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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1)
십자군, 성전과 약탈의 역사
 지중해를 무대로 전개된 문명교류의 역사

- 십자군, 성전과 약탈의 역사를 읽고

서점을 찾았을 때, 이 책이 바로 눈에 들어왔다. 요즘 읽고 있는 책이 '아랍인의 눈으로 본 십자군 전쟁’인데다가 요즘 문화교류사에 관심이 많기 때문이었다.

이 책은 십자군 전쟁을 통해 지중해를 무대로 전개된 문명교류를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다.

저자는 십자군전쟁을 지중해 양편의 기독교 유럽과 이슬람교 중동이 본격적으로 대립하고 충돌한 사건임과 동시에 기독교와 이슬람 문화의 융합을 촉진한 사건으로 보고 있었다.

11세기 이후 서유럽 사회는 안으로 인구의 증가, 농업 생산의 증대, 도시의 부활 등으로 오랜 침체 끝에 수세의 입장에서 벗어나 적극적인 대외 진출을 꾀하였다. 엘베 강을 넘어 독일인이 슬라브 땅에 식민 운동을 시작하였고, 이베리아 반도에서는 이슬람교도에 대한 재정복 운동이 전개되었다. 무엇보다도 교황권의 신장, 이탈리아 상인과 봉건 제후들의 세속적 욕망, 성지 탈환등 여러 요인이 복합되어 일어난 십자군 전쟁이 유럽 세력 팽창의 대표적 사건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십자군 전쟁처럼 성스러운 이름에 가장 세속적인 욕망이 결합된 전쟁은 없으며, 신의 이름을 빌어 약탈과 살인․만행이 판을 친 전쟁이 없을 것이다. 전쟁의 발단은 예루살렘이었다. 예루살렘은 유대인․기독교인․이슬람 인 공통의 성지였다. 유대인에게는 다윗의 우물이 있는 어머니 도시요, 기독교도에겐 예수가 죽어 부활한 곳, 이슬람교도에겐 마호메트가 머무른 곳이기 때문이다. 당시 예루살렘을 지배하고 있던 이슬람 인들은 기독교인의 성지 순례를 방해하지 않았다. 그런데 셀주크 투르크 족이 이 지역을 장악하면서부터 기독교인의 성지 순례는 금지되었다. 셀주크 투르크 족은 중앙 아시아에서 일어난 민족으로서 열렬한 이슬람교도가 되어 세력을 팽창시키고 있었다. 위협을 느낀 동로마 제국 황제 알렉시우스 1세는 교황 우르반 2세에게 원조를 요청했다. 우르반 2세는 이것이 비잔틴 교회를 로마 교회에 복속시킬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1095년 11월 우르반 2세는 클레르몽에서 회의를 개최, 성지탈환을 위한 십자군 파병을 제창했다. 웅변술 이 뛰어났던 그는 성지 예루살렘을 잃은 기독교도들의 비참한 생활과 투르크 족의 위협을 설명하고, 이슬람의 승리는 기독교 세계의 불명예라고 열변을 토했다. 이 전쟁은 성전이며, 전사자는 모두 천국에 가서 그 보상을 받을 거라고 역설했다. 그뿐 아니라, 동방엔 금은 보화가 깔려 있고 아리따운 이슬람 여인들이 기다리고 있다고 하며 제후들의 욕심을 부채질했다.

1095년 삐아첸자(piacenza)와 끌레르몽(Clermont) 교회 회의에서 교황 우르바노 2세는 동로마제국의 알레시오 황제가 파견한 자들로부터 동로마제국의 위급한 상황을 전해듣고 그리스도의 무덤을 되찾고 동방의 그리스도인들을 구출하기 위해 원정군을 보내자고 호소하여 제1차 십자군 원정(1096~1099년)이 시작되었다.

그리스도께서 사시고 돌아가시어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준 이스라엘 성지순례에 대한 열망, 동방과의 무역을 원하는 이탈리아 상인들의 상업적인 야심등의 요인 복합적으로 결합되어 십자군이 결성되었다. 특히 십자군에 참가하여 대사를 받고 전사할 경우 순교자가 된다는 것도 열성적인 신자들을 원정군에 쉽게 참가하게 하였다. 그러나 제대로 준비되지 않은 제1차 원정에서는 비조직적이고 계몽되지 않은 농부들도 많이 참가하여 교회 역사에 커다란 오점을 남기는 일들이 일어났다.

그들이 라인 지방을 지날 때, 흥분한 나머지 유태인들에 대한 박해로 유혈 참사가 일어났는데 발칸 지역을 지날 때에도 지휘자의 통솔을 제대로 받지 않은 이들은 지방 주미들에게도 방화와 학살로 참극을 일으켰다. 전투경험이 전혀 없는 많은 원정군들이 예루살렘에 도달하기도 전에 셀주크족의 공격을 받아 전멸하였다. 그러나 나머지 원정군들이 악전고투 끝에 1098년 안티오키아를 함락하고 1099년 7월 예루살렘을 정복하였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도 부녀자와 유아와 노인들까지 무차별적으로 참살하는 비 그리스도교적인 만행을 저질렀다. 서유럽에서 이곳까지 도달하는 전투에서 이슬람군들의 매복병들의 습격을 받아 매일 매일 수많은 동료들이 전사하는 가운데 겨우 살아 남은 이들의 보복심리와 이슬람 군들의 항전의 악순환이 서로를 살육의 참상으로 몰고 갔다.

이런 악순환의 결과는 생사의 기로에서 양측 모두 이성적인 자제력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서 자신들의 신앙의 가르침과는 전혀 무관하게 생존의 본능만이 절대 기준이었다고 볼 수 있다.

제2차 원정은 이슬람 세력의 반격으로 에뎃사가 함락(1144년)되면서 시작되었는데(1147~1149), 끌레르보의 베르나르도 성인의 설교로 추진되었지만 터키인들과의 여러 번의 전투에서 전멸되어 결국 예루살렘에까지 이르지 못하고 실패하였다.

제3차 원정(1188~1192)은 붉은 수염의 프리드리히(Friedrich)황제가 인솔한 잘 조직된 십자군들이 이코니움에서 터키인들과 싸워 혁혁한 승리를 거두었지만, 황제가 1190년 살레프에서 익사함으로써 지휘자를 잃은 군대는 더 이상 진군할 수 없었다.

영국의 왕 리차드(Richard) 1세, 프랑스의 필립(Philipp) 2세등이 참가하여 예루살렘 재탈환에는 실패하였지만 십자군들이 성지의 새로운 지역을 정복하고 살라딘 술탄과 화해하여 그리스도교인들에게 평화로운 예루살렘 순례의 자유가 보장되었다.

제4차 원정(1202~1204)은 교황 인노첸시오 3세 교황의 호소로 시작되어 서방 그리스도교 세계의 모두가 마지막으로 이 원정에 참가하였다. 그러나 십자군들은 완전히 교황의 의사를 거스르고, 이기적이고 상업저인 이해관계에서 베네치아의 상인들에 의해 콘스탄티노플을 함라가하고(1204. 4.13)라틴 제국이 그곳에 설립되는 엉뚱한 결과를 낳게 하였다. 이 과정에서 이 되시는 심하게 약탈되고 황폐하였으며, 이러한 난폭하고 비이성적인 행동은 동서교회의 분열을 더욱 심화시키고 이슬람 세력에 대한 동방세계의 방위력이 결정적으로 약화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제 5차 원정(1217~1221년)은 1215년 제4차 라테란 공의회에서 십자군 원정이 결정되어 1217년에 실행되었다. 프리드리히 2세가 십자군 파견을 약속했으나 이행하지 않아 파문을 받았다. 원정군은 동유럽의 신흥 그리스도 국가의 약소한 군사력으로 편성되어 이집트를 공격하여 다미에타를 공격하는 적은 성과를 거두었을 뿐이었다.

아씨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은 성지 재탈환을 복음 정신에 따라 평화로운 포교로 해야 한다는 본래의 정신에 따라 무방비 상태로 성지에 가서 술탄을 설득시키려 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포로가 되었다. 그러나 술탄이 성인을 너그럽게 대우하여 풀려났고, 이것을 계기로 프란치스코회의 평화로운 선교활동이 성지에서 시작되었다.

제 6차 원정(1228~1229년)은 교회 당국과는 무관하게 파문 중에 있는 프리드리히 2세 황제의 개인적인 원정이었다. 그는 이집트 술탄과의 담판을 통해 예루살렘을 그리스도인들에게 반환시키는데 성공하였지만, 그후 1224년 결정적으로 다시 잃게 되었다.

제 7차 원정(1248~1254년) 및 8차 원정(1270년)이 모두 실패함으로써 실제적인 원정은 모두 끝났다. 프랑스의 성왕 루이 9세는 우선 이집트를 정복한 후에 성지를 점령하려 하였으나 1205년4월 카이로에서 완패 당해 후퇴했는데 그의 군대에 전염병이 돌아 전의를 상실하고 포로가 되었고 그의 부하를 위해서는 거액의 몸값을 지불하고 그 자신은 이슬람에게 다미에타(Danietta)를 넘겨주는 조건으로 풀려났다.

서방에서는 차츰 십자군 원정에 반대하는 여론이 조성되고 비폭력적인 설교를 통해 이 지역에 복음을 전파하려는 운동이 일어났으며 유럽 자체 내에서는 이교도 문제, 즉 스페인의 무어인, 이교 슬라브인, 프랑스 남부의 알비파 이단등 더 현실적인 문제들이 다가왔다. 이로 인해 십자군 원정은 사실상 실패로 끝났다.

사실 십자군 전쟁은 모든면에서 성공할 수 없는 전쟁이었다. 십자군전사들이 훈련을 제대로 받지 못한 데다 무장마저 허술 했던 것, 당시의 교통통신 수단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먼 지역으로 원정한 것, 국왕과 대영주들이 참전해 지휘부가 대립한 것, 중동 이슬람에 대한 정보가 부족한데다 심자군 원정의 기본 이념마저 변질된 것 등을 실패의 중요한 원인이라 하겠다.

십자군운동은 우선 유럽에서 교황권의 후퇴, 국왕 권력의 강화와 중앙집권화, 도시와 상업의 발달, 이슬람문화와의 접촉에 의한 문화의 발달 등 모든 일과 관계가 있다. 즉 교황에 의해 제창된 운동의 실패는 그대로 교황의 권위를 약화시켰다. 전사(戰死)에 의해 단절된 귀족 가의 소유영지는 왕령(王領)에 편입되어 왕권의 기반을 강화하였다.

십자군운동으로 최대의 경제적 이익을 본 것은 북이탈리아의 여러 도시였다. 십자군에 참가한 유럽인들은 미지의 이질적인 세계를 발견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영향을 과대하게 평가할 수는 없다. 왕권의 강화는 봉건사회 내부 전개에 기본적 요인을 가지고 있었다. 봉건적인 분열상태에 있을 때에만 유럽세계를 관념적으로 통합할 수 있었던 교황권은 왕권에 의한 중앙집권화와 더불어 쇠퇴할 수밖에 없었다.

도시와 상업의 발달은 십자군운동의 전제조건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대규모의 군대를 먼 곳까지 보낼 수도 없었고 다량의 식량과 무기를 모으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또한 동방문화 유입의 중심지는 시칠리아와 에스파냐였다. 유럽인은 이교문화(異敎文化)에 접하면서도 최후까지 관용의 정신을 배우는 일이 없었다.

또한 제4회 십자군에 의해 와해된 비잔틴제국은 다시 부활하지만 이미 소국에 지나지 않았으며 몰락은 결정적이었다. 그 때문에 비잔틴제국은 이제까지 수행해오던 유럽의 방벽 역할을 잃게 되었다. 이슬람세계에 대한 영향도 컸다. 이슬람교도는 관용의 정신이 풍부했다. 그러나 십자군의 공격을 받게 되자 그들 사이에 점차 비관용성과 민족의식이 고취되었으며, 성전(聖戰)에 대한 정열은 높아갔다.

이 책을 읽으면서 지중해를 배경으로 비록 무력을 동원한 충돌이었지만 두 문명이 교류하는 과정을 볼 수 있었다. 그렇지만 이 책 또한 그동안 읽었던 많은 십자군 전쟁에 관한 책들과 마차가지로 지나치게 유럽의 관점에서 쓰여졌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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