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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는 우리땅" 22개국어로 홍보하자!
 일본 외무성이 독도가 일본 영토라는 주장을 선전하기 위해 인터넷 홈페이지에 자료를 기존의 일본어, 한국어, 영어판에서 최근 아랍어, 중국어, 독일어, 포르투갈어, 러시아어, 스페인어 프랑스어 이렇게 10개 주요 언어로 확대해 적극으로 홍보하고 있어 또 한번 국민들의 분노를 자아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분노의 방향은 비단 일본뿐만이 아닙니다. 반크 등 민간에서 발벗고 나서는 동안 대체 우리나라 정부에서는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리나라도 10개국어 15개국어 20개국어로 홍보 가능합니다. 우리나라 정부에서 돕질 않아서 그렇죠. 

 우리라도 홍보합시다.

"독도는 대한민국 땅"

"Dokdo, το γήπεδο της Δημοκρατίας της Κορέας"

"Dokdo, het land van de Republiek Korea"

"Dokdo, das Land der Republik Korea"

"Dokdo, земля в Республике Корея"

"Dokdo, delstaten Sydkorea"

"Dokdo, la tierra de la República de Corea"

"دوكدو ، والأرض من جمهورية كوريا"

"DOKDO, KORE'nin toplağı"

"Dokdo, la terra della Repubblica di Corea"

"Dokdo, земля в Республіці Корея"

"獨島,大韓民國的土地"

"Dokdo, as terras da República da Coreia"

"Dokdo, ziemi Republiki Korei"

"Dokdo, le Land de la République de Corée"

"Dokdo, maa Korean tasavalta"

"Đảo Đok là lãnh thổ của Hàn Quốc"(베트남어)

"Դոկդոն Կորեային է պատկանւմ."(Armenian)

"დოკდო არის კორეის რესპუბლიკის ერიტორია."(Georgi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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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잔틴 제국, 천년의 역사와 만나다


로마 제국은 쇠퇴하여 395년에는 동로마와 서로마로 분리되어버립니다. 그 후 서로마 제국은 게르만 족의 대이동에 의해 멸망하지만, 동로마 제국은 천년동안 명맥을 이어 나갑니다. 이 반쪽짜리 로마제국은 앞의 로마 제국과 구분하기 위해 비잔틴이라는 새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답니다. 

비잔틴 제국의 발전과 쇠퇴

십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산천이 수백 번도 넘게 변할 만큼의 긴 시간을 유지한 나라라면 뭔가 특별한 것이 있었겠죠? 우선 비잔틴 제국은 아시아와 유럽을 갈라놓는 보스포루스 해협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동서 무역의 중심지로 자리잡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비잔틴 제국이 정치적으로 쇠퇴한 이후에도 여젆시 콘스탄티노플은 경제의 중심지 자리를지킬 수 있었죠. 또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은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데다 로마 시대부터 건설된 성벽이 버티고 있었기 때문에 이민족들이 쉽게 침범할 수 없었어요. 게다가 비잔틴의 황제는 황제 교황주의를 바탕으로 정치의 지도자 뿐아니라 교회의 수장까지 겸하고 있었으므로 막강한 힘을 행사할 수 있었답니다.




이러한 여건을 바탕으로 비잔틴 제국은 6세기 중엽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때 전성기를 누립니다. 527년에 황제의 자리에 오른 유스티니아누스는 백 년전에 멸망한 로마제국의 영광을 재현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로마의 재건을 위해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제일 먼저 착수한 일은 비잔틴 제국 내부를 안정시키는 것이었어요. 그는 국내의 안정을 위해서는 사람들에게 해야 할 일과 해서는 안되는 일을 명확히 알려주는 법체계를 다지는 일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유스티니아누스 대제는 법전 편찬에 가장 먼저 매달리지요. 이 때 만들어진 로마법 대전은 기존의 로마법을 집대성하여 만든 것으로 그 뒤 유럽 각국의 법에 큰 영향을 주게 됩니다. 또한 유스티나아누스 대제는 양잠법을 몰래 페르시아에서 들여와 견직 공업이 발달하는데 빛나는 공을 세우기도 해요.

나라가 어느 정도 안정된 후에, 유스티니아누스 대제는 해외로 눈을 돌립니다. 유스티니아누스 대제의 정복 사업으로 비잔틴 제국은 지중해 연안, 소아시아, 아프리카의 옛 로마영역을 차지했고, 로마 제국의 고향이라고 할 수 있는 이탈리아 반도도 반쯤 되찾아서 로마제국의 영광을 재현하는 듯 보였습니다.



하지만 유스티니아누스 대제 사후, 비잔틴 제국은 롬바르드 족의 침입을 시작으로 북쪽의 슬라브 족, 동쪽의 사산 왕조 페르시아의 침공에 시달립니다. 따라서 후대 황제들은 영토를 지키기 위해 모든 영토를 31개의 군관구로 나누고 황제가 직접 임명한 사령관에게 군사관, 행정권, 사법권을 주는 군관구제와 농민에게 군역에 종사하는 대가로 토지를 주는 둔전병제를 시행합니다. 그러나 7세기에 강성해진 이슬람 제국의 침입으로 비잔틴 제국은 대부분의 영토를 빼앗기고 수도 콘스탄티노플이 있는 발칸 반도와 소아시아의 남부로 영토가 축소됩니다. 이후 9세기에 비잔틴 제국은 이슬람 제국이 분열된 틈을 타 영토를 회복하고 다시 번성하는 듯 했지만, 군관구를 장악한 지방 세력가들이 황제의 명령을 무시하고 농민의 토지를 빼앗아 차지하는 바람에 강력했던 황제권을 잃어버리면서 다시 쇠퇴의 길로 접어들게 됩니다. 겨우 명맥만 이어가던 비잔틴 제국은 베네치아 상인의 사주를 받은 제4차 십자군 원정군의 침입으로 더욱 약해져, 결국 1453년에 오스만 투르크 군에게 정복당하고 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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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비류
    와~ 비잔틴 제국의 역사를 한페이지로 알 수 있는 포스팅이네요ㅋ
    제가 비잔틴 제국과 이스탄불에 대해서 관심이 많은데 관련 문화나 관련글 있으면
    또 올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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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정복기의 군대


예언자 무함마드의 시대

1. 무슬림 지휘관-7세기 중반 : 부유하고 잘 무장된 이 지휘관은 쇠사슬 코이프와 어깨 드림 위에 비잔티움에서 유래된 형태의 조립식 투구를 쓰고 있다. 매우 긴 쇠사슬 호버크는 일반적인 형태인듯 하나, 강화된 가죽 러멜러 흉갑은 그렇지 않다. 칼은 아마도 사산조나 인도의 양식일것이며 가죽 방패와 신은 근처의 누비아에서 보이는 형태에서 유래되었다.

 2. 무슬림 궁수-7세기 초중반 : 이 가난한 병사는 그의 칼을 넝마로 감쌌고 가죽 끈을 감아 머리를 보호했다. 그의 활은 Grewia tenax라는 나무에서 베어낸 간단하 형태의 활이며, 짧은 화살은 돌화살촉을 쓰고 있다. 튼튼한 나알-샌들-을 신고 카미스-긴 소매를 가진 튜닉-을 입고, 전통적인 아라비아의 의상인 이자르-어깨와 몸통에 두르는 천-을 입고 있다.

3. 베두윈 족장-7세기 초 : 7세기의 아라비아 반도의 정주민과 베두윈들 사이에서는 의복의 차이점을 찾을수없지만, 남부와 북부에서는 옷차림이 다르다는것이 드러난다. 그의 올린 머리 형태는 이슬람 이전 아라비아의 미술품에서 보인다. 쇠사슬 디르(갑옷) 위에 앞이 뚫려있는 주바(jubba)를 입고 있으며 갑옷 아래는 이자르를 입고 있다. 낙타의 안장은 수백년간 아라비아에서 쓰여오던 것이며 가죽으로 된 등자가 있다.


무슬림의 대정복

1. 안사 전사-7세기 중반 : 안사-예언자의 돕는 사람들-들은 '인도된 칼리프'들의 정예병력이 되었으며 그들의 장비와 무기등은 여러곳에서 자세히 묘사되었다. 이 병사는 하얀 펠트 모자-칼란수와-를 그의 투구 위에 쓰고 있다. 노란색 터번은 그가 안사임을 나타낸다. 실로 짜여진 가는 벨트와 수대-어깨부터 허리까지 칼을 차기 위해 만들어진 띠-는 가죽 벨트나 수대보다 더 많이 사용되었을뿐만 아니라 이 시대의 특징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의 장비는 긴 대나무 창과 전통적인 형태와 비슷한 짧은 칼, 그리고 약간 대칭이 맞지 않는 아랍 스타일의 활, 기름을 바른 가죽 방패이다. 어깨의 호버크 아래에는 속을 천 등으로 층층이 튼튼하게 채웠다.

2. 페르시아 아사와리아 기병-7세기 중반 : 옛 사산조 기병의 함라-붉은 얼굴의 사람들-의 일원이었던 이 병사는 사산조 최후의 시기의 무장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넓은 철띠로 강화된 투구와 셔츠모양의 튜닉 아래 입은 짧은 사슬 호버크, 다리를 보호하는 란-장식된 각반-이 그의 무장이다. 활을 쏘는 오른손은 가죽끈으로 보호하고 있다. 아바르 양식의 긴 칼과 단검, 활은 두개의 나눠진 벨트에 고정되어있으며, 마갑은 북부 스텝의 영향을 보여준다. 안장에는 목제 등자가 달려있다.

3. 베르베르 보조병 : 무장이 매우 빈약한 이 베르베르 보조병은 조악한 직조 하이크와 코르크로 바닥을 댄 샌들을 착용하고 있다. 베르베르족이 지난 세기동안 그랬듯이 전투를 위해서 머리를 밀었고 창과 간단한 투석끈, 돌이 든 가방, 그리고 가죽 방패를 들고 있다.

우마이야조의 보병

1. 우마이야조 근위병-8세기 초 : 이 정예병이 쓰고 있는 철과 청동이 섞인 투구는 중앙아시아에서 유래됬음에도 이란과 이라크에서 대규모로 제조되었다. 그의 디르 호버크 밑에 있는 두라아-앞이 뚫린 튜닉-은 아랍에서 습관적으로 착용된것 같다. 수대에 달려있는 미끄럼 방지가 된 세겹짜리 칼집세트는 매우 특별한 형태인데 이러한 형태는 사마르칸트와 판지켄트(pianjikent)의 낙타를 탄 아랍 침략자들의 그림에서 볼 수 있다.

2. 우마이야조 보병-8세기 초 : 이 보병 궁수는 투구 위에 모자를 쓰고 있다. 이 병사의 무장은 일반적인 우마이야조 보병의 무장을 보여준다. 그의 유일한 다른 방어구는 쇠사슬 디르이다. 천으로 된 카바와 솜으로 된 카미스(겉옷과 갑옷 안의 흰 옷을 말하는것 같은데, 어느게 카바이고 어느게 카미스인지 모르겠음) 아래에는 군사들이 입었던 바지 시르왈이 있다. 어깨에 걸치고 있는 숄은 타얄산이라고 부른다.

3. 무슬림 여성-8세기 초 : 일반적인 견해에도 불구하고, 여성들은 초기 무슬림 시기동안 매우 활동적으로 일을 했었다. 그리고 때에 따라서는 집을 지키기 위해 무기를 들기도 했다. 이 여성은 아마도 부유한 계층의 출신일 것이다. 고급 터번은 머리카락만을 가리고 있는데 이러한 것이 현재의 극단론자들이 주장하는 모든 얼굴을 가리는것 보다 예언자의 본래 가르침에 더 가깝다.

우마이야조의 기병 
 
1. 발흐 총독-8세기 : 여기 이 총독은 갑옷 대신 고위 관료의 옷을 입고 있지만, 지방 총독들은 중무장을 했다. 시위를 매지 않은 채 활집에 들어있는 거대한 아랍활은 도보로만 사용할 수 있다. 몇몇 우마이야의 상류층 인사들은 보석류나 마스카라-코흘-를 이용하기도 했다. 이 자는 말 위에 비스듬히 걸터앉아 있는데, 이러한 형태는 파지켄트의 벽화에서 보인다. 초기 형태의 칼란수와-모자-와 타야라산-목에 두른 흰 띠-를 쓰고 있으며 큰 장갑을 끼고 있다.

2. 우마이야조 정예 기병-7세기 후반 : 이란 출신의 병사들의 무장에서는 이란 갑옷의 영향을 받은점이 보인다. 이 병사는 미그흐파르-쇠사슬 드림-를 입고 있는데, 이 갑옷은 그의 옷 아래에 있다. 청동 러멜러 흉갑은 탄누르 또는 '자궁'이라고 알려졌다. 손에는 이란 양식의 건틀렛을 끼고 있으며 발은 사크 알 자르드라고 불리는 쇠사슬 각반으로 보호하고 있다. 방패는 나무로 된 채색방패이다.

3. 이집트의 우마이야 왕조의 경기병-8세기 중반 : 기후는 우마이야 칼리프조의 아랍 지방에서 중장갑이 드문 이유에 대한 답이 될것이다. 이 병사는 남부 누비아에서 온 악어가죽 투구-초기 중세시대에 쓰인 철제 러멜러 목 보호대가 곁들여 있다-를 쓰고 있다. 화려하게 장식된 카미스 셔츠와 시르왈 바지위에 찬 두개의 벨트가 있는데, 첫번째 벨트는 실로 두껍게 짠 아랍의 양식이고, 가죽과 장식이 달린 가죽 벨트는 새로 나타난 투르크-이란의 양식이다. 낡은 가죽이 덧대여져 있는 안장에는 목재 등자는 달려있지 않다.


 압바스 혁명 
 
1. 후라사니 아랍 정예병-8세기 중반 : 이 정예병은 그의 터번과 모자 아래 둥그런 낮은 투구를 쓰고 있다. 또한 그는 일반적인 형태의 갑옷인 디르에다 얇은 판을 겹쳐 만든 완갑(팔에 차는 방호구)을 쓰고 있다. '명예의 겉옷' 위에 금으로 된 타와-목걸이-를 쓰고 있는데, 이 목걸이는 전투에서 장교들을 구분하기 위해 주어졌다. 말에서 내린 채로 싸우기 때문에 칼은 등에 차고 있다.

2. 후라사니 아랍 기병-8세기 후반 : 이 병사는 바야다 투구와 미그흐파르를 입고, 투구 위에는 가죽 안감을 댄 모자-아마도 이 모자는 칼란수와 샤하시야일것이다-를 쓰고 있다. 전통적인 이란 양식의 카바 코트 아래에는 쇠사슬 호버크를 입고 있다. 이란의 샬와 바지 위에 정강이 갑옷인 란을 가죽끈으로 고정했으며 칸자르라는 단검, 도끼(타바르진), 투르크-이란의 합성궁으로 무장했다. 이 시기에 무슬림 궁수들은 손가락과 엄지 모두를 이용해서 활을 당겼다.

3. 페르가나 기병-8세기 중반 : 민족적인 기원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이 기병은 투르크식의 높은 투구를 쓰고 있다. 앞부분에 솜털을 포갠 겉옷 밑에 쇠사슬 호버크와 얇은 판을 겹쳐 만든 정강이 갑주와 완갑을 착용하고 있다. 겉옷의 아래쪽 부분에 있는 가죽 러멜러 흉갑은 따로 입을때도 있었다. 말에는 코에 큰 금속 재갈끈을 매어놨고 안장의 뒷부분에는 분해된 천막이나 접은 깃발을 매어두는 막대가 매달려 있다.

 


압바스조-변경의 전사들 
 
1. 아나톨리아 국경 전사-9세기 초 : 많은 사료들이 동부 아나톨리아의 비잔티움 병사와 무슬림 병사사이의 장비의 유사성이 있음을 말해준다. 이 병사는 오직 터번을 통해서만 그가 무슬림이란걸 알아볼수 있으며 각 부분을 대갈못으로 고정한 철제 투구를 쓰고 있다. 실로 짠 두꺼운 검은 겉옷-두라아-아래에 보편적인 갑옷인 디르와 가벼운 가죽 부츠-쿠프-를 착용하고 있다. 그의 쭉 뻗은 양날검은 노획된 비잔티움의 무기에서 나타난다.

2. 압바스조 보병-9세기 초 : 여기 이 병사는 종려나무 잎의 줄기로 만든 투구와 가죽으로 감싼 갈대방패를 들고 있다. 이 방패는 중동에 몇세기전부터 알려져 온것인데, 다만 다른 것은 자신의 방패에 역청칠을 했다는 것이다.

3. 페르시아 기병-9세기 초 : 9세기 중반에 이르러서 많은 이란인 기병들은 이전보다 더 가볍게 무장한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경향은 보병이 덜 중시되고 기마 궁술을 더 중요히 여기는 상황을 반영한다. 이 기병은 새로운 형태의 칼란수와를 쓰고 있다. 짧은 쇠사슬 호버크는 철제 러멜러 흉갑아래 입었는데, 이러한 갑옷들은 전신부의 가슴만을 보호하기 위한 목적으로 입었다. 그는 또한 당시 이란에서 많이 쓰이던 굽은 세이버를 들고 있다. 말의 머리는 천을 덧댄 철제 마갑으로 보호하고 있고, 몸통과 목은 티즈파프라고 불리는 펠트를 층층히 쌓아 만든 마갑을 쓰고 있다.

 압바스조-궁중 
 
1. 굴람 근위기병-9세기 중반 : 노예 출신의 이들 굴람들은 처음 몇년간은 통치자의 가장 신뢰할만한 근위병들이었다. 이 굴람은 장식된 비단 두라아와 헐렁한 비단 바지를 입고 있다. 긴 머리는 아마도 그가 투르크족 출신이란것을 보여주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다른 부족 출신들도 긴 머리를 했다. 활은 명백히 중앙아시아에서 발명된것이나 화살통과 활집은 투르크 양식의 영향을 보여준다. 뺨가리개가 달려있는 투구는 많은 그림에서 보인다.

2. 아브나 보병-9세기 초 : 이 아브나 보병의 장비와 복장을 통해 그의 부대가 아랍군과 후라사니들의 혼합이라는것을 알수 있다. 터번 아래에는 양질의 이란 철과 청동으로 만든 투구를 쓰고 있으며 그가 들고 있는 압바스조의 검은 깃발에는 쿠란의 구절이 쓰여있다.

3. 칼리프 무타와킬(847~861) : 칼리프는 터번 천 아래 걷어올린 가죽 목덮개가 달려있는 칼린수와 타윌라를 쓰고 있다. 어깨에는 붉은 비단으로 만들어진 미트라프를 두르고 있고 검은 가죽으로 만든 주바흐 아래 붉은 두라아를 입고 있다. 궁전 안에서 압바스조의 칼리프들은 카딥이라는 지팡이를 가지고 다녔으나 궁전 외부에서는 여기 보이는 간단한 형태의 외날 세이버를 가지고 다녔다. 다양한 형태의 검은 웃옷과 화려하게 장식된 허리띠, 그리고 이러한 지팡이나 칼은 압바스조의 표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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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스토리 달력 사진 공모

 오늘 테터캠프에서 달력 사진 공모전에 대한 얘기를 들었습니다.
달력에 쓰일거라고는 생각 안하지만 탁상 달력을 받고 싶어 올려봅니다^- ^*
참고로 사진은 2008년 5월 부산에서 찍은 사진들입니다. 사용한 카메라는 가장 애착이 가던 코니카미놀타 A2입니다. 덕분에 잠깐이나마 추억에 잠겨봅니다.

5월(May) 벚꽃과 개나리의 환상적인 조화

5월(May) 흐드러지게 핀 벚꽃 사이로 비친 쾌청한 봄 하늘 

5월(May) 벚꽃과 맑은 하늘이 어우러져 신비한 분위기를 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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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헨티나 와인을 만나다!

아르헨티나 와인

1. 아르헨티나 와인 이야기

근래에는 제3국이 새로운 와인 강국으로 급부상하면서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그 중에서도 아르헨티나 와인은 독특한 맛과 개성으로 인해 그 시선이 더욱 주목되고 있다. 아르헨티나 와인은 남미 와인의 정수이자, 우수한 와인 대열의 선두주자라고 할 수 있다

아르헨티나는 남미에서 가장 큰 규모의 와인 생산국이며 세계에서 다섯 번째의 생산국이다. 하지만, 이 나라는 와인의 많은 생산량에도 불구하고 해외 수출은 5%에 불과하고 거의 자국민들이 소비한다. 40L는 아르헨티나 국민 한 사람의 연간 와인 소비량이다. 2002년 약 15억7960만L의 와인을 생산해 낸 아르헨티나의 전체 인구는 3800만 명이 넘는다. 40L는 750L짜리 와인 53병이 된다.

아르헨티나 와인의 역사는 1556년 이곳에 온 예수회가 꾸요(Guyo)지방에 처음으로 포도 묘목을 심은데서 비롯된다. 여기서 시작된 두 종류의 포도품종 즉 끄리오야 그란데(Griolla Grande), 쎄레사(Cereza)가 오늘날 아르헨티나 포도 수확량에서 각기 30%, 10%를 차지한다. 끄리올라와 쎄레사 모두 분홍색 껍질을 가지고 있으며 끄리올라는 칠레의 파이 포도종이다.

아르헨티나 포도 지방은 대부분 안테스 산맥이 아르헨티나와 칠레를 가르는 이 나라의 내륙 지방에 위치하고 있다. 기후는 고지대인 까닭에 온화하지만 그래도 낮에는 대단히 덥고 밤에는 서늘하며 건조한 사막지대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안데스 산맥에서 시작되는 강들을 이용한 물대기 재배가 필수적이다.

아르헨티나의 주 포도 산지는 멘도자와 산후안이다. 멘도자 지방은 수도인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서쪽 1000km에 위치하며 총 생산량의 70%를 생산하고 있다. 안데스 산맥을 끼고 있는 천혜자원의 무공해 청정지역인 멘도자는 환경적인 면에서 와인 생산지로 최적이다. 산 중턱에 위치한 포도밭은 양질의 태양을 가득 받고, 안데스 산맥의 눈 녹은 물이 흐르는 멘도사강으로부터 관개시설을 이용해 천연수를 받는다. 포도 품종은 끄리올라, 말벡(Malbec) 등이다. 말벡(Malbec) 품종의 레드와인과 토론테스(Torrontes)종의 화이트 와인은 전 세계적으로 그 향과 맛에서 최상의 와인으로 쳐준다. 말벡 레드와인은 붉은 앵두색을 지녔으며, 향은 자세히 맡아보면 자두맛, 건포도맛, 커피, 초콜릿, 바닐라, 바이올렛 꽃향을 지녔다고 한다. 토론테스종의 화이트 와인은 초록빛이 약간 감도는 금색으로, 향은 장미, 오렌지 껍질, 복숭아, 꿀, 금못향을 가지고 있다.

아르헨티나의 최대 와인 생산지답게 멘도자는 남반구의 가을 추수기인 3월에 포도축제를 성대하게 거행한다. 축제기간 동안엔 15만~20만명의 관광객들이 몰려들어 아름다운 포도아가씨 선발을 참관하기도 하고, 도심 한복판에서 벌어지는 온갖 색색의 퍼레이드도 관람한다.

산후안 지방은 멘도자의 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전체 생산량의 20%가 이 지역에서 나오고 있으며 포도 품종은 무스까델, 페드로, 시메네스 등이다. 멘도자 보다 훨씬 덥고 건조하며 멘도자 전체 포도 경작면적의 약 3분의 1정도 되는 포도 농장이 들어서 있다.

아르헨티나 와인 용 백포도에는 페드로 기미네츠, 무스까델, 스폐인의 토론테스, 셰닝블랑, 세비용, 리슬링, 샤르도네 등이 있다. 적포도에는 템프라닐로, 바르베라, 람브루스코, 까베르네 쇼비뇽, 피노누아, 시라 등이 있다.

2. 아르헨티나의 와인

*까도네 샤베이즈- 풍부한 열대과일향에 배와 광물향이 더해진 까떼나 샤도네이는 오크향과 신선한 산미로 특별한 균형을 이룬다.

까떼나 자파타 (Catena Zapata)에 관하여

100여년 전에 이태리 Marche에서 와이너리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난 Nicola Catena는 아르헨티나로 이주하여 1902년 Mendoza에 와이너리를 설립하여 곧 아르헨티나의 최대 와인 생산업자로 성장하였다. 1963년 현재의 소유주이자 창업자의 손자인 Nicolas Catena가 가족사업을 물려받으면서 와인생산을 다양화하고 규모를 늘려 1970년대에 와서는 아르헨티나에서 뿐만이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가장 큰 규모의 와인생산업자 가운데 하나로 성장하였다. 1982년 캘리포니아 버클리 대학의 초빙교수로 있는 동안 Robert Mondavi 와이너리를 수 차례 방문한 Nicolas Catena는 높은 수준의 프랑스 와인에 맞먹는 와인을 생산하기 위한 과감한 시설 투자와 선진 기술 등을 보고 큰 영감을 얻어 자신도 Mendoza에 큰 변화를 일으킬 것을 결심했다.

1983년 Mendoza로 돌아와 기후, 품종, 토양 등 모든 분야에 연구를 거듭하여 생산량은 작아도 세계적인 수준에 걸맞는 와인을 생산할 수 있는 포도생산에 몰두했다. 당시 아르헨티나 와인 산업에서는 무모하게만 보였던 "less means more"의 혁신적인 개념과 세계 최고를 자처하는 완전 관개 기술에 의한 포도 생산은 1980년대 후반에 와서는 와인품질의 고급화에 성공하여 그 결실을 맺기 시작했다. 1991년에 처음 미국으로 수출을 하자마자 미국의 와인 애호가들은 그 품질과 매력적인 가격으로 선풍적 인기를 누리기 시작했고 와인 비평가들도 칭찬을 하였다.

현재 그 딸 Laura가 합세하여 고지대이자 건조지역인Mendoza의 독특한 토양과 기후를 이용하여 각 포도 품종을 최대한 표현하는 품질의 아르헨티나 와인 생산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현재 Nicolas Catena Zapata, Catena Alta, Catena, Alamos, Argento 의 브랜드로 전 세계의 주요 와인시장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끄로타 말벡-아르젠티나 최고의 와인생산지 Mendoza 지역에서도 뛰어난 바디, 아로마, 색상을 지닌 와인으로 많은 이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는 와인. 바이올렛빛이 감도는 색상과 잘 익은 베리의 아로마가 다양한 풍미를 선사한다.

*노통 프리바다-진한 루비빛을 지녔다. 잘 익은 베리, 체리의 아로마와 살짝 느껴지는 향신료의 향이 잘 조화된 와인이다. 과일의 농축미가 뛰어나 깊고 우아한 풍미를 느낄 수 있으며 잘 숙성된 탄닌의 깊은 맛이 마시고 난 후에도 입안 가득 향기롭고 복합적인 맛과 향을 느낄 수 있게 한다.

*피노누아 뜨리벤또-아름다운 선홍색을 띠며, 체리, 딸기, 바이올렛 향기를 풍긴다. 맛이 가볍고 부드러우면서도 심오하다. 붉은 색을 띠는 육류요리뿐만 아니라, 연어구이 등 그릴드한 생선요리에도 잘 어울린다.

트리벤토(Trivento)에 관해서

1998년 칠레의 가장 큰 와인생산업체인 콘챠에토로(Concha y Toro)가 투자한 Vina Patagonia가 설립되어 최상급 품질의 와인인 트리벤또(Trivento)를 생산한다. 이 와이너리는 아르헨티나에서 가장 포도를 많이 생산하는 멘도자(Mendoza) 에 위치하고 있다. 이 지역은 충분한 태양과 서늘한 밤 기운으로 포도나무가 생산되기에 좋은 지역적 여건을 가지고 있다. 트리벤또의 와인들은 과일맛과 향이 풍부한 우아한 스타일을 추구한다. 콘챠에또로의 노우하우와 기술력 그리고 상업적인 전문성을 잘 받아들여 전세계로 수출하면서 점차적으로 그 명성을 얻어가고 있다.

3. 아르헨티나 와인의 현재

아르헨티나 와인시장에 변화가 온 것은 10여년 전인 1990년대부터. 무엇보다도 그간 아르헨티나 인들이 가졌던 질보다 양이라는 와인 컨셉이 점차 고급와인을 애호하는 분위기로 변했기 때문이다. 양질의 고급와인을 선호하는 애호가들이 늘면서 와인을 통한 고급 사교문화도 형성되어 갔다. 반면 질로 승부하는 프레미엄 와인을 찾는 이들이 늘어감에 따라 1인당 와인 소비량은 급감하기 시작했다. 국내 시장에 남겨진 와인을 처리하는 데 곤란을 느끼게 된 아르헨티나 와인 제조사들은 해외 와인시장으로 눈을 돌렸다. 아르헨티나가 와인대국으로 성장한 배경엔 여러 와인 제조사의 노력이 담겨 있다. 노르톤(Norton)사의 경우 세계 40여 개국으로 와인을 수출하고 있으며, 최근엔 중국에서 재배용 포도밭을 샀다. 니에토 세네티너(Nieto Senetiner)사는 연간 1200만병의 와인을 생산하고 있으며, 멘도자 포도원에서는 와인창고투어, 포도 가지치기, 포도 수확하기 등 프로그램을 통해 와인 애호가들을 맞고 있다. 이밖에 유기농 밭에서 재배되는 포도로 와인을 생산해 생산량의 75%를 벨기에, 미국, 독일, 영국 등으로 수출하는 중소 와인제조사도 있다. 신흥 와인국으로 성장한 아르헨티나는 2페소(800원)부터 시작되는 저가의 테트라팩 와인부터 생산량이 한정된 양질의 고급 프리미엄 와인까지 모든 종류의 와인을 생산해 내고 있다. 1200여개의 와인 제조사들이 최상의 와인을 만들기 위해 정열과 땀을 쏟고 있는 만큼 아르헨티나는 머지않아 신흥 와인국에서 벗어나 세계 최고의 와인국으로 부상할 것 같은 인상을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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