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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8)
레바논, 천국과 지옥의 혼재


수도 베이루트(Beirut)

 중동의 파리라는 별명을 가진 이 도시는 프랑스 파리와 자매결연이 되어있다. 레바논의 수도이며 가장 큰 도시. 인구는 150만 안팎이다. 서울특별시의 한개 구 정도의 면적에 두개구 이상의 인구를 합쳐놓은 사람들이 사는지라 인구밀도는 매우 높다.

 

*베이루트 시내전경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이루트는 두 개의 도시가 하나로 합쳐진 것으로 봐도 무방할 만큼 동베이루트와 남베이루트가 천지차이를 이룬다. 동베이루트는 레바논 인구의 41%를 차지하는 카톨릭 기독교도 마로니테스(Maronites) 의 거주지역이다. 동베이루트의 전경은 그야말로 파리를 중동으로 옮겨온 것과 다를바 없다. 전쟁 전에는 지중해에서 최고의 휴양도시중 하나였던 베이루트. 동베이루트에 한해 아직 그 말이 유효하다. 고급승용차가 거리에 즐비하고 빌딩들이 우뚝 솟아 있으며 남녀 쌍쌍 모여 다니고 각양각색의 옷차림을 자랑한다. 여자들의 노출도 이곳에서는 이상한 현상이 아니다. 동베이루트는 이슬람지역이 아니기 때문이다. 

*폭격당해 폐허가 된 남베이루트

 반면, 남베이루트는 아귀지옥이다. 남베이루트는 레바논의 국제적으로 악명높은 테러조직 헤즈볼라가 속해있는 종파인 이슬람 시아파 주민들의 거주지역이다. 시아파는 레바논 전체인구의 25%를 차지한다. 즉, 이스라엘 공군이 베이루트를 폭격했다는 말은 사실은 동베이루트가 아닌 남베이루트를 폭격했다는 말이다. 동베이루트는 애초에 이스라엘 공군의 폭격대상에 포함되어 있지도 않은, 완전 다른 도시라는 것이다. 남베이루트의 상황은 처참하다. 길거리의 건물들은 폭격을 당해 모두 폐허가 되어있고 하루에도 몇 번씩 폭탄이 터지며 도시의 모든 기능이 마비되어있는 아비규환의 상태이다. 밤마다 공습의 공포에 시달린다. 남베이루트는 죽은 도시다. 길거리에는 인적이나 차량을 찾아보기 힘들다.

 
레바논의 1인당 국민 소득은 7천불. 우리나라의 반 수준이고, 태국과 비슷하지만 태국보다는 약간 우위에 있다. 이 나라는 세개의 종파가 각기 다른 공동체를 이루면서도 하나의 정부를 구성하는 조화속에서 살아가는 평화로운 나라였고 십여년전에는 최고의 휴양국가로 손꼽히는 지중해의 꽃이었다. 이 나라가 전쟁의 화염에 휩싸이게 된것은 역시나 종교 때문이다. 레바논은 마로니테스 41%, 이슬람 50%(시아파 25%, 수니파 25%)로 구성되어 있다. 민족은 아랍인이지만 여타 중동의 아랍인들과는 조금 달라 생김새가 유럽에 가깝다. 공용어는 아랍어이나 동베이루트 지역에서는 프랑스어나 영어가 사용가능하다. 레바논은 전체적 인구 비율로 보아서는 이슬람 인구비율이 50%가 넘는 이슬람 국가이지만 이들은 수니와 시아로 구별되기 때문에 최대정파를 이끌고 대통령을 당선시키는 나라의 주류종파는 41%의 마로니테스들이다. 이 탓에 레바논은 터키와 마찬가지로 일부다처제가 불법인 세속주의국가다. 이 나라는 아랍 최대의 연예계를 가지고 있다. 다른 아랍국가 청년들은 (가부장 아버님의 눈길을 피해)레바논TV를 시청한다. 여자 가수나 여배우들의 공공연한 노출이 가능한 곳이 중동에서는 유일하게 레바논 하나뿐이다.

 

 *미스 레바논 출신의 레바논 여가수 하이파 와흐비(Haifa Wahbe). 그녀는 남베이루트 출신이고, 종교는 시아파 이슬람이다. 하지만 레바논에서는 이러한 그녀의 과도한 노출(?)이 문제되는 경우는 없다. 하지만 레바논도 한계점은 여실히 드러난다. 그녀는 올해 나이로 30세. 한 번 이혼한 전력이 있는데, 역시 이슬람인구가 반이 넘는 국가답게 아직도 커스터디 로(Custody law)가 적용된다. 그녀는 전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딸을 이혼 후 한 번도 만나보지 못했다고 한다. 하지만, 사우디 배불뚝이 석유재벌이 던져주는 고급 승용차와 향수에 혹해서 약혼까지 갔다고 하니, 그녀가 딸을 만나지 못하는 안타까움에 애끓는 모성을 소유한 것 같다고는 생각되지 않고, 자연히 동정이 가지도 않는다. 아, 한 가지 더. 오빠가 24살 때에 이스라엘과의 교전에서 전사했기 때문에 이스라엘을 증오한다고 한다.

 

*헤즈볼라 지도자 하산 나스랄라.

 헤즈볼라는 이슬람 시아파에 속하는 레바논의 정당임과 동시에 무장조직이다. 헤즈볼라는 무장조직이긴 하지만, 선거를 통한 정당한 방식으로의 이슬람 국가 건설에 목표를 두고, 여러 사회 복지 시설도 많이 운영하는 비교적 온건한 단체로 레바논 국민들도 처음에는 그들에 대해 그다지 거부감이 없었다. 그들은 이스라엘과 그를 돕고 있는 미국을 증오한다. 흔히들 시아파라고 하면 무장 테러집단을 떠올리고, 수니파는 온건한 이슬람 종파라고 생각하는데, 이는 한참 잘못된 오해이다. 알 카에다를 비롯한 이슬람 원리주의 무장 테러조직의 대부분은 수니파이다. 헤즈볼라만이 규모가 큰 시아파 테러조직이다. 수니파가 온건하다는 것은 그만큼 말 안 통하고 고집스럽게 이슬람 식으로 산다는 것을 뜻한다. 수니파는 코란의 해석을 자신들의 정통식 이외의 다른 방면으로 접근하는 것을 철저히 거부한다. 반면 민주화를 이룩해내 상당수준의 여성복지와 여성참정권을 만들어낸 이란은 시아파다. 시아파는 소수파이긴 하지만 과격파는 아니다.  헤즈볼라의 테러수준은 알카에다의 그것에 비교하면 어린애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레바논과 이집트라면 이를 갈기 때문에 헤즈볼라는 레바논의 밉살맞은 이슬람에게 폭탄을 떨어트릴 괜찮은 트집거리가 된것이다.

 레바논은 아직도 치안이 불안하다. 수도 베이루트의 한부분에서는 여전히 지금도 포탄이 떨어지고 있는 가운데 동베이루트에서는 메르세데스 벤츠 안에서 오렌지족 남녀가 서로 좋아 뜨거운 키스를 퍼붓고 있다. 레바논 기독교사회는 이스라엘의 공습이 레바논 전체에 대한 공습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고작 "그래도 같은 나라 국민인데, 시아파 사람들을 구호해야 하지 않겠느냐" 하고 물자를 지원하는 정도이다. 세 종교가 섞여 사는 나라 레바논. 천국과 지옥이 혼재하는 나라 레바논. 그렇기에 앞으로 어찌될 지 전혀 예상할 수 없는 나라, 바로 레바논이다.

 

*레바논 국기. 가운데의 삼목은 레바논에서 가장 많은 수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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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레일 패스와, 유럽의 기차!

유레일 패스 요령있게 구입하는 법


 유레일 패스가 현지 가격보다 싸다 할지라도 그리 만만한 경비는 아니다. 똑같은 유레일 패스일지라도 꼼꼼히 살펴보면 경비를 절약할 수 있는 방법이 얼마든지 있다
.

 유레일 패스는 매년 1 1일부로 약 10%의 가격이 상승된다. 하지만 유레일 패스의 유효기간이 6개월이므로 최초의 여행 개시일이 6월 이전이라면 미리 구입하는 것도 좋다. 그러나 취소할 경우에는 15%의 취소료가 붙는다는 것도 잊지 말자
.

 일반적으로 유레일 패스를 구입할 때는 자신의 여행기간보다 다소 적게 구입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예를 들어 30일 여행자라면 21일정도의 패스면 충분하다. 왜냐하면 첫 기착지의 도시에서는 시내 대중 교통을 이용하므로 패스를 이용하지 않아도 여행이 가능하며 마지막 출발지에서도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이때 유레일 패스의 인준은 첫 도착지에서 여행을 끝마치고 다음 지역으로 이동할 때 인준 받아야 한다는 것도 잊지 말자.

 유레일 패스를 구입할 때는 4개 종류의 패스 가운데 어떤 패스를 선택할 지 보다 신중한 자세가 필요하다.
전체 여행기간이 비록 한달 정도라고 해도 실제 여행지 이동 구간이 5~7개 도시라면 2개월에 10일 짜리면 여행이 가능하다. 따라서 자신의 일정표를 정확하게 파악한 후에 패스를 구입하도록 하자.

 

유럽의 기차역 


 기차역은 여행자들이 가장 먼저 밟게 되는 도시의 관문이다
. 여행을 하다 보면 가장 많이 이용하는 곳이 기차역이고 또 많은 시간을 이곳에서 보내게 된다

 

 기차역에는 여행안내소(tourist information ) 열차안내소(rail information), 은행, 환전소, 화장실, 매점, 샤워시설(큰 역의 경우), 락커, 레스토랑 등 배낭여행자들을 위한 시스템이 잘 갖추어져 있어 늦은 시간이나 이른 시간에도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다.

기차역을 효과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그 시스템에 대해 먼저 알아보자.

 

 한 도시에도 기차역이 여러 곳 있는 경우가 많다.

서울의 경우 서울역, 영등포역, 용산역, 청량리역 등 여러 곳의 기차역이 있으며 각각의 역마다 행선지가 다른 열차가 출발한다유럽의 경우도 큰 도시는 마찬가지이다. 더구나 도착과 출발이 각각 다른 역에서 진행될 수 있으므로 항상 출발역을 잘 체크하는 것이 중요하다.

 

개방된 플랫폼

 


 우리나라는 기차표가 있는 사람만 검표원의 검표 후에 플랫폼에 들어가 기차를 기다리고 승차하게 되어있지만 유럽의 경우는 플랫폼이 개방되어 있어 누구나 기차 앞까지 갈 수 있다. 전광판이 있어 지정된 플랫폼을 쉽게 찾을 수 있고 검표원은 열차가 출발한 후 기차를 돌며 검표한다.

 

 

기차 출발 / 도착

 기차의 출발과 도착시간은 전광판을 통해서도 알 수 있지만 출발시간이 많이 남아있는 기차는 전광판에 표시되지 않는다. 이럴 때나 전체적인 시간표를 알고 싶을 경우에는 역내 벽면에 붙어있는 시간표를 참고한다.

출발하는 기차 시간은 노란색 바탕에, 도착하는 기차 시간은 흰색 바탕에 경유하는 도시와 시간까지 자세히 기입되어 있다. 유럽의 기차역에서는 안내방송이 거의 없다. 있다고 하더라고 역 천장을 울리는 외국어 안내방송을 알아듣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먼저 노란색 바탕의 시간표에서 출발시간과 플랫폼번호를 확인했다 하더라도 출발 전 전광판의 플랫폼 번호를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움직이자. 유럽에서 기차는 스스로 알아서 타고 내려야 한다


기차의 종류 

 

유럽의 기차는 일반열차와 고속열차, 호텔형기차 등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대부분의 기차는 모두 유레일패스로 탑승 가능하나 개인이 운영하는 일부 사철과 도시 내의 지하철 등은 이용할 수 없다.

 

초고속 열차

 

ICE : Inter City Express의 약자로 독일의 첨단 기술력을 엿볼 수 있다. 희고 미끈한 열차 안에는 각종 편의시설이 갖추어져 세계 최고 수준의 열차 서비스를 자랑한다

TGV : 프랑스의 초고속 열차로 우리나라 고속철도 KTX에 도입된 열차이다. 파리-리용 구간에서 300Km까지 달릴 수 있다고 한다. 반드시 예약해야 탈 수 있으며 예약 비는 € 3.00. 

TALGO : 스페인의 각 도시를 연결하며 프랑스 쪽으로 넘어가서 궤도 폭이 달라져도 그대로 달릴 수 있게 되어있어 국경에서 갈아탈 필요가 없다

THALYS : 주요 도시를 연결하는 열차로서 TGV와 거의 비슷하다. 유레일 패스로도 탑승은 가능하나 독일의 ICE를 제외하고 모두 반드시 좌석 예약을 필수로 하고 있다. 좌석예약은 기차역에서 할 수 있고 별도의 예약 비를 내야 한다. Reservation ticket을 함께 소지하여야만 기차에 탑승할 수 있다는 점을 잊지 말자

 

일반열차

 

EC(Euro city), IC(Inter city) 유럽 열차여행 중 가장 자주 이용하게 되는 열차 편으로 대부분이 1등석, 2등석으로 나눠져 있으며 일부 EC열차는 식당 칸도 있다.

좌석은 코치, 컴파트먼트 형태로 되어 있다. R 표시가 없는 경우는, 별도의 예약이 필요 없이 유레일패스 만으로 이용이 가능하다

 

EN(Euro night), CNL(CityNightLine), NZ(DB Nacht Zug), ICN(Inter CityNight), D 위에 같은 열차들은 유럽의 주요도시를 연결하는 야간열차들에 붙는 이름이다. 대부분 같은 의미로 쓰이고 있지만 나라별 이름이 다르기도 하다. R표시가 있는 경우는 반드시 예약을 해야 하고 그렇지 않은 경우는 유레일패스를 이용해 그냥 탈 수 있다

 

R, IR, RE, RX 열차 종류에 이 같은 이름이 들어간 열차들 대부분이 장거리보다는 근거리 이동에 이용되는 열차편이다. 짧은 구간을 이동하기 때문에 열차 내에 식당칸, 화장실 시설이 잘 갖춰져 있지 않는 경우도 있다. 유럽 여행 중에는 암스텔담 근교의 마두로담, 뮌헨 근교의 퓌센, 뽀르뜨 보에서 바르셀로나로 들어가는 열차 등이 이에 해당한다.

특급열차와 같이 추가 요금, 예약필수인 경우는 거의 드물다. R (Regional) 표기되는 열차는 위의 완행열차 중에서 가장 근거리를 운행하는 열차로 주요 도시와 멀지 않은 곳을 운행하고 있다.  

 

IR (Inter Regio)은 우리가 많이 이용하게 되는 열차편이다. 이것의 일부 열차 편은 IC와 같은 노선을 운행하고 있기도 하지만 IC에 비해서 여러 번 정차하는 완행 열차편이므로 같은 노선일 경우 가능한 한 IC를 타도록 하자.

 

RE (Regional Express 독일), RX (Regio Express 스위스)는 근거리 열차 편 중에서 IR에 비해 비교적 빠르게 이동할 수 있는 열차이다. 대부분 독일 내 열차들이 이에 해당된다

 
좌석의 종류

 

코치 Couch

우리나라의 기차와 같은 배열이다. 주로 주간에 이동하는 기차가 많다

컴파트먼트 Compartment

1개의 방에 6~8명이 마주보며 안도록 배열되어 있다. 야간열차나 장거리 이동하는 기차에 많다. 마주보는 좌석을 서로 앞으로 당기면 두 좌석이 연결되어 작은 침대처럼 된다. 야간 이동의 경우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다

쿠셋 Couchette

간이 침대 형 야간열차이다. 편안히 누워 잠을 자며 이동할 수 있다. 보통 양쪽으로 3층 침대가 놓여 있는 6인실로 구성되어 있다. 반드시 예약을 하여야 하며 비용은 약 20,000~25,000원이다. 피곤에 지친 경우나 안전이 우려되는 야간열차 구간의 경우 문을 잠글 수 있으므로 매우 유용하다.

슬리핑 카 Sleeping Car

1-4인실까지 있으며 예약은 필수다. 예약비가 비싸 배낭여행자들은 자주 이용하기 어렵다. (4인실이 1인당 6-8만 원 정도) 객실 내에 간단한 세면대가 있고 베개와 시트 등이 지급된다. 다른 사용법은 쿠셋과 같다.

식당칸

보통 1등석과 2등석의 중간에 위치한다. 간단한 음료부터 제대로 된 식사까지 다양하다. 가격이 만만치 않아 자주 이용하기는 좀 부담스럽다. 객실 내에서 흡연이 가능하다.

 
기차 예약
 

예약을 해야만 탑승이 가능한 기차를 이용할 경우, 좌석의 확보를 원할 경우, 쿠셋이나 침대칸 등의 이용을 원할 경우에 예약을 해야 한다

예약은 반드시 기차역의 창구나 rail information에서 하여야 하며 예약 후 받는 예약증이 있어야 좌석에 탑승할 수 있다

국경을 넘어 이동할 경우에는 International 또는 English Speaking이라고 쓰여 있는 창구에서 예약하는 것이 편하며 서툰 발음으로 예약하기보다는 메모지에 기입하여 유레일패스와 함께 제시하는 것이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예약은 빨리 할수록 유리하고 늦어도 반드시 탑승 12시간 전에는 하여야 한다. 특히 여름철 성수기의 경우라면 미리미리 예약하는 것이 살 길이다

예약은 출발도시에서만 가능한 것이 아니라 유레일이 통용되는 유럽의 모든 도시에서 가능하다. 유럽의 철도 예약 망이 on-line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한 도시에서 예약하고 싶은 여러 구간을 모두 예약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암스텔담/뮌헨/, 뮌헨/프라하, 비엔나/베니스, 로마/인터라켄, 니스/파리의 5구간을 예약할 계획이라면 암스텔담에서 한꺼번에 모두 예약이 가능하다. 그러나 역마다 1인당 예약 건수를 2~3구간으로 제한하는 경우도 있으므로 동행인이 있다면 2~3구간씩 나누어서 예약한다

대도시의 경우 예약 창구마다 여행자들로 항상 붐빈다. 따라서 대륙 도착과 동시에 최대한 빨리 야간열차를 예약하도록 하자.


기차 이용시 주의사항


탑승시간을 확인한다
.  

미리 예약을 하는 경우는 예약증에 기차 출발시간이 적혀있기 때문에 별 문제가 없다. 하지만 예약 없이 탈 경우에는 미리 출발시간을 확인해야 한다. 이때 유레일 타임테이블보다는 역의 노란색 출발 시간표가 더 정확하고 노란색 출발 시간표보다는 전광판이 정확하다.

 

트랙을 확인한다

전광판을 보고 확인한 플랫폼으로 가면 먼저 플랫폼에 붙어있는 열차 편성표에서 1, 2층 칸과 침대 칸의 위치를 확인한다. 예약을 하지 않아 확보된 자리가 없는 경우라면 특히 정확한 트랙 앞에서 미리 기다렸다가 기차가 도착했을 때 바로 올라타자. 서울에서 지하철 탈 때 잽싸게 앉기 위해서 했던 행동을 떠올려 보자!

 

목적지를 확인한다

기차를 타기 전에는 기차의 앞, 뒤 출입구 옆에 붙어있는 표지판을 보고 탈 기차의 차량 별 최종 목적지를 확인한다. 같은 시간에 같은 플랫폼에서 출발하는 기차라도 각 차량 별로 목적지가 다른 경우가 많이 있다. 중간의 경유 역에서 기차들이 서로 붙고 떨어져 각기 다른 행선지로 향하는 수가 있기 때문이다.

일단 아무 칸이나 타서 빈자리에 앉는다든가 탑승 후 이 칸 저 칸 옮겨 다니다 보면 분명히 로마에 도착해야 할 내가 아침에 일어나보니 니스에 있다거나 친구와 따로 떨어져 앉았다가 친구는 로마에, 나는 니스에 갈 수도 있다는 얘기다. 항상 기차 타기 전 목적지를 확인하고 만약 기차 내에서 옮겨 다녀야 할 경우에도 기차 양쪽 문에 붙은 행선지표를 항상 확인해야 한다.

 

탑승 30분 전까지는 도착한다

급하게 역에 도착해 서두르다 보면 실수가 생기는 법이다. 여유를 가지고 탑승 30분 전에는 역에 도착하자. 종착역이라면 기차가 미리 플랫폼에 도착해 있을 것이다. 일찍 도착하면 좌석 잡기도 쉽고 무거운 배낭을 들고 힘겹게 뛰지 않아도 된다.

 

도착시간은 내가 체크한다

유럽의 기차에서 안내방송은 거의 없을뿐더러 있다 해도 듣기가 쉽지 않다. 승차하기 전에 도착시간을 미리 체크하고 내릴 시간이 되면 미리미리 내릴 준비를 하자. 기차가 서행하기 시작하면 도착 역의 표지가 보일 것이다 .특히 주간에 이동하는 기차의 경우 종착역이 아니라면 정차 시간이 상당히 짧다. 기차가 완전히 정차한 후 문을 돌리거나 당겨서 열고 내려야 한다. 만약 자동으로 열릴 것으로 생각했다가는 다음 역에서 내려야 하는 불상사가 생길 수도 있다. 여유 있게 그러나 민첩하게…….

 

유레일 타임 테이블

유레일패스, 유로 패스 등 기차 패스를 구입하면 유레일 타임 테이블이라는 대도시 위주의 기차시간표와 유럽지도가 있는 유레일 Traveler’s Guide를 받게 된다. 유레일 여행자 가이드에는 유럽지도와 유레일패스의 사용법,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부수적인 보너스에 대해 씌어  있다. 대도시 위주의 여행이나 호텔 팩, 단체 배낭여행처럼 숙소를 미리 확보하고 떠나는 여행의 경우 이때 받게 되는 유래일 타임 테이블 만으로도 충분히 기차여행이 가능하다.

 

유레일 타임테이블 보는 법

 

1) 출발 도시를 찾는다. 알파벳 순서대로 배열되어 있다. 출발도시는 큰 글씨로 진하게, 도착도시는 작은 글씨로 쓰여 있다.

2) 도착 도시를 찾는다. 역시 알파벳 순서대로 배열되어 있다. 맨 왼쪽이 출발시간, 오른쪽은 도착시간이다. 갈아탈 경우 중간에 따로 시간이 표시되어 있고, 그 왼편에 갈아타는 역이 기입되어 있다.

3) 기차 종류를 체크한다.

EC, IC, ICE와 아무 표시가 없는 기차는 예약 없이 탑승 가능한 기차이다. 그 외의 표시가 되어 있는 기차는 맨 앞 페이지의 범례를 참고하여 예약이 필수인 경우 반드시 예약한다.

4) 역을 확인한다.  도시에도 여러 역이 있으므로 주의 깊게 출발 역과 도착 역의 이름을 확인한다.


 

 위의 그림은 유레일 패스를 사용한 history. 패스를 사용하려면 먼저 기차역 체크인 카운터 직원에게 여권과 함께 유레일 패스를 제시하여 우측 하단의 스탬프를 받아야 사용할 수 있다. 패스를 가지고 있더라도 스탬프가 찍히지 않았다면 사용할 수 없다는 점에 주의한다.

또한 기차를 이용하는 날짜를 위와 같이 수기로 작성하는데, 하루에 여러번의 기차를 이용했다면 같은 날짜를 여러번 기재하지 않고 한번만 기재한다.

 
예약없이 탈 경우에는?

예약을 하지 않고 기차에 올랐을 경우 빈 자리라고 무조건 앉지 말고 유리문 오른쪽 위에 노란색 예약 표가 끼워져 있는 지 확인하자. (컴파트먼트가 아닌 일반 좌석의 경우 좌석 위 선반에 예약 표가 끼워져 있다)

예약 표가 끼워져 있지 않다면 예약이 없다는 표시이므로 마음 놓고 앉으면 된다. 그러나 예약이 되어있는 난감한 상황이라면 예약 표를 일일이 확인해보자. 예약 표에는 어느 좌석이 어느 구간까지 예약되어 있는지 쓰여져 있다. 빈 구간을 잘 활용하면 서서 가는 고생을 면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서울에서 부산까지 가는데 1번 좌석은 서울/대전까지만 예약되어 있고 2번 좌석은 대전/부산이 예약되어 있다면 서울/대전까지는 2번에 앉고 대전/부산은 1번으로 옮겨 앉으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때로는 차장이 예약 표 정리를 하지 않아 이미 날짜가 지난 예약표가 끼워져 있는 경우도 있으니 날짜까지 확인해 보는 것도 좋다(자료 : 블루여행사 http://www.blueeurope.co.kr/punchup/travel_tips.asp?code=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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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아버지 왕(Rex Pater Europae), 샤를마뉴


초기생애

 샤를마뉴는 샤를1세(Charle Ⅰ), 카알 대제(Karl der Grosse), 찰스 대제(Charles the Great), 카롤루스 대제(Carolus Magnus) 등으로도 불린다. 그는 742년경 4월 2일 피핀 3세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메로빙거 왕조 말기 프랑크 왕국의 권력은 궁재(宮宰)에게로 집중되었으며 샤를마뉴가 태어날 무렵엔 그의 아버지 피핀과 숙부 카를로만이 프랑크 왕국의 궁재가 되어 프랑크 왕국을 장악한 직후였다. 나중에 카롤링거 왕조라고 부르게 된 이 가문은 메로빙거 왕조의 궁재직을 세습하며 프랑크 왕국 전체에 대한 지배권을 장악해왔다. 샤를마뉴의 할아버지 카를 마르텔은 분열 직전에 처한 왕국을 재건했고 732년에는 투르와 푸아티에 전투에서 사라센(이슬람)을 물리쳐 유럽과 기독교 세계를 지켜낸 공로로 인망이 있었다. 그는 힘없는 메로빙거 왕조가 유일하게 갖고 있던 이름뿐인 국왕의 대권을 침해하지 않은 채 사실상 왕국을 아들인 피핀과 카를로만에게 세습하듯 물려주었다.

 샤를마뉴가 어렸을 때 그의 아버지 피핀은 왕족 및 자신의 형제들을 쓰러뜨리고 권력을 차지했으며 751년에는 힘 있는 자가 국왕이 되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며 교황 자카리아스로부터 승인을 받아 실권 없는 메로빙거 왕가의 마지막 왕 힐데리히 3세를 폐위시킨 뒤 프랑크 회의에 의해 왕위에 올랐다. 자카리아스의 후임 교황인 스테파누스 2세는 롬바르드족(랑고바르드)의 침공으로부터 로마를 보호하는 데 도움을 청하려고 754년 알프스를 넘어 프랑크 왕국을 방문했는데 당시 12세였던 샤를마뉴는 왕국의 장자로서 교황을 영접했다. 교황은 생드니 대성당에서 성유식(聖油式)을 집전해 피핀과 그의 두 아들 샤를마뉴 및 카를로만에게 왕의 칭호를 수여했다. 이 귀중한 봉사의 대가로 피핀은 롬바르드족을 교황의 영지에서 축출할 것을 다짐했다. 피핀은 760년부터 해마다 원정을 해 아키텐(루아르 강 남쪽의 프랑스)을 정복함으로써 피레네 산맥까지가 모두 프랑크 왕국의 영토임을 재확인했다. 이 일련의 원정에는 샤를마뉴가 늘 동행했다.

 이런 젊은 시절의 경험은 아마 샤를마뉴의 성격과 목표 형성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그는 아버지를 닮아서 권력에 대한 불굴의 의지를 갖고 있었다. 외적에 대항해 단호하게 싸우고 기회만 있으면 영토를 넓히려는 경향, 가까운 친척들의 권리를 빼앗는 한이 있더라도 혼자 나라를 다스리겠다는 결심도 아버지와 똑같았다. 샤를마뉴는 세속 권력과 교회 권력의 밀접한 관계를 일찍부터 인정했다. 그는 교회를 존중했고 크리스트교 신앙을 널리 전파하는 것이 왕의 의무라고 생각했다. 또 교회에 대한 왕의 종주권을 주장하면서도 신이 그에게 크리스트교도들을 맡겼기 때문에 신에게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프랑크의 왕

 768년 피핀이 죽자 프랑크 왕국의 오랜 관습에 따라 왕국은 그의 두 아들에게 분할되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형제 사이에 격렬한 대립이 일어났다. 샤를마뉴의 동생 카를로만은 부르군트 일대를 다스렸는데 롬바르드 선왕의 왕비였던 게르베르가와 결혼하였다. 롬바르드 왕 데시다리우스는 카를로만이 프랑크 전체의 왕이 되기를 원하여 그를 암암리에 지원하였다. 그러나 동생과의 갈등에서 샤를마뉴는 승리했고 771년 카를로만이 사망하자 프랑크 왕국의 단일 지배자가 되었으며 카를로만의 편을 든 롬바르드를 멸망시켰다. 롬바르드의 수도인 파비아 포위 공격이 아직 진행되고 있는 동안 샤를마뉴는 로마로 가서 교황과 함께 774년의 부활절을 축하하고 이탈리아의 대부분을 교황령으로 이양하겠다는 아버지의 약속을 성 베드로 성당에서 재확인했다. 그러나 그가 실제로 넓혀준 교황의 땅은 미미했고 롬바르드 왕국 전역에 대한 통치권은 자신이 차지했다.

 샤를마뉴는 이교도인 작센족이 라인 강 하류 지역을 공격한 앙갚음으로 772년에 지금의 니더작센 지방과 베스트팔렌 지방에 사는 작센족을 공격했다. 그러나 775년부터는 복수보다는 작센족 전체를 정복하여 크리스트교로 개종시키고 그들의 영토를 프랑크 왕국에 통합하는 것이 그의 목표가 되었다. 이 목표는 여러 차례의 원정 끝에 실현된 것처럼 보였다. 작센족 귀족들이 그에게 충성을 서약하고 775~777년에 대규모 세례식이 거행되었기 때문이다. 777년에 파더보른에서 열린 제국의회는 작센족의 항복을 조인했다. 의회에 참석한 사람들 중에는 코르도바의 우마이야 왕조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키는 데 샤를마뉴의 도움을 얻으려고 스페인 북부에서 찾아온 아랍인들도 끼어 있었다. 778년 여름 샤를마뉴는 스페인으로 진격해 사라고사를 포위했지만 그 도시를 점령하지는 못했다. 피레네 산맥을 넘어 퇴각하던 프랑크 군대는 바스크족의 공격을 받고 참패를 당했다. 브르타뉴 원정 때 활약했던 샤를마뉴의 기사 롤랑도 이때 죽었는데 그는 나중에 전설과 시(롤랑의 노래)로써 불멸의 존재가 되었다.

 이후 그는 영토 보전에 힘쓰는 한편 내정을 강화하고 문화생활과 법의 지배를 보호했다. 샤를마뉴가 스페인에서 패배한 직후 작센족이 다시 봉기했다. 샤를마뉴가 생각하기에 세례를 받고 충성을 서약한 이 작센족의 저항은 정치적 배신이자 종교적 변절로 이런 범죄에는 가혹한 처벌을 내릴 필요가 있었다. 샤를마뉴는 작센족과 18회나 전쟁을 치르고 난 뒤에야 그들을 완전히 정복했다. 결국 그는 작센족을 자신의 지배 아래 복종시키겠다는 목표만이 아니라 제국에 완전히 통합시키겠다는 목표도 달성했다. 세속 권력과 크리스트교 신앙 사이의 뗄 수 없는 유대관계를 생각하면 이것은 작센족을 크리스트교로 개종시켜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샤를마뉴는 781년에 2번째로 로마를 방문해 교황이 어린 두 아들 피피노와 루이(루트비히)에게 각각 롬바르드와 아키텐의 왕관을 씌워주게 했다. 또한 비잔틴 제국의 황태후이며 콘스탄티누스 6세의 모후로서 섭정을 맡고 있던 이레네에게서 자신의 이탈리아 지배를 사실상 승인받았다. 그러나 프랑크 왕국이 787년에 이탈리아 남부를 공격한 뒤 샤를마뉴와 비잔틴 제국의 협약은 깨졌다.

 788년 샤를마뉴는 바이에른 공작이자 사촌인 타실로 3세를 폐위함으로써 라인 강 건너편에 남아 있는 마지막 게르만족의 독립성을 사실상 박탈했다. 이제 서게르만족인 알라마니족, 바이에른족, 작센족, 튀링겐족은 역사상 처음으로 하나의 정치 단위 안에 모이게 되었다. 게다가 아바르 왕국(지금의 헝가리와 오스트리아 북부)에 속해 있던 나머지 공국들과 도나우 강 유역에 새로 건설된 슬라브족 국가들도 느슨하나마 프랑크 왕국에 의존하게 되었고 프랑크 왕국의 종주권을 어느 정도 인정했다.

  프랑크 왕국은 엄청난 팽창을 통해 중세 초기의 부족국가들보다 훨씬 높은 지위로 올라갔기 때문에 이제는 양적인 변화뿐만 아니라 질적인 변화도 필요했다. 그러나 샤를마뉴에게 로마 황제의 칭호를 부여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은 늦게야 떠올랐고 그나마도 특수한 정치적 상황이 조성되었기 때문이었다. 동로마 제국, 즉 비잔틴 제국은 서로마 제국까지 포함한 로마 제국 전체에 대해 발언권을 가질 자격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당시 비잔틴 제국은 로마와 라벤나를 포기하고 이탈리아 남부와 시칠리아 섬에 대해서만 지배권을 주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샤를마뉴의 보호를 받고 있던 교황 하드리아누스는 이탈리아 중부에 자치령을 세우려고 애쓰고 있었다.
 


서로마의 황제

 799년 5월 교황 레오 3세는 로마에서 반대파들의 습격을 받자 샤를마뉴의 궁정으로 피신해 지원을 간청했다. 샤를마뉴는 800년 11월 교황과 함께 로마로 가서 황제의 예우로 영접을 받았다. 성 베드로 성당에서 열린 성탄절 미사 때 로마인들이 샤를마뉴를 황제라고 찬양하자 교황은 성유식을 집전하여 샤를마뉴에게 왕관을 씌워주고 샤를 아우구스투스라는 이름으로 황제에 임명했다. 샤를마뉴가 옛날 로마 제국의 서부지역을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의 황제 지위에 대한 합법성을 구체화해주었지만 동로마 황태후 이레네(797년 아들을 퇴위시키고 장님으로 만들었음), 즉 여성의 지배에 대항하려는 욕망도 그가 제위를 얻으려고 한 이유였다.

 비잔틴 제국은 제위 찬탈자의 공격에 대비했지만 샤를마뉴가 원한 것은 그저 자신의 새로운 지위와 협상에서 얻은 로마 지배권을 인정받는 것뿐이었다. 812년 비잔틴 제국 황제인 미카일 1세가 어쨌든 샤를마뉴를 황제로(로마 황제는 아니었음) 승인함으로써 그는 목적을 달성했다. 황제라는 칭호는 샤를마뉴에게 어떠한 권력도 추가로 주지 않았지만 그의 로마 지배는 합법적인 것이 되었다. 역사적으로 중요한 754년의 사건, 즉 교황이 비잔틴 제국과 소원해지고 그 대신 프랑크 왕국과 친교 관계를 확립한 것은 이제 명백해졌다. 중세의 제국이라는 개념, 그리고 프랑크 왕국 및 그 뒤를 이은 신성 로마 제국의 법률적 전통이 아우구스투스가 세운 고대 로마 제국과 맺고 있는 모든 관계는 샤를마뉴가 가졌던 황제라는 칭호와 지위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궁정과 행정

 제국의 창건은 주로 제국 내부의 문화 수준을 높이려는 샤를마뉴의 노력을 통해 합법화되었다. 샤를마뉴가 권력을 잡았을 때 프랑크 왕국의 문화, 행정, 사법 제도는 아직도 상대적으로 미개한 상태였다. 예를 들어 이 프랑크 왕국의 왕은 일정한 주거지가 전혀 없었다. 따뜻한 봄 날씨 때문에 샤를마뉴가 특히 좋아한 아헨이 왕의 거처가 된 것은 794년에 이르러서였다. 샤를마뉴는 이곳에 궁정과 왕실 교회를 지었다.

 샤를마뉴의 궁정은 그의 가족, ‘카펠라’라는 왕의 개인 예배를 집전한 성직자들, 그리고 속세의 관리들로 구성되었다. 속세의 관리들 중에는 자신의 영지 안에서 왕권을 일부 위임받아 행사하도록 허용된 영주들, 왕실의 집사들, 왕실 관리인들이 포함되었다. 샤를마뉴는 자신의 궁정을 왕국의 정치와 행정 중심지뿐 아니라 지성의 중심지로 만들겠다는 야심이 있었기 때문에 해외에서도 유명한 학자들을 불러들였다. 이들 가운데 중요한 인물로 아인하르트와 앨퀸이 있었다. 샤를마뉴는 이들을 비롯한 여러 문필가들의 도움을 얻어 교회 신부들의 저술과 고대 작가들의 작품을 소장하는 왕실도서관을 설립했으며 프랑크 왕국의 젊은 기사들을 가르치기 위해 궁정 학교를 창설했다. 제국 전역의 종교의식과 도덕성 및 재판절차의 수준을 높이려는 노력도 이루어졌다.

 모든 수도원 학교와 성당 학교에서는 라틴어와 라틴 문학을 집중적으로 공부하라는 지시가 내려졌다. ‘카롤링거 르네상스’라고 불리는 문화적 운동은 제국의 수많은 수도원을 중심으로 활발히 전개되었다. 그러나 전 세계에서 최고의 지성들을 불러들여 성직자를 가르치게 하고 결국에는 백성 전체를 가르치게 한 샤를마뉴의 노력과 그의 궁정을 언급하지 않고서는 이 운동을 제대로 평가할 수 없다. 궁정의 신학적 지식과 지적 자부심은 791년경에 샤를마뉴의 이름으로 작성한 포괄적 논문인 <샤를마뉴의 책 (Libri Carolini)>에 반영되어 있다.

 샤를마뉴는 이 궁정을 통해 제국을 다스리고 관리했으며 정의를 시행했다. 궁정과 제국 각지의 주요행정관 및 귀족들은 적어도 1년에 한두 번씩 프랑크 왕국의 심장부나 정복한 영토에 모여 총회를 열었다. 이것은 군대회의나 귀족들의 입법회의 및 교회의 종교회의를 분명히 구별하지 않은 카롤링거 제국의 독특한 구조를 보여준다. 이들과 궁정의 관계는 샤를마뉴의 명령에 따라 각지를 돌아다니는 왕의 사절들을 통해 유지되었다. 왕의 사절은 대개 2명이 한 조를 이루었는데 관리와 고위 성직자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왕의 명령은 글로 쓰면 안 되는 것이 원칙이었지만 샤를마뉴의 통치가 끝나기 20년 전부터 왕의 포고령이 약간 애매하나마 기록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왕의 포고령이 일정한 틀을 갖는 데는 시간이 걸렸으며 카롤링거 르네상스 시기에 형식이 고안되었다. 샤를마뉴는 그가 지배하는 다양한 민족과 부족의 전통적 권리를 원칙적으로 존중했고 황제가 된 뒤에는 그 전통적 권리를 기록하게 했다. 프랑크 왕국의 법령집은 여러 부족의 율법을 보완하는 기능을 했을 뿐 아니라 공공생활과 개인생활의 가장 다양한 측면에 적용된 규칙이며 왕의 사절과 백작 및 주교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에게 내려진 특수한 명령이기도 했다. 전체적으로 볼 때 샤를마뉴 시대에 만들어진 법률 문서는 샤를마뉴가 사법 행정과 대중 계몽에 관심이 많았다는 것을 뚜렷이 증명해준다.

 
통치의 한계

 그러나 샤를마뉴의 제국에 구조적인 결함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프랑크 제국의 모든 정치제도는 샤를마뉴의 뛰어난 능력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그가 사라지면 모든 것이 무너질 위기에 놓여 있었다. 이것은 샤를마뉴의 후계자인 루트비히 1세 때 프랑크 제국의 양상을 보면 훨씬 명확하다. 샤를마뉴의 교육정책으로 자신감을 얻은 성직자들은 항상 샤를마뉴의 신권(神權)정치를 고분고분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그들은 걸핏하면 자신들의 정치적, 교육적 원칙을 내세워 샤를마뉴의 신권정치에 반대하곤 했다.

 카롤링거 왕조와 함께 제국을 건설한 평신도 귀족들은 새로운 정복이 새로운 이권과 봉토를 약속해주지 않는 한 왕조와 확고한 유대를 맺을 수 없었다. 그러나 800년에 이르자 이미 도달한 국경선을 넘어 밖으로 더욱 팽창하는 것은 사실상 거의 불가능해졌다. 실제로는 이미 얻은 땅을 통합, 관리하며 외적으로부터 보호하는 데 필요한 경제적 자원과 기술적 수단도 불충분한 상태였다. 샤를마뉴의 제국은 로마 제국이 국가를 유지하는 데 사용한 수단들(화폐 경제, 봉급을 받는 관리, 상비군, 정비된 도로망과 통신망, 해안을 지키는 해군)을 갖고 있지 않았다. 샤를마뉴가 살아 있을 때 이미 해안은 노르만족의 위협을 받고 있었다. 806년에 샤를마뉴는 제국을 분할해 아들들한테 나누어줄 계획을 세웠지만 맏아들과 둘째 아들이 죽자 813년 아헨에서 아키텐의 루이(경건왕 루트비히)를 공동 황제로 만들고 유일한 후계자로 삼았다. 샤를마뉴는 불과 몇 달 뒤인 814년 1월 28일 아헨에서 세상을 떠났다.

 
인간성과 영향력

 샤를마뉴가 죽은 뒤 그의 뒤를 이은 후손들이 제국 내부의 평화와 통일성 및 국제적 지위를 유지하지 못했기 때문에 샤를마뉴의 명성은 죽은 뒤에 더욱 빛났다. 카롤링거 왕조가 단절된 뒤에도 서프랑크(프랑스) 왕국과 동프랑크(독일) 왕국의 정치적 전통은 샤를마뉴가 세운 선례에서 자양을 얻어 생명력을 유지했다. 오토 1세 때 아헨은 독일 통치자들이 대관식을 올리는 도시가 되었고 로마 교황에 대항한 대립 교황 파스칼리스 3세는 붉은 수염왕 프리드리히 1세의 요청으로 1165년에 샤를마뉴를 성인으로 추증했다. 프랑스에서는 존엄왕 필리프 2세가 샤를마뉴를 기리는 전통을 되살렸다. 샤를마뉴의 진정한 후계자가 독일인이냐 프랑스인이냐 하는 문제는 중세뿐 아니라 근대에 접어든 뒤에도 계속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나폴레옹은 샤를마뉴의 후계자라 자처했고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크리스트교 국가들이 통합해 ‘서방 유럽’을 구성하자는 논의는 샤를마뉴의 본보기를 상기시켰다.

 민간 전설과 문학도 이런 정치적 전통과 나란히 발전해 롤랑을 다룬 서사시에서 절정에 이르렀다. 샤를마뉴의 명성은 한때 그의 제국이던 지역 내부에만 머물지 않았다. 일부 슬라브어에서 왕을 뜻하는 단어는 그의 이름에서 파생한 것이다. 샤를마뉴는 전기적 문서를 전혀 남기지 않았다. 그의 인간성은 그의 행위와 동시대인들이 남긴 기록으로 조립할 수 있을 뿐이다. 샤를마뉴의 강렬한 개성은 분명 신의 뜻이 자신과 함께 한다는 굳은 신념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그는 마음속으로 전혀 모순을 느끼지 않고 개인의 독실한 신앙심과 일상생활의 쾌락, 종교적 사명감과 권력에 대한 강한 의지, 거친 태도와 지적 성장에 대한 갈망, 적과 타협하지 않는 태도와 공정함을 양립시킬 수 있었다. 그의 독실한 신앙심에는 정치적 조건이 붙어 있었기 때문에 제국과 교회는 제도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하나의 단위가 되었다.

  그의 제국은 2대 황제인 루트비히에서 끝났지만 로마 제국 멸망 이후 갈기갈기 찢어졌던 서유럽 사람들이 그 후 몇 세기 동안 의지할 수 있는 공통된 지적, 종교적, 정치적 유산을 재구성하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 물론 이런 유산이 샤를마뉴 혼자 힘으로 만든 것은 아니지만 그가 없었다면 상상하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그의 궁정 시인들 가운데 한 사람은 그를 ‘유럽의 아버지 왕(Rex Pater Europae)’이라고 불렀다. 사실 중세의 수백년 동안 유럽 역사에 그와 비슷한 발자취를 남긴 사람은 아무도 없다
 


제국의 분열

 샤를마뉴가 814년에 죽자 그의 아들 루이트비히 1세가 제국을 물려받았다. 그는 신앙심이 두터워 교회로부터 환영을 받았고 경건왕이라는 별칭도 얻었지만 난세를 헤쳐 나갈 능력이 부족하였으며 무능한 군주로 평가되고 있다. 제국 분열의 조짐은 루트비히 1세의 황후 에르멘가르드가 세 아들을 남기고 818년에 세상을 떠날 때부터 시작되었다. 이미 루트비히는 게르만족의 상속 유풍에 따라 제국을 그의 세 아들에게 분할 상속하기로 정해 놓았다. 장자 로타르 1세에게는 제위를 물려주어 제국의 중심부를, 차남 피핀과 삼남 루이 2세에게는 변경을 주기로 하였다. 그러나 에르멘가르드가 죽고 4개월 후 루트비히는 유디트와 재혼하여 사남 샤를(대머리 왕 샤를 2세)을 낳았고 그에게도 상속권이 생겼다. 그것도 늦게 얻은 귀여운 자식이고 형들에 비해서 어린 연령은 불이익을 받을 수도 있기 때문에 부친으로서는 자기가 살아 있을 때 상속 문제를 확실히 해둘 필요가 있었다. 이에 루트비히는 829년에 회의를 소집하고 샤를에게 제국의 중심부를 준다고 선언해 버렸다.

 여기서부터 부자간 혹은 형제간에 추잡한 상속 싸움이 시작되었다. 로타르는 아우 피핀과 일부 호족들의 호응을 얻어 반란을 일으켜 황후 유디트를 감금하고 로타르의 측근들이 궁중의 요직을 차지하여 영토 상속문제를 원점으로 돌렸다. 그러나 6개월 후 다시 루트비히가 일부 호족과 교회, 수도원의 도움으로 세력을 회복하여 영토 상속문제를 다시 논의하게 되었고 이에 불리함을 느낀 장자 로타르는 교황청과 말을 맞추어 놓고 알자스에서 회의를 열어 아버지인 루트비히를 퇴위시키고 세 아들은 유디트의 아들 샤를을 배제하고 합의하에 영토를 셋으로 나누어 가졌다. 하지만 이 합의는 오래 가지 않았다. 겨우 1년을 못 넘기고 형제들 간에 다시 싸움이 시작되었고 차남 피핀이 부친 루트비히와 손을 잡고 로타르에게 대항하였다. 호족들은 우왕좌왕하였고 교회는 에르멘가르드의 아들들을 외면하였으며 수도원이 확실하게 루트비히를 지지하자 로타르는 이탈리아로 도망갔고 그를 지지했던 많은 사람들은 처형되었다. 그리고 루트비히는 834년에 복위하였다.

 그 후 몇 년간 잠잠하였지만 차남 피핀이 죽자 부왕 루트비히는 기다렸다는 듯이 그 땅을 샤를에게 주었고 840년에 루트비히가 세상을 떠나자 다시 상속 분쟁이 전개되었다. 결국 843년에 베르됭 조약으로 제국을 삼분하여 로타르는 제호(帝號)와 중심부를, 삼남 루이는 라인강 동쪽의 동프랑크를, 샤를은 제국 서쪽의 서프랑크를 차지하였다. 이래서 제국은 동프랑크, 서프랑크, 중프랑크로 분할되었고 855년에 로타르가 죽고 세력이 약해지자 동프랑크의 루이와 서프랑크의 샤를이 870년에 메르센에서 다시 조약을 맺어 중프랑크의 로트링겐 일대를 빼앗아 나누어 가졌다. 이것이 오늘날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 세 나라의 출발이었고 그 판도도 지금과 비슷하였다.

 샤를 대제의 손자들은 이렇게 해서 영토를 얻었지만 그것은 오래갈 수는 없었고 결국 875년에 중프랑크에서, 이어 911년에 동프랑크에서, 987년에는 서프랑크에서 카롤링거의 왕통은 단절되었고 노르만인과 마자르인 그리고 이슬람인의 침입으로 유럽은 혼란에 빠졌다.


자료 출처
http://mtcha.com.ne.kr/world-man/france/man32-syarulmanyu.htm
http://tiny.britannica.co.kr/bol/topic.asp?mtt_id=88304

http://www.nobelmann.com/history/history_.htm

cafe.naver.com/fatewhtenight.cafe?iframe_url=/ArticleRead.nhn%3Farticleid=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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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콜라이 사망자 프랑스에서 발생, 대체 왜?


이콜라이 사망자가 발생했습니다.
프랑스에서 처음으로 이콜라이(E. coli) 감염 사망자가 발생했다고 합니다.

프랑스 보건당국은 1일(현지시간) 오전 남부 보르도 지방에서 이콜라이 감염으로 78세 여성이 사망했다고 밝혔습니다. 

숨진 여성은 지난달 24일부터 병원에서 신장병 질환인 용혈성 요독증후군(hemolytic uremic syndrome) 치료를 받아온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로써 유럽에서는 신종 병원성 대장균으로 인한 사망자가 총 50명으로 늘어났습니다. 이콜라이는 독일 북부 한 농장의 채소 새싹에서 발생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 저작권에 대한 내용은 본 블로그의 공지사항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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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우스
    원래 병을 앓고계신분이고 면역력이 약한사람이라 .....전염병에 쉽게걸리는게아닌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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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소영 제대혈 보관, 대체 제대혈이 뭐길래?

고소영 부부 등 스타부부들의 제대혈 보관의뢰가 늘면서 제대혈에 대한 네티즌들의 관심 또한 커지고 있습니다.

제대혈은 출산 때 탯줄에서 나오는 탯줄혈액입니다. 백혈구와 적혈구·혈소판 등을 만드는 조혈모세포를 다량 함유하고, 연골과 뼈·근육·신경 등을 만드는 간엽줄기세포도 갖고 있어 의료가치가 매우 높죠.

1988년 프랑스에서 판코니빈혈(Fanconi's anemia; 백혈병과 척추기형을 동반하는 빈혈)을 앓고 있는 5세 남자아이에게 처음으로 이 혈액에서 뽑은 조혈모세포를 이식하여 성공했다고 합니다.

특히 골수를 구할 수 없는 백혈병 환자에 대한 새로운 혈액암 치료법으로 자리를 잡았으며, 자신이나 가족의 백혈병과 암·혈액질환 등의 질병을 치료하는 데 적극적으로 활용됩니다. 골수를 이식하는 것보다 부작용이 적고 수술 성공률도 높습니다.

심근경색증과 퇴행성관절염·알츠하이머병 등의 치료에도 이용될 것으로 기대되는데, 이 때문에 제대혈을 초저온 상태로 보관해 두는 제대혈은행이 운영중이라고 합니다.

※ 저작권에 대한 내용은 본 블로그의 공지사항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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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텔레콤 직원들 24명의 잇따른 자살, 이유는?

 

 지난 1년 반동안 무려 23명의 직원이 프랑스 텔레콤에서 어제 또 직원 1명이 자살을 시도한 것으로 드러나 파문이 확산되고 있습니다.

 AFP 통신은 프랑스에서 가장 큰 통신회사인 프랑스 텔레콤이 최근 잇따른 자살 사고로 국정 조사에 직면한 가운데, 또다른 자살 시도가 발생했다며 이같이 전했습니다.

 어제 자살 시도를 한 직원은 고객센터에서 일하는 53살의 여성으로, 지난 1년간 부서 이동을 3차례나 겪었으며 이로 인한 스트레스가 극심했던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프랑스 텔레콤 경영진은 최근 계속되고 있는 비극을 중단시키는 것이 무엇보다 우선이라면서 의료진을 각 부서에 보내 잠재적 자살 요인을 분석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노조는 그러나 대규모 구조조정과 새 수익모델 창출과 관련한 업무 스트레스가 이번 자살 사태의 원인이라면서 의회의 국정 조사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정부 지분이 27%이며 직원이 10만 명인 프랑스 텔레콤에서는 지난해 2월부터 최근 사이 23명의 직원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정보 출처 : AFP통신, YT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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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나르 베르베르 내한, 차기작 주인공은 한국인?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프랑스 소설가’ 베르나르 베르베르(48·사진)가 3일 오전 입국했습니다.

 

 장편소설 '신'(열린책들 펴냄)의 완간과 100만 부 돌파 기념으로 방문한 베르베르는 서울 웨스틴조선호텔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베르베르는 신작 다음 달 프랑스에서 출간되는 신작 소설의 주인공이 한국인이라고 밝혔습니다.

 전작인 '신'에서도 위안부였던 할머니를 둔 한국인 캐릭터를 등장시킨 작가는, 차기작인 '카산드라의 거울'에서는 남자주인공으로 한국인 '김예빈'이라는 인물이 등장한다고 밝혔습니다.

 한편
그의 작품이 유독 한국에서 사랑받는 이유에 대해선 “그런 질문을 많이 받아 고민했다”고 운을 뗀 뒤 “한국이 창의력 높고, 상상력 뛰어나고, 미래지향적이다보니 제 작품이 맞는 것 같다”고 했습니다.

 지금 베르베르의 신을 2권을 읽고 있는데 정말 강추합니다!

 이 글에 일부 포함 된 정보의 출처는 티워(제휴 언론사들 포함)로서 저작권은 픽플커뮤니케이션즈에 있고, 픽플커뮤니케이션즈의 일원이자 티워 운영을 총괄하고 있는 필자는 저작권법에 저촉되지 않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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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티셔츠' 입고 방송한 프랑스 앵커 화제


 프랑스의 한 방송인이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얼굴이 그려진 노란색 티셔츠를 입고 나와 방송하는 동영상이 네티즌들 사이에서 화제가 된바 있었다.

 유튜브에 올라온 이 동영상은 총 1분 41초 분량으로 진행자가 노무현 대통령의 얼굴과 '사람사는 세상'이라는 글씨가 새겨진 노란색 반팔 티셔츠를 입고 방송을 진행하고 있다.

 오마이뉴스의 보도에 따르면 동영상의 주인공은 로랑 드뢰 (Laurent Dereux)로 프랑스 WEO TV의 앵커이다. 그는 매일 오후 6시부터 8시까지 '대광장'(La Grande Place)이라는 방송을 진행하고 있다. 이 방송은 뉴스를 포함해 문화, 사회현상을 다각적으로 다루고 있다. 이 방송을 위해 그는 매일 새로운 티셔츠를 입는데, 방송을 담당하는 그래피스트들이 그에게 티셔츠를 제공한고 한다. 그래피스트 팀 중에 한국인이 한 명 있는데, 그 분이 어느 날 그에게 노무현 전 대통령을 추모하는 뜻으로 '노무현 티셔츠를 입지 않겠냐'고 제안해서 이뤄졌다고 한다.

 로랑 드뢰가 평소 노무현 전 대통령을 존경해서 티셔츠를 입었다는 소문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지만, 네티즌들은 해외의 방송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의 티셔츠를 보게된 것에 기뻐하고 있으며 체 게바라의 경우처럼 노무현 전 대통령 티셔츠도 하나의 패션 아이콘으로 만들자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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