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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군 (3)
판문점과 JSA 공동경비구역 관광

  판문점을 관광하게 되면 판문점에서 지켜야 할 몇가지 사항들에 대해 교육을 받게 됩니다.


 이병헌, 송강호, 이영애 주연의 JSA 공동경비구역이라는 영화에서 우리 군이 북한군과 마주보며 경비를 서던 바로 그 곳입니다. 실제 촬영지는 판문점이 아닌 경기도의 한 세트였다고 하네요.

 판문점 뒤로 보이는 북한 건물.
북한군이 나와서 지켜보고 있네요.
북쪽 관광객들이 있을 때만 내려와 경비를 선다고 합니다.

  망원경으로 감시하는 북한군.



 판문점 내부입니다.
이 곳에서 남북회담이 열리게 되죠. 테이블 중간의 깃발과 세개의 스피커가 남과 북의 경계입니다.


 건물 가운데 보이는 낮은 시멘트 턱이 남과 북의 경계라고 합니다.
아 그리고 이곳에서는 절대 손짓을 하면 안된다고 하네요.
총을 겨누는 모습으로 오인되기도 하고 북쪽을 찬양한다는 선전물로 쓰일 우려가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혹 판문점을 관광하시는 분들은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판문점에 방문하시면 분단의 현실을 더욱 실감하실 수 있을 겁니다.
하루 빨리 남북한이 평화통일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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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의 정전협정, 그 배경은?

 


 고전적인 정의에 따르면 ‘정전’은 휴전의 전제로서 짧은 기간의 적대 행위 중단을 의미한다. 반면 ‘휴전’은 전쟁의 중단을 의미하지만 전쟁원인의 해결에 합의하지 않은 채 전쟁을 종료한다는 점에서 「평화조약」과는 구분된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휴전협정」이 전투행위의 일시적 중단뿐만 아니라 전쟁의 재발방지 조치 마련 및 궁극적 포기까지 내포한 개념이 되었다. 현재 북한은 휴전이라는 용어는 사용하지 않고 있으며, 정전이라는 용어만 사용하고 있다. 현재는 대체로 평화체제가 완전히 구축된 '전쟁의 종식'과의 차이만 구별된 채 휴전 혹은 정전이라는 개념이 중복되어 사용되고 있다.

  UN 연합군의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전세가 역전되자, 중국은 한국전쟁의 참전을 결정하였고, 이로 인해 한국전쟁의 성격은 완전히 변모되었다. 즉, 관련당사국간의 전쟁에서 이데올로기간의 전쟁으로 확대된 것이다. 또한 중국군의 참전과 전선의 교착 상태가 지속되면서 어느 한쪽이 군사적으로 완전히 승리할 가능성은 요원해졌다. 실제로 1951년 초 전선은 다시금 38선 부근으로 고착되었고, 상대방 진영을 돌파하기 위한 작전보다는 진지방어전에 주력하게 되었다. 당시 중국군 사령관이었던 팽덕회도 “한국전쟁에서 신속한 승리가(速勝) 불가능하다”라고 인식했고, 맥아더 역시 중공군 개입이후 UN군은 전혀 ‘새로운 전쟁’과 마주하게 되었음을 인정하였다. 당시 미국은 맥아더의 중국 본토까지를 포함하는 ‘확전’ 주장과 트루먼을 중심으로 한 ‘휴전’ 파간의 논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결국 미국에서의 ‘확전’과 ‘휴전’ 논쟁은 맥아더의 해임을 가져왔고, 맥아더의 뒤를 이은 리지웨이 사령관은 북진에 대한 제한을 명령하면서 제한적인 전쟁만을 지시하였다. 양측의 군사적 승리에 대한 불확신, 미국 내부에서의 전쟁에 대한 전략 수정, 소련의 긴장 완화에 대한 요구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정전이 제의되었고, 2년여의 지루한 공방 끝에 불안정한 「정전협정」이 조인되었다.


※ 국가기록원에서 제공받은 글로 내용이 The Neo Renaissance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더 많은 내용은 국가기록원 홈페이지에서 찾아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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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족상잔의 비극, 6.25 한국 전쟁
 

 1950년 6월 25일 새벽을 기해 전 전선에서 침공을 감행한 인민군은 불과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하고, 7월 19일에는 대전을 점령한데 이어, 8월 31일에는 낙동강 전선까지 진출하였다. 전쟁 개시 두 달 여만에 남한 전체 국토의 대부분을 점령한 것이다. 반면 이승만 정부는 전쟁에 대한 효과적인 대응을 하지 못한 채 6월 27일 대전으로 정부를 이전하고, 7월 8일에는 대구, 8월 18일에는 부산을 임시수도를 정하는 등 후퇴를 거듭하고 있었다.


  “한국전쟁”의 과정은 몇 개의 단계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우선 첫 단계는 인민군의 공세기로서 전쟁 개시에서 9월 15일까지의 상황으로 낙동강 전선까지 인민군이 진출했던 단계, 두 번째 단계는 UN군의 ‘인천상륙작전’ 성공이후 UN군의 전면적인 공세 단계로서 9월 15일에서 11월 초까지의 단계, 세 번째 단계는 중국군의 참전으로 전선이 다시금 중부 지방에서 교착되는 인민군과 중국군의 합동공세 단계로서 1950년 11월 초에서 1951년 1월까지의 단계, 네 번째 단계는 전선이 교착되고 휴전이 모색되는 단계로서 1951년 2월에서 5월까지의 시기, 마지막으로 휴전협상과 소모전의 단계로서 1951년 5월에서 정전까지의 단계이다.

  북한의 한국전쟁 개시는 즉각적인 미국의 군사적 개입을 가져왔다. 전쟁개시 직후,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은 해·공군에 출동명령을 내리고, UN 안전보장이사회에서 북한을 침략군으로 규정하고 UN군을 조직하였다. 7월 1일에는 UN군 지상부대가 부산에 상륙하면서 본격적으로 한국전쟁에 개입하였다. UN군의 개입으로 전쟁은 남한과 북한의 국내전이 아니라 UN군과 북한, 그리고 중국군으로 이어지는 국제전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전쟁 초기 일방적으로 밀리던 한국군은 9월 15일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함으로써 전세를 역전하였다. 인민군은 괴멸적인 타격을 받게 되었으며, 압록강 근처에까지 후퇴하게 되었다.

  그러나 중국군의 참전으로 전쟁은 다시금 중부전선에서 교착되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전쟁은 어느 한편의 승리로 귀결되기에는 어려워졌다. 이에 소련 UN 대표 말리크는 전쟁 당사국에게 휴전을 제의하게 되었고, 1951년 6월 30일 리지웨이 UN군 최고사령관의 휴전 제의와 김일성·팽덕회의 동의로 휴전회담이 진행되게 되었다. 양측은 2년이 넘는 휴전 회담을 거쳐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에 조인하고 전쟁을 중지하였다.

※ 국가기록원에서 제공받은 글로 내용이 The Neo Renaissance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더 많은 내용은 국가기록원 홈페이지에서 찾아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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