진짜 이익인지 생각하는 애국심, 구성원을 신나게 만드는 동기부여 능력을 고루 갖춘 지도자가 등장해 기적의 리더십을 펼쳐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두바이의 기적을 그저 지나치는 이웃나라인 우리에겐 불가능 한 일이라는 생각을 바꾸고, 그들의 방법과 리더십을 철저히 벤치마킹하여 두바이의 기적을 능가할 수 있는 우리나라의 역사를 써나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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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비아 로렌스>의 거짓말

  영국의 거장 데이비드 린 감독이 미국 자본으로 만든 70MM 영화 <아라비아의 로렌스>(1962)는 사막의 아름다움과 영웅의 열정, 그리고 감동을 담은 세기의 걸작이다.

 
여기에 사막을 종횡무진하는 영국인 T . E . 로렌스가 있다. 그는 아랍인들의 독립을 위해, 외세배척을 위해 아랍인들을 이끌고 몇 안되는 군사로 연전연승을 거두며 아랍인들의 존경심을 얻는다. 그러나 아랍인들의 독립을 위한 명목으로 시작된 이 아랍반란이 끝난 직후, 영국이 약조를 어기고 아랍인들의 독립을 인정해주지 않자, 회의를 느낀 로렌스는 양심에 따라 장교를 그만두고 오토바이 사고를 내서 사망하며 불꽃같은 인생을 마감한다. 
 
 
아름다운 금발 머리와 푸른 눈을 가진 그는 현대영웅의 초상으로 남았다. 로렌스에 대한 이 이야기들은 그의 저서 <일곱 가지 지혜의 기둥>과 <사막의 반란>에 기초한 이야기들이다.

  "아랍인들은 영웅으로서의 로렌스는 전혀 모른다."

  영웅은 만들어진다. 로렌스 또한 그런 부류 중 하나이자 자신의 거짓말로 거짓된 역사를 완성한 인물이다. 로렌스에 대한 모든 이야기는 그의 입과 그의 저서로써 밝혀진 이야기들이지 다른 사람의 증언은 없다. 그에 대한 사진을 비롯해 몇몇 자료들이 있지만 그가 아랍반란의 선두를 지휘한 영국인 지도자라는 증거는 일절 없다. 결국 당시 아랍인들의 증언을 통해 사실을 알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아랍인들은 로렌스가 누군지 모른다고 한다. 이것은 도대체 어찌 된 사실인가?

  아랍반란의 주역은 로렌스가 아니다. 파이잘 왕자의 아버지인 후세인왕 휘하에 있던 아랍인청년들이었다. 
 
 (당시 영국은 아랍반란의 전면에 나선 적이 없었다. 외교사절단 몇명, 보급물자 몇몇, 전쟁경과를 보고해주는 종군기자 몇명. 이 정도가 아랍에 대한 영국의 모든 지원이었다. 영국은 1차대전 터키와의 싸움에서 위기를 피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아랍이 뒤를 치도록 만드는 것이 목적이었을 뿐 아랍의 독립을 생각하진 않았다. 파리강화회의에서 아랍의 독립을 철저히 무시한 것이나, 맥마흔 선언으로 아랍의 독립을 보장하고서도 밸포어 선언을 하여 이스라엘 건국의 기초를 세우게끔 빌미를 줘 아랍인들을 기만한것을 봐도 알 수 있다. 무식한 아랍인들은 처음에 그 사실을 믿었다.)

 
로렌스는 파이잘 왕자와 만나 그의 군대를 이끌고 선봉에 서서 전략을 지휘했을까? 이것 역시 거짓말이다. 파이잘군의 지휘관은 이라크인 장교들이었으며, 모든 군단은 아랍인들로 구성되어 있었다.그렇다면 최후의 다마스쿠스 해방은? 이것은 성 안에 있던 아랍인 지도자들과 후세인왕 지휘하 장교들의 내통으로 이룬 승리였다. 이런 자리에 로렌스는 낀 적도 없을 뿐더러 그가 활약할 무대는 없었다. 아랍반란의 모든 것은 아랍인들끼리 이룩해낸 것이었다.

 
로렌스의 이야기를 알게 된 아랍인들측에서는 이러한 로렌스 신화가 너무나도 의심스우며 있지도 않은 사실이라고 이야기 한 바가 있었다. 아랍반란은 많은 아랍인들의 피와 땀으로 이루어진 것. 그런데도 한 영국장교가 영국으로 귀환한 그 날부터 아랍반란의 모든 공로가 로렌스에게 돌아가 버릴 줄은 꿈에도 몰랐다고 말하였다.

  그렇다면 로렌스는 누구인가?

  로렌스는 영국의 고고학자이자 중동 문명에 관심이 깊던 사람이었다. 그는 1차대전에서 영국 외교사절단의 외교관을 맡았고, 아랍반란의 경과를 영국에 계속해서 제공하는 중재자이자 종군기자 수준이었던 인물이다. 전쟁에 나선 적은 전혀 없으며, 일부 아랍 장교들의 눈에 띈 적 조차 없었다.

 아랍인들은 그를 기억한다. 그는 후세인 왕에게 1921년 팔레스티나에 유태인들의 독립국가를 가지게끔 보장한 '밸포어선언'을 인정하라고 협박적인 외교를 한 인물이었다. 영국의 무력을 등에 엎고 후세인 왕을 협박한 더러운 영국인 외교관. 이것이 아랍인들이 기억하는 로렌스의 모든 것이다.

 슐레이만 무서라는 작가가 있다. 그는 <아랍이 본 아라비아의 로렌스>라는 저서를 출판한 적이 있다. 로렌스에 대한 허구를 알리고 진실을 외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이런 시도는 크게 성공하지 못했다. 데이비드 린의 영화 <아라비아의 로렌스>가 너무나도 확고하게 로렌스의 이미지를 완성하였으며, 서구인들이 기록한 역사를 세상은 무조건 믿었기 때문이다.

  <아라비아의 로렌스>는 명백한 역사왜곡이자 아랍인들에 대한 모독이자 기만이다. 지금 사전과 미디어, 모든 검색 매체에서 로렌스를 찾으면 그는 아랍반란의 영웅. 아라비아의 로렌스. 이런 모습으로 그려진다. 보여지는 것만이 진실은 아니다. 사실과 역사는 다르다. 하지만 <아라비아의 로렌스>는 너무나도 서구 우월주의적인 사고방식과 아랍의 미개함과 열등함을 노골적으로 표현한 예이다. 이것에 대해 우리는 어떤 딴지조차 걸어보지 않는다. 우리 역시 서구 우월주의 이데올로기에 우리도 모르게 쪄들어 버렸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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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아버지 왕(Rex Pater Europae), 샤를마뉴


초기생애

 샤를마뉴는 샤를1세(Charle Ⅰ), 카알 대제(Karl der Grosse), 찰스 대제(Charles the Great), 카롤루스 대제(Carolus Magnus) 등으로도 불린다. 그는 742년경 4월 2일 피핀 3세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메로빙거 왕조 말기 프랑크 왕국의 권력은 궁재(宮宰)에게로 집중되었으며 샤를마뉴가 태어날 무렵엔 그의 아버지 피핀과 숙부 카를로만이 프랑크 왕국의 궁재가 되어 프랑크 왕국을 장악한 직후였다. 나중에 카롤링거 왕조라고 부르게 된 이 가문은 메로빙거 왕조의 궁재직을 세습하며 프랑크 왕국 전체에 대한 지배권을 장악해왔다. 샤를마뉴의 할아버지 카를 마르텔은 분열 직전에 처한 왕국을 재건했고 732년에는 투르와 푸아티에 전투에서 사라센(이슬람)을 물리쳐 유럽과 기독교 세계를 지켜낸 공로로 인망이 있었다. 그는 힘없는 메로빙거 왕조가 유일하게 갖고 있던 이름뿐인 국왕의 대권을 침해하지 않은 채 사실상 왕국을 아들인 피핀과 카를로만에게 세습하듯 물려주었다.

 샤를마뉴가 어렸을 때 그의 아버지 피핀은 왕족 및 자신의 형제들을 쓰러뜨리고 권력을 차지했으며 751년에는 힘 있는 자가 국왕이 되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며 교황 자카리아스로부터 승인을 받아 실권 없는 메로빙거 왕가의 마지막 왕 힐데리히 3세를 폐위시킨 뒤 프랑크 회의에 의해 왕위에 올랐다. 자카리아스의 후임 교황인 스테파누스 2세는 롬바르드족(랑고바르드)의 침공으로부터 로마를 보호하는 데 도움을 청하려고 754년 알프스를 넘어 프랑크 왕국을 방문했는데 당시 12세였던 샤를마뉴는 왕국의 장자로서 교황을 영접했다. 교황은 생드니 대성당에서 성유식(聖油式)을 집전해 피핀과 그의 두 아들 샤를마뉴 및 카를로만에게 왕의 칭호를 수여했다. 이 귀중한 봉사의 대가로 피핀은 롬바르드족을 교황의 영지에서 축출할 것을 다짐했다. 피핀은 760년부터 해마다 원정을 해 아키텐(루아르 강 남쪽의 프랑스)을 정복함으로써 피레네 산맥까지가 모두 프랑크 왕국의 영토임을 재확인했다. 이 일련의 원정에는 샤를마뉴가 늘 동행했다.

 이런 젊은 시절의 경험은 아마 샤를마뉴의 성격과 목표 형성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그는 아버지를 닮아서 권력에 대한 불굴의 의지를 갖고 있었다. 외적에 대항해 단호하게 싸우고 기회만 있으면 영토를 넓히려는 경향, 가까운 친척들의 권리를 빼앗는 한이 있더라도 혼자 나라를 다스리겠다는 결심도 아버지와 똑같았다. 샤를마뉴는 세속 권력과 교회 권력의 밀접한 관계를 일찍부터 인정했다. 그는 교회를 존중했고 크리스트교 신앙을 널리 전파하는 것이 왕의 의무라고 생각했다. 또 교회에 대한 왕의 종주권을 주장하면서도 신이 그에게 크리스트교도들을 맡겼기 때문에 신에게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프랑크의 왕

 768년 피핀이 죽자 프랑크 왕국의 오랜 관습에 따라 왕국은 그의 두 아들에게 분할되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형제 사이에 격렬한 대립이 일어났다. 샤를마뉴의 동생 카를로만은 부르군트 일대를 다스렸는데 롬바르드 선왕의 왕비였던 게르베르가와 결혼하였다. 롬바르드 왕 데시다리우스는 카를로만이 프랑크 전체의 왕이 되기를 원하여 그를 암암리에 지원하였다. 그러나 동생과의 갈등에서 샤를마뉴는 승리했고 771년 카를로만이 사망하자 프랑크 왕국의 단일 지배자가 되었으며 카를로만의 편을 든 롬바르드를 멸망시켰다. 롬바르드의 수도인 파비아 포위 공격이 아직 진행되고 있는 동안 샤를마뉴는 로마로 가서 교황과 함께 774년의 부활절을 축하하고 이탈리아의 대부분을 교황령으로 이양하겠다는 아버지의 약속을 성 베드로 성당에서 재확인했다. 그러나 그가 실제로 넓혀준 교황의 땅은 미미했고 롬바르드 왕국 전역에 대한 통치권은 자신이 차지했다.

 샤를마뉴는 이교도인 작센족이 라인 강 하류 지역을 공격한 앙갚음으로 772년에 지금의 니더작센 지방과 베스트팔렌 지방에 사는 작센족을 공격했다. 그러나 775년부터는 복수보다는 작센족 전체를 정복하여 크리스트교로 개종시키고 그들의 영토를 프랑크 왕국에 통합하는 것이 그의 목표가 되었다. 이 목표는 여러 차례의 원정 끝에 실현된 것처럼 보였다. 작센족 귀족들이 그에게 충성을 서약하고 775~777년에 대규모 세례식이 거행되었기 때문이다. 777년에 파더보른에서 열린 제국의회는 작센족의 항복을 조인했다. 의회에 참석한 사람들 중에는 코르도바의 우마이야 왕조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키는 데 샤를마뉴의 도움을 얻으려고 스페인 북부에서 찾아온 아랍인들도 끼어 있었다. 778년 여름 샤를마뉴는 스페인으로 진격해 사라고사를 포위했지만 그 도시를 점령하지는 못했다. 피레네 산맥을 넘어 퇴각하던 프랑크 군대는 바스크족의 공격을 받고 참패를 당했다. 브르타뉴 원정 때 활약했던 샤를마뉴의 기사 롤랑도 이때 죽었는데 그는 나중에 전설과 시(롤랑의 노래)로써 불멸의 존재가 되었다.

 이후 그는 영토 보전에 힘쓰는 한편 내정을 강화하고 문화생활과 법의 지배를 보호했다. 샤를마뉴가 스페인에서 패배한 직후 작센족이 다시 봉기했다. 샤를마뉴가 생각하기에 세례를 받고 충성을 서약한 이 작센족의 저항은 정치적 배신이자 종교적 변절로 이런 범죄에는 가혹한 처벌을 내릴 필요가 있었다. 샤를마뉴는 작센족과 18회나 전쟁을 치르고 난 뒤에야 그들을 완전히 정복했다. 결국 그는 작센족을 자신의 지배 아래 복종시키겠다는 목표만이 아니라 제국에 완전히 통합시키겠다는 목표도 달성했다. 세속 권력과 크리스트교 신앙 사이의 뗄 수 없는 유대관계를 생각하면 이것은 작센족을 크리스트교로 개종시켜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샤를마뉴는 781년에 2번째로 로마를 방문해 교황이 어린 두 아들 피피노와 루이(루트비히)에게 각각 롬바르드와 아키텐의 왕관을 씌워주게 했다. 또한 비잔틴 제국의 황태후이며 콘스탄티누스 6세의 모후로서 섭정을 맡고 있던 이레네에게서 자신의 이탈리아 지배를 사실상 승인받았다. 그러나 프랑크 왕국이 787년에 이탈리아 남부를 공격한 뒤 샤를마뉴와 비잔틴 제국의 협약은 깨졌다.

 788년 샤를마뉴는 바이에른 공작이자 사촌인 타실로 3세를 폐위함으로써 라인 강 건너편에 남아 있는 마지막 게르만족의 독립성을 사실상 박탈했다. 이제 서게르만족인 알라마니족, 바이에른족, 작센족, 튀링겐족은 역사상 처음으로 하나의 정치 단위 안에 모이게 되었다. 게다가 아바르 왕국(지금의 헝가리와 오스트리아 북부)에 속해 있던 나머지 공국들과 도나우 강 유역에 새로 건설된 슬라브족 국가들도 느슨하나마 프랑크 왕국에 의존하게 되었고 프랑크 왕국의 종주권을 어느 정도 인정했다.

  프랑크 왕국은 엄청난 팽창을 통해 중세 초기의 부족국가들보다 훨씬 높은 지위로 올라갔기 때문에 이제는 양적인 변화뿐만 아니라 질적인 변화도 필요했다. 그러나 샤를마뉴에게 로마 황제의 칭호를 부여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은 늦게야 떠올랐고 그나마도 특수한 정치적 상황이 조성되었기 때문이었다. 동로마 제국, 즉 비잔틴 제국은 서로마 제국까지 포함한 로마 제국 전체에 대해 발언권을 가질 자격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당시 비잔틴 제국은 로마와 라벤나를 포기하고 이탈리아 남부와 시칠리아 섬에 대해서만 지배권을 주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샤를마뉴의 보호를 받고 있던 교황 하드리아누스는 이탈리아 중부에 자치령을 세우려고 애쓰고 있었다.
 


서로마의 황제

 799년 5월 교황 레오 3세는 로마에서 반대파들의 습격을 받자 샤를마뉴의 궁정으로 피신해 지원을 간청했다. 샤를마뉴는 800년 11월 교황과 함께 로마로 가서 황제의 예우로 영접을 받았다. 성 베드로 성당에서 열린 성탄절 미사 때 로마인들이 샤를마뉴를 황제라고 찬양하자 교황은 성유식을 집전하여 샤를마뉴에게 왕관을 씌워주고 샤를 아우구스투스라는 이름으로 황제에 임명했다. 샤를마뉴가 옛날 로마 제국의 서부지역을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의 황제 지위에 대한 합법성을 구체화해주었지만 동로마 황태후 이레네(797년 아들을 퇴위시키고 장님으로 만들었음), 즉 여성의 지배에 대항하려는 욕망도 그가 제위를 얻으려고 한 이유였다.

 비잔틴 제국은 제위 찬탈자의 공격에 대비했지만 샤를마뉴가 원한 것은 그저 자신의 새로운 지위와 협상에서 얻은 로마 지배권을 인정받는 것뿐이었다. 812년 비잔틴 제국 황제인 미카일 1세가 어쨌든 샤를마뉴를 황제로(로마 황제는 아니었음) 승인함으로써 그는 목적을 달성했다. 황제라는 칭호는 샤를마뉴에게 어떠한 권력도 추가로 주지 않았지만 그의 로마 지배는 합법적인 것이 되었다. 역사적으로 중요한 754년의 사건, 즉 교황이 비잔틴 제국과 소원해지고 그 대신 프랑크 왕국과 친교 관계를 확립한 것은 이제 명백해졌다. 중세의 제국이라는 개념, 그리고 프랑크 왕국 및 그 뒤를 이은 신성 로마 제국의 법률적 전통이 아우구스투스가 세운 고대 로마 제국과 맺고 있는 모든 관계는 샤를마뉴가 가졌던 황제라는 칭호와 지위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궁정과 행정

 제국의 창건은 주로 제국 내부의 문화 수준을 높이려는 샤를마뉴의 노력을 통해 합법화되었다. 샤를마뉴가 권력을 잡았을 때 프랑크 왕국의 문화, 행정, 사법 제도는 아직도 상대적으로 미개한 상태였다. 예를 들어 이 프랑크 왕국의 왕은 일정한 주거지가 전혀 없었다. 따뜻한 봄 날씨 때문에 샤를마뉴가 특히 좋아한 아헨이 왕의 거처가 된 것은 794년에 이르러서였다. 샤를마뉴는 이곳에 궁정과 왕실 교회를 지었다.

 샤를마뉴의 궁정은 그의 가족, ‘카펠라’라는 왕의 개인 예배를 집전한 성직자들, 그리고 속세의 관리들로 구성되었다. 속세의 관리들 중에는 자신의 영지 안에서 왕권을 일부 위임받아 행사하도록 허용된 영주들, 왕실의 집사들, 왕실 관리인들이 포함되었다. 샤를마뉴는 자신의 궁정을 왕국의 정치와 행정 중심지뿐 아니라 지성의 중심지로 만들겠다는 야심이 있었기 때문에 해외에서도 유명한 학자들을 불러들였다. 이들 가운데 중요한 인물로 아인하르트와 앨퀸이 있었다. 샤를마뉴는 이들을 비롯한 여러 문필가들의 도움을 얻어 교회 신부들의 저술과 고대 작가들의 작품을 소장하는 왕실도서관을 설립했으며 프랑크 왕국의 젊은 기사들을 가르치기 위해 궁정 학교를 창설했다. 제국 전역의 종교의식과 도덕성 및 재판절차의 수준을 높이려는 노력도 이루어졌다.

 모든 수도원 학교와 성당 학교에서는 라틴어와 라틴 문학을 집중적으로 공부하라는 지시가 내려졌다. ‘카롤링거 르네상스’라고 불리는 문화적 운동은 제국의 수많은 수도원을 중심으로 활발히 전개되었다. 그러나 전 세계에서 최고의 지성들을 불러들여 성직자를 가르치게 하고 결국에는 백성 전체를 가르치게 한 샤를마뉴의 노력과 그의 궁정을 언급하지 않고서는 이 운동을 제대로 평가할 수 없다. 궁정의 신학적 지식과 지적 자부심은 791년경에 샤를마뉴의 이름으로 작성한 포괄적 논문인 <샤를마뉴의 책 (Libri Carolini)>에 반영되어 있다.

 샤를마뉴는 이 궁정을 통해 제국을 다스리고 관리했으며 정의를 시행했다. 궁정과 제국 각지의 주요행정관 및 귀족들은 적어도 1년에 한두 번씩 프랑크 왕국의 심장부나 정복한 영토에 모여 총회를 열었다. 이것은 군대회의나 귀족들의 입법회의 및 교회의 종교회의를 분명히 구별하지 않은 카롤링거 제국의 독특한 구조를 보여준다. 이들과 궁정의 관계는 샤를마뉴의 명령에 따라 각지를 돌아다니는 왕의 사절들을 통해 유지되었다. 왕의 사절은 대개 2명이 한 조를 이루었는데 관리와 고위 성직자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왕의 명령은 글로 쓰면 안 되는 것이 원칙이었지만 샤를마뉴의 통치가 끝나기 20년 전부터 왕의 포고령이 약간 애매하나마 기록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왕의 포고령이 일정한 틀을 갖는 데는 시간이 걸렸으며 카롤링거 르네상스 시기에 형식이 고안되었다. 샤를마뉴는 그가 지배하는 다양한 민족과 부족의 전통적 권리를 원칙적으로 존중했고 황제가 된 뒤에는 그 전통적 권리를 기록하게 했다. 프랑크 왕국의 법령집은 여러 부족의 율법을 보완하는 기능을 했을 뿐 아니라 공공생활과 개인생활의 가장 다양한 측면에 적용된 규칙이며 왕의 사절과 백작 및 주교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에게 내려진 특수한 명령이기도 했다. 전체적으로 볼 때 샤를마뉴 시대에 만들어진 법률 문서는 샤를마뉴가 사법 행정과 대중 계몽에 관심이 많았다는 것을 뚜렷이 증명해준다.

 
통치의 한계

 그러나 샤를마뉴의 제국에 구조적인 결함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프랑크 제국의 모든 정치제도는 샤를마뉴의 뛰어난 능력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그가 사라지면 모든 것이 무너질 위기에 놓여 있었다. 이것은 샤를마뉴의 후계자인 루트비히 1세 때 프랑크 제국의 양상을 보면 훨씬 명확하다. 샤를마뉴의 교육정책으로 자신감을 얻은 성직자들은 항상 샤를마뉴의 신권(神權)정치를 고분고분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그들은 걸핏하면 자신들의 정치적, 교육적 원칙을 내세워 샤를마뉴의 신권정치에 반대하곤 했다.

 카롤링거 왕조와 함께 제국을 건설한 평신도 귀족들은 새로운 정복이 새로운 이권과 봉토를 약속해주지 않는 한 왕조와 확고한 유대를 맺을 수 없었다. 그러나 800년에 이르자 이미 도달한 국경선을 넘어 밖으로 더욱 팽창하는 것은 사실상 거의 불가능해졌다. 실제로는 이미 얻은 땅을 통합, 관리하며 외적으로부터 보호하는 데 필요한 경제적 자원과 기술적 수단도 불충분한 상태였다. 샤를마뉴의 제국은 로마 제국이 국가를 유지하는 데 사용한 수단들(화폐 경제, 봉급을 받는 관리, 상비군, 정비된 도로망과 통신망, 해안을 지키는 해군)을 갖고 있지 않았다. 샤를마뉴가 살아 있을 때 이미 해안은 노르만족의 위협을 받고 있었다. 806년에 샤를마뉴는 제국을 분할해 아들들한테 나누어줄 계획을 세웠지만 맏아들과 둘째 아들이 죽자 813년 아헨에서 아키텐의 루이(경건왕 루트비히)를 공동 황제로 만들고 유일한 후계자로 삼았다. 샤를마뉴는 불과 몇 달 뒤인 814년 1월 28일 아헨에서 세상을 떠났다.

 
인간성과 영향력

 샤를마뉴가 죽은 뒤 그의 뒤를 이은 후손들이 제국 내부의 평화와 통일성 및 국제적 지위를 유지하지 못했기 때문에 샤를마뉴의 명성은 죽은 뒤에 더욱 빛났다. 카롤링거 왕조가 단절된 뒤에도 서프랑크(프랑스) 왕국과 동프랑크(독일) 왕국의 정치적 전통은 샤를마뉴가 세운 선례에서 자양을 얻어 생명력을 유지했다. 오토 1세 때 아헨은 독일 통치자들이 대관식을 올리는 도시가 되었고 로마 교황에 대항한 대립 교황 파스칼리스 3세는 붉은 수염왕 프리드리히 1세의 요청으로 1165년에 샤를마뉴를 성인으로 추증했다. 프랑스에서는 존엄왕 필리프 2세가 샤를마뉴를 기리는 전통을 되살렸다. 샤를마뉴의 진정한 후계자가 독일인이냐 프랑스인이냐 하는 문제는 중세뿐 아니라 근대에 접어든 뒤에도 계속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나폴레옹은 샤를마뉴의 후계자라 자처했고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크리스트교 국가들이 통합해 ‘서방 유럽’을 구성하자는 논의는 샤를마뉴의 본보기를 상기시켰다.

 민간 전설과 문학도 이런 정치적 전통과 나란히 발전해 롤랑을 다룬 서사시에서 절정에 이르렀다. 샤를마뉴의 명성은 한때 그의 제국이던 지역 내부에만 머물지 않았다. 일부 슬라브어에서 왕을 뜻하는 단어는 그의 이름에서 파생한 것이다. 샤를마뉴는 전기적 문서를 전혀 남기지 않았다. 그의 인간성은 그의 행위와 동시대인들이 남긴 기록으로 조립할 수 있을 뿐이다. 샤를마뉴의 강렬한 개성은 분명 신의 뜻이 자신과 함께 한다는 굳은 신념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그는 마음속으로 전혀 모순을 느끼지 않고 개인의 독실한 신앙심과 일상생활의 쾌락, 종교적 사명감과 권력에 대한 강한 의지, 거친 태도와 지적 성장에 대한 갈망, 적과 타협하지 않는 태도와 공정함을 양립시킬 수 있었다. 그의 독실한 신앙심에는 정치적 조건이 붙어 있었기 때문에 제국과 교회는 제도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하나의 단위가 되었다.

  그의 제국은 2대 황제인 루트비히에서 끝났지만 로마 제국 멸망 이후 갈기갈기 찢어졌던 서유럽 사람들이 그 후 몇 세기 동안 의지할 수 있는 공통된 지적, 종교적, 정치적 유산을 재구성하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 물론 이런 유산이 샤를마뉴 혼자 힘으로 만든 것은 아니지만 그가 없었다면 상상하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그의 궁정 시인들 가운데 한 사람은 그를 ‘유럽의 아버지 왕(Rex Pater Europae)’이라고 불렀다. 사실 중세의 수백년 동안 유럽 역사에 그와 비슷한 발자취를 남긴 사람은 아무도 없다
 


제국의 분열

 샤를마뉴가 814년에 죽자 그의 아들 루이트비히 1세가 제국을 물려받았다. 그는 신앙심이 두터워 교회로부터 환영을 받았고 경건왕이라는 별칭도 얻었지만 난세를 헤쳐 나갈 능력이 부족하였으며 무능한 군주로 평가되고 있다. 제국 분열의 조짐은 루트비히 1세의 황후 에르멘가르드가 세 아들을 남기고 818년에 세상을 떠날 때부터 시작되었다. 이미 루트비히는 게르만족의 상속 유풍에 따라 제국을 그의 세 아들에게 분할 상속하기로 정해 놓았다. 장자 로타르 1세에게는 제위를 물려주어 제국의 중심부를, 차남 피핀과 삼남 루이 2세에게는 변경을 주기로 하였다. 그러나 에르멘가르드가 죽고 4개월 후 루트비히는 유디트와 재혼하여 사남 샤를(대머리 왕 샤를 2세)을 낳았고 그에게도 상속권이 생겼다. 그것도 늦게 얻은 귀여운 자식이고 형들에 비해서 어린 연령은 불이익을 받을 수도 있기 때문에 부친으로서는 자기가 살아 있을 때 상속 문제를 확실히 해둘 필요가 있었다. 이에 루트비히는 829년에 회의를 소집하고 샤를에게 제국의 중심부를 준다고 선언해 버렸다.

 여기서부터 부자간 혹은 형제간에 추잡한 상속 싸움이 시작되었다. 로타르는 아우 피핀과 일부 호족들의 호응을 얻어 반란을 일으켜 황후 유디트를 감금하고 로타르의 측근들이 궁중의 요직을 차지하여 영토 상속문제를 원점으로 돌렸다. 그러나 6개월 후 다시 루트비히가 일부 호족과 교회, 수도원의 도움으로 세력을 회복하여 영토 상속문제를 다시 논의하게 되었고 이에 불리함을 느낀 장자 로타르는 교황청과 말을 맞추어 놓고 알자스에서 회의를 열어 아버지인 루트비히를 퇴위시키고 세 아들은 유디트의 아들 샤를을 배제하고 합의하에 영토를 셋으로 나누어 가졌다. 하지만 이 합의는 오래 가지 않았다. 겨우 1년을 못 넘기고 형제들 간에 다시 싸움이 시작되었고 차남 피핀이 부친 루트비히와 손을 잡고 로타르에게 대항하였다. 호족들은 우왕좌왕하였고 교회는 에르멘가르드의 아들들을 외면하였으며 수도원이 확실하게 루트비히를 지지하자 로타르는 이탈리아로 도망갔고 그를 지지했던 많은 사람들은 처형되었다. 그리고 루트비히는 834년에 복위하였다.

 그 후 몇 년간 잠잠하였지만 차남 피핀이 죽자 부왕 루트비히는 기다렸다는 듯이 그 땅을 샤를에게 주었고 840년에 루트비히가 세상을 떠나자 다시 상속 분쟁이 전개되었다. 결국 843년에 베르됭 조약으로 제국을 삼분하여 로타르는 제호(帝號)와 중심부를, 삼남 루이는 라인강 동쪽의 동프랑크를, 샤를은 제국 서쪽의 서프랑크를 차지하였다. 이래서 제국은 동프랑크, 서프랑크, 중프랑크로 분할되었고 855년에 로타르가 죽고 세력이 약해지자 동프랑크의 루이와 서프랑크의 샤를이 870년에 메르센에서 다시 조약을 맺어 중프랑크의 로트링겐 일대를 빼앗아 나누어 가졌다. 이것이 오늘날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 세 나라의 출발이었고 그 판도도 지금과 비슷하였다.

 샤를 대제의 손자들은 이렇게 해서 영토를 얻었지만 그것은 오래갈 수는 없었고 결국 875년에 중프랑크에서, 이어 911년에 동프랑크에서, 987년에는 서프랑크에서 카롤링거의 왕통은 단절되었고 노르만인과 마자르인 그리고 이슬람인의 침입으로 유럽은 혼란에 빠졌다.


자료 출처
http://mtcha.com.ne.kr/world-man/france/man32-syarulmanyu.htm
http://tiny.britannica.co.kr/bol/topic.asp?mtt_id=88304

http://www.nobelmann.com/history/history_.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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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정복기의 군대


예언자 무함마드의 시대

1. 무슬림 지휘관-7세기 중반 : 부유하고 잘 무장된 이 지휘관은 쇠사슬 코이프와 어깨 드림 위에 비잔티움에서 유래된 형태의 조립식 투구를 쓰고 있다. 매우 긴 쇠사슬 호버크는 일반적인 형태인듯 하나, 강화된 가죽 러멜러 흉갑은 그렇지 않다. 칼은 아마도 사산조나 인도의 양식일것이며 가죽 방패와 신은 근처의 누비아에서 보이는 형태에서 유래되었다.

 2. 무슬림 궁수-7세기 초중반 : 이 가난한 병사는 그의 칼을 넝마로 감쌌고 가죽 끈을 감아 머리를 보호했다. 그의 활은 Grewia tenax라는 나무에서 베어낸 간단하 형태의 활이며, 짧은 화살은 돌화살촉을 쓰고 있다. 튼튼한 나알-샌들-을 신고 카미스-긴 소매를 가진 튜닉-을 입고, 전통적인 아라비아의 의상인 이자르-어깨와 몸통에 두르는 천-을 입고 있다.

3. 베두윈 족장-7세기 초 : 7세기의 아라비아 반도의 정주민과 베두윈들 사이에서는 의복의 차이점을 찾을수없지만, 남부와 북부에서는 옷차림이 다르다는것이 드러난다. 그의 올린 머리 형태는 이슬람 이전 아라비아의 미술품에서 보인다. 쇠사슬 디르(갑옷) 위에 앞이 뚫려있는 주바(jubba)를 입고 있으며 갑옷 아래는 이자르를 입고 있다. 낙타의 안장은 수백년간 아라비아에서 쓰여오던 것이며 가죽으로 된 등자가 있다.


무슬림의 대정복

1. 안사 전사-7세기 중반 : 안사-예언자의 돕는 사람들-들은 '인도된 칼리프'들의 정예병력이 되었으며 그들의 장비와 무기등은 여러곳에서 자세히 묘사되었다. 이 병사는 하얀 펠트 모자-칼란수와-를 그의 투구 위에 쓰고 있다. 노란색 터번은 그가 안사임을 나타낸다. 실로 짜여진 가는 벨트와 수대-어깨부터 허리까지 칼을 차기 위해 만들어진 띠-는 가죽 벨트나 수대보다 더 많이 사용되었을뿐만 아니라 이 시대의 특징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의 장비는 긴 대나무 창과 전통적인 형태와 비슷한 짧은 칼, 그리고 약간 대칭이 맞지 않는 아랍 스타일의 활, 기름을 바른 가죽 방패이다. 어깨의 호버크 아래에는 속을 천 등으로 층층이 튼튼하게 채웠다.

2. 페르시아 아사와리아 기병-7세기 중반 : 옛 사산조 기병의 함라-붉은 얼굴의 사람들-의 일원이었던 이 병사는 사산조 최후의 시기의 무장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넓은 철띠로 강화된 투구와 셔츠모양의 튜닉 아래 입은 짧은 사슬 호버크, 다리를 보호하는 란-장식된 각반-이 그의 무장이다. 활을 쏘는 오른손은 가죽끈으로 보호하고 있다. 아바르 양식의 긴 칼과 단검, 활은 두개의 나눠진 벨트에 고정되어있으며, 마갑은 북부 스텝의 영향을 보여준다. 안장에는 목제 등자가 달려있다.

3. 베르베르 보조병 : 무장이 매우 빈약한 이 베르베르 보조병은 조악한 직조 하이크와 코르크로 바닥을 댄 샌들을 착용하고 있다. 베르베르족이 지난 세기동안 그랬듯이 전투를 위해서 머리를 밀었고 창과 간단한 투석끈, 돌이 든 가방, 그리고 가죽 방패를 들고 있다.

우마이야조의 보병

1. 우마이야조 근위병-8세기 초 : 이 정예병이 쓰고 있는 철과 청동이 섞인 투구는 중앙아시아에서 유래됬음에도 이란과 이라크에서 대규모로 제조되었다. 그의 디르 호버크 밑에 있는 두라아-앞이 뚫린 튜닉-은 아랍에서 습관적으로 착용된것 같다. 수대에 달려있는 미끄럼 방지가 된 세겹짜리 칼집세트는 매우 특별한 형태인데 이러한 형태는 사마르칸트와 판지켄트(pianjikent)의 낙타를 탄 아랍 침략자들의 그림에서 볼 수 있다.

2. 우마이야조 보병-8세기 초 : 이 보병 궁수는 투구 위에 모자를 쓰고 있다. 이 병사의 무장은 일반적인 우마이야조 보병의 무장을 보여준다. 그의 유일한 다른 방어구는 쇠사슬 디르이다. 천으로 된 카바와 솜으로 된 카미스(겉옷과 갑옷 안의 흰 옷을 말하는것 같은데, 어느게 카바이고 어느게 카미스인지 모르겠음) 아래에는 군사들이 입었던 바지 시르왈이 있다. 어깨에 걸치고 있는 숄은 타얄산이라고 부른다.

3. 무슬림 여성-8세기 초 : 일반적인 견해에도 불구하고, 여성들은 초기 무슬림 시기동안 매우 활동적으로 일을 했었다. 그리고 때에 따라서는 집을 지키기 위해 무기를 들기도 했다. 이 여성은 아마도 부유한 계층의 출신일 것이다. 고급 터번은 머리카락만을 가리고 있는데 이러한 것이 현재의 극단론자들이 주장하는 모든 얼굴을 가리는것 보다 예언자의 본래 가르침에 더 가깝다.

우마이야조의 기병 
 
1. 발흐 총독-8세기 : 여기 이 총독은 갑옷 대신 고위 관료의 옷을 입고 있지만, 지방 총독들은 중무장을 했다. 시위를 매지 않은 채 활집에 들어있는 거대한 아랍활은 도보로만 사용할 수 있다. 몇몇 우마이야의 상류층 인사들은 보석류나 마스카라-코흘-를 이용하기도 했다. 이 자는 말 위에 비스듬히 걸터앉아 있는데, 이러한 형태는 파지켄트의 벽화에서 보인다. 초기 형태의 칼란수와-모자-와 타야라산-목에 두른 흰 띠-를 쓰고 있으며 큰 장갑을 끼고 있다.

2. 우마이야조 정예 기병-7세기 후반 : 이란 출신의 병사들의 무장에서는 이란 갑옷의 영향을 받은점이 보인다. 이 병사는 미그흐파르-쇠사슬 드림-를 입고 있는데, 이 갑옷은 그의 옷 아래에 있다. 청동 러멜러 흉갑은 탄누르 또는 '자궁'이라고 알려졌다. 손에는 이란 양식의 건틀렛을 끼고 있으며 발은 사크 알 자르드라고 불리는 쇠사슬 각반으로 보호하고 있다. 방패는 나무로 된 채색방패이다.

3. 이집트의 우마이야 왕조의 경기병-8세기 중반 : 기후는 우마이야 칼리프조의 아랍 지방에서 중장갑이 드문 이유에 대한 답이 될것이다. 이 병사는 남부 누비아에서 온 악어가죽 투구-초기 중세시대에 쓰인 철제 러멜러 목 보호대가 곁들여 있다-를 쓰고 있다. 화려하게 장식된 카미스 셔츠와 시르왈 바지위에 찬 두개의 벨트가 있는데, 첫번째 벨트는 실로 두껍게 짠 아랍의 양식이고, 가죽과 장식이 달린 가죽 벨트는 새로 나타난 투르크-이란의 양식이다. 낡은 가죽이 덧대여져 있는 안장에는 목재 등자는 달려있지 않다.


 압바스 혁명 
 
1. 후라사니 아랍 정예병-8세기 중반 : 이 정예병은 그의 터번과 모자 아래 둥그런 낮은 투구를 쓰고 있다. 또한 그는 일반적인 형태의 갑옷인 디르에다 얇은 판을 겹쳐 만든 완갑(팔에 차는 방호구)을 쓰고 있다. '명예의 겉옷' 위에 금으로 된 타와-목걸이-를 쓰고 있는데, 이 목걸이는 전투에서 장교들을 구분하기 위해 주어졌다. 말에서 내린 채로 싸우기 때문에 칼은 등에 차고 있다.

2. 후라사니 아랍 기병-8세기 후반 : 이 병사는 바야다 투구와 미그흐파르를 입고, 투구 위에는 가죽 안감을 댄 모자-아마도 이 모자는 칼란수와 샤하시야일것이다-를 쓰고 있다. 전통적인 이란 양식의 카바 코트 아래에는 쇠사슬 호버크를 입고 있다. 이란의 샬와 바지 위에 정강이 갑옷인 란을 가죽끈으로 고정했으며 칸자르라는 단검, 도끼(타바르진), 투르크-이란의 합성궁으로 무장했다. 이 시기에 무슬림 궁수들은 손가락과 엄지 모두를 이용해서 활을 당겼다.

3. 페르가나 기병-8세기 중반 : 민족적인 기원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이 기병은 투르크식의 높은 투구를 쓰고 있다. 앞부분에 솜털을 포갠 겉옷 밑에 쇠사슬 호버크와 얇은 판을 겹쳐 만든 정강이 갑주와 완갑을 착용하고 있다. 겉옷의 아래쪽 부분에 있는 가죽 러멜러 흉갑은 따로 입을때도 있었다. 말에는 코에 큰 금속 재갈끈을 매어놨고 안장의 뒷부분에는 분해된 천막이나 접은 깃발을 매어두는 막대가 매달려 있다.

 


압바스조-변경의 전사들 
 
1. 아나톨리아 국경 전사-9세기 초 : 많은 사료들이 동부 아나톨리아의 비잔티움 병사와 무슬림 병사사이의 장비의 유사성이 있음을 말해준다. 이 병사는 오직 터번을 통해서만 그가 무슬림이란걸 알아볼수 있으며 각 부분을 대갈못으로 고정한 철제 투구를 쓰고 있다. 실로 짠 두꺼운 검은 겉옷-두라아-아래에 보편적인 갑옷인 디르와 가벼운 가죽 부츠-쿠프-를 착용하고 있다. 그의 쭉 뻗은 양날검은 노획된 비잔티움의 무기에서 나타난다.

2. 압바스조 보병-9세기 초 : 여기 이 병사는 종려나무 잎의 줄기로 만든 투구와 가죽으로 감싼 갈대방패를 들고 있다. 이 방패는 중동에 몇세기전부터 알려져 온것인데, 다만 다른 것은 자신의 방패에 역청칠을 했다는 것이다.

3. 페르시아 기병-9세기 초 : 9세기 중반에 이르러서 많은 이란인 기병들은 이전보다 더 가볍게 무장한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경향은 보병이 덜 중시되고 기마 궁술을 더 중요히 여기는 상황을 반영한다. 이 기병은 새로운 형태의 칼란수와를 쓰고 있다. 짧은 쇠사슬 호버크는 철제 러멜러 흉갑아래 입었는데, 이러한 갑옷들은 전신부의 가슴만을 보호하기 위한 목적으로 입었다. 그는 또한 당시 이란에서 많이 쓰이던 굽은 세이버를 들고 있다. 말의 머리는 천을 덧댄 철제 마갑으로 보호하고 있고, 몸통과 목은 티즈파프라고 불리는 펠트를 층층히 쌓아 만든 마갑을 쓰고 있다.

 압바스조-궁중 
 
1. 굴람 근위기병-9세기 중반 : 노예 출신의 이들 굴람들은 처음 몇년간은 통치자의 가장 신뢰할만한 근위병들이었다. 이 굴람은 장식된 비단 두라아와 헐렁한 비단 바지를 입고 있다. 긴 머리는 아마도 그가 투르크족 출신이란것을 보여주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다른 부족 출신들도 긴 머리를 했다. 활은 명백히 중앙아시아에서 발명된것이나 화살통과 활집은 투르크 양식의 영향을 보여준다. 뺨가리개가 달려있는 투구는 많은 그림에서 보인다.

2. 아브나 보병-9세기 초 : 이 아브나 보병의 장비와 복장을 통해 그의 부대가 아랍군과 후라사니들의 혼합이라는것을 알수 있다. 터번 아래에는 양질의 이란 철과 청동으로 만든 투구를 쓰고 있으며 그가 들고 있는 압바스조의 검은 깃발에는 쿠란의 구절이 쓰여있다.

3. 칼리프 무타와킬(847~861) : 칼리프는 터번 천 아래 걷어올린 가죽 목덮개가 달려있는 칼린수와 타윌라를 쓰고 있다. 어깨에는 붉은 비단으로 만들어진 미트라프를 두르고 있고 검은 가죽으로 만든 주바흐 아래 붉은 두라아를 입고 있다. 궁전 안에서 압바스조의 칼리프들은 카딥이라는 지팡이를 가지고 다녔으나 궁전 외부에서는 여기 보이는 간단한 형태의 외날 세이버를 가지고 다녔다. 다양한 형태의 검은 웃옷과 화려하게 장식된 허리띠, 그리고 이러한 지팡이나 칼은 압바스조의 표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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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바비 탄생, 이슬람과 바비의 만남?


이슬람 여성을 모델로 한 바비가 탄생해 화제입니다.
 
16일 '스포츠서울닷컴'은 영국의 일간지 '텔레그라프'의 보도를 인용해 "이슬람 여성들의 전통 의상인 부르카(Burca)를 두른 바비인형이 탄생해 관심을 모으고 있다"며 "이것은 바비 탄생 50주년을 기념해 만들어졌다"고 보도했습니다.

어쩌면 당연하지만 '이슬람 바비'들은 마텔사에서 출시된 바비 중 가장 노출이 적습니다. 온 몸은 물론 얼굴까지 가린 이슬람의 전통 의상 때문이죠. 그동안 인형의 과도한 노출과 지나치게 섹시한 몸매로 여성 성상품화 논란에 시달리던 바비인형계 일대 혁신입니다.

하지만 화려한 색상의 '부르카'로 포인트를 줬습니다. 이 '이슬람 바비'들은 이슬람 율법대로 3개의 인형 중 2개는 얼굴 전체를 가려 이슬람 전통문화를 존중했다는 평을 받고 있습니다.

다원주의 시대에 걸맞게 다양한 바비들이 탄생하는 것은 긍정적인 일인 것 같습니다.

※ 저작권에 대한 내용 본 블로그의 공지사항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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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 최초! 성에 대한 설문조사!

중동최초 성에 대한 설문조사의 결과

 중동에서 사상최초로 행해진 설문조사의 결과입니다. 세계적인 콘돔회사 듀렉스(Durex)가 행한 이번 설문조사에는 아랍권 10여개국에서 3189명이 참여했습니다. 이 중에는 642명의 여성이 참여해 전체 응답자의 18%를 차지해 아랍권 여성들도 점차 성생활에 깊은 관심을 표명하고 있음이 밝혀졌습니다.
                   

                         (아랍인들이 가장 섹시하다고 생각하는 연예인 1위, 레바논의 가수 엘리사)

다음은 주요 설문조사 결과입니다.

 1. 주요 피임방법은?

콘돔: 44.9%
피임약: 10.9%
질외사정: 10.7%
사용하지 않는다: 11.5%
참는다: 6.9%

 (역시 콘돔이 가장 응답률이 높았습니다. 참는다는 대답도 6.9%나 나왔네요ㅋㅋ)

 2. 얼마나 자주 섹스를 하는가?

하루에 한번 이상: 12.8%
일주에 5-6번: 9.2%
일주에 3-4번: 14.6%
일주에 두번: 15.1%
일주에 한번: 11.5%
이주에 한 번: 5.8%
한달에 한번: 3.3%
2-3개월에 한번: 3.4%
6개월에 한번:  1.6%
거의 하지 않는다:  7.3%
한번도 해본적 없다: 15.0%

(마지막 응답을 보면 역시 성에 대해 비교적 폐쇄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3. 몇살때 공개적인 성교육을 받았는가?

 10살 미만 5.9%
11-13세 18.8%
14-16세 26.0%
 16세 이14.2%
 전혀 받은 적이 없다 27.1%

4. 성교육은 누가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부모: 36.4%
학교 41.6%
 의사/간호원 4.5%
 정부 3.9%
 잡지/서적/인터넷 4.7
 기타 5.0

 5. 처음 만나거나 잘 모르는 사람과 섹스를 해본 경험이 있나?

 있다 39.9% 
 없다 60.1%

6. 섹스 상대를 잘 모를 경우 우려되는 것은?

에이즈 53.1%
걱정되는 것 없다 21.0%
매독, 임질 등 성병 14.2%
임신 11.7%

7. 상대방을 가장 섹시하게 보이게 하는 부분은?

가슴 18.7%
피부 색 15.7%
얼굴 12.3%
눈 11.7%
히프 8.9%
유머 8.7%
지성미 7.8%
미소 7.0%
다리 4.4%
나이 2.0%
돈 1.6%
키 1.1%
머리 색 0.2%

(우리나라나 서양과 달리 각선미를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 안한다는 것이 특징입니다. 중동의 경우 풍만한 여성을 아름답다고 여긴다고 알고 있습니다.)

 8. 가장 섹시하다고 생각하는 연예인은?(Top 5만 적습니다)

 안젤리나 졸리 11.1%
 엘리사 (레바논 여가수) 8.7%
 캐서린 제타 존스 7.6%
 제니퍼 로페즈 6.4% 
 낸시 아그람 (레바논 여가수) 6.1%

 9. 중동에서 가장 낭만적인 도시는?(Top 4만 적습니다)

 레바논 베이루트 36.2%
 아랍에미리트 두바이 14.1%
 모로코 카사블랑카 12.8%
 이집트 카이로 10.8%

10. 가장 섹시한 머리 색깔은?

 검은색 36.3%
 갈색 26.6%
 금발 21.7%
 빨간색 10.0%

 11.원하지 않은 임신을 한 경험은?

  있다 21.2%
  없다 78.8%

(자료참조:서정민 기자님의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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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루 체포 소식에 대한 해명, 대체 진실은?


김미루 체포 소식에 대해 김미루가 지난 25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이스탄불에서 체포당하지 않았고 사원 꼭대기에 올라간 적도 없다"고 밝혔습니다.

김미루는 이어 "잘못되고 과장된 뉴스가 타블로이드 신문들에 의해 더 확산됐다"고 짧게 해명했습니다.

앞서 터키 일부 언론들은 24일자 보도로 김미루가 이슬람 사원에서 누드 촬양 중 터키 경찰에 체포됐다고 전했습니다.

김미루는 김용옥 전 고려대학교 철학과 교수의 딸로 한국계 미국인입니다. 김미루는 전 세계를 돌며 황량한 배경에 자신의 누드를 사진이나 영상으로 담아내 전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김미루가 이같은 작업을 한 것은 지난 2004년으로, 당초 2003년 미국 컬럼비아 대학교 불문학과 졸업 후 의사 준비를 하다가 프랫 인스티튜드 미술학교로 진학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강박장애에 시달려와 그 강박감과 공포를 극복하기 위해 선택한 작업이었다고 합니다.

체포 소식이 전해지기 한달 전에도 김미루는 이스탄불에서 여러 배경 앞에 자신의 누드를 담아내고 있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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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쿠크법 논란에 국회 몸살, 대체 무슨 법이길래?

수쿠크법 논란에 국회가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수쿠크법 이라고 불리는 이슬람 채권법 도입 여부를 두고 정치권이 공방을 벌이고 있습니다. 스쿠크법은 이슬람 채권에 면세혜택을 주는 내용을 담은 이슬람 채권법입니다.

수쿠크법은 ‘돈을 빌려주고 이자(리바)를 받는 것을 엄격히 금지’ 하는 이슬람 채권법의 규제를 피하기 위한 금융법입니다. 돈을 빌려주는 대신 실물을 매개로 한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 예로 수쿠크법은 기계를 구매하기 위해 은행에 대출을 하는 사람에게 은행이 직접 기계를 사들여 제공하고 사용료를 받는습니다. 여기서 사용료는 이자 대신에 지불되는 것이죠.

정부는 당초 2월 임시국회 통과를 기대했던 수쿠크법에 대해 법인세 양도세 부가세 취·등록세 등 일체의 세금을 면제하겠다고 밝혔지만 민주당 반대로 통과 여부가 불투명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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