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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8)
조선시대 세자의 다이어트 비법?



대한민국은 이미 남녀노소 거의 모든 국민들이 다이어트 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상태인데요.
오래 전 조선시대, 그것도 세자가 다이어트를 했다는 기록이 발견돼 화제입니다.


바로 조선왕조실록에 다이어트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었습니다. 기록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世宗常命大臣曰: ‘世子多膚, 常令習步內庭, 乘馬後園, 至令放鷹, 以通血氣。’ 今上常居深宮, 未嘗行氣, 故一有動勞, 便至違豫, 當散步宮內, 或時御馬, 常常行氣,


해석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세종께서 항상 신하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세자는 뚱뚱하니 항상 궁궐에서 걸음을 걷게 하고, 후원에서 말을 타게 하며, 매를 놓아 사냥하는데 참여하도록 하여 혈기를 통하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이제 성상께서 항상 깊은 궁중에 계시고 일찍이 운동을 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몸을 한 번 움직여 피로하게 되면 바로 병환이 나십니다. 마땅히 궁궐 안에서 산보를 하시고 때로는 말을 타시어서 항상 운동을 하시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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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노블리스 오블리제


 노블리스 오블리제는 높은 사회적 신분에 상응하는 도덕적 의무를 뜻하는 말이다.
영화나 소설에서나 가끔 엿볼 수 있는 노블리스 오블리제.
사실 현실속에서, 특히 우리나라의 상류층에게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기대하는 사람은 몇 안될 것이다.

 혹시 조선시대에는 노블리스 오블리제와 비슷한 개념이 있었을까?


 놀랍게도 있었다. 조선왕조 실록 정조편에 보면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사례가 잘 나타나 있다.

우연히 발견한 조선왕조의 독특한 기록을 읽으며
대한민국의 상류층들의 노블리스 오블리제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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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민정음과 세종대왕의 거짓말

나랏말싸미 듕귁에 달아

문짱와로 서로사맛디아니할새

이런젼차로 어린백셩이 니르고저 홇베이셔도

마참내 제뜨들 시러펴디 못할노미하니라

내 이랄위하야 어엿비녀겨

새로 스물여듫짜랄 맹가노니

사람마다 해여수비니겨 날로쑤메 편안케 할 따라미니라

 위의 글은 세종어제훈민정음의 내용으로, 세종대왕이 한글을 만든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고등학교 국어교과서는 이 글에 세종대왕의 애민정신, 자주정신, 실용정신, 창조정신을 느낄 수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 중 애민정신이 가장 중요하게 다뤄지는데 과연 세종대왕은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한글을 만들었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라는 의견도 적지 않다. 세종대왕은 조선 초기의 왕으로 조선왕조의 정당성을 만백성에게 알려야했다. 그러기위해서는 백성들 모두가 보다 쉽게 볼 수 있는 새로운 문자가 필요했던 것이다. 훈민정음으로 쓰여진 최초의 문헌은 '용비어천가'이다. 그 내용은 역성혁명이 천명임을 백성들에게 알려 조선건국의 합리화를 꾀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세종은 조세제도를 바꿨는데, 이를 알릴 문자가 필요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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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상트
    생각지도 못하던 사실이네요;
  • 안타깝습니다.
    당시 세종대왕은 자신의 조부가 건국하고 아버지가 기틀을 잡은 조선을 이끌어가야 하는 숙명을 어깨에 지고 군주자리에 올라섰습니다. 당연히 조선 건국의 정당성을 백성들의 마음 속 깊이 새겨넣어야만 했습니다. 그건 거부 할 수 없는 과업이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백성들이 쉽게 익힐 수 있는 훈민정음으로 알리는건 당연한거 아닙니까~ 그리고 세종은 재위기간동안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을 끊임없이 보여주었습니다. 근데 고작 용비어천가를 통해 조선 건국의 정당성을 알리려 했다는 사실과 조세제도 사례만으로 그의 마음을 폄하하는건 그저 졸렬한 수작으로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 세종대왕께서 백성을 사랑하지 않았다는 말을 한 것은 아닙니다. 다만 세종대왕이 언급한 그 이유들보다 더 큰 이유가 숨어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을뿐입니다.
  • Fashion community attracts numerous teenagers today not simply given that it is a alternatively new career, but additionally it really is intended to realise person's likes from the field of trend. Furthermore, it can be really a high-paid profession currently. Any time a younger human being decides to link her or his exercise using the vogue market place next to nothing arrives to thoughts apart from an individual its part - style layout. In all probability, several persons in fact know that it truly is a separate discipline of vogue industry. Believe it or not, you can find a fantastic quantity of other professions and specialties in such as creating clothing, design and style, selling, merchandising, and so 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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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한일병합 100주년 맞아 일왕 초청해 파문

이명박 대통령은 15일, 한일 강제병합 100년을 맞는 2010년에 일왕을 한국에 초청할 계획임을 밝혀 파문이 일고 있습니다.

이 대통령은 이날 오전 청와대에서 연합뉴스와 교도통신 공동 인터뷰를 갖고 "천황 방문이 양국 관계의 거리를 완전히 없애는, 종지부를 찍는다는 의미가 있다"며 "의미있는 좋은 결과가 있는, 거리감을 완전히 해소하는 마지막 방문이 됐으면 하는 기대감에서 방한이 내년 중에라도 이뤄질 수 있으면 양국 간에 큰 의미를 부여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김은혜 청와대 대변인은 정례 브리핑에서 일왕 방한 초청과 관련해 “과거 한일 양국 관계에 대한 대통령의 기조는 과거는 잊지 않되 미래지향적으로 가자는 것”이라며 “한일 강제병합 100년을 맞아 과거사 문제가 해결됐다고 보지는 않지만 한일 관계의 또 다른 장이 열릴 텐데 미래지향적으로 관계발전 시키기 위해 일본 몫이 크다고 생각하는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정말 어이가 없고 황당합니다.
할 말은 많지만 먼저 네티즌 여러분들의 의견을 들어보고 싶습니다.
이명박 대통령의 인터뷰 내용, 어떻게 생각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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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도협약 100년…간도 되찾기 운동, 문제는 북한?
 
 오는 9월 4일은 지난 1909년 청-일 간도(間島)협약이 맺어진 지 100년이 되는 날입니다. 국내에서는 이를 앞두고 민간 차원에서 국제사회에 탄원서를 제출하는 등 간도를 되찾자는 움직임이 더욱 거세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간도를 중국이 차지하고 있는 것은 다른 조약 때문이라고 합니다. 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한 일본은  1951년 9월에 1941년 이전에 맺은 모든 조약을 무효로 하는 샌프란시스코 조약을 체결하였습니다. 고로 이미 간도협약은 무효가 된 것이죠.

 그럼 왜 간도가 중국의 영토로 되어있을까요? 그 이유는 1962년 북한과 중국이 맺은 조중변계조약에 있습니다. 조중변계조약에는 간도는 물론 백두산 천지를 중국이 55%, 북한이 45%를 갖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다고 합니다.

 즉 간도를 되찾기 위해서는 북한과 통일을 한 후에 북한이 괴뢰정권이었음을 증명하여 북한이 중국 등과 맺은 모든 조약을 무효화시켜야 한다는 것이죠. 

 간도협약이 맺어진지 100년째가 다가오면서 정계와 학계, 그리고 국민들까지 간도에 관심을 가져주시는 것은 매우 감사한 일이나 보다 더 정확히 알았으면 합니다.

(이 글에 일부 포함 된 정보의 출처는 티워(제휴 언론사들 포함)로서 저작권은 픽플커뮤니케이션즈에 있고, 픽플커뮤니케이션즈의 일원인 필자는 저작권법에 저촉되지 않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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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 또다른 협약이 있었군요.. 흠.. 생각처럼 간단한 문제는 아니네요. 북한이 끼어 있다면..
    어서 간도를 찾아오는 그날이 오면 좋겠습니다.
  • 휴...우리나라가 분단이 되었을 때부터 정말 많이 꼬인 것은 사실입니다.
    만약에 광복 이후에 단일 국가로 성장을 했다면 아마도 일본과 비슷한 수준을 유지하거나 그 이상이 되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이 드네요.
  • 우와~
    되찾을 수만 있다면 대한민국 만세입니다.
  • WkdRofmf wnrdudi
    짱깨를 죽여야
  • 간도 협악 100년을 바라보며

    간도를 회복하자는 국민 서명운동의 기사를 보고



    본론을 약간 떠나 소설 안수길 저 "북간도"를 이 기회에 다시 한번 상기하여 대중적 읽기를 권하고 싶다.

    체험으로 역사 속에서 간도를 일구고 사잇섬을 오가며 그 시대 우리 조상들의 한 많은 삷을 피부로 맛보면 우리가 지금 말로 또는 글로

    이 이야기르 전개하는데 훨신 많은 도음이 되리라 생각한다.

    이 소설은 오늘날 우리가 접한지 오래된 잊은 문학세계를 다기 역사 속에서 조명 할 뿐만 아니라 ,괘를 달리하면 좋은 영화화 할 수있는 멋진 소재이다



    tv시대에 우리의 불후의 명작 "안수길 저 북간도"를 저 서재 한 곳에서 꺼내 국민적 사랑을 받는 필독서 로 일독을 이지음에 꼭 맞는 것으로 추천합니다.




    역사는 지금도 똑같은 연장선상에 있다.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 국사교과서 왜곡, 중국의 동북공정, 남한산성, 왜란, 호란, 역사의 모든 페이지가 같은 맥락이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우주베키스탄, 디아스포라, 네팔, 미 쏘 일,

    열강속에 약소국의 일들은 우리만의 비극이 아니다.

    이스라엘이 수백년전의 가나안을 다시 찾은 것은

    국제법상 시효가 아니고

    그들 민족구성원 하나하나가 대대로 내려오는 역사의 공감의식이다.

    이 공감의식이 사라질 때 고구려도 발해도 간도도 모두 사라진다.

    우리가 이 기회에 우리 가까이 손쉽게 국민적 정서로 함께 할 수 있는

    잊어버린 소설 읽기 당시 일간지 연재 소설 안수길 저 북간도를 때맞추어 전국민적으로 읽을거리로 간곡히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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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러시아 공사관 답사와 아관파천

아관파천

 '아관파천(俄館播遷)'. 한국인이라면 모를 리가 없을 이 네 음절의 짧은 단어. 일제에 의해 대한제국 황실과 민중 일반이 느끼는 압력이 최고조에 이르던 시기, 대한제국의 지도자 고종은 1896년 러시아 공사관으로 황급히 몸을 피하게 되는데 바로 그 사건이 아관파천이요, 바로 지금 눈 앞에 서 있는 건물이 바로 러시아 공사관의 일부인 것이다.

 비록 첨탑 부분을 남기고 대부분의 건물이 사라지긴 했지만 이 건물은 운현궁이나 경운궁, 지금은 사라진 조선총독부 건물 등과 함께 우리 근대사와 직접적인 연관을 맺고 있는 건물인 것이다.

 을미사변 이후 일본세력의 배경으로 조직된 제3차 김홍집(金弘集)내각은 일세일원연호(一世一元年號) ·태양력 사용, 군제개혁, 단발령의 실시 등 급진적인 개혁을 단행하였으나 명성황후의 살해와 단발령의 실시는 친일내각과 그 배후세력인 일본에 대한 국민의 감정을 극단적으로 자극하여 전국 각지에서 의병항쟁이 일어났다. 이범진(李範晉) ·이완용(李完用) 등의 친러파 세력은 친위대(親衛隊)가 의병을 진압하기 위해 지방으로 분산될 기회를 이용하여, 자신들의 세력만회와 신변에 불안을 느끼고 있던 고종의 희망에 따라 러시아 공사 베베르와 협의, 파천계획을 진행하였다.

 이들은 미리 인천에 와 있던 러시아 수병(水兵) 150명과 포(砲) 1문을 서울로 이동하고 2월 11일 새벽 국왕과 왕세자를 극비밀리에 정동(貞洞)에 있던 러시아 공관으로 옮겼다. 러시아 공사관에 도착한 고종은 즉시 김홍집 ·유길준(兪吉濬) ·정병하(鄭秉夏) ·조희연(趙羲淵) ·장박(張博) 등의 5대신을 역적으로 규정하여 포살(捕殺) 명령을 내려 김홍집 ·정병하 ·어윤중(魚允中)은 군중에게 타살되고 유길준 ·조희연 등은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이로써 친일내각은 몰락하고 박정양(朴定陽:首相 ·內相) ·이완용(外相 ·學相 ·農相) ·이윤용(李允用:軍相) ·윤용선(尹容善:度支相) ·이범진(法相 ·警務使) 등의 친러파 정부가 구성되었는데, 중심인물은 이범진이었다. 신정부는 의병항쟁을 불문에 부치고, 죄수들을 석방하는 등 민심수습에 힘쓰고, 일본세력으로 개혁하였던 제도를 구제(舊制)로 환원하였다. 일시에 지지기반을 상실한 일본측은 독립국가의 체면을 내세워 국왕의 조속한 환궁을 요청하였으나 고종은 ‘불안 ·공포의 궁전보다는 노국공관의 일실(一室)이 안정하니 당분간 환궁할 수 없다’고 거절하였다. 이를 계기로 조선왕조의 보호국을 자처하게 된 러시아는 조선정부에 압력을 가하여 압록강 연안과 울릉도의 삼림채벌권을 비롯하여 경원(慶源) ·종성(鐘城)의 채광권, 경원전신선(京元電信線)을 시베리아 전선에 연결하는 권리, 인천 월미도 저탄소(沔炭所) 설치권 등 경제적 이권을 차지했다.

 이에 구미열강(歐美列强)도 동등한 권리를 요구하여 경인(京仁) 및 경의선(京義線) 철도부설권 등 중요이권이 값싼 조건으로 외국에 넘어갔다. 아관파천 1년 간은 내정에 있어서도 러시아의 강한 영향력 밑에 놓이게 되어 정부 각부에 러시아인 고문과 사관(士官)이 초빙되고, 러시아 무기가 구입되어 중앙 군제도 러시아식으로 개편되었으며 재정도 러시아인 재정고문에 의해 농단되었다. 1897년 2월 25일, 고종은 러시아의 영향에서 벗어나라는 내외의 압력에 따라 러시아 공관을 떠나 경운궁(慶運宮:덕수궁)으로 환궁하고 국호를 대한제국, 연호를 광무(光武)로 고치고 왕을 황제라 칭하여 중외에 독립제국임을 선포하였다.

구러시아 공사관의 유래



 구 러시아공사관의 정확한 명칭은 러시아공사관 탑이다. 러시아공사관 건물의 일부인 탑에 해당한다. 러시아공사관 건물은 한러수호조약[韓露修好條約]이 체결된 1885년에 착공되어 1890년 준공되었다. 이 건물은 경복궁과 경운궁(덕수궁) 등 서울 4대문 안을 내려다 볼 수 있는 정동(貞洞)의 고지대에 입지했으며, 그 건물 규모나 대지 규모에서 미국ㆍ영국ㆍ프랑스ㆍ독일공사관보다 컸다.

 19세기 말 고종은 일본 세력을 견제하기 위하여 서양 세력을 이용하려 하였는데, 이 서양 국가 중에 러시아를 특히 중시했다. 러시아공사관은 경운궁과 미국ㆍ 영국 등 서양 국가의 공관 등이 집중적으로 위치한 정동을 내려다 볼 수 있는 언덕 위에 자리잡고 있었다. 이 자리는 원래 경운궁의 영역이었으며, 탑의 동북쪽 지하실이 경운궁으로 연결되었다고도 한다.

 1895년 고종 비인 명성황후가 경복궁에서 일본 세력에 의하여 시해되자, 고종은 1896년 2월 세자와 함께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하였다가[俄館播遷], 1897년 경운궁으로 환궁하였다. 아관파천으로 친일 김홍집(金弘集) 내각이 무너지고 친러 박정양(朴定陽) 내각이 조직되었다. 이렇게 러시아공사관의 입지와 건축은 조선 말의 정치적인 상황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

 이 건물의 설계자는 러시아인 사바찐(Afanasij Ivanobich Seredin Sabatin)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1860년경 러시아에서 출생했다. 1883년 여름 중국 상해에 있던 사바찐은 고종으로부터 유럽식 정주지(定住地)의 설계와 관청 건물의 건축을 맡아달라고 초빙받는다. 그는 그해 9월 조선에 도착했고, 1884년 초에 왕궁 축조 설계, 저렴한 벽돌공장, 불연성(不燃性)의 이엉지붕 설비안, 서울의 전차선로 설비안 등을 작성했다. 그의 건축활동은 경운궁ㆍ정동 일대ㆍ서대문ㆍ경복궁 그리고 인천 등지에서 이루어졌는데, 그의 첫 설계 작품은 러시아공사관 건물과 그 건물의 러시아아치문[俄門]이다.

 그는 또한 명성황후 민씨 시해사건의 목격자이기도 했다. 그는 왕실직속 시위대(侍衛隊) 교관이던 미 육군 퇴역소장 다이(W. M. Dye)와 함께 경복궁 건청궁(乾淸宮) 옥호루(玉壺樓) 인근의 서양관(西洋館)에 기거했는데, 이 건물은 고종의 거실에서 불과 60~70m 떨어진 곳이었다. 시해의 주동자들인 일본군 장교들은 황후 처소를 사바찐에게 물었는데 그가 가르쳐주지 않아 목숨이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렀었다고 한다. 러시아공사관 건물은 사진에 의해서 그 규모와 건축을 알 수 있다. 사진 자료에 의하면 러시아공사관 건물은 단층 ㄱ자형이었다. 정면과 측면은 아치 아케이드(arcade)로 둘러쌓았고, 정면에는 페디먼트(pediment)를 두었다. 이 공사관의 핵심은 탑부이다. 고지대에 3층탑을 설치하여 경복궁과 인접한 경운궁 그리고 주변 서울 시내를 내려다 볼 수 있었다.

 이 탑은 석재와 회색 벽돌로 되어 있었는데, 1973년 탑 외부 단장 때 흰 회반죽 칠로 마감하였다. 1층은 반원형 아치의 아래로 긴 장방형 개구부가 있으며, 2층은 단순 벽으로, 3층의 각 입면은 쌍 반원형 아치창과 페디먼트로 구성되었다. 이 3층은 전망대 역할을 했다.

 1896년 촬영한 사진을 보면, 러시아공사관 입구에는 개선문 형식의 아치문이 세워져 있었는데 이 문은 벽돌조로 전후 좌우 4면이 아치로 개방되었다.

 서울특별시는 1981년 문화재관리국과 공동으로 공사관 유적을 발굴하였는데, 공사관 지하에는 밀실과 비밀통로가 있었다. 지하 밀실은 7m×4m의 장방형 평면으로 돌과 벽돌로 쌓여져 있었다. 이 지하 밀실과 공사관, 그리고 탑은 비밀통로로 서로 연결되었는데 그 통로 폭은 약 45cm로 매우 좁고, 길이는 20.3m였다. 통로의 중간 지점에 폭 50cm, 길이 5m를 확장시켜 놓았는데, 이는 왕복 통행 때 대기 공간 구실을 한 것으로 보인다. 이 통로의 벽은 벽돌로, 바닥은 재래식 석회다짐을 했다.

 고종은 아관파천 때 이 공사관의 제일 좋은 방에서 머물렀다고 한다. 커튼ㆍ벽지ㆍ바닥재ㆍ실내등은 모두 화려한 것이었고, 침대ㆍ소파ㆍ의자 등도 제정(帝政) 러시아로부터 수입된 가구들이었다고 한다. 이 공사관 내부의 장식은 제정러시아의 화려한 인테리어 스타일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건물은 광복 직후 소련영사관으로 사용되었다. 한국전쟁 때 대부분이 소실되고 탑 부분과 일부 지하층만 남아있었다. 1973년 약간 손질하여 현재와 같이 되었다. 이 건물은 건축사적 의미도 중요하지만, 그 역사적인 장소성(場所性)이 더 중요하다. 이 탑은 이를 상징하고 있다. 1981년 10월 건물을 재보수하고 주변을 조경하여 시민공원으로 사용되고 있다. 현재 대지 면적은 약 2,500평으로 반 이상 줄었다. 이 건물은 1973년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3호로 지정되었으며, 1977년 11월 22일 사적 제253호로 승격되었다.


느낀 점

 당시 대한제국은 말 그대로 국가로서의 체면을 상실한 채 그저 일본이나 러시아, 영국 등 열강들에게 휘둘리던 동방의 한 작은 나라에 불과했다.

 러일전쟁에서 '만약' 러시아가 승리하고 일본이 패했다면 과연 고종은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을까? 러시아 공사관으로 가느니 차라리 해외 망명을 해 독립운동을 (탄압하거나 방관하지 않고) 지원했다면 이후 역사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물론 역사를 바라봄에 있어서의 '가정(假定)'이란 그저 허무맹랑한 '희망'일 수밖에 없으며 무용지물에 그친다는 점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다만 당시 자국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조선땅에서 동분서주하던 열강들에게 있어, 동방의 한 작은 나라의 왕 고종은 그저 종속변수일 수밖에 없었을 뿐이며, 고종 자신이 의탁처로 택한 러시아 역시 크게 다르지 않은 입장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생각할 때 어쩌면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몸을 피한 후 약 1년 뒤인 1897년 2월 20일 경운궁으로 환궁한 것은, 한반도 역사에 있어 별다른 의미가 없는 일이란 생각이 든다. 그저 나라 잃은 자의 슬픔이요 힘없는 자의 소리 없는 아우성일 뿐, 언젠가는 양상은 달리 해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을 테니 말이다.

 또한 고종 스스로도 나라의 독립을 위해 적극적으로 헌신했다기보다는 자신을 비롯한 왕가의 안녕을 위해 애쓴 흔적이 더 역력하니 일반 민중들에게 있어서는 별 의미가 없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물론 이를 두고 너무 무책임한 소리일 뿐만 아니라 당시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데서 나오는 오해라고 반박할 수도 있겠다. 물론이다. 이 길손이 당시를 살았던 사람이 아니니 말이다.

 아마도 가슴 한구석을 메어오는 답답함은 여기서 나오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무리 고종을 미워하고 싶어도 이런 비극의 원인을 고종 스스로가 초래했다고 단정할 수 없으니 말이다. 차라리 고종 한 사람에게 모든 책임을 뒤집어씌울 수 있으면 차라리 마음이라도 시원할 텐데….

 그래, 그냥 마음 편하게 지나간 '과거'는 잊는다고 치자. 문제는 어디까지나 '현재'이니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도 쉽게 해결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관파천이라는 한맺힌 설움을 경험한 지 100년도 더 지난 현재 2009년의 한국은 외부로부터 자유로운지 쉽사리 판단을 내리기 힘들어 보인다. 주변 4강을 만족시켜야 하는 남북통일을 위한 잰걸음들이, 미국 시장(市場)의 눈치를 보아야 하는 한국 경제가 그저 답답하기만한 여름밤이다.


더 많은 우리 역사의 기록들은 대한민국 국가기록원(http://www.archives.go.kr/)에서 열람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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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임금, 사생활 있다? 없다?
 

 조선시대의 임금의 사생활은 어느정도나 보장되었을까요?

국가기록원에 있는 조선왕조실록 기사 중에 임금의 사생활에 대해 언급한 부분이 있어서
여러분께 소개합니다.



 위 기사 내용을 보면 임금은 엄격한 자기 통제가 요구되었고, 개인적인 영역까지 기록한다고 되어있네요.
갑자기 박지원의 양반전이 생각나네요. 여러분께 임금 자리를 내준다면, 하시겠어요?

 국가기록원에는 흥미로운 자료들이 매우 많습니다. 더 많은 자료들을 보고싶으시면 아래 배너를 클릭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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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공정, 이 것만은 알아두자.


 동북공정이 이슈화 된지 벌써 수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동북공정이 무엇인지 조차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더군요. 조금은 충격적이었습니다. 그래서 대학 때 정리해 둔 자료를 바탕으로 동북공정을 간단하게 다루겠습니다.

동북공정의 의미

동북공정이란?

 동북공정이란 ‘동북변강역사여현상계열연구공정(東北邊疆歷史與現狀系列硏究工程)’의 줄임말로 동북 변경의 역사와 현황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 프로젝트로 풀이 됩니다. 중국 사회과학원에서 조직 동북3성(요령성, 길림성, 흑룡강성)의 성 위원회가 참여하고 지원하는 학술연구 프로젝트입니다.

 이 작업을 통해 중국이 얻으려 하는 것은 한민족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의 정통성을 이어 받은 고구려의 역사를 중국의 역사로 편입하려는 것입니다. 접근 방향은 중국은 한족(漢族)을 중심으로 55개의 소수민족이 만든 국가라는 것이며 현재 중국 국경 안에서 이루어진 모든 역사는 중국의 역사이므로 고구려사와 발해의 역사는 한국의 역사가 아니라 중국의 역사가 된다는 논리입니다.

동북공정의 발단

 동북공정의 출발은 중국측의 입장으로는 잘못된 역사 바로잡기 운동에서부터 시작이 되는데 곧 주변국의 입장에서 보면 역사의 왜곡에서부터 시작된다고 할 것입니다. 중국은 일찍이 서남공정에서 보여주듯이 소수민족의 불만을 잠재우고 한민족 대단결을 위하며 초기에 소수민족분쟁의 단초를 없애기 위하여 서부대개발과 같은 국가적 차원의 국책사업을 추진하였습니다. 동북공정은 또 다른 형태의 서남공정에 연장선상에 존재하고 장기적인 안목에서 구상된 기획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결국 동북공정의 시작은 이미 서남공정에서부터 의도되고 기획된 것이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동북공정의 목적과 경과

 중국은 2001년 6월에 동북공정에 대한 연구를 추진하기로 하고, 8개월간의 준비 기간을 거쳐 이듬해 2월 18일 정부의 승인을 받아 공식적으로 동북공정을 추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연구는 중국 최고의 학술 기관인 사회과학원과 지린성(吉林省), 랴오닝성(遼寧省), 헤이룽장성(黑龍江省) 등 둥베이삼성(東北三省)의 성 위원회가 연합해 추진하고 있습니다. 연구기간은 5년이며, 연구비는 총 24 억 원이다.

 실질적인 목적은 중국의 전략지역인 동북지역, 특히 고구려·발해 등 한반도와 관련된 역사를 중국의 역사로 만들어 한반도가 통일 되었을 때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 영토 분쟁을 미연에 방지하는 데 있습니다.

 연구는 크게 기초 연구와 응용 연구로 나누어 진행됩니다. 주요 연구과제는 동북지방사 연구, 동북민족사 연구, 고조선사·고구려사·발해서 연구, 중국과 한반도 관계사 연구, 한반도 정세 및 변화와 그에 따른 중국 동북 변경지역의 안정에 관한 영향 연구 등입니다. 특히 고조선·고구려·발해 등은 고대 중국의 동북지방에 속한 지방정권인데, 북한과 한국의 학자들이 이러한 사실을 왜곡하고 혼란을 부추기고 있다는 전제 아래 연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3국은 엄연한 한국사의 실체이고, 고구려나 발해는 만주와 한반도를 동시에 영토로 삼았던 국가들입니다. 이 때문에 한국에서도 중국의 역사왜곡에 체계적으로 대처하기 위해 2004년 3월 고구려사연구재단을 발족하였습니다.

동북공정의 연구내용

 동북공정의 연구내용은 고대 중국의 강역이론 연구, 동북지방사 연구, 동북민족사 연구, 고조선·고구려·발해사 연구, 중조(中朝)관계사 연구, 중국동북변경과 러시아 극동지역의 정치·경제관계사 연구, 동북변경의 사회 안정 전략 연구, 조선반도의 형세 변화와 그것이 중국동북변경지역의 안정에 미치는 영향 연구 등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중국의 동북지역 및 한반도와 관련된 각 분야를 포괄하고 있습니다.


 미래의 우리 역사는 현재의 우리들이 쓰는 것입니다. 한 분이라도 더 많은 국민들이 우리나라 역사에 대해 관심을 가질 때, 우리는 우리의 역사를 자랑스럽게 우리의 아들들에게 들려줄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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