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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 (7)
레바논, 천국과 지옥의 혼재


수도 베이루트(Beirut)

 중동의 파리라는 별명을 가진 이 도시는 프랑스 파리와 자매결연이 되어있다. 레바논의 수도이며 가장 큰 도시. 인구는 150만 안팎이다. 서울특별시의 한개 구 정도의 면적에 두개구 이상의 인구를 합쳐놓은 사람들이 사는지라 인구밀도는 매우 높다.

 

*베이루트 시내전경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이루트는 두 개의 도시가 하나로 합쳐진 것으로 봐도 무방할 만큼 동베이루트와 남베이루트가 천지차이를 이룬다. 동베이루트는 레바논 인구의 41%를 차지하는 카톨릭 기독교도 마로니테스(Maronites) 의 거주지역이다. 동베이루트의 전경은 그야말로 파리를 중동으로 옮겨온 것과 다를바 없다. 전쟁 전에는 지중해에서 최고의 휴양도시중 하나였던 베이루트. 동베이루트에 한해 아직 그 말이 유효하다. 고급승용차가 거리에 즐비하고 빌딩들이 우뚝 솟아 있으며 남녀 쌍쌍 모여 다니고 각양각색의 옷차림을 자랑한다. 여자들의 노출도 이곳에서는 이상한 현상이 아니다. 동베이루트는 이슬람지역이 아니기 때문이다. 

*폭격당해 폐허가 된 남베이루트

 반면, 남베이루트는 아귀지옥이다. 남베이루트는 레바논의 국제적으로 악명높은 테러조직 헤즈볼라가 속해있는 종파인 이슬람 시아파 주민들의 거주지역이다. 시아파는 레바논 전체인구의 25%를 차지한다. 즉, 이스라엘 공군이 베이루트를 폭격했다는 말은 사실은 동베이루트가 아닌 남베이루트를 폭격했다는 말이다. 동베이루트는 애초에 이스라엘 공군의 폭격대상에 포함되어 있지도 않은, 완전 다른 도시라는 것이다. 남베이루트의 상황은 처참하다. 길거리의 건물들은 폭격을 당해 모두 폐허가 되어있고 하루에도 몇 번씩 폭탄이 터지며 도시의 모든 기능이 마비되어있는 아비규환의 상태이다. 밤마다 공습의 공포에 시달린다. 남베이루트는 죽은 도시다. 길거리에는 인적이나 차량을 찾아보기 힘들다.

 
레바논의 1인당 국민 소득은 7천불. 우리나라의 반 수준이고, 태국과 비슷하지만 태국보다는 약간 우위에 있다. 이 나라는 세개의 종파가 각기 다른 공동체를 이루면서도 하나의 정부를 구성하는 조화속에서 살아가는 평화로운 나라였고 십여년전에는 최고의 휴양국가로 손꼽히는 지중해의 꽃이었다. 이 나라가 전쟁의 화염에 휩싸이게 된것은 역시나 종교 때문이다. 레바논은 마로니테스 41%, 이슬람 50%(시아파 25%, 수니파 25%)로 구성되어 있다. 민족은 아랍인이지만 여타 중동의 아랍인들과는 조금 달라 생김새가 유럽에 가깝다. 공용어는 아랍어이나 동베이루트 지역에서는 프랑스어나 영어가 사용가능하다. 레바논은 전체적 인구 비율로 보아서는 이슬람 인구비율이 50%가 넘는 이슬람 국가이지만 이들은 수니와 시아로 구별되기 때문에 최대정파를 이끌고 대통령을 당선시키는 나라의 주류종파는 41%의 마로니테스들이다. 이 탓에 레바논은 터키와 마찬가지로 일부다처제가 불법인 세속주의국가다. 이 나라는 아랍 최대의 연예계를 가지고 있다. 다른 아랍국가 청년들은 (가부장 아버님의 눈길을 피해)레바논TV를 시청한다. 여자 가수나 여배우들의 공공연한 노출이 가능한 곳이 중동에서는 유일하게 레바논 하나뿐이다.

 

 *미스 레바논 출신의 레바논 여가수 하이파 와흐비(Haifa Wahbe). 그녀는 남베이루트 출신이고, 종교는 시아파 이슬람이다. 하지만 레바논에서는 이러한 그녀의 과도한 노출(?)이 문제되는 경우는 없다. 하지만 레바논도 한계점은 여실히 드러난다. 그녀는 올해 나이로 30세. 한 번 이혼한 전력이 있는데, 역시 이슬람인구가 반이 넘는 국가답게 아직도 커스터디 로(Custody law)가 적용된다. 그녀는 전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딸을 이혼 후 한 번도 만나보지 못했다고 한다. 하지만, 사우디 배불뚝이 석유재벌이 던져주는 고급 승용차와 향수에 혹해서 약혼까지 갔다고 하니, 그녀가 딸을 만나지 못하는 안타까움에 애끓는 모성을 소유한 것 같다고는 생각되지 않고, 자연히 동정이 가지도 않는다. 아, 한 가지 더. 오빠가 24살 때에 이스라엘과의 교전에서 전사했기 때문에 이스라엘을 증오한다고 한다.

 

*헤즈볼라 지도자 하산 나스랄라.

 헤즈볼라는 이슬람 시아파에 속하는 레바논의 정당임과 동시에 무장조직이다. 헤즈볼라는 무장조직이긴 하지만, 선거를 통한 정당한 방식으로의 이슬람 국가 건설에 목표를 두고, 여러 사회 복지 시설도 많이 운영하는 비교적 온건한 단체로 레바논 국민들도 처음에는 그들에 대해 그다지 거부감이 없었다. 그들은 이스라엘과 그를 돕고 있는 미국을 증오한다. 흔히들 시아파라고 하면 무장 테러집단을 떠올리고, 수니파는 온건한 이슬람 종파라고 생각하는데, 이는 한참 잘못된 오해이다. 알 카에다를 비롯한 이슬람 원리주의 무장 테러조직의 대부분은 수니파이다. 헤즈볼라만이 규모가 큰 시아파 테러조직이다. 수니파가 온건하다는 것은 그만큼 말 안 통하고 고집스럽게 이슬람 식으로 산다는 것을 뜻한다. 수니파는 코란의 해석을 자신들의 정통식 이외의 다른 방면으로 접근하는 것을 철저히 거부한다. 반면 민주화를 이룩해내 상당수준의 여성복지와 여성참정권을 만들어낸 이란은 시아파다. 시아파는 소수파이긴 하지만 과격파는 아니다.  헤즈볼라의 테러수준은 알카에다의 그것에 비교하면 어린애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레바논과 이집트라면 이를 갈기 때문에 헤즈볼라는 레바논의 밉살맞은 이슬람에게 폭탄을 떨어트릴 괜찮은 트집거리가 된것이다.

 레바논은 아직도 치안이 불안하다. 수도 베이루트의 한부분에서는 여전히 지금도 포탄이 떨어지고 있는 가운데 동베이루트에서는 메르세데스 벤츠 안에서 오렌지족 남녀가 서로 좋아 뜨거운 키스를 퍼붓고 있다. 레바논 기독교사회는 이스라엘의 공습이 레바논 전체에 대한 공습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고작 "그래도 같은 나라 국민인데, 시아파 사람들을 구호해야 하지 않겠느냐" 하고 물자를 지원하는 정도이다. 세 종교가 섞여 사는 나라 레바논. 천국과 지옥이 혼재하는 나라 레바논. 그렇기에 앞으로 어찌될 지 전혀 예상할 수 없는 나라, 바로 레바논이다.

 

*레바논 국기. 가운데의 삼목은 레바논에서 가장 많은 수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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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바이-기적의 리더십


 

 <두바이 기적의 리더십은> 세계 최고의 호텔과 인공 섬, 사막의 스키장과 골프장 등 상상을 초월하는 일이 눈앞에 현실로 이루어지고 있는 두바이의 지도자, 셰이크 모하메드의 비전과 리더십에 대해 다룬 책이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황량한 사막, 몇 년만 퍼내면 고갈될 것이 뻔히 예견되는 석유 매장량, 30만 명도 채 되지 않는 인구, 게다가 중동 지역이면서도 볼 만한 역사적 유적지 하나 없는 보잘 것 없는 불모지의 나라였던 중동의 작은 부족국가 두바이는 셰이크 모하메드의 리더십 아래 다른 도시와 국가가 감히 엄두도 못내는 창의력과 역발상으로 전 세계 금융과 물류와 관광과 엔터테인먼트와 언론, 심지어 고급문화까지 모두 끌어 모으겠다는 야심을 실천해 나가고 있다. 두바이가 세계적인 주목을 받는 것은 단순한 물량적 성장 때문만은 아니다. 세계 최고층 빌딩 버즈 두바이나 세계 최고급 호텔 버즈 알 아랍이나 인공 섬 팜 아일랜드, 해저호텔 하이드로폴리스 등에서 온갖 상상력과 창의력이 번득이기 때문인데, 이 모든 과정에는 셰이크 모하메드의 기적의 리더십이 있다. 이 책은 기발한 상상력과 창의적인 아이디어로 세계를 놀라게 하고 있는 그런 두바이의 모습을 화려한 컬러 사진과 생생한 여행정보를 곁들여가며 전달하고 있다. 그럼 이 책이 다루고 있는 주요 내용과 핵심 메시지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다.

2 <두바이 기적의 리더십> 감상 및 분석

(1) 셰이크 모하메드의 리더십

 두바이는 요즘 전 세계의 벤치마킹 대상이 되고 있다. 이러한 두바이의 천지개벽은 셰이크 모하메드의 진두지휘에 따라 진행되고 있다. 그는 현재 세계 리더십 전문가가 주목하는 인물이 되었고, 국가적 리더십 결핍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나라에서도 그의 리더십에 찬사를 보내는 사람이 많다. 셰이크 모하메드는 현실을 냉철하게 진단하는 통찰력, 도전과 모험정신으로 미래를 내다보고 발전상을 머리에 그릴 줄 아는 상상력, 불가능은 없다는 자세로 일사천리로 밀어붙이는 실천력 등 리더십의 3대 조건을 고루 갖추고 있는 지도자인데, 1995년 그가 왕세자로 지명된 뒤 10년 동안 두바이의 GDP는 80억 달러에서 200억 달러로 폭증했다. 이는 두바이의 석유 부존량이 2020년쯤이면 바닥날 것으로 판단한 그가 관광, 금융, 무역, 엔터테인먼트, 전시회 등의 아이디어로 승부를 건 결과라 할 수 있다.

 셰이크 모하메드의 리더십이 돋보이는 것은 그가 행정규제로는 경제발전을 기할 수 없다는 점을 간파하고 있었다는 데 있다. 그런가 하면 인터넷 시티, 미디어 시티 등 다양한 형태의 자유지역(Free Zone)을 지정하여 마이크로소프트, 시스코, CNN 등 세계적인 업체를 마음껏 끌어들이는 데도 성공했다. 또 현재 두바이에는 용적률이나 층고 제한이 거의 없어 건축업체에는 천국이나 다름없다. 또한 비수기 세계 부자의 돈을 끌어들일 목적으로 1월 중순부터 2월 중순까지 두바이 쇼핑 페스티벌이란 바겐세일 행사를 진행하고, 6월부터 8월까지도 이와 비슷한 두바이 여름 깜짝 세일 축제를 개최한다. 지금도 그에게는 늘 새로운 아이디어가 넘치고 있는데, 그는 세계의 자본가들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의 자본가들이 두바이를 필요로 하도록 만들겠다며, 두바이가 세계적인 도시에서 만족하지 않고 두바이가 세계 그 자체라는 말을 듣도록 하겠다는 각오로 임하고 있다.

 셰이크 모하메드는 아버지로부터 어린 시절부터 차근차근 리더가 되기 위한 여러 가지 준비를 해왔다. 세계를 바라보는 시각, 미래를 그릴 줄 아는 상상력, 본질을 꿰뚫는 통찰력, 무엇이 국민에게 진짜 이익인지 생각하는 애국심, 구성원을 신나게 만드는 동기부여 능력을 고루 갖추고 있다. 한국의 리더들이 그로부터 배워야 할 점을 언어, 사고, 행동 등 3가지 측면에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셰이크 모하메드의 말이다. 말이란 시간과 장소에 따라 적절하게 구사되어야 한다. 그는 교언영색이나 감언이설, 허장성세가 아니라, 진실된 말을 통해 국민에게 비전을 제시하고 동기를 부여하고 잠재력을 이끌어내고 있으며, 유머도 있다. 그의 말에는 생기가 넘치고, 정중하고도 힘이 있다. 지도자는 말로써 미래의 비전을 제시해야 하는데, 모하메드는 비전 제시라는 점에서 다시 한 번 탁월성을 과시한다.

 둘째, 셰이크 모하메드의 생각을 배워야 한다. 그는 불가능은 없다는 전제 아래, 역발상을 바탕으로 한 상상력으로 두바이를 보물섬으로 만들었다. 그는 다양한 관점의 질문을 여러 차례 던지면서 사물의 본질을 파고들었고, 수평적이고 열린 마음으로 수많은 전문가들과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누면서, 새로운 아이디어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사람들이 두바이를 가고 싶은 이유는 단순하게 거대한 건축물이 있어서가 아니라, 무언가 새롭고 신기한 발상이 꿈틀거리고 있기 때문이다.

 셋째, 셰이크 모하메드의 행동을 배워야 한다. 그는 언제나 신중하게 결정하되, 행동은 번개처럼 신속하게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상상력을 통해 만들어진 아이디어와 사고는 전광석화와 같이 실천으로 옮긴다. 지금 우리 정부와 기업에 요구되는 것은 이 눈치 저 눈치 보면서 갈팡질팡하는 리더십이 아니라, 셰이크 모하메드처럼 신속한 스피드다. 때로 신속한 행동이 부작용도 낳고 나쁜 결과도 만들 수 있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스피드가 오히려 낫다는 게 최근 경영학계의 트렌드다. 용기도 없고 의지도 상실한 우리나라 각계각층에 있는 리더들은 셰이크 모하메드의 눈빛에서 교훈을 얻어야 한다.

(2) 두바이의 기적



두바이가 오늘날 세계 최고의 신데렐라로 주목받는 비결은 무엇일까? 흔히 오일달러의 위력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하지만 오일달러는 결과로 나타난 것이지, 원인이 아니다. 왜냐하면 두바이가 상상력으로 불가능을 향해 도전장을 던지고 성공할 기미를 보이자, 엄청난 액수의 오일달러가 두바이로 모인 것이기 때문이다. 참고로 두바이와 두바이의 지도자는 오일달러를 비롯한 전 세계 자본을 끌어 모으기 위해 랜드마크(Landmark)를 만드는 데 힘을 쏟았는데, 세계 최고층 빌딩 버즈 두바이, 세계 최고급 호텔 버즈 알 아랍, 인공 섬 팜 아일랜드와 더 월드, 초대형 테마공원 두바이랜드, 초대형 실내 스키장 스키 두바이, 해저호텔 하이드로폴리스, 초호화 골프 클럽 에미레이트 골프 클럽, 테크놀러지- 미디어 프리 존 시티 등 경이적인 시설들이 그것이다.


(3) 모든 항로는 두바이로 통한다

 두바이의 성공은 원유수입에만 의존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즉 외국인의 유입과 활발한 경제활동에 힘입어 상업 및 거주용 건물에서 나오는 수입과 각종 수수료 수입을 극대화시켰고, 여기에다 외국자본을 끌어들이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기 때문이었다. 한편 두바이는 세금이 없는 나라다. 개인소득세도 없고, 법인세도 없다. 부가가치세도 기본적으로 없다. 그리고 국가가 사실상 소유하고 있는 항공사, 정유사, 부동산 개발회사 등이 비즈니스를 통해 수익을 내며 이 돈으로 나라를 운영한다. 아울러 두바이 전체는 하나의 공사판이다. 아라비아만을 바라보는 두바이 해변에는 고급 빌라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건설되고 있고, 고급 빌라 주변에는 흔히 최고급 쇼핑센터가 있으며, 시내 곳곳에도 세계적 명품 판매점이 들어선 대형 쇼핑센터가 관광객들의 지갑을 털고 있다.

 오늘날 두바이의 성공비결은 홍보의 성공에서 찾는 사람이 많다. 특히 모하메드는 자신의 독창적인 국가전략을 대내외에 절묘하게 포장시킬 줄 아는 정치적 홍보능력을 지니고 있다. 그는 외국인의 눈길을 잡아당기지 못하면 실패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세계 최초, 세계 최고, 세계 최대라는 구호를 만들었으며, 세계 최고의 기업과 자본으로 하여금 두바이에 군침을 흘리도록 만들었다. 그의 세계적인 홍보 마케팅은 어느 홍보 전문회사보다 탁월한 기법을 자랑하는데, 우선 각 업계의 간판 기업부터 유치함으로써, 다른 기업이 따라 들어오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었다. 세계 최초, 세계 최대, 세계 최고라는 타이틀도 대외홍보에 커다란 시너지 효과를 거두었는데, 이를 알리기 위해 해외 유명 스타를 동원하여 각종 이벤트 및 대규모 국제행사를 개최하는데 주력했다.

 두바이의 야심은 세계 물류 전초 기지가 되겠다는 전략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두바이는 걸프만 일대에서 대형 선박이 정박할 수 있는 유일한 지역이며, 유럽과 아시아·태평양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어, 지리적으로 발전 잠재력이 크다는 점을 셰이크 모하메드는 최대한 노렸다. 그런 바탕 위에서 두바이의 물류전략은 공항과 항만을 통합하고, 자유지역이라는 파격적인 물류 거점을 건설하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흔히 두바이에 외국기업이 몰리는 이유로 4무(無)와 2다(多)를 지적하는데, 4무란 무세금, 무제한 외환거래, 무노동쟁의, 무스폰서를 말하고, 2다란 다양한 물류여건, 다양하고 편리한 지원 시스템을 갖춘 원스톱 행정을 말한다. 즉 각종 세금과 금융규제, 노사문제가 없는 기업천국이란 의미다.

(4) 우리가 가야 할 길을 앞서 간 두바이



 두바이 프로젝트의 성공요인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독창적 아이디어와 역발상의 도시개발 모델 창출을 들 수 있다. 두바이는 태양과 바다, 사막과 같은 단조로운 자원에,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활용해 세계적 관광 중심지로 도약했는데, 최고급을 지향하는 리조트 시설, 사막에 초고층 초대형의 빌딩 건설과 불가능해 보이는 간척사업을 실현하고, 세계 쇼핑 축제 등 국제적 이벤트를 개최하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고급화 전략을 밀고 나가고, 다양한 아이디어의 현실화를 위해 선 공급, 후 수요 창출의 역발상식 두바이 도시개발 모델이 만들어졌다.

 둘째, 해외자본 유치를 위한 Open Sky Policy를 들 수 있다. 두바이는 외국인 토지임차 및 소유권 보장으로 친비즈니스 환경을 조성했고, 여기에 폭 넓은 세제혜택과 규제완화 등 해외 투자자본 유치를 위한 정책적 노력이 가미됐다. 아울러 외국인 투자자 및 입주자의 물리적·제도적 여건과 생활환경도 개선시켰는데, 예로 약 80개의 외국인학교를 설립했고, 세계적 수준의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는 헬스 케어 시티가 2010년 완공될 예정이다.

 셋째, 국제 관광도시 인프라와 고객중심 서비스 전략을 들 수 있다. 두바이는 인종과 문화가 융합된 140개 이상 다국적 인구의 국제도시로, 해외 관광객들에 대한 편의와 안전을 철저히 배려하고 있다.

 넷째, 세계적인 홍보 마케팅 전략을 들 수 있다. 전 세계적인 쇼 케이스 홍보를 통해 해외 주요 기업을 유치함으로써, 관련 기업의 투자신뢰도 향상은 물론 간접적인 홍보효과도 유발하고 있고, 아울러 세계 최초·최대·최고라는 타이틀을 내걸고 시작한 대외홍보에서도 시너지 효과를 노렸다. 여기에 해외 유명 스타를 동원한 각종 이벤트 및 대규모 국제행사도 한 몫 했다.

 다섯째, 정부의 지속적인 프로젝트 지원과 리더십을 들 수 있다. 두바이 개발 프로젝트의 급속한 추진으로 인한 교통난 해소를 위해 경전철을 도입하고, 대중교통 시스템을 개혁했으며, 부동산 개발 활성화로 주택가격 상승에 따른 중산층 및 저소득층의 주거안정을 위해 대량 주택공급도 촉진하고 있다. 한편 두바이 당국은 부족한 인력문제 해결을 위해, 노동인구 유입을 활성화하고, 노동생산성의 향상도 지원하고 있다.

 한편, 우리나라가 관광레저 기업도시를 개발하는 과정에 두바이의 사례는 다음과 같은 교훈을 던져줄 수 있다. 첫째, 민간기업 주도의 관광·레저 기업도시 개발이 필요하다는 점을 시사해 주고 있다. 오늘날 두바이가 세계적인 관광지가 된 것은 기업의 창의적 아이디어와 개발 전권을 기업에게 위임한 정부의 전폭적인 지지에 기인한다고 하겠다. 따라서 우리나라 정부도 관광·레저도시 건설을 저해하는 출자총액 제한 및 외국 교육·의료기관 설립 제한 등 각종 규제를 완화하는 동시에, 광역 인프라에 대한 지원 강화를 통한 건설추진을 활성화시켜야 한다.

 둘째,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개발에 대한 개혁의지가 필요하다는 점을 시사해 주고 있다. 두바이는 이슬람 신도가 아닌 외국인에게는 주류 판매를 허용하는 등, 이슬람의 엄격한 금기로부터 해방구를 마련했고, 이러한 기본 정신을 바탕으로 1970년대 본격적인 유전개발로 벌어들인 오일머니로 관광·무역·금융 인프라 구축에 투자해 석유고갈에 대비하고, 관광·무역의 메카로 성장해 왔다고 할 수 있다. 아울러 두바이의 성공요인에는 지역 특성을 극복한 개발 컨셉트도 있기에, 우리나라의 관광·레저도시에도 한국 고유의 미와 자연 특색을 살린 컨셉트 확립이 필요하다.

 셋째, 실용적 개발전략 및 고객 맞춤형 마케팅 방안 강구가 필요하다는 점을 시사해 주고 있다. 사실 두바이는 낯선 환경과 테러 위험이 도사리는 아랍국가라는 이미지를 탈피하기 위해, 싱가포르와 홍콩 등 세계적 관광 국가를 철저히 벤치마킹했고, 결국 철저한 치안관리를 통해 싱가포르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안전한 국가이자, 쇼핑의 천국으로 부상하는데 성공했다고 할 수 있다. 우리도 관광·레저도시 내 해외 관광객 유치 활성화를 위해서는, 주요국의 방한 관광객을 중심으로 세밀한 서비스 전략을 수립하는 비즈니스 마인드가 필요하다. 이와 함께 대규모 관광객 동원이 가능한 국제행사를 유치하고 홍보·이벤트 마케팅도 강화해야 한다.

(5) 두바이의 한국 기업

 삼성전자 휴대폰은 두바이에서도 셰이크 모하메드 지도자가 직접 칭찬한 최고의 고급 브랜드로, 왕족과 부유층의 손바닥을 파고들고 있는데, 삼성전자는 이곳에서 소니 등에 이어 호감도 톱3 기업에 들어갔고, 프로젝션TV, LCD-TV, LCD 모니터 등에서는 시장1위를 달리고 있다. 그리고 세계 최고 7성급 호텔이라는 버즈 알 아랍에는 LG전자가 대거 납품을 했고, 현대자동차도 두바이에 아중동지역본부를 두고 20여 명의 직원을 파견했다.

 현재 두바이에 지사를 두고 있는 국내 업체로는, 현대건설, 삼성물산, GS건설, 두산중공업 등인데, 이들은 중동 전체 원유매장량의 95%를 차지하면서 최근 고유가의 최대 수혜를 받고 있는 걸프연안 8개국의 건설·플랜트 공사 수주를 위해 두바이를 센터로 하여 총력 수주활동을 벌이고 있다. 최근 중동 지역 공사발주의 특징은, 발주 분야가 토목·건설 부문에서 석유·가스 부문으로 변화되고 있는데, 국내 업체는 이 점을 노리고 있다.

(6) 두바이의 빛과 그림자

 급격한 성장 뒤에는 환희의 눈길이 있지만, 질시와 우려의 눈길도 동시에 도사리고 있다. 우선 두바이는 대규모 개발로 부동산 가격에 거품이 발생했는데, 문제는 두바이 투자액의 65%가 사우디아라비아·쿠웨이트·이란 등지에서 온 오일달러라는 점이다. 따라서 자칫 국제 유가가 하락하거나, 미국과 이란의 관계가 심각한 지경으로 악화되면, 일거에 버블이 꺼질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다. 아울러 많은 사람들이 장기 모기지론을 통해 부동산 투자자금을 조달하고 있기 때문에, 부동산 버블 붕괴는 더욱 심각할 수 있고, 거품이 터지면 경제 전반에 연쇄적인 타격이 우려된다.

 한편 두바이를 얘기할 때 외국인이 잊어서는 안 되는 점이 있다. 바로 두바이는 철저하게 30만 명에 이르는 자국민 중심 사회라는 점이다. 즉 원칙적으로 외국인은 두바이 현지인을 스폰서로 두어야 사업을 할 수 있고, 스폰서에게는 만만찮은 스폰서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는 것이다. 합작법인도 대부분 스폰서를 끼고 들어가야 하며, 지분도 49% 정도에서 만족해야 한다. 이 때문에 외국인에게 스폰서 비용을 받아 놀고먹는 현지인도 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다수 전문가들은 두바이가 당분간 승승장구 하리라는데 표를 던진다. 왜냐하면 두바이를 이끄는 셰이크 모하메드 지도자의 리더십이 워낙 파격적이고 기발한데다, 실천력에 스피드를 갖추고 있어서 당분간 적수가 없으리라는 전망 때문이다. 특히 경제학적으로 보면 이미 두바이가 규모의 경제를 구축해놓은 상태여서, 돈이 돈을 끌어 모으는, 즉 부익부의 선순환 현상이 수년간은 자동적으로 지속되리라는 전망이 많다. 그래서 두바이는 아직 그림자보다는 빛이 훨씬 더 센 곳이라고 할 수 있다.

3. 결론

 셰이크 모하메드는 불가능은 없다는 전제 아래, 역발상의 상상력으로 국민에게 비전을 제시하고, 동기를 부여하며, 잠재력을 이끌어내고 있다. 그리고 상상력을 통해 만들어진 아이디어와 사고는 빠르게 실천으로 옮기고 있다. 특히 지도자란 나라를 살피고 부흥시킬 수 있다면 어떤 길도 외면하지 말아야 하는데, 그는 아랍인의 피가 흐르면서도 미국에 대한 이해가 누구보다 높았고, 미국을 활용하기 위해 아랍권 내부에서 비판받을 정도로 친미 정책을 시행해 왔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또한 그가 모든 정책을 결정하기 전에 2천여 명의 싱크탱크들로부터 충분한 의견을 수렴, 분석하고 결정짓는 순서들을 거쳤다는 점이 인상적이었으며, 바로 이러한 점들이 두바이를 오늘날 전 세계가 주목하게 한 가장 큰 요인이라 생각된다. “미래를 바꾸려고 시도하지 않는 사람은 과거의 노예 상태로 머무르게 될 것”이라는 그의 신념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예이다.

 한편, 우리나라도 두바이 같은 기적의 성장을 이루기 위해서는 민간기업 주도의 관광·레저 기업도시 개발이 필요하고,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개발에 대한 개혁의지가 필요하며, 실용적 개발전략 및 고객 맞춤형 마케팅 방안 강구가 필요할 것이다. 또한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나라에서도 셰이크 모하메드처럼 세계를 바라보는 시각, 미래를 그릴 줄 아는 상상력, 본질을 꿰뚫는 통찰력, 무엇이 국민에게 진짜 이익인지 생각하는 애국심, 구성원을 신나게 만드는 동기부여 능력을 고루 갖춘 지도자가 등장해 기적의 리더십을 펼쳐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두바이의 기적을 그저 지나치는 이웃나라인 우리에겐 불가능 한 일이라는 생각을 바꾸고, 그들의 방법과 리더십을 철저히 벤치마킹하여 두바이의 기적을 능가할 수 있는 우리나라의 역사를 써나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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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비아 로렌스>의 거짓말

  영국의 거장 데이비드 린 감독이 미국 자본으로 만든 70MM 영화 <아라비아의 로렌스>(1962)는 사막의 아름다움과 영웅의 열정, 그리고 감동을 담은 세기의 걸작이다.

 
여기에 사막을 종횡무진하는 영국인 T . E . 로렌스가 있다. 그는 아랍인들의 독립을 위해, 외세배척을 위해 아랍인들을 이끌고 몇 안되는 군사로 연전연승을 거두며 아랍인들의 존경심을 얻는다. 그러나 아랍인들의 독립을 위한 명목으로 시작된 이 아랍반란이 끝난 직후, 영국이 약조를 어기고 아랍인들의 독립을 인정해주지 않자, 회의를 느낀 로렌스는 양심에 따라 장교를 그만두고 오토바이 사고를 내서 사망하며 불꽃같은 인생을 마감한다. 
 
 
아름다운 금발 머리와 푸른 눈을 가진 그는 현대영웅의 초상으로 남았다. 로렌스에 대한 이 이야기들은 그의 저서 <일곱 가지 지혜의 기둥>과 <사막의 반란>에 기초한 이야기들이다.

  "아랍인들은 영웅으로서의 로렌스는 전혀 모른다."

  영웅은 만들어진다. 로렌스 또한 그런 부류 중 하나이자 자신의 거짓말로 거짓된 역사를 완성한 인물이다. 로렌스에 대한 모든 이야기는 그의 입과 그의 저서로써 밝혀진 이야기들이지 다른 사람의 증언은 없다. 그에 대한 사진을 비롯해 몇몇 자료들이 있지만 그가 아랍반란의 선두를 지휘한 영국인 지도자라는 증거는 일절 없다. 결국 당시 아랍인들의 증언을 통해 사실을 알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아랍인들은 로렌스가 누군지 모른다고 한다. 이것은 도대체 어찌 된 사실인가?

  아랍반란의 주역은 로렌스가 아니다. 파이잘 왕자의 아버지인 후세인왕 휘하에 있던 아랍인청년들이었다. 
 
 (당시 영국은 아랍반란의 전면에 나선 적이 없었다. 외교사절단 몇명, 보급물자 몇몇, 전쟁경과를 보고해주는 종군기자 몇명. 이 정도가 아랍에 대한 영국의 모든 지원이었다. 영국은 1차대전 터키와의 싸움에서 위기를 피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아랍이 뒤를 치도록 만드는 것이 목적이었을 뿐 아랍의 독립을 생각하진 않았다. 파리강화회의에서 아랍의 독립을 철저히 무시한 것이나, 맥마흔 선언으로 아랍의 독립을 보장하고서도 밸포어 선언을 하여 이스라엘 건국의 기초를 세우게끔 빌미를 줘 아랍인들을 기만한것을 봐도 알 수 있다. 무식한 아랍인들은 처음에 그 사실을 믿었다.)

 
로렌스는 파이잘 왕자와 만나 그의 군대를 이끌고 선봉에 서서 전략을 지휘했을까? 이것 역시 거짓말이다. 파이잘군의 지휘관은 이라크인 장교들이었으며, 모든 군단은 아랍인들로 구성되어 있었다.그렇다면 최후의 다마스쿠스 해방은? 이것은 성 안에 있던 아랍인 지도자들과 후세인왕 지휘하 장교들의 내통으로 이룬 승리였다. 이런 자리에 로렌스는 낀 적도 없을 뿐더러 그가 활약할 무대는 없었다. 아랍반란의 모든 것은 아랍인들끼리 이룩해낸 것이었다.

 
로렌스의 이야기를 알게 된 아랍인들측에서는 이러한 로렌스 신화가 너무나도 의심스우며 있지도 않은 사실이라고 이야기 한 바가 있었다. 아랍반란은 많은 아랍인들의 피와 땀으로 이루어진 것. 그런데도 한 영국장교가 영국으로 귀환한 그 날부터 아랍반란의 모든 공로가 로렌스에게 돌아가 버릴 줄은 꿈에도 몰랐다고 말하였다.

  그렇다면 로렌스는 누구인가?

  로렌스는 영국의 고고학자이자 중동 문명에 관심이 깊던 사람이었다. 그는 1차대전에서 영국 외교사절단의 외교관을 맡았고, 아랍반란의 경과를 영국에 계속해서 제공하는 중재자이자 종군기자 수준이었던 인물이다. 전쟁에 나선 적은 전혀 없으며, 일부 아랍 장교들의 눈에 띈 적 조차 없었다.

 아랍인들은 그를 기억한다. 그는 후세인 왕에게 1921년 팔레스티나에 유태인들의 독립국가를 가지게끔 보장한 '밸포어선언'을 인정하라고 협박적인 외교를 한 인물이었다. 영국의 무력을 등에 엎고 후세인 왕을 협박한 더러운 영국인 외교관. 이것이 아랍인들이 기억하는 로렌스의 모든 것이다.

 슐레이만 무서라는 작가가 있다. 그는 <아랍이 본 아라비아의 로렌스>라는 저서를 출판한 적이 있다. 로렌스에 대한 허구를 알리고 진실을 외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이런 시도는 크게 성공하지 못했다. 데이비드 린의 영화 <아라비아의 로렌스>가 너무나도 확고하게 로렌스의 이미지를 완성하였으며, 서구인들이 기록한 역사를 세상은 무조건 믿었기 때문이다.

  <아라비아의 로렌스>는 명백한 역사왜곡이자 아랍인들에 대한 모독이자 기만이다. 지금 사전과 미디어, 모든 검색 매체에서 로렌스를 찾으면 그는 아랍반란의 영웅. 아라비아의 로렌스. 이런 모습으로 그려진다. 보여지는 것만이 진실은 아니다. 사실과 역사는 다르다. 하지만 <아라비아의 로렌스>는 너무나도 서구 우월주의적인 사고방식과 아랍의 미개함과 열등함을 노골적으로 표현한 예이다. 이것에 대해 우리는 어떤 딴지조차 걸어보지 않는다. 우리 역시 서구 우월주의 이데올로기에 우리도 모르게 쪄들어 버렸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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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중정원, 영원한 고대의 불가사의

세미라미스의 공중정원


 공중정원은 실제로 공중에 떠있는 것이 아니라 높이 솟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연속된 계단식 테라스로 된 노대에 풀과 꽃, 수목을 심었기 때문에 멀리서 보면 마치 삼림으로 뒤덮인 작은 산과 같다. 현대적 관점에서 보면 계단식 아파트의 발코니에 꽃과 커다란 나무들을 심은 것과 유사하다. 공중정원이 있었다는 바빌론은 고대 바빌로니아의 수도다. 바빌론은 수많은 정복자들에 의해 정복을 당했는데 그것은 이 지역을 차지하는 민족이 세계를 지배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곳을 지나간 유명한 왕들은 수없이 많으며, 그 중에서도 바빌론을 재건하고 공중정원을 직접 건설했다는 아시리아의 정복자 세미라미스가 매우 유명하다.

 놀랍게도 세미라미스는 남자가 아니라 여자다. 세미라미스에 대한 전설은 오래전부터 알려져 있었다. 학자들은 세미라미스를 기원전 8백23년에서 8백10년까지 바빌론을 통치했던 삼시 아다드 5세의 왕비인 ‘사무-라마’로 여긴다. 삼시 아다드 5세는 유명한 아슈르나시르팔왕(기원전 883-859)의 손자다. 세미라미스가 역사상 가장 유명한 왕 중 한명으로 거론되는 것은 바빌론을 재건축했기 때문이다. 당시까지는 님루드가 수도였는데 그녀는 수도를 바빌론으로 옮겼다. 수도를 옮기기 위해 재건한 바빌론은 고대의 바빌론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거대한 성곽을 가진 도시였다.

 고대에서 가장 넓은 성곽이라고 해도 폭이 8m에 지나지 않았으나 바빌론의 성곽은 무려 17.7m가 됐다는 것이 근래의 발굴에 의해 알려졌다. 외부 성곽은 11.3km이며, 내부 성곽은 6km다. 성곽 옆으로 흐르는 유프라테스강을 건널 수 있는 커다란 기둥으로 된 다리가 놓여졌는데, 기둥들의 간격은 3.6m, 다리의 폭은 9m였으며 4마리의 말이 끄는 전차가 다닐 수 있을 만큼 폭이 넓었다. 이 성채는 1백개의 문을 갖고 있었다. 성벽이 어찌나 거대하고 방문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는지 현재의 세계 7대 불가사의가 확정되기 전부터 세계의 불가사의에 단골로 들어간 기념물이었다. 사실 세계 7대 불가사의의 명명자라고도 볼 수 있는 필론도 자신이 선정한 세계 7대 불가사의에 파로스섬의 등대 대신 바빌론의 성벽을 선정했다. 바빌론은 세계 7대 불가사의에 거대한 성벽과 공중정원 등 두개가 포함됐다는 뜻이다.

설계자는 누구인가

 한편 공중정원은 기원전 5백년경 신바빌로니아의 네부카드네자르 2세가 왕비 아미타스를  수도인 바빌론에 건설한 정원이라고도 알려져 있다. 네부카드네자르 2세(성경에서는 느브갓셀 2세라고도 함)는 바빌론의 왕이 되자 메디아왕국 키약사레스왕의 딸 아미티스를 왕비로 맞았다. 산이 많아 과일과 꽃이 풍성한 메디아에서 자란 왕비는 평탄하고 비가 잘 오지 않는 바빌론에 마음을 두지 못한 채 항상 아름다운 고향의 푸른 언덕을 그리워했다. 이 모습을 보고 안타깝게 여긴 왕은 왕비를 위해 메디아에 있는 어떤 정원보다도 아름다운 정원을 바빌론에 만들라고 명령했다. 왕의 명령을 받은 건축가는 곧장 작업에 들어가 왕궁의 광장 중앙에 가로·세로 4백m, 폭 15m의 토대를 세우고 그 위에 계단식 건물을 세웠다. 한층이 만들어지면 그 위에 기름진 흙을 옮겨 놓고 넓은 발코니에 잘 다듬은 화단을 일궜다.

 그렇다면 이쯤에서 진짜 공중정원을 건설한 사람은 누구일지 궁금해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세계 7대 불가사의의 경우 공식적인 이름은 ‘세미라미스의 공중정원’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 공중정원을 건설한 장본인으로는 네부카드네자르 2세도 거론되기 때문이다. 결국 두사람 모두 공중정원을 건설했다고 보면 의문점이 해결된다. 사실 테라스에 나무나 풀을 심는 것은 메소포타미아의 강가에 사는 사람들에게 매우 보편적인 것이었다. 즉 도시 주위를 흐르는 강물을 이용해 식물을 재배하는 정원은 매우 오래전부터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대영박물관에 보관된 니니브의 소위 ‘나무로 꽉 채워진 장소 아래에서의 향연’으로 유명한 아수르바니팔왕과 왕비가 나무 그늘 아래에서 향연을 베푸는 그림으로도 알 수 있다.

 디디오르가 기록한 공중정원의 모습은 다음과 같다. “인공정원은 한변이 거의 1백20m의 사각형으로 마치 극장과 같이 계단으로 한단씩 올라가게 설계됐다. 테라스 또는 플랫폼에 재배되는 모든 식물의 무게는 높낮이가 있는 기둥으로 지지되도록 했다. 가장 높은 기둥은 약 25m로, 정원 최상부를 지지하며 벽체의 두께는 6.6m나 된다. 테라스는 돌출부분을 포함해 16×4피에(1 피에 = 0.3m)의 크기로 아스팔트로 많이 칠해진 벽돌(갈대를 포함)로 주의를 구분한 후 다시 구운 벽돌로 치장했다. 이곳에 얇은 납판을 붙여 물이 기초 부분으로 흘러 들어가지 않도록 했다. 테라스에서 거대한 나무들의 뿌리가 충분히 자랄 수 있도록 해 준 장치인 것이다. 테라스에는 각종 종류의 크고 작은 나무들이 심어져 있어 그 규모나 아름다움이 빼어나다. 기둥의 높낮이도 다르게 만들어 강도가 다른 빛이 들어오도록 유도함으로써 호화롭게 장식된 궁전의 내부 공간에 신비감을 주도록 했다. 단 하나의 기둥이 천장부터 기초까지 내려져 있는데, 이 안에 다량의 강물을 테라스까지 올릴 수 있도록 만드는 수력기계가 들어 있다. 그러나 이 기계는 밖에서 볼 수 없다.”

물을 공급하는 두가지 방법

 비가 거의 오지 않아 사막과 같은 기후를 갖고 있는 바빌론에서 약 4천3백64평이라는 큰 정원에 물을 대는 것은 여간 어려운 문제가 아니었다. 수력기계에 대해서는 두가지 설이 있다. 첫번째 방법은 정원의 맨 위에 커다란 물탱크를 만들어 유프라테스강의 물을 펌프로 길어 올렸다는 것. 체인에 물통을 연속적으로 매달아 상부로 물을 올린 다음 물탱크에 저장했다가 필요한 곳에 물을 흘려주거나 물뿌리개를 이용해 물을 공급했다는 매우 단순한 방법이다. 두번째 방법은 디오도르와 스트라본이 기록한 것으로 아르키메데스가 고안한 수력기계 방식이다. 아르키메데스의 수력기계란 물레방아를 타고 올라온 물을 아르키메데스의 나사에 연결해 꼭대기까지 퍼올리는 구조다. 특히 이 방식의 장점은 물레방아가 도는 힘으로 아르키메데스 나사가 돌면 물이 달팽이식 나선형 홈을 타고 올라간다는 것이다. 이 방식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비롯한 중세시대의 기술자들이 실현시키려고 했던 기술이기도 하며, 광산의 지하에서 물을 퍼올리거나 고층 건물에 물을 공급하기 위해 사용됐다.

 첫번째 방식의 경우 물을 상부로 올리는 체인이 밖에서 보일 수밖에 없다는 단점(일설에는 외부에서 보이지 않는 물레방아를 각 층마다 설치했다고 함)을 갖고 있다. 두번째 방식은 디디오르가 지붕에서 기초까지 내려져 있는 기둥으로 물이 올라갔다는 설명에 부합된다. 하지만 이 경우 각층에 수많은 아르키메데스의 나사, 즉 기둥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설명이 보이지 않는다. 결국 상층부까지 물을 길어 올리는 방법은 이 두가지 방식을 병용하거나, 방문자들이 잘 볼 수 없는 곳에서 사람들이 직접 물을 상부로 길어 올렸다고 가정할 수밖에 없다.

 비가 거의 오지 않아 사막과 같은 기후를 갖고 있는 바빌론에서 약 4천3백64평이라는 큰 정원에 물을 대는 것은 여간 어려운 문제가 아니었다. 수력기계에 대해서는 두가지 설이 있다. 첫번째 방법은 정원의 맨 위에 커다란 물탱크를 만들어 유프라테스강의 물을 펌프로 길어 올렸다는 것. 체인에 물통을 연속적으로 매달아 상부로 물을 올린 다음 물탱크에 저장했다가 필요한 곳에 물을 흘려주거나 물뿌리개를 이용해 물을 공급했다는 매우 단순한 방법이다. 두번째 방법은 디오도르와 스트라본이 기록한 것으로 아르키메데스가 고안한 수력기계 방식이다. 아르키메데스의 수력기계란 물레방아를 타고 올라온 물을 아르키메데스의 나사에 연결해 꼭대기까지 퍼올리는 구조다. 특히 이 방식의 장점은 물레방아가 도는 힘으로 아르키메데스 나사가 돌면 물이 달팽이식 나선형 홈을 타고 올라간다는 것이다. 이 방식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비롯한 중세시대의 기술자들이 실현시키려고 했던 기술이기도 하며, 광산의 지하에서 물을 퍼올리거나 고층 건물에 물을 공급하기 위해 사용됐다.

 첫번째 방식의 경우 물을 상부로 올리는 체인이 밖에서 보일 수밖에 없다는 단점(일설에는 외부에서 보이지 않는 물레방아를 각 층마다 설치했다고 함)을 갖고 있다. 두번째 방식은 디디오르가 지붕에서 기초까지 내려져 있는 기둥으로 물이 올라갔다는 설명에 부합된다. 하지만 이 경우 각층에 수많은 아르키메데스의 나사, 즉 기둥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설명이 보이지 않는다. 결국 상층부까지 물을 길어 올리는 방법은 이 두가지 방식을 병용하거나, 방문자들이 잘 볼 수 없는 곳에서 사람들이 직접 물을 상부로 길어 올렸다고 가정할 수밖에 없다.

공중정원의 발굴
 


 학자들은 아직 공중정원의 위치를 확정한 상태는 아니지만, 비교적 예전부터 공중정원의 위치로 알려진 아무란의 언덕으로 추정한다. 바빌론은 내외 이중성벽에 둘러싸여 있었는데 공중정원은 내성에 위치하며, ‘텔 아무란 이븐 알리’(Tel-Amuran-ibn-Ali, 추장의 언덕)라고도 불렸다.

 바빌론의 폐허는 오늘날까지도 그 모습이 남아 있는데, 이라크 정부는 특히 공중정원을 집중적으로 복원할 계획을 갖고 있다. 바빌론의 공중정원이 다른 불가사의보다 더 유명해진 것은 수많은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불러 일으켰던 바벨탑과 로맨틱한 분위기를 갖고 있는 공중정원의 신화가 혼합됐기 때문이다. 또한 공중정원은 다른 불가사의처럼 인간을 압도하는 것은 아니지만 사랑으로 이뤄진 건물이라는데 더욱 매력이 있다. 천하의 영웅 알렉산더가 자신이 죽을 장소로 바빌론을 지목한 것도 이해가 될 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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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 성전과 약탈의 역사
 지중해를 무대로 전개된 문명교류의 역사

- 십자군, 성전과 약탈의 역사를 읽고

서점을 찾았을 때, 이 책이 바로 눈에 들어왔다. 요즘 읽고 있는 책이 '아랍인의 눈으로 본 십자군 전쟁’인데다가 요즘 문화교류사에 관심이 많기 때문이었다.

이 책은 십자군 전쟁을 통해 지중해를 무대로 전개된 문명교류를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다.

저자는 십자군전쟁을 지중해 양편의 기독교 유럽과 이슬람교 중동이 본격적으로 대립하고 충돌한 사건임과 동시에 기독교와 이슬람 문화의 융합을 촉진한 사건으로 보고 있었다.

11세기 이후 서유럽 사회는 안으로 인구의 증가, 농업 생산의 증대, 도시의 부활 등으로 오랜 침체 끝에 수세의 입장에서 벗어나 적극적인 대외 진출을 꾀하였다. 엘베 강을 넘어 독일인이 슬라브 땅에 식민 운동을 시작하였고, 이베리아 반도에서는 이슬람교도에 대한 재정복 운동이 전개되었다. 무엇보다도 교황권의 신장, 이탈리아 상인과 봉건 제후들의 세속적 욕망, 성지 탈환등 여러 요인이 복합되어 일어난 십자군 전쟁이 유럽 세력 팽창의 대표적 사건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십자군 전쟁처럼 성스러운 이름에 가장 세속적인 욕망이 결합된 전쟁은 없으며, 신의 이름을 빌어 약탈과 살인․만행이 판을 친 전쟁이 없을 것이다. 전쟁의 발단은 예루살렘이었다. 예루살렘은 유대인․기독교인․이슬람 인 공통의 성지였다. 유대인에게는 다윗의 우물이 있는 어머니 도시요, 기독교도에겐 예수가 죽어 부활한 곳, 이슬람교도에겐 마호메트가 머무른 곳이기 때문이다. 당시 예루살렘을 지배하고 있던 이슬람 인들은 기독교인의 성지 순례를 방해하지 않았다. 그런데 셀주크 투르크 족이 이 지역을 장악하면서부터 기독교인의 성지 순례는 금지되었다. 셀주크 투르크 족은 중앙 아시아에서 일어난 민족으로서 열렬한 이슬람교도가 되어 세력을 팽창시키고 있었다. 위협을 느낀 동로마 제국 황제 알렉시우스 1세는 교황 우르반 2세에게 원조를 요청했다. 우르반 2세는 이것이 비잔틴 교회를 로마 교회에 복속시킬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1095년 11월 우르반 2세는 클레르몽에서 회의를 개최, 성지탈환을 위한 십자군 파병을 제창했다. 웅변술 이 뛰어났던 그는 성지 예루살렘을 잃은 기독교도들의 비참한 생활과 투르크 족의 위협을 설명하고, 이슬람의 승리는 기독교 세계의 불명예라고 열변을 토했다. 이 전쟁은 성전이며, 전사자는 모두 천국에 가서 그 보상을 받을 거라고 역설했다. 그뿐 아니라, 동방엔 금은 보화가 깔려 있고 아리따운 이슬람 여인들이 기다리고 있다고 하며 제후들의 욕심을 부채질했다.

1095년 삐아첸자(piacenza)와 끌레르몽(Clermont) 교회 회의에서 교황 우르바노 2세는 동로마제국의 알레시오 황제가 파견한 자들로부터 동로마제국의 위급한 상황을 전해듣고 그리스도의 무덤을 되찾고 동방의 그리스도인들을 구출하기 위해 원정군을 보내자고 호소하여 제1차 십자군 원정(1096~1099년)이 시작되었다.

그리스도께서 사시고 돌아가시어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준 이스라엘 성지순례에 대한 열망, 동방과의 무역을 원하는 이탈리아 상인들의 상업적인 야심등의 요인 복합적으로 결합되어 십자군이 결성되었다. 특히 십자군에 참가하여 대사를 받고 전사할 경우 순교자가 된다는 것도 열성적인 신자들을 원정군에 쉽게 참가하게 하였다. 그러나 제대로 준비되지 않은 제1차 원정에서는 비조직적이고 계몽되지 않은 농부들도 많이 참가하여 교회 역사에 커다란 오점을 남기는 일들이 일어났다.

그들이 라인 지방을 지날 때, 흥분한 나머지 유태인들에 대한 박해로 유혈 참사가 일어났는데 발칸 지역을 지날 때에도 지휘자의 통솔을 제대로 받지 않은 이들은 지방 주미들에게도 방화와 학살로 참극을 일으켰다. 전투경험이 전혀 없는 많은 원정군들이 예루살렘에 도달하기도 전에 셀주크족의 공격을 받아 전멸하였다. 그러나 나머지 원정군들이 악전고투 끝에 1098년 안티오키아를 함락하고 1099년 7월 예루살렘을 정복하였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도 부녀자와 유아와 노인들까지 무차별적으로 참살하는 비 그리스도교적인 만행을 저질렀다. 서유럽에서 이곳까지 도달하는 전투에서 이슬람군들의 매복병들의 습격을 받아 매일 매일 수많은 동료들이 전사하는 가운데 겨우 살아 남은 이들의 보복심리와 이슬람 군들의 항전의 악순환이 서로를 살육의 참상으로 몰고 갔다.

이런 악순환의 결과는 생사의 기로에서 양측 모두 이성적인 자제력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서 자신들의 신앙의 가르침과는 전혀 무관하게 생존의 본능만이 절대 기준이었다고 볼 수 있다.

제2차 원정은 이슬람 세력의 반격으로 에뎃사가 함락(1144년)되면서 시작되었는데(1147~1149), 끌레르보의 베르나르도 성인의 설교로 추진되었지만 터키인들과의 여러 번의 전투에서 전멸되어 결국 예루살렘에까지 이르지 못하고 실패하였다.

제3차 원정(1188~1192)은 붉은 수염의 프리드리히(Friedrich)황제가 인솔한 잘 조직된 십자군들이 이코니움에서 터키인들과 싸워 혁혁한 승리를 거두었지만, 황제가 1190년 살레프에서 익사함으로써 지휘자를 잃은 군대는 더 이상 진군할 수 없었다.

영국의 왕 리차드(Richard) 1세, 프랑스의 필립(Philipp) 2세등이 참가하여 예루살렘 재탈환에는 실패하였지만 십자군들이 성지의 새로운 지역을 정복하고 살라딘 술탄과 화해하여 그리스도교인들에게 평화로운 예루살렘 순례의 자유가 보장되었다.

제4차 원정(1202~1204)은 교황 인노첸시오 3세 교황의 호소로 시작되어 서방 그리스도교 세계의 모두가 마지막으로 이 원정에 참가하였다. 그러나 십자군들은 완전히 교황의 의사를 거스르고, 이기적이고 상업저인 이해관계에서 베네치아의 상인들에 의해 콘스탄티노플을 함라가하고(1204. 4.13)라틴 제국이 그곳에 설립되는 엉뚱한 결과를 낳게 하였다. 이 과정에서 이 되시는 심하게 약탈되고 황폐하였으며, 이러한 난폭하고 비이성적인 행동은 동서교회의 분열을 더욱 심화시키고 이슬람 세력에 대한 동방세계의 방위력이 결정적으로 약화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제 5차 원정(1217~1221년)은 1215년 제4차 라테란 공의회에서 십자군 원정이 결정되어 1217년에 실행되었다. 프리드리히 2세가 십자군 파견을 약속했으나 이행하지 않아 파문을 받았다. 원정군은 동유럽의 신흥 그리스도 국가의 약소한 군사력으로 편성되어 이집트를 공격하여 다미에타를 공격하는 적은 성과를 거두었을 뿐이었다.

아씨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은 성지 재탈환을 복음 정신에 따라 평화로운 포교로 해야 한다는 본래의 정신에 따라 무방비 상태로 성지에 가서 술탄을 설득시키려 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포로가 되었다. 그러나 술탄이 성인을 너그럽게 대우하여 풀려났고, 이것을 계기로 프란치스코회의 평화로운 선교활동이 성지에서 시작되었다.

제 6차 원정(1228~1229년)은 교회 당국과는 무관하게 파문 중에 있는 프리드리히 2세 황제의 개인적인 원정이었다. 그는 이집트 술탄과의 담판을 통해 예루살렘을 그리스도인들에게 반환시키는데 성공하였지만, 그후 1224년 결정적으로 다시 잃게 되었다.

제 7차 원정(1248~1254년) 및 8차 원정(1270년)이 모두 실패함으로써 실제적인 원정은 모두 끝났다. 프랑스의 성왕 루이 9세는 우선 이집트를 정복한 후에 성지를 점령하려 하였으나 1205년4월 카이로에서 완패 당해 후퇴했는데 그의 군대에 전염병이 돌아 전의를 상실하고 포로가 되었고 그의 부하를 위해서는 거액의 몸값을 지불하고 그 자신은 이슬람에게 다미에타(Danietta)를 넘겨주는 조건으로 풀려났다.

서방에서는 차츰 십자군 원정에 반대하는 여론이 조성되고 비폭력적인 설교를 통해 이 지역에 복음을 전파하려는 운동이 일어났으며 유럽 자체 내에서는 이교도 문제, 즉 스페인의 무어인, 이교 슬라브인, 프랑스 남부의 알비파 이단등 더 현실적인 문제들이 다가왔다. 이로 인해 십자군 원정은 사실상 실패로 끝났다.

사실 십자군 전쟁은 모든면에서 성공할 수 없는 전쟁이었다. 십자군전사들이 훈련을 제대로 받지 못한 데다 무장마저 허술 했던 것, 당시의 교통통신 수단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먼 지역으로 원정한 것, 국왕과 대영주들이 참전해 지휘부가 대립한 것, 중동 이슬람에 대한 정보가 부족한데다 심자군 원정의 기본 이념마저 변질된 것 등을 실패의 중요한 원인이라 하겠다.

십자군운동은 우선 유럽에서 교황권의 후퇴, 국왕 권력의 강화와 중앙집권화, 도시와 상업의 발달, 이슬람문화와의 접촉에 의한 문화의 발달 등 모든 일과 관계가 있다. 즉 교황에 의해 제창된 운동의 실패는 그대로 교황의 권위를 약화시켰다. 전사(戰死)에 의해 단절된 귀족 가의 소유영지는 왕령(王領)에 편입되어 왕권의 기반을 강화하였다.

십자군운동으로 최대의 경제적 이익을 본 것은 북이탈리아의 여러 도시였다. 십자군에 참가한 유럽인들은 미지의 이질적인 세계를 발견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영향을 과대하게 평가할 수는 없다. 왕권의 강화는 봉건사회 내부 전개에 기본적 요인을 가지고 있었다. 봉건적인 분열상태에 있을 때에만 유럽세계를 관념적으로 통합할 수 있었던 교황권은 왕권에 의한 중앙집권화와 더불어 쇠퇴할 수밖에 없었다.

도시와 상업의 발달은 십자군운동의 전제조건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대규모의 군대를 먼 곳까지 보낼 수도 없었고 다량의 식량과 무기를 모으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또한 동방문화 유입의 중심지는 시칠리아와 에스파냐였다. 유럽인은 이교문화(異敎文化)에 접하면서도 최후까지 관용의 정신을 배우는 일이 없었다.

또한 제4회 십자군에 의해 와해된 비잔틴제국은 다시 부활하지만 이미 소국에 지나지 않았으며 몰락은 결정적이었다. 그 때문에 비잔틴제국은 이제까지 수행해오던 유럽의 방벽 역할을 잃게 되었다. 이슬람세계에 대한 영향도 컸다. 이슬람교도는 관용의 정신이 풍부했다. 그러나 십자군의 공격을 받게 되자 그들 사이에 점차 비관용성과 민족의식이 고취되었으며, 성전(聖戰)에 대한 정열은 높아갔다.

이 책을 읽으면서 지중해를 배경으로 비록 무력을 동원한 충돌이었지만 두 문명이 교류하는 과정을 볼 수 있었다. 그렇지만 이 책 또한 그동안 읽었던 많은 십자군 전쟁에 관한 책들과 마차가지로 지나치게 유럽의 관점에서 쓰여졌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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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정복기의 군대


예언자 무함마드의 시대

1. 무슬림 지휘관-7세기 중반 : 부유하고 잘 무장된 이 지휘관은 쇠사슬 코이프와 어깨 드림 위에 비잔티움에서 유래된 형태의 조립식 투구를 쓰고 있다. 매우 긴 쇠사슬 호버크는 일반적인 형태인듯 하나, 강화된 가죽 러멜러 흉갑은 그렇지 않다. 칼은 아마도 사산조나 인도의 양식일것이며 가죽 방패와 신은 근처의 누비아에서 보이는 형태에서 유래되었다.

 2. 무슬림 궁수-7세기 초중반 : 이 가난한 병사는 그의 칼을 넝마로 감쌌고 가죽 끈을 감아 머리를 보호했다. 그의 활은 Grewia tenax라는 나무에서 베어낸 간단하 형태의 활이며, 짧은 화살은 돌화살촉을 쓰고 있다. 튼튼한 나알-샌들-을 신고 카미스-긴 소매를 가진 튜닉-을 입고, 전통적인 아라비아의 의상인 이자르-어깨와 몸통에 두르는 천-을 입고 있다.

3. 베두윈 족장-7세기 초 : 7세기의 아라비아 반도의 정주민과 베두윈들 사이에서는 의복의 차이점을 찾을수없지만, 남부와 북부에서는 옷차림이 다르다는것이 드러난다. 그의 올린 머리 형태는 이슬람 이전 아라비아의 미술품에서 보인다. 쇠사슬 디르(갑옷) 위에 앞이 뚫려있는 주바(jubba)를 입고 있으며 갑옷 아래는 이자르를 입고 있다. 낙타의 안장은 수백년간 아라비아에서 쓰여오던 것이며 가죽으로 된 등자가 있다.


무슬림의 대정복

1. 안사 전사-7세기 중반 : 안사-예언자의 돕는 사람들-들은 '인도된 칼리프'들의 정예병력이 되었으며 그들의 장비와 무기등은 여러곳에서 자세히 묘사되었다. 이 병사는 하얀 펠트 모자-칼란수와-를 그의 투구 위에 쓰고 있다. 노란색 터번은 그가 안사임을 나타낸다. 실로 짜여진 가는 벨트와 수대-어깨부터 허리까지 칼을 차기 위해 만들어진 띠-는 가죽 벨트나 수대보다 더 많이 사용되었을뿐만 아니라 이 시대의 특징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의 장비는 긴 대나무 창과 전통적인 형태와 비슷한 짧은 칼, 그리고 약간 대칭이 맞지 않는 아랍 스타일의 활, 기름을 바른 가죽 방패이다. 어깨의 호버크 아래에는 속을 천 등으로 층층이 튼튼하게 채웠다.

2. 페르시아 아사와리아 기병-7세기 중반 : 옛 사산조 기병의 함라-붉은 얼굴의 사람들-의 일원이었던 이 병사는 사산조 최후의 시기의 무장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넓은 철띠로 강화된 투구와 셔츠모양의 튜닉 아래 입은 짧은 사슬 호버크, 다리를 보호하는 란-장식된 각반-이 그의 무장이다. 활을 쏘는 오른손은 가죽끈으로 보호하고 있다. 아바르 양식의 긴 칼과 단검, 활은 두개의 나눠진 벨트에 고정되어있으며, 마갑은 북부 스텝의 영향을 보여준다. 안장에는 목제 등자가 달려있다.

3. 베르베르 보조병 : 무장이 매우 빈약한 이 베르베르 보조병은 조악한 직조 하이크와 코르크로 바닥을 댄 샌들을 착용하고 있다. 베르베르족이 지난 세기동안 그랬듯이 전투를 위해서 머리를 밀었고 창과 간단한 투석끈, 돌이 든 가방, 그리고 가죽 방패를 들고 있다.

우마이야조의 보병

1. 우마이야조 근위병-8세기 초 : 이 정예병이 쓰고 있는 철과 청동이 섞인 투구는 중앙아시아에서 유래됬음에도 이란과 이라크에서 대규모로 제조되었다. 그의 디르 호버크 밑에 있는 두라아-앞이 뚫린 튜닉-은 아랍에서 습관적으로 착용된것 같다. 수대에 달려있는 미끄럼 방지가 된 세겹짜리 칼집세트는 매우 특별한 형태인데 이러한 형태는 사마르칸트와 판지켄트(pianjikent)의 낙타를 탄 아랍 침략자들의 그림에서 볼 수 있다.

2. 우마이야조 보병-8세기 초 : 이 보병 궁수는 투구 위에 모자를 쓰고 있다. 이 병사의 무장은 일반적인 우마이야조 보병의 무장을 보여준다. 그의 유일한 다른 방어구는 쇠사슬 디르이다. 천으로 된 카바와 솜으로 된 카미스(겉옷과 갑옷 안의 흰 옷을 말하는것 같은데, 어느게 카바이고 어느게 카미스인지 모르겠음) 아래에는 군사들이 입었던 바지 시르왈이 있다. 어깨에 걸치고 있는 숄은 타얄산이라고 부른다.

3. 무슬림 여성-8세기 초 : 일반적인 견해에도 불구하고, 여성들은 초기 무슬림 시기동안 매우 활동적으로 일을 했었다. 그리고 때에 따라서는 집을 지키기 위해 무기를 들기도 했다. 이 여성은 아마도 부유한 계층의 출신일 것이다. 고급 터번은 머리카락만을 가리고 있는데 이러한 것이 현재의 극단론자들이 주장하는 모든 얼굴을 가리는것 보다 예언자의 본래 가르침에 더 가깝다.

우마이야조의 기병 
 
1. 발흐 총독-8세기 : 여기 이 총독은 갑옷 대신 고위 관료의 옷을 입고 있지만, 지방 총독들은 중무장을 했다. 시위를 매지 않은 채 활집에 들어있는 거대한 아랍활은 도보로만 사용할 수 있다. 몇몇 우마이야의 상류층 인사들은 보석류나 마스카라-코흘-를 이용하기도 했다. 이 자는 말 위에 비스듬히 걸터앉아 있는데, 이러한 형태는 파지켄트의 벽화에서 보인다. 초기 형태의 칼란수와-모자-와 타야라산-목에 두른 흰 띠-를 쓰고 있으며 큰 장갑을 끼고 있다.

2. 우마이야조 정예 기병-7세기 후반 : 이란 출신의 병사들의 무장에서는 이란 갑옷의 영향을 받은점이 보인다. 이 병사는 미그흐파르-쇠사슬 드림-를 입고 있는데, 이 갑옷은 그의 옷 아래에 있다. 청동 러멜러 흉갑은 탄누르 또는 '자궁'이라고 알려졌다. 손에는 이란 양식의 건틀렛을 끼고 있으며 발은 사크 알 자르드라고 불리는 쇠사슬 각반으로 보호하고 있다. 방패는 나무로 된 채색방패이다.

3. 이집트의 우마이야 왕조의 경기병-8세기 중반 : 기후는 우마이야 칼리프조의 아랍 지방에서 중장갑이 드문 이유에 대한 답이 될것이다. 이 병사는 남부 누비아에서 온 악어가죽 투구-초기 중세시대에 쓰인 철제 러멜러 목 보호대가 곁들여 있다-를 쓰고 있다. 화려하게 장식된 카미스 셔츠와 시르왈 바지위에 찬 두개의 벨트가 있는데, 첫번째 벨트는 실로 두껍게 짠 아랍의 양식이고, 가죽과 장식이 달린 가죽 벨트는 새로 나타난 투르크-이란의 양식이다. 낡은 가죽이 덧대여져 있는 안장에는 목재 등자는 달려있지 않다.


 압바스 혁명 
 
1. 후라사니 아랍 정예병-8세기 중반 : 이 정예병은 그의 터번과 모자 아래 둥그런 낮은 투구를 쓰고 있다. 또한 그는 일반적인 형태의 갑옷인 디르에다 얇은 판을 겹쳐 만든 완갑(팔에 차는 방호구)을 쓰고 있다. '명예의 겉옷' 위에 금으로 된 타와-목걸이-를 쓰고 있는데, 이 목걸이는 전투에서 장교들을 구분하기 위해 주어졌다. 말에서 내린 채로 싸우기 때문에 칼은 등에 차고 있다.

2. 후라사니 아랍 기병-8세기 후반 : 이 병사는 바야다 투구와 미그흐파르를 입고, 투구 위에는 가죽 안감을 댄 모자-아마도 이 모자는 칼란수와 샤하시야일것이다-를 쓰고 있다. 전통적인 이란 양식의 카바 코트 아래에는 쇠사슬 호버크를 입고 있다. 이란의 샬와 바지 위에 정강이 갑옷인 란을 가죽끈으로 고정했으며 칸자르라는 단검, 도끼(타바르진), 투르크-이란의 합성궁으로 무장했다. 이 시기에 무슬림 궁수들은 손가락과 엄지 모두를 이용해서 활을 당겼다.

3. 페르가나 기병-8세기 중반 : 민족적인 기원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이 기병은 투르크식의 높은 투구를 쓰고 있다. 앞부분에 솜털을 포갠 겉옷 밑에 쇠사슬 호버크와 얇은 판을 겹쳐 만든 정강이 갑주와 완갑을 착용하고 있다. 겉옷의 아래쪽 부분에 있는 가죽 러멜러 흉갑은 따로 입을때도 있었다. 말에는 코에 큰 금속 재갈끈을 매어놨고 안장의 뒷부분에는 분해된 천막이나 접은 깃발을 매어두는 막대가 매달려 있다.

 


압바스조-변경의 전사들 
 
1. 아나톨리아 국경 전사-9세기 초 : 많은 사료들이 동부 아나톨리아의 비잔티움 병사와 무슬림 병사사이의 장비의 유사성이 있음을 말해준다. 이 병사는 오직 터번을 통해서만 그가 무슬림이란걸 알아볼수 있으며 각 부분을 대갈못으로 고정한 철제 투구를 쓰고 있다. 실로 짠 두꺼운 검은 겉옷-두라아-아래에 보편적인 갑옷인 디르와 가벼운 가죽 부츠-쿠프-를 착용하고 있다. 그의 쭉 뻗은 양날검은 노획된 비잔티움의 무기에서 나타난다.

2. 압바스조 보병-9세기 초 : 여기 이 병사는 종려나무 잎의 줄기로 만든 투구와 가죽으로 감싼 갈대방패를 들고 있다. 이 방패는 중동에 몇세기전부터 알려져 온것인데, 다만 다른 것은 자신의 방패에 역청칠을 했다는 것이다.

3. 페르시아 기병-9세기 초 : 9세기 중반에 이르러서 많은 이란인 기병들은 이전보다 더 가볍게 무장한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경향은 보병이 덜 중시되고 기마 궁술을 더 중요히 여기는 상황을 반영한다. 이 기병은 새로운 형태의 칼란수와를 쓰고 있다. 짧은 쇠사슬 호버크는 철제 러멜러 흉갑아래 입었는데, 이러한 갑옷들은 전신부의 가슴만을 보호하기 위한 목적으로 입었다. 그는 또한 당시 이란에서 많이 쓰이던 굽은 세이버를 들고 있다. 말의 머리는 천을 덧댄 철제 마갑으로 보호하고 있고, 몸통과 목은 티즈파프라고 불리는 펠트를 층층히 쌓아 만든 마갑을 쓰고 있다.

 압바스조-궁중 
 
1. 굴람 근위기병-9세기 중반 : 노예 출신의 이들 굴람들은 처음 몇년간은 통치자의 가장 신뢰할만한 근위병들이었다. 이 굴람은 장식된 비단 두라아와 헐렁한 비단 바지를 입고 있다. 긴 머리는 아마도 그가 투르크족 출신이란것을 보여주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다른 부족 출신들도 긴 머리를 했다. 활은 명백히 중앙아시아에서 발명된것이나 화살통과 활집은 투르크 양식의 영향을 보여준다. 뺨가리개가 달려있는 투구는 많은 그림에서 보인다.

2. 아브나 보병-9세기 초 : 이 아브나 보병의 장비와 복장을 통해 그의 부대가 아랍군과 후라사니들의 혼합이라는것을 알수 있다. 터번 아래에는 양질의 이란 철과 청동으로 만든 투구를 쓰고 있으며 그가 들고 있는 압바스조의 검은 깃발에는 쿠란의 구절이 쓰여있다.

3. 칼리프 무타와킬(847~861) : 칼리프는 터번 천 아래 걷어올린 가죽 목덮개가 달려있는 칼린수와 타윌라를 쓰고 있다. 어깨에는 붉은 비단으로 만들어진 미트라프를 두르고 있고 검은 가죽으로 만든 주바흐 아래 붉은 두라아를 입고 있다. 궁전 안에서 압바스조의 칼리프들은 카딥이라는 지팡이를 가지고 다녔으나 궁전 외부에서는 여기 보이는 간단한 형태의 외날 세이버를 가지고 다녔다. 다양한 형태의 검은 웃옷과 화려하게 장식된 허리띠, 그리고 이러한 지팡이나 칼은 압바스조의 표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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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 최초! 성에 대한 설문조사!

중동최초 성에 대한 설문조사의 결과

 중동에서 사상최초로 행해진 설문조사의 결과입니다. 세계적인 콘돔회사 듀렉스(Durex)가 행한 이번 설문조사에는 아랍권 10여개국에서 3189명이 참여했습니다. 이 중에는 642명의 여성이 참여해 전체 응답자의 18%를 차지해 아랍권 여성들도 점차 성생활에 깊은 관심을 표명하고 있음이 밝혀졌습니다.
                   

                         (아랍인들이 가장 섹시하다고 생각하는 연예인 1위, 레바논의 가수 엘리사)

다음은 주요 설문조사 결과입니다.

 1. 주요 피임방법은?

콘돔: 44.9%
피임약: 10.9%
질외사정: 10.7%
사용하지 않는다: 11.5%
참는다: 6.9%

 (역시 콘돔이 가장 응답률이 높았습니다. 참는다는 대답도 6.9%나 나왔네요ㅋㅋ)

 2. 얼마나 자주 섹스를 하는가?

하루에 한번 이상: 12.8%
일주에 5-6번: 9.2%
일주에 3-4번: 14.6%
일주에 두번: 15.1%
일주에 한번: 11.5%
이주에 한 번: 5.8%
한달에 한번: 3.3%
2-3개월에 한번: 3.4%
6개월에 한번:  1.6%
거의 하지 않는다:  7.3%
한번도 해본적 없다: 15.0%

(마지막 응답을 보면 역시 성에 대해 비교적 폐쇄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3. 몇살때 공개적인 성교육을 받았는가?

 10살 미만 5.9%
11-13세 18.8%
14-16세 26.0%
 16세 이14.2%
 전혀 받은 적이 없다 27.1%

4. 성교육은 누가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부모: 36.4%
학교 41.6%
 의사/간호원 4.5%
 정부 3.9%
 잡지/서적/인터넷 4.7
 기타 5.0

 5. 처음 만나거나 잘 모르는 사람과 섹스를 해본 경험이 있나?

 있다 39.9% 
 없다 60.1%

6. 섹스 상대를 잘 모를 경우 우려되는 것은?

에이즈 53.1%
걱정되는 것 없다 21.0%
매독, 임질 등 성병 14.2%
임신 11.7%

7. 상대방을 가장 섹시하게 보이게 하는 부분은?

가슴 18.7%
피부 색 15.7%
얼굴 12.3%
눈 11.7%
히프 8.9%
유머 8.7%
지성미 7.8%
미소 7.0%
다리 4.4%
나이 2.0%
돈 1.6%
키 1.1%
머리 색 0.2%

(우리나라나 서양과 달리 각선미를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 안한다는 것이 특징입니다. 중동의 경우 풍만한 여성을 아름답다고 여긴다고 알고 있습니다.)

 8. 가장 섹시하다고 생각하는 연예인은?(Top 5만 적습니다)

 안젤리나 졸리 11.1%
 엘리사 (레바논 여가수) 8.7%
 캐서린 제타 존스 7.6%
 제니퍼 로페즈 6.4% 
 낸시 아그람 (레바논 여가수) 6.1%

 9. 중동에서 가장 낭만적인 도시는?(Top 4만 적습니다)

 레바논 베이루트 36.2%
 아랍에미리트 두바이 14.1%
 모로코 카사블랑카 12.8%
 이집트 카이로 10.8%

10. 가장 섹시한 머리 색깔은?

 검은색 36.3%
 갈색 26.6%
 금발 21.7%
 빨간색 10.0%

 11.원하지 않은 임신을 한 경험은?

  있다 21.2%
  없다 78.8%

(자료참조:서정민 기자님의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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