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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6)
대자연이 살아숨쉬는 비무장지대(DMZ)


 비무장지대는「정전협정」에 규정되어, 군사분계선에서 양측이 2km씩 후퇴하여 완충지대로서 설치한 지역이다. 서쪽은 한강 하구의 교동도, 동쪽으로는 강원도 고성군 명호리에 이르는 248km에 이르는 한반도 허리를 가로지르는 분단의 상징이다. 비무장지대 내의 군사분계선에는 철책선이 없고, 군사분계선임을 표시하는 표지판이 설치되어 있다.「정전협정」에 의하면 비무장지대에서는 개인 화기(권총 혹은 단발식 보총) 이외에는 무장이 금지되어 있고, 군인과 민간인의 출입 또한 통제되었다.
 
1. 비무장지대의 역할

「정전협정」제10항에 의하면, 비무장지대 내의 군사분계선 이남지역은 UN군 총사령관이, 이북지역은 인민군 및 중국군 총사령관이 관리책임을 맡게 되어 있다. 따라서 이러한 문제 때문에 남북한이 비무장지대에 대한 독자적인 결정과 변화를 시도할 수 없게 되어있다. 이러한 문제는 경의선과 동해선, 그리고 금강산 육로 관광문제를 둘러싸고, 해당 지역의 비무장지대 통과에 대한 관리 책임을 둘러싸고 북한과 미국 간에 신경전이 벌어지는 근거가 되기도 했다.

2. 전망


 최근 비무장지대는 남과 북의 대립의 상징으로서만 아니라 자연의 보고로서 보존의 가치가 높은 지역으로 인식되고 있다. 이 지역은 오랫동안 개발이 정지된 곳이어서 자연환경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기 때문이다. 한편 비무장지대는 지난 2000년의 〈남북정상회담〉 이후 경의선과 동해선, 그리고 금강산 육로관광이 실시됨으로써 조금씩 개방되고 있다. 대표적으로 지난 1998년 6월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소떼 방북이 판문점을 통해 이루어졌고, 분단 반세기만에 처음으로 2003년 10월에는 정주영 체육관 개관식과 남북 합동 축하공연 참가를 위한 대규모 방북단이 판문점이 아닌 군사분계선을 넘어 북한을 방문하였다. 앞으로 대규모 방북이나 금강산 관광, 경의선·동해선 연결 등이 이루어지면 군사분계선의 여러 곳이 개방될 것이며, 이렇게 될 경우 비무장지대와 군사분계선의 변화가 요구될 것이다. 이는 곧 한반도의 평화체제 수립에 한 걸음 더 가깝게 다가서는 것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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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과 정전협정, 그 역사적 의의는?
 

 “한국전쟁”은 먼저 양측에 엄청난 인명피해를 초래하였다. 통계를 보면 남한측은 민간인 사망 37만 여명, 부상 22만 여명, 실종 38만 여명이며, 군인은 사망 13만 여명, 부상 45만 여명, 실종 2만 여명으로 민간인과 군인을 합치면 약 160 여 만명이 피해를 입었다. 반면, 북한측은 민간인 사망 40만 여명, 부상 160만 여명, 실종 68 만 여명이며, 군인은 사망 52만 여명, 부상 22만 여명, 실종 9만 여명으로 합계 350 만 여명에 달한다. UN군은 사망 3만 여명, 부상 11만 여명, 실종 6천 여명이며, 중국군은 사망 11만 여명, 부상 22만 여명, 실종 3만 여명이었다. 위의 수치상으로 당시 남북한 전체 인구가 약 3천만명이라고 할 때 약 1/5이 피해를 입었으며 한 가족에 1명 이상이 피해를 주었다고 할 수 있다.


 “한국전쟁”은 막대한 인명피해와 함께, 사회·경제적인 측면에서도 엄청난 피해를 안겨주었다. 남한의 경우 일반공업시설의 40%, 주택의 16%가 파괴되었고, 북한의 경우는 피해가 이보다 더 심해서 전력의 74%, 연료 공업의 89%, 야금업의 90%, 화학공업의 70%가 피해를 입었다. 한국전쟁은 양 측에서 600만 명이 넘는 인명피해를 입은 참혹한 전쟁이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한국전쟁으로 하여금 남북한에 공고한 분단체제가 성립되었다는 점이다. 한국전쟁은 양 측에게 반공이데올로기의 강화와 반미이데올로기의 강화를 가져왔으며, 증오와 대립을 심화시켰다. 전쟁을 통해서 분단선을 제거하려던 애초의 목표는 사라졌고, 오로지 서로에 대한 증오와 공고한 분단체제만을 가져다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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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한국전쟁과 그 정전협정
 
 1950년 6월 25일 새벽을 기해 전 전선에서 침공을 감행한 인민군은 불과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하고, 7월 19일에는 대전을 점령한데 이어, 8월 31일에는 낙동강 전선까지 진출하였다. 전쟁 개시 두 달 여만에 남한 전체 국토의 대부분을 점령한 것이다. 반면 이승만 정부는 전쟁에 대한 효과적인 대응을 하지 못한 채 6월 27일 대전으로 정부를 이전하고, 7월 8일에는 대구, 8월 18일에는 부산을 임시수도를 정하는 등 후퇴를 거듭하고 있었다.


  “한국전쟁”의 과정은 몇 개의 단계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우선 첫 단계는 인민군의 공세기로서 전쟁 개시에서 9월 15일까지의 상황으로 낙동강 전선까지 인민군이 진출했던 단계, 두 번째 단계는 UN군의 ‘인천상륙작전’ 성공이후 UN군의 전면적인 공세 단계로서 9월 15일에서 11월 초까지의 단계, 세 번째 단계는 중국군의 참전으로 전선이 다시금 중부 지방에서 교착되는 인민군과 중국군의 합동공세 단계로서 1950년 11월 초에서 1951년 1월까지의 단계, 네 번째 단계는 전선이 교착되고 휴전이 모색되는 단계로서 1951년 2월에서 5월까지의 시기, 마지막으로 휴전협상과 소모전의 단계로서 1951년 5월에서 정전까지의 단계이다.

  북한의 한국전쟁 개시는 즉각적인 미국의 군사적 개입을 가져왔다. 전쟁개시 직후,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은 해·공군에 출동명령을 내리고, UN 안전보장이사회에서 북한을 침략군으로 규정하고 UN군을 조직하였다. 7월 1일에는 UN군 지상부대가 부산에 상륙하면서 본격적으로 한국전쟁에 개입하였다. UN군의 개입으로 전쟁은 남한과 북한의 국내전이 아니라 UN군과 북한, 그리고 중국군으로 이어지는 국제전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전쟁 초기 일방적으로 밀리던 한국군은 9월 15일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함으로써 전세를 역전하였다. 인민군은 괴멸적인 타격을 받게 되었으며, 압록강 근처에까지 후퇴하게 되었다.

  그러나 중국군의 참전으로 전쟁은 다시금 중부전선에서 교착되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전쟁은 어느 한편의 승리로 귀결되기에는 어려워졌다. 이에 소련 UN 대표 말리크는 전쟁 당사국에게 휴전을 제의하게 되었고, 1951년 6월 30일 리지웨이 UN군 최고사령관의 휴전 제의와 김일성·팽덕회의 동의로 휴전회담이 진행되게 되었다. 양측은 2년이 넘는 휴전 회담을 거쳐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에 조인하고 전쟁을 중지하였다.

※ 국가기록원에서 제공받은 글로 내용이 The Neo Renaissance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더 많은 내용은 국가기록원 홈페이지에서 찾아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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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의 정전협정, 그 배경은?

 


 고전적인 정의에 따르면 ‘정전’은 휴전의 전제로서 짧은 기간의 적대 행위 중단을 의미한다. 반면 ‘휴전’은 전쟁의 중단을 의미하지만 전쟁원인의 해결에 합의하지 않은 채 전쟁을 종료한다는 점에서 「평화조약」과는 구분된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휴전협정」이 전투행위의 일시적 중단뿐만 아니라 전쟁의 재발방지 조치 마련 및 궁극적 포기까지 내포한 개념이 되었다. 현재 북한은 휴전이라는 용어는 사용하지 않고 있으며, 정전이라는 용어만 사용하고 있다. 현재는 대체로 평화체제가 완전히 구축된 '전쟁의 종식'과의 차이만 구별된 채 휴전 혹은 정전이라는 개념이 중복되어 사용되고 있다.

  UN 연합군의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전세가 역전되자, 중국은 한국전쟁의 참전을 결정하였고, 이로 인해 한국전쟁의 성격은 완전히 변모되었다. 즉, 관련당사국간의 전쟁에서 이데올로기간의 전쟁으로 확대된 것이다. 또한 중국군의 참전과 전선의 교착 상태가 지속되면서 어느 한쪽이 군사적으로 완전히 승리할 가능성은 요원해졌다. 실제로 1951년 초 전선은 다시금 38선 부근으로 고착되었고, 상대방 진영을 돌파하기 위한 작전보다는 진지방어전에 주력하게 되었다. 당시 중국군 사령관이었던 팽덕회도 “한국전쟁에서 신속한 승리가(速勝) 불가능하다”라고 인식했고, 맥아더 역시 중공군 개입이후 UN군은 전혀 ‘새로운 전쟁’과 마주하게 되었음을 인정하였다. 당시 미국은 맥아더의 중국 본토까지를 포함하는 ‘확전’ 주장과 트루먼을 중심으로 한 ‘휴전’ 파간의 논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결국 미국에서의 ‘확전’과 ‘휴전’ 논쟁은 맥아더의 해임을 가져왔고, 맥아더의 뒤를 이은 리지웨이 사령관은 북진에 대한 제한을 명령하면서 제한적인 전쟁만을 지시하였다. 양측의 군사적 승리에 대한 불확신, 미국 내부에서의 전쟁에 대한 전략 수정, 소련의 긴장 완화에 대한 요구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정전이 제의되었고, 2년여의 지루한 공방 끝에 불안정한 「정전협정」이 조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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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족상잔의 비극, 6.25 한국 전쟁
 

 1950년 6월 25일 새벽을 기해 전 전선에서 침공을 감행한 인민군은 불과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하고, 7월 19일에는 대전을 점령한데 이어, 8월 31일에는 낙동강 전선까지 진출하였다. 전쟁 개시 두 달 여만에 남한 전체 국토의 대부분을 점령한 것이다. 반면 이승만 정부는 전쟁에 대한 효과적인 대응을 하지 못한 채 6월 27일 대전으로 정부를 이전하고, 7월 8일에는 대구, 8월 18일에는 부산을 임시수도를 정하는 등 후퇴를 거듭하고 있었다.


  “한국전쟁”의 과정은 몇 개의 단계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우선 첫 단계는 인민군의 공세기로서 전쟁 개시에서 9월 15일까지의 상황으로 낙동강 전선까지 인민군이 진출했던 단계, 두 번째 단계는 UN군의 ‘인천상륙작전’ 성공이후 UN군의 전면적인 공세 단계로서 9월 15일에서 11월 초까지의 단계, 세 번째 단계는 중국군의 참전으로 전선이 다시금 중부 지방에서 교착되는 인민군과 중국군의 합동공세 단계로서 1950년 11월 초에서 1951년 1월까지의 단계, 네 번째 단계는 전선이 교착되고 휴전이 모색되는 단계로서 1951년 2월에서 5월까지의 시기, 마지막으로 휴전협상과 소모전의 단계로서 1951년 5월에서 정전까지의 단계이다.

  북한의 한국전쟁 개시는 즉각적인 미국의 군사적 개입을 가져왔다. 전쟁개시 직후,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은 해·공군에 출동명령을 내리고, UN 안전보장이사회에서 북한을 침략군으로 규정하고 UN군을 조직하였다. 7월 1일에는 UN군 지상부대가 부산에 상륙하면서 본격적으로 한국전쟁에 개입하였다. UN군의 개입으로 전쟁은 남한과 북한의 국내전이 아니라 UN군과 북한, 그리고 중국군으로 이어지는 국제전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전쟁 초기 일방적으로 밀리던 한국군은 9월 15일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함으로써 전세를 역전하였다. 인민군은 괴멸적인 타격을 받게 되었으며, 압록강 근처에까지 후퇴하게 되었다.

  그러나 중국군의 참전으로 전쟁은 다시금 중부전선에서 교착되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전쟁은 어느 한편의 승리로 귀결되기에는 어려워졌다. 이에 소련 UN 대표 말리크는 전쟁 당사국에게 휴전을 제의하게 되었고, 1951년 6월 30일 리지웨이 UN군 최고사령관의 휴전 제의와 김일성·팽덕회의 동의로 휴전회담이 진행되게 되었다. 양측은 2년이 넘는 휴전 회담을 거쳐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에 조인하고 전쟁을 중지하였다.

※ 국가기록원에서 제공받은 글로 내용이 The Neo Renaissance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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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에서 한반도 전쟁, 그리고 이명박 당선까지


1. 들어가며


 한반도의 일제치하에서의 상황부터 6.25 발발까지의 상황을 다룰 것이며, 이러한 상황들을 국제정치학적 관점으로 살펴보며, 한반도의 국내적인 상황보다는 한반도를 중심으로한 국제정치학적 지리를 주되게 다룰 것이다.

 한반도의 시대적 상황들로 보아 그 시기 한반도의 주된 영향을 끼치고, 흐름을 잡아나갔던 국가들은 미국과 소련이라고 판단된다. 그것은 한반도의 분단에 있어서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국가가 이 두 국가이기 때문이며, 그러므로 한반도 문제를 다루었던 전시회담의 성격과  더불어 그들의 입장, 그리고 해방후의 그 두 국가의 입장의 변화추이들을 살펴볼 예정이다. 또한 한반도 분단에 있어서 그들이 어떠한 역할들을 하였으며, 그들의 입장 변화에는 어떠한 요소들이 놓여있는지를 살펴볼 것이다.

2. 전시회담 

 미소 연합국은 두 경쟁적 사회 체제의 약점을 해결하고 전후에 분출할 혁명적인 사회 변화의 통제 가능성을 기대하면서 회담을 진행시켰다.  그러므로 전시회담에 임하는 국가들의 이해과 그에 대한 관철, 그리고 그들의 입장은 향후 세계질서재편과 밀접히 연관되어져 있는 것이다.

 한국의 전후 처리 방안에 대해 연합국간의 논의가 시작된 것은 43년 11월 ‘카이로 회담’부터 이다. 이후에 테헤란 회담, 45년 2월 얄타회담  그리고 포츠담 회담 등을 걸쳐 한반도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졌다.

 이러한 전시회담의 두드러진 특징은 ‘국제주의’적 정책을 구사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국제주의적 대회 정책의 핵심고리는 전면적인 문호 개방 정책의 추구하에 형성된 국제 협정에서 미국의 지배적인 위치를 전제, 폐쇄적이고 직접적이기 보다는 개방적이고 간접적인 접근 방색을 통하여 이해를 관철시킨다는 것이다. 따라서 소련에 대한 입장도 직접적인 반공이라기 보다는 견제의 측면으로 주도하려고 하였던 것이며, 전후 식민지에 대한 처리 방시도 혁명과 전쟁을 방지하는 체제 통합 구상을 전제로 기존의 단독 식민 통치에서 다국 신탁 통치로 선택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연합국의 국제외교의 변화는 미국의 세계 질서 재편 과정에서 미국경제의 확대 재생산을 위해 불가결한 세계적 외연으로 포섭하여야 하고, 동시에 세계적 차원의 계급 대항에 대응하여 미국을 본영으로 하는 경제․정치․군사적 통일체로서의 자본주의 세계 체제의 존립 요건을 보장해야만 했다. 이러한 점에서 미국의 세계 정책은 반공, 반혁명을 그 핵으로 하는 세계 전략 체제의 총괄로서 통일적으로 파악될 수 있다. 또한 수많은 식민지 국가에서 일어나고 있던 반제 반파시즘 운동과 전시중이라는 상황이 고려되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3. 세계 2차대전의 종결과 미소의 정세․전략 

 세계 2차대전의 종결후의 국제정세는 간단하게 말해서 세계질서의 재편기라고 할 수 있고 이는 사회주의 진영과 자본주의 진영으로의 양분화와 함께 그 사이의 광범한 식민지․반식미지의 존재로 나타난다. 따라서 이 시기에는 자본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간의 체제모순이 주요 모순으로 등장하게 된다. 한반도와 같은 경우 이와 같은 세계질서 재편과정에서 나타나는 제반 모순이 가장 극명하게 작용된 곳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세계질서 재편기의 국제정세에 대한 고찰이 해방후부터 한국전쟁 발발까지의 상황을 이해하는데 결정적이라 할 수 있겠다.

 1) 미국의 세계전략 

 미국의 세계전략을 올바로 알기 위해서는 미국의 국내정세를 더불어 알아야 하겠다. 미국은 세계 2차대전을 통해 경제적 발전을 향유, 이에 기반하여 종전 직후에는 비교적 유화적인 국제주의적 대회정책을 구사하였다. 그러나 국제주의 시기를 경과하면서 미국은 종전 후 급속한 동원 해제와 전쟁경제 해체과정에서 ①국내 독점자본의 생산기반이 위기에 봉착하고, ②국내 노동계급 등의 계급운동의 광범한 확산으로 점차 심각한 정치․경제적 위기에 직면하였다. 이러한 국내적 상황과 맞물려 대외적으로는 구식민지체제의 붕괴와 전세계적수준에서의 민족해방운동의 고양, 그리고 동구를 중심으로한 13개국의 자본주의 진영 이탈과 사회주의권으로의 편입으로 인하여 미국 독점자본은 상품시장을 상실할 위기에 직면하였다. 이러한 국내․국외 정세와 맞물려 미국은 더욱 공세적인 사회주의권 고립정책과 식민지․반식미지 민족해방운동 억압(그리스-필리핀 민족해방운동의 폭력적 억압), 독일․일본에서의 역전정책 및 이의 미국 헤게모니체제로의 편입 등을 추구하였다. 이로보아 미국은 대외적으로 사실상 제국주의적 지배전략을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2) 소련의 세계 전략 

 이 시기 소련은 세계질서 재편에 있어서 미국과 더불어 가장 중요한 주체였다. 1945년 세계대전 종전의 시점에서 볼 때 소련은 경제력과 군사력에서 미국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열세에 있었다. 대전 당시 유럽에서의 주대립전선은 독소전선이었으며, 이 힘겨운 전쟁에서 미국이 전쟁기간 중 세게의 공장으로서 등장하는 동안 비교도 안 될 만큼의 많은 인적․물적 대가를 치르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 결과 종전시 소련은 일국수준에서의 최소한의 사회주의체제의 유지조차도 용이하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따라서 종전 후 소련에게는 국내경제의 복구와 체제유지가 가장 긴급한 과제가 아닐 수 없었다. 2차대전 후 한국전쟁 종결시까지 소련이 과도할 정도로 일관되게 견지한 수세적․대미유화적 국제협력노선과 국내적 억압통치는 경제와 정치․군사의 두 수준 모두에서 미국에 비해 엄청나게 열세에 놓여있다는 객관적 조건 아래 강화되는 제국주의 독점자본의 공세에 대응하여 일국수준에서의 사회주의체제라도 보전하려는 고육지책의 결과로 이해된다. 스탈린주의의 대내외적 편향성이 초해한 결과는 식민지․반식민지 민족해방투쟁에 대한 무지원과 제국주의와의 편향된 타협노선 그리고 대내적인 엄청난 강권통치노선으로 일관했던 것이다. 그것은 지역적으로 심한 차별성을 띠며 관철되었는데 유럽의 동구지역에 대한 상대적 중시에 비하여 유럽의 동구이외의 지역에서의 공산주의 운동, 예컨대 한국등에서의 공산주의 운동은 대미타협과 무지원으로 일관, 이러한 소련의 유화적 노선이 관철된 대표적인 사레였다. 소련이 미국으 분할 점령안에 수동적으로 동의한 것은 한반도에서의 미국과의 마찰을 최소화하는 대신 일본 점령에 개입할 기회를 추구하고 만주에서의 이권을 확보하며 동유럽지역의 소련군 진주를 공고화하려는 의도에 따른 것이다.  

 4. 미소의 대한정책 

 위에서 보여지는 미소의 국내․국제 정세속에서 연합국의 세계전략을 살펴 보았다. 그렇다면 이러한 미소의 세계전략은 한반도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으며, 그것은 어떠한 방식으로 드러났을 것인가.

  1) 미국의 대한정책 

 2차대전 직후 미국의 동북아정책의 핵심은 변혁을 추구하고 있던 동북아를 미국의 이해에 맞게 세계자본주의권내로 편입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한반도에서 이러한 정책을 관철하는 데에는 몇 가지 장애가 가로놓여 있었다. 첫째, 한반도에 소련의 영향력이 강하게 미치고 있었다는 점이다. 만약 한반도가 소련의 세계질서재편의 범위에 편입된다면 이 지역은 제 2의 동구가 될 가능성이 많았다. 독일 패망후의 동구권에서의 움직임은 미국에게는 자본주의권의 축소와 시장경제의 축소를 의미하였으며 이와 같은 상황이 동북아에서는 나타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또하나의 미국을 어렵게 하는 또 하나의 장애는 중국내전이 친미적인 국민당정부에게 점점 불리하게 진행되었다는 것이다.

 미국의 대한정책도 기본적으로는 이러한 대동북아정책의 기조위에서 이루어졌다. 게다가 한반도가 소련과 바로 국경을 접하고 있다는 지정학적인 특수성으로 인하여 한반도는 군사적으로 더욱 중요했다.

 그러므로 미국은 한반도에 있어서 반공친미국가를 한반도에 구축하는 것이 미국의 대한정책의 가장 중요한 목표가 될 수 밖에 없었으며 이를 기본적으로 축으로 하여 대한정책이 수립되었다. 미소공동위원회에 참여한 미국의 한 관리는 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여, 미국의 대한정책의 핵심은 한반도가 소련의 영향권 아래로 들어가지 않도록 하는 것에 있다는 점을 잘 보여주고 있었다.

 한국의 독립이 제2차 목표이므로 금후 수년내에 완전한 독립을 하게 될 한국 정부의 구성이 미국의 이익에 맞는 것으로 믿어지지는 않는다. 그리고 유엔 기구의 침략을 방지할 수 있는 능력의 합리적인 증거를 보여줄 수 있을때까지 미국은 필요하다면 소련과 더불어 한국의 영토를 보전하며 한국의 국제관계에서 어떤 긴요한 특권을 행사하여야 될 것이다. 따라서, 어떠한 한국 임시정부의 구성도 미국이 상당한 기간동안 적어도 최고위 수준에 있어서 어떤 형태와 위장된 지배권을 행사한다는 전제조건에 기초를 두어야 할 것이다. 미국은 이러한 정책에 기초하여 38선 이남을 점령, 군정을 실시하고 직접통치하기에 이르렀다.

 2) 소련의 대한정책 

  전후 식민지 처리에 대한 소련의 입장은 1920~30년대 스탈린을 중심으로 형성된 대외 정책의 이론적 근거로부터 연원한다. 소련의 사회주의 건설속에서 ‘일국 사회주의론’으로 확립되면서 대 자본주의의 진영과 국제 공산주의 운동에 대한 일련의 자기 정리가 이루어졌다.

 이는 혁명 직후 불리한 국제 정치적 상황에서 소련의 안보를 확보하고 국력 강화를 위한 현실적인 필요성에 의한 것이었으며,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라는 과제는 세게 혁명의 기지로서 소련 방위라는 임무가 국제 공산주의 운동 세력에 부과되었다. 그 결과 소련은 미국과의 유화정책을 택하게 되었고, 이는 한국 문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더더구나 군사 작전에서도 부차적이었던 한국 문제에 대해 독자점령의 구상보다는 미국의 신탁 통치 논의에서 몇 가지 확인 정도를 거치며 협조에 응했다. 결국 소련은 국경 주변의 완충 지대 형성이라는 정책 실현을 위해 한반도에서 비우호적 정부의 형성을 방지하려는 수준에서 머물렀을 뿐, 한반도 자체를 주전략 지역하하지는 않았다.

 5. 한국 전쟁의 발발 

  한국 전쟁의 발발원인으로 가장 크게 살펴보고자 하는 부분은 국내적 원인과 국제적 원인이라 할 수 있겠다. 이는 기간의 미소의 대한정책에 있어서 한국전쟁 발발 원인을 찾아보고자 함이며, 또다른 하나는 이러한 국제정세와 맞물려서 국내적인 상황에서 돌아보고자 함이다.

 한국 전쟁의 발발의 원인중 가장 큰 역할을 해던 것은 미국의 이중적인 대극동-대한반도 정책이라고 하겠다. 그리고 또다른 원인으로는 일제치하 후의 피폐한 상황과 이승만 정권의 한계와 위기를 꼽고 싶다. 

  한국전쟁의 발발까지의 미소의 대한정책에 있어서 가장 큰 영향을 끼쳤던 것은 중국혁명이라고 볼 수 있다. 중국혁명은 그간 부차적인 존재로 머물러있던 한국이라는 존재를 표면위로 부상시키게되는 역할을 한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중국이 어떠한 위치였으며, 중국혁명이 미소정책에 있어서 어떠한 변화를 불러일으켰는지 살펴보자.

 중국혁명 이전에 중국에서는 공산당과 국민당이 큰 세력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여기서의 국민당은 미국이 친미적정부를 만들기 위해 지원을 하고 있었던 당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놀랍게도 중국에서는 공산화가 되었고, 미국이 중국 공산당내에서 벌였던 모든 공작 또한 수포로 돌아가게 되었다.

 이러한 중국혁명이 시사하는 바는 미국에게는 완충지대의 역할을 해줄 한반도라는 나라 역시 공산화의 가능성이 있다라는 것이며, 중국에서의 실패는 미국에게 ‘제 2의 중국’을 만들 수는 없다는 결의를 갖게 하기에는 충분하였다. 그러나 미국은 여기에서 아주 교묘하게 그들의 입장은 숨기고 난마하게 된다. 이 시기 미국은 중요한 이중적 외교자세를 보이는데, 그것은 즉 1948~50년 기간에 동아시아에서의 반혁명 정책을 한층 강화시켜가는 한편, 그 해석 여하에 따라서는 남한을 버린 것 같은 외교 자세를 취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미국은 중국혁명의 성공, 즉 미국의 국제전략의 실패를 경험하면서도 중국혁명 당시 직접적인 개입을 하지 않는다. 그러한 모습 속에서 스탈린 혹은 김일성에게 한반도와 같은 상황에서도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는 암시를 갖게된다.

 또한 소련은 중국혁명의 성공을 목도하게 되면서, 한반도와 같은 경우도 쉽게 소련의 세계재편의 질서의 범주하에 편입시킬 수 있으리라고 자신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미국의 미끼를 덥썩 물은 소련과 북한은 한국전쟁의 발발원인이 될 수 있다 하겠다.  

 그 태동의 과정에서 많은 정치 세력의 반대를 무릅쓰고 출현한 이승만 정권은 초기부터 숱한 정치 경제 사회적 문제를 노정하고 있었다. 이것은 모두 정권의 정통성과 연결된 문제로써 하나는 사회 경제적인 수준의 문제였고, 다른 하나는 정신적, 민족 이데올로기적 문제와 관련되는 것이었다. 사회 경제적인 수준의 경우 가장 중요한 것은 미군정이 일제 시대의 모순과 착취구조를 거의 혁파하지 않은 데다가 이승만 정권이 이를 그대로 계승한 데서 연유한다. 이러한 문제점에다가 경제 상황 또한 악화일로로 치닫고 있었다. 정부 수립 후 남한의 물가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게 되고, 쌀값 또한 폭등하게 된다. 이같은 쌀값 폭등으로 도시와 농촌의 많은 사람들이 근근히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조차도 미국의 원조에 의해서 지탱되고 있었다. 당시 이승만 정권은 미국의 경제 원조가 중단된다면 그 즉시 붕괴될 상황에 놓여 있었다. 또한 이승만 정권의 위기로는 정권의 한계로 인하여 생겨난 남한 농민들과 군인들의 자기 체제에 대한 저항도 꼽을 수 있다. 일제 시대 이래의 토지 모순 구조의 온존과 그것의 개혁에 대한 기대의 무산, 물가의 폭등, 절대 빈곤과 기아, 친일파의 발호, 정부의 무능, 점점 줄어드는 통일 정부 수립의 가능성...등등이 남한 민중들의 인내를 한계롤 내몰아 가고 있었다. 이들의 저항 또한 이승만 정권의 위기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다.

6. 나가며 

 이상이 전시회담부터 한국전쟁의 발발 원인까지 살펴본 결과이다. 전반적으로 국제정세를 지배하는 것은 패권이며, 이러한 나라들의 패권을 안정시키기 위한 것이 여직까지의 국제질서의 모습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것은 한반도의 문제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러한 국제정세의 틈바구니 속에서 우리는 한국전쟁을 발발하게 되었으며,
2009년 오늘까지도 세계의 유일한 분단국가의 국민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한국의 역사와 기록에 대한 정보는 국가기록원에서 더 찾아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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