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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레일 패스와, 유럽의 기차!

유레일 패스 요령있게 구입하는 법


 유레일 패스가 현지 가격보다 싸다 할지라도 그리 만만한 경비는 아니다. 똑같은 유레일 패스일지라도 꼼꼼히 살펴보면 경비를 절약할 수 있는 방법이 얼마든지 있다
.

 유레일 패스는 매년 1 1일부로 약 10%의 가격이 상승된다. 하지만 유레일 패스의 유효기간이 6개월이므로 최초의 여행 개시일이 6월 이전이라면 미리 구입하는 것도 좋다. 그러나 취소할 경우에는 15%의 취소료가 붙는다는 것도 잊지 말자
.

 일반적으로 유레일 패스를 구입할 때는 자신의 여행기간보다 다소 적게 구입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예를 들어 30일 여행자라면 21일정도의 패스면 충분하다. 왜냐하면 첫 기착지의 도시에서는 시내 대중 교통을 이용하므로 패스를 이용하지 않아도 여행이 가능하며 마지막 출발지에서도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이때 유레일 패스의 인준은 첫 도착지에서 여행을 끝마치고 다음 지역으로 이동할 때 인준 받아야 한다는 것도 잊지 말자.

 유레일 패스를 구입할 때는 4개 종류의 패스 가운데 어떤 패스를 선택할 지 보다 신중한 자세가 필요하다.
전체 여행기간이 비록 한달 정도라고 해도 실제 여행지 이동 구간이 5~7개 도시라면 2개월에 10일 짜리면 여행이 가능하다. 따라서 자신의 일정표를 정확하게 파악한 후에 패스를 구입하도록 하자.

 

유럽의 기차역 


 기차역은 여행자들이 가장 먼저 밟게 되는 도시의 관문이다
. 여행을 하다 보면 가장 많이 이용하는 곳이 기차역이고 또 많은 시간을 이곳에서 보내게 된다

 

 기차역에는 여행안내소(tourist information ) 열차안내소(rail information), 은행, 환전소, 화장실, 매점, 샤워시설(큰 역의 경우), 락커, 레스토랑 등 배낭여행자들을 위한 시스템이 잘 갖추어져 있어 늦은 시간이나 이른 시간에도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다.

기차역을 효과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그 시스템에 대해 먼저 알아보자.

 

 한 도시에도 기차역이 여러 곳 있는 경우가 많다.

서울의 경우 서울역, 영등포역, 용산역, 청량리역 등 여러 곳의 기차역이 있으며 각각의 역마다 행선지가 다른 열차가 출발한다유럽의 경우도 큰 도시는 마찬가지이다. 더구나 도착과 출발이 각각 다른 역에서 진행될 수 있으므로 항상 출발역을 잘 체크하는 것이 중요하다.

 

개방된 플랫폼

 


 우리나라는 기차표가 있는 사람만 검표원의 검표 후에 플랫폼에 들어가 기차를 기다리고 승차하게 되어있지만 유럽의 경우는 플랫폼이 개방되어 있어 누구나 기차 앞까지 갈 수 있다. 전광판이 있어 지정된 플랫폼을 쉽게 찾을 수 있고 검표원은 열차가 출발한 후 기차를 돌며 검표한다.

 

 

기차 출발 / 도착

 기차의 출발과 도착시간은 전광판을 통해서도 알 수 있지만 출발시간이 많이 남아있는 기차는 전광판에 표시되지 않는다. 이럴 때나 전체적인 시간표를 알고 싶을 경우에는 역내 벽면에 붙어있는 시간표를 참고한다.

출발하는 기차 시간은 노란색 바탕에, 도착하는 기차 시간은 흰색 바탕에 경유하는 도시와 시간까지 자세히 기입되어 있다. 유럽의 기차역에서는 안내방송이 거의 없다. 있다고 하더라고 역 천장을 울리는 외국어 안내방송을 알아듣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먼저 노란색 바탕의 시간표에서 출발시간과 플랫폼번호를 확인했다 하더라도 출발 전 전광판의 플랫폼 번호를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움직이자. 유럽에서 기차는 스스로 알아서 타고 내려야 한다


기차의 종류 

 

유럽의 기차는 일반열차와 고속열차, 호텔형기차 등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대부분의 기차는 모두 유레일패스로 탑승 가능하나 개인이 운영하는 일부 사철과 도시 내의 지하철 등은 이용할 수 없다.

 

초고속 열차

 

ICE : Inter City Express의 약자로 독일의 첨단 기술력을 엿볼 수 있다. 희고 미끈한 열차 안에는 각종 편의시설이 갖추어져 세계 최고 수준의 열차 서비스를 자랑한다

TGV : 프랑스의 초고속 열차로 우리나라 고속철도 KTX에 도입된 열차이다. 파리-리용 구간에서 300Km까지 달릴 수 있다고 한다. 반드시 예약해야 탈 수 있으며 예약 비는 € 3.00. 

TALGO : 스페인의 각 도시를 연결하며 프랑스 쪽으로 넘어가서 궤도 폭이 달라져도 그대로 달릴 수 있게 되어있어 국경에서 갈아탈 필요가 없다

THALYS : 주요 도시를 연결하는 열차로서 TGV와 거의 비슷하다. 유레일 패스로도 탑승은 가능하나 독일의 ICE를 제외하고 모두 반드시 좌석 예약을 필수로 하고 있다. 좌석예약은 기차역에서 할 수 있고 별도의 예약 비를 내야 한다. Reservation ticket을 함께 소지하여야만 기차에 탑승할 수 있다는 점을 잊지 말자

 

일반열차

 

EC(Euro city), IC(Inter city) 유럽 열차여행 중 가장 자주 이용하게 되는 열차 편으로 대부분이 1등석, 2등석으로 나눠져 있으며 일부 EC열차는 식당 칸도 있다.

좌석은 코치, 컴파트먼트 형태로 되어 있다. R 표시가 없는 경우는, 별도의 예약이 필요 없이 유레일패스 만으로 이용이 가능하다

 

EN(Euro night), CNL(CityNightLine), NZ(DB Nacht Zug), ICN(Inter CityNight), D 위에 같은 열차들은 유럽의 주요도시를 연결하는 야간열차들에 붙는 이름이다. 대부분 같은 의미로 쓰이고 있지만 나라별 이름이 다르기도 하다. R표시가 있는 경우는 반드시 예약을 해야 하고 그렇지 않은 경우는 유레일패스를 이용해 그냥 탈 수 있다

 

R, IR, RE, RX 열차 종류에 이 같은 이름이 들어간 열차들 대부분이 장거리보다는 근거리 이동에 이용되는 열차편이다. 짧은 구간을 이동하기 때문에 열차 내에 식당칸, 화장실 시설이 잘 갖춰져 있지 않는 경우도 있다. 유럽 여행 중에는 암스텔담 근교의 마두로담, 뮌헨 근교의 퓌센, 뽀르뜨 보에서 바르셀로나로 들어가는 열차 등이 이에 해당한다.

특급열차와 같이 추가 요금, 예약필수인 경우는 거의 드물다. R (Regional) 표기되는 열차는 위의 완행열차 중에서 가장 근거리를 운행하는 열차로 주요 도시와 멀지 않은 곳을 운행하고 있다.  

 

IR (Inter Regio)은 우리가 많이 이용하게 되는 열차편이다. 이것의 일부 열차 편은 IC와 같은 노선을 운행하고 있기도 하지만 IC에 비해서 여러 번 정차하는 완행 열차편이므로 같은 노선일 경우 가능한 한 IC를 타도록 하자.

 

RE (Regional Express 독일), RX (Regio Express 스위스)는 근거리 열차 편 중에서 IR에 비해 비교적 빠르게 이동할 수 있는 열차이다. 대부분 독일 내 열차들이 이에 해당된다

 
좌석의 종류

 

코치 Couch

우리나라의 기차와 같은 배열이다. 주로 주간에 이동하는 기차가 많다

컴파트먼트 Compartment

1개의 방에 6~8명이 마주보며 안도록 배열되어 있다. 야간열차나 장거리 이동하는 기차에 많다. 마주보는 좌석을 서로 앞으로 당기면 두 좌석이 연결되어 작은 침대처럼 된다. 야간 이동의 경우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다

쿠셋 Couchette

간이 침대 형 야간열차이다. 편안히 누워 잠을 자며 이동할 수 있다. 보통 양쪽으로 3층 침대가 놓여 있는 6인실로 구성되어 있다. 반드시 예약을 하여야 하며 비용은 약 20,000~25,000원이다. 피곤에 지친 경우나 안전이 우려되는 야간열차 구간의 경우 문을 잠글 수 있으므로 매우 유용하다.

슬리핑 카 Sleeping Car

1-4인실까지 있으며 예약은 필수다. 예약비가 비싸 배낭여행자들은 자주 이용하기 어렵다. (4인실이 1인당 6-8만 원 정도) 객실 내에 간단한 세면대가 있고 베개와 시트 등이 지급된다. 다른 사용법은 쿠셋과 같다.

식당칸

보통 1등석과 2등석의 중간에 위치한다. 간단한 음료부터 제대로 된 식사까지 다양하다. 가격이 만만치 않아 자주 이용하기는 좀 부담스럽다. 객실 내에서 흡연이 가능하다.

 
기차 예약
 

예약을 해야만 탑승이 가능한 기차를 이용할 경우, 좌석의 확보를 원할 경우, 쿠셋이나 침대칸 등의 이용을 원할 경우에 예약을 해야 한다

예약은 반드시 기차역의 창구나 rail information에서 하여야 하며 예약 후 받는 예약증이 있어야 좌석에 탑승할 수 있다

국경을 넘어 이동할 경우에는 International 또는 English Speaking이라고 쓰여 있는 창구에서 예약하는 것이 편하며 서툰 발음으로 예약하기보다는 메모지에 기입하여 유레일패스와 함께 제시하는 것이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예약은 빨리 할수록 유리하고 늦어도 반드시 탑승 12시간 전에는 하여야 한다. 특히 여름철 성수기의 경우라면 미리미리 예약하는 것이 살 길이다

예약은 출발도시에서만 가능한 것이 아니라 유레일이 통용되는 유럽의 모든 도시에서 가능하다. 유럽의 철도 예약 망이 on-line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한 도시에서 예약하고 싶은 여러 구간을 모두 예약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암스텔담/뮌헨/, 뮌헨/프라하, 비엔나/베니스, 로마/인터라켄, 니스/파리의 5구간을 예약할 계획이라면 암스텔담에서 한꺼번에 모두 예약이 가능하다. 그러나 역마다 1인당 예약 건수를 2~3구간으로 제한하는 경우도 있으므로 동행인이 있다면 2~3구간씩 나누어서 예약한다

대도시의 경우 예약 창구마다 여행자들로 항상 붐빈다. 따라서 대륙 도착과 동시에 최대한 빨리 야간열차를 예약하도록 하자.


기차 이용시 주의사항


탑승시간을 확인한다
.  

미리 예약을 하는 경우는 예약증에 기차 출발시간이 적혀있기 때문에 별 문제가 없다. 하지만 예약 없이 탈 경우에는 미리 출발시간을 확인해야 한다. 이때 유레일 타임테이블보다는 역의 노란색 출발 시간표가 더 정확하고 노란색 출발 시간표보다는 전광판이 정확하다.

 

트랙을 확인한다

전광판을 보고 확인한 플랫폼으로 가면 먼저 플랫폼에 붙어있는 열차 편성표에서 1, 2층 칸과 침대 칸의 위치를 확인한다. 예약을 하지 않아 확보된 자리가 없는 경우라면 특히 정확한 트랙 앞에서 미리 기다렸다가 기차가 도착했을 때 바로 올라타자. 서울에서 지하철 탈 때 잽싸게 앉기 위해서 했던 행동을 떠올려 보자!

 

목적지를 확인한다

기차를 타기 전에는 기차의 앞, 뒤 출입구 옆에 붙어있는 표지판을 보고 탈 기차의 차량 별 최종 목적지를 확인한다. 같은 시간에 같은 플랫폼에서 출발하는 기차라도 각 차량 별로 목적지가 다른 경우가 많이 있다. 중간의 경유 역에서 기차들이 서로 붙고 떨어져 각기 다른 행선지로 향하는 수가 있기 때문이다.

일단 아무 칸이나 타서 빈자리에 앉는다든가 탑승 후 이 칸 저 칸 옮겨 다니다 보면 분명히 로마에 도착해야 할 내가 아침에 일어나보니 니스에 있다거나 친구와 따로 떨어져 앉았다가 친구는 로마에, 나는 니스에 갈 수도 있다는 얘기다. 항상 기차 타기 전 목적지를 확인하고 만약 기차 내에서 옮겨 다녀야 할 경우에도 기차 양쪽 문에 붙은 행선지표를 항상 확인해야 한다.

 

탑승 30분 전까지는 도착한다

급하게 역에 도착해 서두르다 보면 실수가 생기는 법이다. 여유를 가지고 탑승 30분 전에는 역에 도착하자. 종착역이라면 기차가 미리 플랫폼에 도착해 있을 것이다. 일찍 도착하면 좌석 잡기도 쉽고 무거운 배낭을 들고 힘겹게 뛰지 않아도 된다.

 

도착시간은 내가 체크한다

유럽의 기차에서 안내방송은 거의 없을뿐더러 있다 해도 듣기가 쉽지 않다. 승차하기 전에 도착시간을 미리 체크하고 내릴 시간이 되면 미리미리 내릴 준비를 하자. 기차가 서행하기 시작하면 도착 역의 표지가 보일 것이다 .특히 주간에 이동하는 기차의 경우 종착역이 아니라면 정차 시간이 상당히 짧다. 기차가 완전히 정차한 후 문을 돌리거나 당겨서 열고 내려야 한다. 만약 자동으로 열릴 것으로 생각했다가는 다음 역에서 내려야 하는 불상사가 생길 수도 있다. 여유 있게 그러나 민첩하게…….

 

유레일 타임 테이블

유레일패스, 유로 패스 등 기차 패스를 구입하면 유레일 타임 테이블이라는 대도시 위주의 기차시간표와 유럽지도가 있는 유레일 Traveler’s Guide를 받게 된다. 유레일 여행자 가이드에는 유럽지도와 유레일패스의 사용법,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부수적인 보너스에 대해 씌어  있다. 대도시 위주의 여행이나 호텔 팩, 단체 배낭여행처럼 숙소를 미리 확보하고 떠나는 여행의 경우 이때 받게 되는 유래일 타임 테이블 만으로도 충분히 기차여행이 가능하다.

 

유레일 타임테이블 보는 법

 

1) 출발 도시를 찾는다. 알파벳 순서대로 배열되어 있다. 출발도시는 큰 글씨로 진하게, 도착도시는 작은 글씨로 쓰여 있다.

2) 도착 도시를 찾는다. 역시 알파벳 순서대로 배열되어 있다. 맨 왼쪽이 출발시간, 오른쪽은 도착시간이다. 갈아탈 경우 중간에 따로 시간이 표시되어 있고, 그 왼편에 갈아타는 역이 기입되어 있다.

3) 기차 종류를 체크한다.

EC, IC, ICE와 아무 표시가 없는 기차는 예약 없이 탑승 가능한 기차이다. 그 외의 표시가 되어 있는 기차는 맨 앞 페이지의 범례를 참고하여 예약이 필수인 경우 반드시 예약한다.

4) 역을 확인한다.  도시에도 여러 역이 있으므로 주의 깊게 출발 역과 도착 역의 이름을 확인한다.


 

 위의 그림은 유레일 패스를 사용한 history. 패스를 사용하려면 먼저 기차역 체크인 카운터 직원에게 여권과 함께 유레일 패스를 제시하여 우측 하단의 스탬프를 받아야 사용할 수 있다. 패스를 가지고 있더라도 스탬프가 찍히지 않았다면 사용할 수 없다는 점에 주의한다.

또한 기차를 이용하는 날짜를 위와 같이 수기로 작성하는데, 하루에 여러번의 기차를 이용했다면 같은 날짜를 여러번 기재하지 않고 한번만 기재한다.

 
예약없이 탈 경우에는?

예약을 하지 않고 기차에 올랐을 경우 빈 자리라고 무조건 앉지 말고 유리문 오른쪽 위에 노란색 예약 표가 끼워져 있는 지 확인하자. (컴파트먼트가 아닌 일반 좌석의 경우 좌석 위 선반에 예약 표가 끼워져 있다)

예약 표가 끼워져 있지 않다면 예약이 없다는 표시이므로 마음 놓고 앉으면 된다. 그러나 예약이 되어있는 난감한 상황이라면 예약 표를 일일이 확인해보자. 예약 표에는 어느 좌석이 어느 구간까지 예약되어 있는지 쓰여져 있다. 빈 구간을 잘 활용하면 서서 가는 고생을 면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서울에서 부산까지 가는데 1번 좌석은 서울/대전까지만 예약되어 있고 2번 좌석은 대전/부산이 예약되어 있다면 서울/대전까지는 2번에 앉고 대전/부산은 1번으로 옮겨 앉으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때로는 차장이 예약 표 정리를 하지 않아 이미 날짜가 지난 예약표가 끼워져 있는 경우도 있으니 날짜까지 확인해 보는 것도 좋다(자료 : 블루여행사 http://www.blueeurope.co.kr/punchup/travel_tips.asp?code=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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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아버지 왕(Rex Pater Europae), 샤를마뉴


초기생애

 샤를마뉴는 샤를1세(Charle Ⅰ), 카알 대제(Karl der Grosse), 찰스 대제(Charles the Great), 카롤루스 대제(Carolus Magnus) 등으로도 불린다. 그는 742년경 4월 2일 피핀 3세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메로빙거 왕조 말기 프랑크 왕국의 권력은 궁재(宮宰)에게로 집중되었으며 샤를마뉴가 태어날 무렵엔 그의 아버지 피핀과 숙부 카를로만이 프랑크 왕국의 궁재가 되어 프랑크 왕국을 장악한 직후였다. 나중에 카롤링거 왕조라고 부르게 된 이 가문은 메로빙거 왕조의 궁재직을 세습하며 프랑크 왕국 전체에 대한 지배권을 장악해왔다. 샤를마뉴의 할아버지 카를 마르텔은 분열 직전에 처한 왕국을 재건했고 732년에는 투르와 푸아티에 전투에서 사라센(이슬람)을 물리쳐 유럽과 기독교 세계를 지켜낸 공로로 인망이 있었다. 그는 힘없는 메로빙거 왕조가 유일하게 갖고 있던 이름뿐인 국왕의 대권을 침해하지 않은 채 사실상 왕국을 아들인 피핀과 카를로만에게 세습하듯 물려주었다.

 샤를마뉴가 어렸을 때 그의 아버지 피핀은 왕족 및 자신의 형제들을 쓰러뜨리고 권력을 차지했으며 751년에는 힘 있는 자가 국왕이 되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며 교황 자카리아스로부터 승인을 받아 실권 없는 메로빙거 왕가의 마지막 왕 힐데리히 3세를 폐위시킨 뒤 프랑크 회의에 의해 왕위에 올랐다. 자카리아스의 후임 교황인 스테파누스 2세는 롬바르드족(랑고바르드)의 침공으로부터 로마를 보호하는 데 도움을 청하려고 754년 알프스를 넘어 프랑크 왕국을 방문했는데 당시 12세였던 샤를마뉴는 왕국의 장자로서 교황을 영접했다. 교황은 생드니 대성당에서 성유식(聖油式)을 집전해 피핀과 그의 두 아들 샤를마뉴 및 카를로만에게 왕의 칭호를 수여했다. 이 귀중한 봉사의 대가로 피핀은 롬바르드족을 교황의 영지에서 축출할 것을 다짐했다. 피핀은 760년부터 해마다 원정을 해 아키텐(루아르 강 남쪽의 프랑스)을 정복함으로써 피레네 산맥까지가 모두 프랑크 왕국의 영토임을 재확인했다. 이 일련의 원정에는 샤를마뉴가 늘 동행했다.

 이런 젊은 시절의 경험은 아마 샤를마뉴의 성격과 목표 형성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그는 아버지를 닮아서 권력에 대한 불굴의 의지를 갖고 있었다. 외적에 대항해 단호하게 싸우고 기회만 있으면 영토를 넓히려는 경향, 가까운 친척들의 권리를 빼앗는 한이 있더라도 혼자 나라를 다스리겠다는 결심도 아버지와 똑같았다. 샤를마뉴는 세속 권력과 교회 권력의 밀접한 관계를 일찍부터 인정했다. 그는 교회를 존중했고 크리스트교 신앙을 널리 전파하는 것이 왕의 의무라고 생각했다. 또 교회에 대한 왕의 종주권을 주장하면서도 신이 그에게 크리스트교도들을 맡겼기 때문에 신에게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프랑크의 왕

 768년 피핀이 죽자 프랑크 왕국의 오랜 관습에 따라 왕국은 그의 두 아들에게 분할되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형제 사이에 격렬한 대립이 일어났다. 샤를마뉴의 동생 카를로만은 부르군트 일대를 다스렸는데 롬바르드 선왕의 왕비였던 게르베르가와 결혼하였다. 롬바르드 왕 데시다리우스는 카를로만이 프랑크 전체의 왕이 되기를 원하여 그를 암암리에 지원하였다. 그러나 동생과의 갈등에서 샤를마뉴는 승리했고 771년 카를로만이 사망하자 프랑크 왕국의 단일 지배자가 되었으며 카를로만의 편을 든 롬바르드를 멸망시켰다. 롬바르드의 수도인 파비아 포위 공격이 아직 진행되고 있는 동안 샤를마뉴는 로마로 가서 교황과 함께 774년의 부활절을 축하하고 이탈리아의 대부분을 교황령으로 이양하겠다는 아버지의 약속을 성 베드로 성당에서 재확인했다. 그러나 그가 실제로 넓혀준 교황의 땅은 미미했고 롬바르드 왕국 전역에 대한 통치권은 자신이 차지했다.

 샤를마뉴는 이교도인 작센족이 라인 강 하류 지역을 공격한 앙갚음으로 772년에 지금의 니더작센 지방과 베스트팔렌 지방에 사는 작센족을 공격했다. 그러나 775년부터는 복수보다는 작센족 전체를 정복하여 크리스트교로 개종시키고 그들의 영토를 프랑크 왕국에 통합하는 것이 그의 목표가 되었다. 이 목표는 여러 차례의 원정 끝에 실현된 것처럼 보였다. 작센족 귀족들이 그에게 충성을 서약하고 775~777년에 대규모 세례식이 거행되었기 때문이다. 777년에 파더보른에서 열린 제국의회는 작센족의 항복을 조인했다. 의회에 참석한 사람들 중에는 코르도바의 우마이야 왕조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키는 데 샤를마뉴의 도움을 얻으려고 스페인 북부에서 찾아온 아랍인들도 끼어 있었다. 778년 여름 샤를마뉴는 스페인으로 진격해 사라고사를 포위했지만 그 도시를 점령하지는 못했다. 피레네 산맥을 넘어 퇴각하던 프랑크 군대는 바스크족의 공격을 받고 참패를 당했다. 브르타뉴 원정 때 활약했던 샤를마뉴의 기사 롤랑도 이때 죽었는데 그는 나중에 전설과 시(롤랑의 노래)로써 불멸의 존재가 되었다.

 이후 그는 영토 보전에 힘쓰는 한편 내정을 강화하고 문화생활과 법의 지배를 보호했다. 샤를마뉴가 스페인에서 패배한 직후 작센족이 다시 봉기했다. 샤를마뉴가 생각하기에 세례를 받고 충성을 서약한 이 작센족의 저항은 정치적 배신이자 종교적 변절로 이런 범죄에는 가혹한 처벌을 내릴 필요가 있었다. 샤를마뉴는 작센족과 18회나 전쟁을 치르고 난 뒤에야 그들을 완전히 정복했다. 결국 그는 작센족을 자신의 지배 아래 복종시키겠다는 목표만이 아니라 제국에 완전히 통합시키겠다는 목표도 달성했다. 세속 권력과 크리스트교 신앙 사이의 뗄 수 없는 유대관계를 생각하면 이것은 작센족을 크리스트교로 개종시켜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샤를마뉴는 781년에 2번째로 로마를 방문해 교황이 어린 두 아들 피피노와 루이(루트비히)에게 각각 롬바르드와 아키텐의 왕관을 씌워주게 했다. 또한 비잔틴 제국의 황태후이며 콘스탄티누스 6세의 모후로서 섭정을 맡고 있던 이레네에게서 자신의 이탈리아 지배를 사실상 승인받았다. 그러나 프랑크 왕국이 787년에 이탈리아 남부를 공격한 뒤 샤를마뉴와 비잔틴 제국의 협약은 깨졌다.

 788년 샤를마뉴는 바이에른 공작이자 사촌인 타실로 3세를 폐위함으로써 라인 강 건너편에 남아 있는 마지막 게르만족의 독립성을 사실상 박탈했다. 이제 서게르만족인 알라마니족, 바이에른족, 작센족, 튀링겐족은 역사상 처음으로 하나의 정치 단위 안에 모이게 되었다. 게다가 아바르 왕국(지금의 헝가리와 오스트리아 북부)에 속해 있던 나머지 공국들과 도나우 강 유역에 새로 건설된 슬라브족 국가들도 느슨하나마 프랑크 왕국에 의존하게 되었고 프랑크 왕국의 종주권을 어느 정도 인정했다.

  프랑크 왕국은 엄청난 팽창을 통해 중세 초기의 부족국가들보다 훨씬 높은 지위로 올라갔기 때문에 이제는 양적인 변화뿐만 아니라 질적인 변화도 필요했다. 그러나 샤를마뉴에게 로마 황제의 칭호를 부여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은 늦게야 떠올랐고 그나마도 특수한 정치적 상황이 조성되었기 때문이었다. 동로마 제국, 즉 비잔틴 제국은 서로마 제국까지 포함한 로마 제국 전체에 대해 발언권을 가질 자격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당시 비잔틴 제국은 로마와 라벤나를 포기하고 이탈리아 남부와 시칠리아 섬에 대해서만 지배권을 주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샤를마뉴의 보호를 받고 있던 교황 하드리아누스는 이탈리아 중부에 자치령을 세우려고 애쓰고 있었다.
 


서로마의 황제

 799년 5월 교황 레오 3세는 로마에서 반대파들의 습격을 받자 샤를마뉴의 궁정으로 피신해 지원을 간청했다. 샤를마뉴는 800년 11월 교황과 함께 로마로 가서 황제의 예우로 영접을 받았다. 성 베드로 성당에서 열린 성탄절 미사 때 로마인들이 샤를마뉴를 황제라고 찬양하자 교황은 성유식을 집전하여 샤를마뉴에게 왕관을 씌워주고 샤를 아우구스투스라는 이름으로 황제에 임명했다. 샤를마뉴가 옛날 로마 제국의 서부지역을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의 황제 지위에 대한 합법성을 구체화해주었지만 동로마 황태후 이레네(797년 아들을 퇴위시키고 장님으로 만들었음), 즉 여성의 지배에 대항하려는 욕망도 그가 제위를 얻으려고 한 이유였다.

 비잔틴 제국은 제위 찬탈자의 공격에 대비했지만 샤를마뉴가 원한 것은 그저 자신의 새로운 지위와 협상에서 얻은 로마 지배권을 인정받는 것뿐이었다. 812년 비잔틴 제국 황제인 미카일 1세가 어쨌든 샤를마뉴를 황제로(로마 황제는 아니었음) 승인함으로써 그는 목적을 달성했다. 황제라는 칭호는 샤를마뉴에게 어떠한 권력도 추가로 주지 않았지만 그의 로마 지배는 합법적인 것이 되었다. 역사적으로 중요한 754년의 사건, 즉 교황이 비잔틴 제국과 소원해지고 그 대신 프랑크 왕국과 친교 관계를 확립한 것은 이제 명백해졌다. 중세의 제국이라는 개념, 그리고 프랑크 왕국 및 그 뒤를 이은 신성 로마 제국의 법률적 전통이 아우구스투스가 세운 고대 로마 제국과 맺고 있는 모든 관계는 샤를마뉴가 가졌던 황제라는 칭호와 지위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궁정과 행정

 제국의 창건은 주로 제국 내부의 문화 수준을 높이려는 샤를마뉴의 노력을 통해 합법화되었다. 샤를마뉴가 권력을 잡았을 때 프랑크 왕국의 문화, 행정, 사법 제도는 아직도 상대적으로 미개한 상태였다. 예를 들어 이 프랑크 왕국의 왕은 일정한 주거지가 전혀 없었다. 따뜻한 봄 날씨 때문에 샤를마뉴가 특히 좋아한 아헨이 왕의 거처가 된 것은 794년에 이르러서였다. 샤를마뉴는 이곳에 궁정과 왕실 교회를 지었다.

 샤를마뉴의 궁정은 그의 가족, ‘카펠라’라는 왕의 개인 예배를 집전한 성직자들, 그리고 속세의 관리들로 구성되었다. 속세의 관리들 중에는 자신의 영지 안에서 왕권을 일부 위임받아 행사하도록 허용된 영주들, 왕실의 집사들, 왕실 관리인들이 포함되었다. 샤를마뉴는 자신의 궁정을 왕국의 정치와 행정 중심지뿐 아니라 지성의 중심지로 만들겠다는 야심이 있었기 때문에 해외에서도 유명한 학자들을 불러들였다. 이들 가운데 중요한 인물로 아인하르트와 앨퀸이 있었다. 샤를마뉴는 이들을 비롯한 여러 문필가들의 도움을 얻어 교회 신부들의 저술과 고대 작가들의 작품을 소장하는 왕실도서관을 설립했으며 프랑크 왕국의 젊은 기사들을 가르치기 위해 궁정 학교를 창설했다. 제국 전역의 종교의식과 도덕성 및 재판절차의 수준을 높이려는 노력도 이루어졌다.

 모든 수도원 학교와 성당 학교에서는 라틴어와 라틴 문학을 집중적으로 공부하라는 지시가 내려졌다. ‘카롤링거 르네상스’라고 불리는 문화적 운동은 제국의 수많은 수도원을 중심으로 활발히 전개되었다. 그러나 전 세계에서 최고의 지성들을 불러들여 성직자를 가르치게 하고 결국에는 백성 전체를 가르치게 한 샤를마뉴의 노력과 그의 궁정을 언급하지 않고서는 이 운동을 제대로 평가할 수 없다. 궁정의 신학적 지식과 지적 자부심은 791년경에 샤를마뉴의 이름으로 작성한 포괄적 논문인 <샤를마뉴의 책 (Libri Carolini)>에 반영되어 있다.

 샤를마뉴는 이 궁정을 통해 제국을 다스리고 관리했으며 정의를 시행했다. 궁정과 제국 각지의 주요행정관 및 귀족들은 적어도 1년에 한두 번씩 프랑크 왕국의 심장부나 정복한 영토에 모여 총회를 열었다. 이것은 군대회의나 귀족들의 입법회의 및 교회의 종교회의를 분명히 구별하지 않은 카롤링거 제국의 독특한 구조를 보여준다. 이들과 궁정의 관계는 샤를마뉴의 명령에 따라 각지를 돌아다니는 왕의 사절들을 통해 유지되었다. 왕의 사절은 대개 2명이 한 조를 이루었는데 관리와 고위 성직자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왕의 명령은 글로 쓰면 안 되는 것이 원칙이었지만 샤를마뉴의 통치가 끝나기 20년 전부터 왕의 포고령이 약간 애매하나마 기록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왕의 포고령이 일정한 틀을 갖는 데는 시간이 걸렸으며 카롤링거 르네상스 시기에 형식이 고안되었다. 샤를마뉴는 그가 지배하는 다양한 민족과 부족의 전통적 권리를 원칙적으로 존중했고 황제가 된 뒤에는 그 전통적 권리를 기록하게 했다. 프랑크 왕국의 법령집은 여러 부족의 율법을 보완하는 기능을 했을 뿐 아니라 공공생활과 개인생활의 가장 다양한 측면에 적용된 규칙이며 왕의 사절과 백작 및 주교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에게 내려진 특수한 명령이기도 했다. 전체적으로 볼 때 샤를마뉴 시대에 만들어진 법률 문서는 샤를마뉴가 사법 행정과 대중 계몽에 관심이 많았다는 것을 뚜렷이 증명해준다.

 
통치의 한계

 그러나 샤를마뉴의 제국에 구조적인 결함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프랑크 제국의 모든 정치제도는 샤를마뉴의 뛰어난 능력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그가 사라지면 모든 것이 무너질 위기에 놓여 있었다. 이것은 샤를마뉴의 후계자인 루트비히 1세 때 프랑크 제국의 양상을 보면 훨씬 명확하다. 샤를마뉴의 교육정책으로 자신감을 얻은 성직자들은 항상 샤를마뉴의 신권(神權)정치를 고분고분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그들은 걸핏하면 자신들의 정치적, 교육적 원칙을 내세워 샤를마뉴의 신권정치에 반대하곤 했다.

 카롤링거 왕조와 함께 제국을 건설한 평신도 귀족들은 새로운 정복이 새로운 이권과 봉토를 약속해주지 않는 한 왕조와 확고한 유대를 맺을 수 없었다. 그러나 800년에 이르자 이미 도달한 국경선을 넘어 밖으로 더욱 팽창하는 것은 사실상 거의 불가능해졌다. 실제로는 이미 얻은 땅을 통합, 관리하며 외적으로부터 보호하는 데 필요한 경제적 자원과 기술적 수단도 불충분한 상태였다. 샤를마뉴의 제국은 로마 제국이 국가를 유지하는 데 사용한 수단들(화폐 경제, 봉급을 받는 관리, 상비군, 정비된 도로망과 통신망, 해안을 지키는 해군)을 갖고 있지 않았다. 샤를마뉴가 살아 있을 때 이미 해안은 노르만족의 위협을 받고 있었다. 806년에 샤를마뉴는 제국을 분할해 아들들한테 나누어줄 계획을 세웠지만 맏아들과 둘째 아들이 죽자 813년 아헨에서 아키텐의 루이(경건왕 루트비히)를 공동 황제로 만들고 유일한 후계자로 삼았다. 샤를마뉴는 불과 몇 달 뒤인 814년 1월 28일 아헨에서 세상을 떠났다.

 
인간성과 영향력

 샤를마뉴가 죽은 뒤 그의 뒤를 이은 후손들이 제국 내부의 평화와 통일성 및 국제적 지위를 유지하지 못했기 때문에 샤를마뉴의 명성은 죽은 뒤에 더욱 빛났다. 카롤링거 왕조가 단절된 뒤에도 서프랑크(프랑스) 왕국과 동프랑크(독일) 왕국의 정치적 전통은 샤를마뉴가 세운 선례에서 자양을 얻어 생명력을 유지했다. 오토 1세 때 아헨은 독일 통치자들이 대관식을 올리는 도시가 되었고 로마 교황에 대항한 대립 교황 파스칼리스 3세는 붉은 수염왕 프리드리히 1세의 요청으로 1165년에 샤를마뉴를 성인으로 추증했다. 프랑스에서는 존엄왕 필리프 2세가 샤를마뉴를 기리는 전통을 되살렸다. 샤를마뉴의 진정한 후계자가 독일인이냐 프랑스인이냐 하는 문제는 중세뿐 아니라 근대에 접어든 뒤에도 계속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나폴레옹은 샤를마뉴의 후계자라 자처했고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크리스트교 국가들이 통합해 ‘서방 유럽’을 구성하자는 논의는 샤를마뉴의 본보기를 상기시켰다.

 민간 전설과 문학도 이런 정치적 전통과 나란히 발전해 롤랑을 다룬 서사시에서 절정에 이르렀다. 샤를마뉴의 명성은 한때 그의 제국이던 지역 내부에만 머물지 않았다. 일부 슬라브어에서 왕을 뜻하는 단어는 그의 이름에서 파생한 것이다. 샤를마뉴는 전기적 문서를 전혀 남기지 않았다. 그의 인간성은 그의 행위와 동시대인들이 남긴 기록으로 조립할 수 있을 뿐이다. 샤를마뉴의 강렬한 개성은 분명 신의 뜻이 자신과 함께 한다는 굳은 신념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그는 마음속으로 전혀 모순을 느끼지 않고 개인의 독실한 신앙심과 일상생활의 쾌락, 종교적 사명감과 권력에 대한 강한 의지, 거친 태도와 지적 성장에 대한 갈망, 적과 타협하지 않는 태도와 공정함을 양립시킬 수 있었다. 그의 독실한 신앙심에는 정치적 조건이 붙어 있었기 때문에 제국과 교회는 제도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하나의 단위가 되었다.

  그의 제국은 2대 황제인 루트비히에서 끝났지만 로마 제국 멸망 이후 갈기갈기 찢어졌던 서유럽 사람들이 그 후 몇 세기 동안 의지할 수 있는 공통된 지적, 종교적, 정치적 유산을 재구성하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 물론 이런 유산이 샤를마뉴 혼자 힘으로 만든 것은 아니지만 그가 없었다면 상상하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그의 궁정 시인들 가운데 한 사람은 그를 ‘유럽의 아버지 왕(Rex Pater Europae)’이라고 불렀다. 사실 중세의 수백년 동안 유럽 역사에 그와 비슷한 발자취를 남긴 사람은 아무도 없다
 


제국의 분열

 샤를마뉴가 814년에 죽자 그의 아들 루이트비히 1세가 제국을 물려받았다. 그는 신앙심이 두터워 교회로부터 환영을 받았고 경건왕이라는 별칭도 얻었지만 난세를 헤쳐 나갈 능력이 부족하였으며 무능한 군주로 평가되고 있다. 제국 분열의 조짐은 루트비히 1세의 황후 에르멘가르드가 세 아들을 남기고 818년에 세상을 떠날 때부터 시작되었다. 이미 루트비히는 게르만족의 상속 유풍에 따라 제국을 그의 세 아들에게 분할 상속하기로 정해 놓았다. 장자 로타르 1세에게는 제위를 물려주어 제국의 중심부를, 차남 피핀과 삼남 루이 2세에게는 변경을 주기로 하였다. 그러나 에르멘가르드가 죽고 4개월 후 루트비히는 유디트와 재혼하여 사남 샤를(대머리 왕 샤를 2세)을 낳았고 그에게도 상속권이 생겼다. 그것도 늦게 얻은 귀여운 자식이고 형들에 비해서 어린 연령은 불이익을 받을 수도 있기 때문에 부친으로서는 자기가 살아 있을 때 상속 문제를 확실히 해둘 필요가 있었다. 이에 루트비히는 829년에 회의를 소집하고 샤를에게 제국의 중심부를 준다고 선언해 버렸다.

 여기서부터 부자간 혹은 형제간에 추잡한 상속 싸움이 시작되었다. 로타르는 아우 피핀과 일부 호족들의 호응을 얻어 반란을 일으켜 황후 유디트를 감금하고 로타르의 측근들이 궁중의 요직을 차지하여 영토 상속문제를 원점으로 돌렸다. 그러나 6개월 후 다시 루트비히가 일부 호족과 교회, 수도원의 도움으로 세력을 회복하여 영토 상속문제를 다시 논의하게 되었고 이에 불리함을 느낀 장자 로타르는 교황청과 말을 맞추어 놓고 알자스에서 회의를 열어 아버지인 루트비히를 퇴위시키고 세 아들은 유디트의 아들 샤를을 배제하고 합의하에 영토를 셋으로 나누어 가졌다. 하지만 이 합의는 오래 가지 않았다. 겨우 1년을 못 넘기고 형제들 간에 다시 싸움이 시작되었고 차남 피핀이 부친 루트비히와 손을 잡고 로타르에게 대항하였다. 호족들은 우왕좌왕하였고 교회는 에르멘가르드의 아들들을 외면하였으며 수도원이 확실하게 루트비히를 지지하자 로타르는 이탈리아로 도망갔고 그를 지지했던 많은 사람들은 처형되었다. 그리고 루트비히는 834년에 복위하였다.

 그 후 몇 년간 잠잠하였지만 차남 피핀이 죽자 부왕 루트비히는 기다렸다는 듯이 그 땅을 샤를에게 주었고 840년에 루트비히가 세상을 떠나자 다시 상속 분쟁이 전개되었다. 결국 843년에 베르됭 조약으로 제국을 삼분하여 로타르는 제호(帝號)와 중심부를, 삼남 루이는 라인강 동쪽의 동프랑크를, 샤를은 제국 서쪽의 서프랑크를 차지하였다. 이래서 제국은 동프랑크, 서프랑크, 중프랑크로 분할되었고 855년에 로타르가 죽고 세력이 약해지자 동프랑크의 루이와 서프랑크의 샤를이 870년에 메르센에서 다시 조약을 맺어 중프랑크의 로트링겐 일대를 빼앗아 나누어 가졌다. 이것이 오늘날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 세 나라의 출발이었고 그 판도도 지금과 비슷하였다.

 샤를 대제의 손자들은 이렇게 해서 영토를 얻었지만 그것은 오래갈 수는 없었고 결국 875년에 중프랑크에서, 이어 911년에 동프랑크에서, 987년에는 서프랑크에서 카롤링거의 왕통은 단절되었고 노르만인과 마자르인 그리고 이슬람인의 침입으로 유럽은 혼란에 빠졌다.


자료 출처
http://mtcha.com.ne.kr/world-man/france/man32-syarulmanyu.htm
http://tiny.britannica.co.kr/bol/topic.asp?mtt_id=88304

http://www.nobelmann.com/history/history_.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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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가리 이탈리아 꺾고 4강에서 가나와 격돌, 우승까지?
헝가리가 2009 국제축구연맹(FIFA) 20세 이하(U-20) 월드컵에서 이탈리아를 연장 접전 끝에 꺾고 준결승에 진출했습니다.

헝가리는 10일(한국시간) 이집트 수에즈의 무바라크 스타디움에서 열린 대회 8강에서 전.후반 90분 동안 1-1로 승부를 가리지 못한 뒤 연장 후반에만 두 골을 사냥하며 한 골을 추가한 이탈리아를 3-2로 꺾었습니다.

이로써 헝가리는 4강에 올라 한국을 3-2로 힘겹게 꺾은 가나와 결승 진출을 다투게 됐습니다. 반면 16강에서 `무적함대' 스페인의 기세를 3-1로 잠재웠던 이탈리아는 4강 길목에서 분루를 삼켰습니다.

한편 헝가리는 이번 대회까지 통산 다섯 차례 출전했지만 지난 1985년 구소련 대회 때 9위가 최고 성적이었다고 합니다. 헝가리가 어디까지 올라갈지 기대가 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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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 섹시 女축구팬은? 한국은 7위


세상에서 가장 섹시한 축구팬을 설문조사로 뽑아보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모르긴 몰라도, 유럽이나 중남미 미녀들이 대다수 순위에 오를 것이다. 한국 여자 축구팬들의 섹시지수는 그럼 몇 점일까?

해외의 한 축구팬사이트에서 ‘여자 축구팬이 가장 섹시한 나라는 어디일까’라는 설문조사를 통해 축구팬들의 성향을 분석했다. 그 결과 1위는 브라질 여자 축구팬들이 뽑혔다. 한 네티즌은 "가장 열정적인 나라, 가장 뜨거운 나라, 가장 축구가 강한 나라, 가장 섹시한 축구의 나라"라는 문구로 동의했다.

2위는 스웨덴. 금백발과 섹시한 외모가 돋보이는 스웨덴 여자 축구팬들은 보기에도 시원시원해보인다. 네티즌들 역시 "달콤한 초콜릿 같은 축구팬"이라며 스웨덴을 지지했다. 3위는 크로아티아. "신비로움을 간직한 크로아티아 여자 축구팬들"이라는 반응이 대다수였다.



4위는 이탈리아로, 맛있는 음식과 유별난 축구팀, 위대한 축구팬이라고 팬들은 설명했다. 이밖에 5위는 멕시코였고, 7위는 한국 여자 축구팬들이 손꼽혔다. 한국 여자 축구팬들에 대해서는 "동양의 신비감을 일깨워주는 붉은 미녀"라고 표기해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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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지막 위사진 엘프녀로 유명하셨던 분이시죠 연예인으로 데뷔하신다는 기사가 맥심에서 실렸었습니다. 하지만 그때 엘프녀 포스에는 미치지 못한다는 .... 킁
  • 오호라
    마지막 사진은 순수 축구팬이라기보다 어디 남자잡는 홍보용 의상 (심하게 말해 포주집 유니폼) 같네요..좀 싫다.....................
  • 스위니토드
    마지막사진은 보너스??
  • 진이신이
    다 좋은데..마지막사진에 가슴보이는 여자사진은 뭐죠?ㅡ_ㅡ;;
    • 저여자는 말입니다.
      그냥 노출증 환자입니다.
    • 저위 사진들 보고 투표햇겟죠.축구강국도 아닌 한국이 느닷없이 언급될리가.....
      저위 사진들 보고 투표햇겟죠.
  • ㅋㅋㅋ
    마지막....고맙습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
  • 자랑스러워할일은아닌데
    지금 외국의 그 미디어에서 우리나라 여자축구팬 저 사진을 보고 섹시하다라고 그런지 아닌지를 잘 모르겠는데, 저건 섹시한 게 아니라 그냥 야한거고 선정적인 겁니다. 마지막이나 마지막에서 두번째 사진은 우리나라 정서에는 부합하지 않고 그냥 일본의 포르노 배우를 연상케합니다.
  • 월드컵개최한번더
    마지막같은 광경 다시보기 위해 빠른시일내 월드컵 꼭 한번도 개최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 dd
    마지막 사진은... 월드컵때 한국이 들썩거리자, 그걸 마케팅으로 이용하려는 성인 인터넷 업체들이 많았습니다.
    사진을 보시면 짙은 화장에, 옆에는 바디페인팅.. 둘 다 일반인은 아니고 벗고 홍보하려는 업체쪽 피고용 여성인거 같습니다.
    인터넷 찾아보시면 똥습녀니 무슨녀니 해서 꽤 많습니다.
  • 정말로
    정말로 마지막 사진은?
  • 하긴....
    내가봐도 맨마지막 가슴노출을 한 사진보다는 다 입은 브라질녀가 더 색시하다. 어찌보면 굴욕이네....다벗어도 7위라니....
  • 축구강국이 순위에 들텐데,이상하군요.
    뭔가 좀 이상하군요........1위 부터 6위는 다 축구강국들인데............ 당연히 국제적으로 축구실력이 좋아서 세게 사람들이 많이 보게 되는 나라를 선택할텐데........
    갑자기 한국은 뭔가 좀 이상하군요........ 스페인이나 아르헨티나 같은 나라들을 사람들은 많이 보고, 당연히 관중도 많이 보니 사람들이 먼저 생각할텐데, 정말 이상하군요.
  • 정말 별로네요.순수축구팬도 아닌 사진으로 투표하고, 세게인들은 한국경기,한국팬 잘 보지도 못햇을 텐데...
    왜 관리자 승인이 안돼는지요................ 그래서 죄송하지만, 이름으로 남겨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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